#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125
장사의가 돌아온 이후.
평양은 후끈하게 달아올랐다.
죽었다고 생각하던 이들이 멀쩡하게 살아서 돌아왔다. 더구나 드넓은 바다 건너에 새로운 대륙이 있다고 했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 말이었다.
하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타고 돌아온 배에는 여러 가지 증거가 선창에 가득 채워져 있었다.
아직 작물에 대해서 공개하진 않았으나 그걸 대신할 기괴한 형태의 금은보화를 보고 의문을 품는 이들은 없었다.
금괴처럼 단순한 형태도 아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기괴한 모습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화려하게 조각된 황금으로 만든 정교한 마스크였다.
“뭔가 느낌이 끔찍한 것 같아.”
“계속 지켜보다 보면 노려보는 느낌이 드는 것 같지 않아?”
“그래도 확실히 대단하기는 하네.”
고려도 가면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대부분 가면극을 위한 것이다.
눈코입을 간단하게 만들었을 뿐이지 아스텍의 황금 가면처럼 사람의 얼굴을 정교하게 만든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장사의가 가지고 온 모든 아스테카 문명의 물건을 미술관에 전시하자 구경하려는 사람이 엄청나게 밀려들었다.
내성 안에 있는 미술관 앞에 끝이 보이지 않는 줄이 생길 정도였다.
거기에 그림도 적지 않게 걸렸다.
장사의를 따라 탐험에 동행한 화공이 그린 그림이었다. 대부분은 현장에서 그린 것이었으나 일부는 되돌아온 이후에 다시 공을 들여서 그린 것들도 있었다.
“오늘도 미술관에 사람이 엄청나네요.”
가진은 그걸 보고 혀를 내둘렀다.
이 정도의 반응을 보일 줄 몰랐었다.
처음에 그녀는 미술관을 만드는 것을 쉽게 이해하진 못했다. 한량 같은 이들이나 작품을 보러 올 줄 알았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생각보다 다양한 이들이 찾아왔다.
호기심에 찾는 이도 있었고 세상을 보는 견문을 넓히기 위해서 찾아오기도 했다.
그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교육을 위해서 찾아오는 아이들이었다.
평양 인근의 학당에서는 매년 두 차례씩 필수로 미술관을 찾게 되어 있었다.
그곳은 박물관의 역할도 겸했다.
각 나라의 문화도 엿볼 수 있게 만들어 놨는데 원자와 채윤이 말다툼을 했던 코끼리의 뼈도 야외에 전시되어 있었다.
관절에 콘크리트를 바르고 철심을 박아서 세울 수 있었는데 요즘 인기가 꽤 많았다.
“이게 바로 문화의 힘이오.”
“그런데 금은보화를 저렇게 전시하면 혹여나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닐지 걱정하는 이들이 제법 많습니다.”
“저곳만큼 안전한 곳이 어디 있겠소.”
땅속 깊숙한 곳에 숨기면 모를까.
궁궐보다 지금 이곳이 더 안전했다.
현재 미술관은 밤손님이 감히 들어설 수 없는 곳이었다. 내성 안에 세워진 그곳의 주변에 들어선 여러 건물 덕분이었다.
미술관의 양옆에는 순군만호부과 응양군이 사용하는 거점이 있었다.
그리고 정면에는 감찰사가 있기에 어지간히 미친놈이 아니라면 시도조차 해보지 못할 정도로 경비가 삼엄했다.
“하지만 절대라는 것은 없죠.”
“걱정 마시오. 가장 중요한 보물은 조만간 따로 보관할 곳을 마련할 것이오.”
“저번에 말씀하신 그것을 말하시는 것입니까?”
나는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진이 방금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일종의 타임캡슐과 비슷한 것이었다.
현시대를 대표하는 예술품과 각종 역사와 시대상을 쓴 서책을 모종의 장소에 보관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역사를 담은 자료를 보존하는 일.
무엇보다 그걸 중요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즉위한 이후부터 줄곧 삼국 시대 이전의 유물을 계속해서 모으고 있었다.
공부할 때 워낙 절실하게 느꼈던 거라 하나의 자료라도 더 남겨주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 데나 파묻을 수는 없다.
수백 년 이상을 보관해야 하고 도굴꾼과 전쟁이라는 예측 불가능한 변수도 어느 정도는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더기가 무서워서 장을 못 담글 수는 없지 않는가. 이런 문제의 해결책은 물량 공세가 답이었다.
여러 곳에 나눠서 많이 준비해 놓으면 적어도 하나쯤 고스란히 전달되겠지.
이미 일부는 해인사 등에 보관 중이었고 요동 정벌과 같은 새롭게 쌓이는 업적은 추가로 장소가 선정되면 넣을 예정이다.
그때 내성 안으로 들어오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였다.
“어머! 이게 누구야?”
