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124
그로부터 4개월이 지난 뒤.
배꽃이 전국에 가득 피어날 무렵.
허름한 세 척의 배가 평양으로 들어서는 관문이라 할 수 있는 남포항에 나타났다.
공사를 마친 남포항은 아직 창고 같은 시설물이 부족했으나 고려 최고 항구였던 벽란도의 명성과 견줄 정도가 되었다.
일단 항구의 규모부터 달라졌다.
기존에 협소하던 벽란도와 달리 남포항은 콘크리트 블록으로 만든 거대한 항구였다.
당연히 한 번에 들어올 수 있는 배의 숫자도 몇 배나 늘어서 수십 척이 동시에 접안 가능할 수 있게 되었다.
수많은 배들이 오가는 곳에서,
세 척의 배는 단숨에 시선을 모았다.
그만큼 상태가 상당히 좋지 않아 보였다.
침몰하지 않고 항구까지 들어온 것이 신기할 정도로 여기저기 파손되어 있었다.
누더기가 된 돛과 부서져 내릴 것 같은 선체 때문인지 몰라도 한낮인데도 불구하고 귀신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때 배 위에서 사다리가 내려졌다.
그런 뒤에 상당히 마른 선원들이 하나둘 내려왔는데 그걸 본 남포항을 관리하는 관리가 병사들을 데리고 서둘러 다가갔다.
그들이 걱정되어서 그런 것보다 오늘 접안이 허락된 배가 아니었다.
“어디에서 오시는 배입니까?”
관리는 선장으로 보이는 이부터 찾았다.
하지만 그는 화물을 내려야 하니 선단을 책임지는 사람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보통의 상선이라면 항구의 관리에게 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대부분 허리 숙여 잘 보이려고 애를 쓰기 마련이다.
괜히 밉보일 필요가 없는 것이 은근히 이런저런 불이익을 당하기 때문이다.
관리는 부아가 살짝 치밀었다.
하지만 그걸 꾹 누르며 참아야 했다.
항구 관리가 가지는 권위는 상당하지만, 함부로 휘두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남포항 곳곳에 감찰사와 내수사를 비롯한 여러 관청 소속의 눈이 상당히 많았다.
정당하지 않은 몽니를 부릴 경우.
당장 그 자리에서 관복을 벗어야 한다.
실제로 그런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의 전임자도 옛날에 들인 못된 버릇이 은연중에 드러나서 가차 없이 쫓겨났다.
하지만 정당한 절차에 대해서는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관리는 어느 때보다 더 철저하게 절차를 밟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저거 혹시 그 배 아니야?”
“무슨 배를 말하는 거야?”
“모습이 조금 달라지기는 했어도 선체만 보면 딱 봐도 대형 쾌선이잖아.”
“대형 쾌선은 동오 어르신이나 심부 어르신의 상단에서만 쓰는 배잖아. 그런 배는 보통 소속을 밝히는 깃발을 달고 들어오는데 무슨 소리야?”
“아니! 그 배 말고 대형 쾌선이 그것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잖아.”
그제야 다들 무슨 말인지 알아챘다.
현재까지 고려에서 만든 대형 쾌선은 그리 많지 않았고 오직 어용 상인이 운영하는 상단에서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단 한 번의 예외가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18개월 전에 전하의 환송을 받으며 떠난 다섯 척의 쾌선이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확실한 것 같았다.
그 증거로 선수상을 들 수 있었다.
당시에 떠난 배들의 선수상은 특별하게 십장생을 형상화시킨 것이었다.
살아서 돌아오라는 의미로 제작되었다.
그런데 지금 들어온 배의 선수상을 보면 학과 거북이 그리고 태양이었다.
그걸 본 이들은 확신을 가졌다.
“도대체 바다에서 항해 중에 무슨 일을 겪었길래 저 지경이 된 거야?”
“그런데 나머지 두 척은 어디 있는 거지. 처음에 출발할 때 다섯 척 아니었나?”
“뻔한 걸 뭘 물어보나.”
다들 안타까움에 혀를 찼다.
모습을 보아하니 희생이 꽤 컸던 것 같아 보였다. 해를 쫓아 세상의 끝을 보고 오겠다는 것부터 무모한 도전이기는 했다.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라 여기던 이들의 의구심이 상당히 많이 있었던 항해였다.
그쯤 되자 관리는 태세 전환을 했다.
그들이 말하는 배를 전하께서 얼마나 애타게 기다리고 계신지 알기 때문이었다.
매달 한 번씩 들어온 소식이 없는지 궁궐에서 보낸 이가 와서 묻고는 했다.
서둘러서 선장이 지목한 이에게 다가간 그는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물어봤다.
“혹시 벽란도에서 탐사용 쾌선을 타고 출발하셨던 장사의 어르신이 맞습니까?”
“그런데 무슨 일인가?”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관리는 허리를 깊게 숙였다.
뒤에서 다른 말단 관리들이 태세 전환이 대단하다며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기분이었으나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장사의가 쓴 서책은 아직도 인기가 식을 줄 몰랐고 그의 형제는 절강의 왕이다.
잘 보여서 나쁠 게 전혀 없었다.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습니까?”
“전하께 돌아왔다는 소식을 먼저 알려야 할 것 같은데 사람을 보내주시겠소?”
“물론입니다. 긴 항해로 고단하실 텐데 잠시 쉬고 계실 곳을 마련하겠습니다.”
“그보다 저것들을 옮겨야 하는데 동오 상단의 사람들부터 불러주시오.”
배에서는 여러 물건들이 내려졌다.
상자를 닫아놔서 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중에 상자에 줄을 걸어서 내리던 선원이 줄을 놓쳐서 위에서부터 상자 하나가 떨어져서 완전히 박살 났다.
다행히 다친 이들은 없었다.
하지만 커다란 소음이 생긴 탓에 다들 그쪽으로 시선이 쏠렸는데 상자에서 나온 것은 황금빛이 감도는 수많은 보물이었다.
당연히 선장은 화를 내며 서둘러서 수습하기 시작했다.
“뭘 보고만 있나! 어서 다른 상자 가져와서 담아.”
절대 비밀로 할 일은 아니지만,
다른 이들에게 보여