그들을 본 가진은 환하게 웃었다.
만류할 틈도 없이 달려간 그녀가 반갑게 맞이한 이는 얼마 전에 혼례를 올린 가진의 겁령구였던 자르갈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제법 많은 나이에 새신랑이 된 조인벽도 있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원나라의 백성이었던 조씨 집안은 몽골인에 대한 거부감이 전혀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건 자르갈도 마찬가지였는데 생각보다 두 사람은 잘 어울리는 편이었다.
가진과 자르갈은 겨우 몇 개월 정도 떨어져 있었는데도 오랜만에 만나게 된 이들처럼 해후를 나누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함께하던 이들이기에 충분히 이해가 됐다.
멀뚱거리며 서 있기 뭐해서 나와 비슷한 처지인 조인벽과 잠시 대화를 나눴다.
“그간 잘 지냈소?”
“안 그래도 궁궐로 가는 길이었는데 이렇게 뵐 줄은 몰랐습니다.”
“함경도에 살림을 차렸다고 들었소.”
“임시 거처 수준입니다. 안사람은 평양과 화주를 오가며 지낼 거라 합니다.”
고마운 일이었다.
아마도 가진 때문일 것이다.
환한 웃음을 지으며 안부를 묻는 가진와 자르갈이 떨어져 지내는 이유는 조인벽을 함경도의 최영 아래로 보냈기 때문이다.
가진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곳에서 그는 아버지 조돈 아래에서 천여 명의 기마병을 맡게 될 예정이었다.
참고로 조돈이 이끌고 있는 기마병은 동별초(東別抄)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가별초(家別抄)라는 명칭이 이자춘 가문의 사병이란 느낌이 강하게 든다는 이야기가 계속해서 나왔다.
이성계에 대한 경계심이 없다고 할 수 없기에 나는 도당의 의견을 받아들여서 그들을 둘로 나누고 이름을 바꿨다.
현재 이자춘이 이끌고 있는 기마병은 당연히 서별초(西別抄)라 불리게 되었다.
서별초와 동별초는 앞으로 요동과 함경도를 지키는 병마사의 직속 부대로 배치되어 국경을 지키게 될 것이다.
그 규모도 점차 커지고 있었다.
수년 전부터 계속해서 마두라이와 여진을 통해 사들인 말들이 꾸준히 번식한 덕분에 새로 태어나는 말이 상당히 많이 있었다.
“최근에 동별초의 증원 요청을 해서 허락해 줬는데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오?”
“최영 병마사께서 올린 장계 내용대로 일단은 천오백 명까지 늘리고 상황을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생각보다 많지 않은데 갑주나 인력이 부족한 것이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조인벽은 살짝 말끝을 흐렸다.
내가 재차 묻자 그는 비용적인 문제도 있으나 기마 전술을 위한 예비마도 무시할 수 없다고 내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말이 죽거나 다칠 경우도 있고 체력 안배를 위해서 예비마를 끌고 다니며 작전을 수행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그러니 당분간 예비마를 어느 정도 채우고 다시 기마병에 대해 논의를 해보는 것이 어떠냐며 조인벽이 의견을 내놨다.
그 말을 들으니 재촉할 수 없었다.
확실히 전형적인 문신인 조돈보다는 조인벽이 그 자리에 어울렸다.
그런데도 조돈에게 맡긴 이유는 그가 함경도에서 가지고 있는 영향력과 여진족과의 관계가 깊기 때문이다.
“슬슬 가보셔야 할 시간입니다.”
그때 신소봉이 재촉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나는 꽤 시간이 지체되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자르갈과 수다를 떠느라 정신이 없는 가진을 재촉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길가에서 시간을 보내자니 내가 가기 전까지 많은 사람이 기다릴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두 사람도 같이 데리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목적지는 평양의 새로운 명물이 되고 있는 오백석 규모의 원형 극장이다.
이미 완공된 지 꽤 된 그곳을 가는 이유는 장사의가 탐험 이야기를 하는 초연(初演)이 오늘이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자르갈과 조인벽도 상당히 많은 관심을 보였다.
“안 그래도 요즘 원형 극장이 상당히 인기가 많다는 소식을 듣기는 했습니다.”
“벌써 함경도까지 소문이 퍼진 것이오?”
“이야기꾼이 어찌나 자랑을 하던지 동네 꼬맹이도 알 정도입니다.”
“다들 기다릴 테니 여기서 이러지 말고 어서 갑시다.”
내성 너머에 있는 원형 극장.
그곳은 생각보다 크지는 않았지만,
어디에 앉아도 무대가 내려다보였다.
이미 빈자리가 하나도 없을 정도였는데 대부분 도당에 소속된 관리이거나 성균관의 학생과 선생들이었다.
내가 안으로 들어서자 그곳에 있던 이들이 동시에 모두 일어나 고개 숙였다.
중앙에 비워 놓은 가장 좋은 자리로 향하자 신소봉은 눈치 좋게 옆에 두 자리를 조인벽과 자르갈을 위해 비웠다.
어차피 그 자리는 경호하는 이들을 위해서 비워두는 곳이었다.
“시작하시오.”
내가 자리에 앉으며 신호를 주자,
장사의가 무대 위로 올라가서 섰다.
그의 앞에는 기묘한 도구가 놓여 있었는데 일종의 확성기 같은 것이었다.
목청이 좋다면 모르겠는데 한 시진 내내 말하면 목이 남아나질 않을 것이다.
그래서 만든 것은 확성기였다.
구조는 전혀 복잡하지 않은 물건이다.
화자의 입술 쪽은 가늘고 멀어질수록 나팔관이 커지는 것에 불과했다.
장사의가 그 앞에서 말하기 시작했는데 조금 어색해 보이기는 해도 소리를 들어 보면 확실히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이렇게 전하 앞에서 ‘신대륙 견문록’의 초연을 하게 되어서 영광이옵니다.”
그가 말한 신대륙 견문록은 요즘 고려를 강타하고 있었다. 인쇄하는 족족 팔려나갈 정도로 인기가 엄청난 서책이었다.
기존에 그가 쓴 견문록이나 나관중의 삼국지 연의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거기에 적힌 내용은 탐사 중에 보고 듣고 경험한 것들을 정리한 것이다.
하지만 활자만 있지는 않았다.
목판화를 이용하여 삽화도 넣었다.
그만큼 서책이 비싸질 수밖에 없었으나 도저히 도저히 상상만으로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 많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때부터 장사의는 견문록에 나오는 내용을 간단하게 압축해서 이야기했다.
중간에는 그와 함께 탐사를 했던 선장도 나와서 옆에서 말을 거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앞으로도 계속 무대 위에 오르진 않을 것이다. 원형 극장에는 여러 이야기꾼이 귀담아듣고 있었다.
장사의는 다시 떠나야 한다.
여기서 광대 노릇을 할 여유가 없었다.
일종의 북 콘서트처럼 몇 차례 정도만 무대에 서는 것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전문적인 이야기꾼의 몫이었다.
‘저들도 먹고살아야 하니···.’
그리고 이곳의 수익금 중 일부는 탐사 중에 죽은 이들을 위해서 쓰일 예정이다.
이미 상당히 큰돈과 요동의 땅을 보상으로 주었으나 내 기준으로 보면 사람의 목숨값치고 너무 보잘것없었다.
당연히 살아남은 이들도 보상을 받았다.
그들이 가지고 온 작물과 보물을 고려가 매입하는 것으로 처리해서 대부분 수십 년 동안 굶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일부 선원은 재물을 안 받고 요동의 땅을 받았는데 그 면적이 결코 작지 않았다.
단숨에 소작농에서 지주가 된 것이다.
그게 알려져서인지 최근에는 다음 탐사에 자원하고자 줄을 설 정도였다.
분명히 목숨을 걸고 다녀와야 하는 여정이었으나 일단 성공하면 팔자가 필 수 있다는 것을 실감한 것이었다.
“제가 발견한 신대륙은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땅입니다. 비록 우리가 지닌 문화에 비해 미개한 부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곳을 통해서 얻을 것이 수없이 많습니다.”
장사의가 하는 말은 연설에 가까웠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자리를 마련한 의도가 따로 있었다. 도당의 관리들에게 일종의 프레젠테이션을 의도한 것이다.
다음 탐사를 떠나기 위해서 다시 한번 대규모의 투자를 끌어내야 했다.
1차 탐사는 장사의가 가지고 온 금은보화 덕분에 어느 정도 손실이 만회는 되었으나 고려 입장에서 보면 아직 손해였다.
돌아온 시기가 묘하게 어긋나서 감자는 아직 심지도 못했고 고추는 애지중지 지켜보며 싹이 트길 기다리는 중이다.
그래도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고려 안에서 고여 있었던 썩은 물이 어느 정도 빠져버린 덕분이었다. 지금의 도당은 조금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이들이었다.
당연히 일부나마 반대하는 이도 있었으나 대다수가 찬성을 했기에 그날 나는 그 자리에서 제2차 탐사를 확정 지었다.
슬슬 자리를 파하려고 할 무렵.
궁궐에서 나온 환관 하나가 신소봉에게 다가가서 귓가에 뭔가를 속삭였다.
꽤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길래 무슨 일이냐고 묻자 신소봉은 조심스럽게 내게 이자춘의 소식을 전달해줬다.
“요동에서 이방실 장군이 보낸 전령이 왔사온데 서별초를 이끌고 있던 이자춘이 졸(卒)하였다고 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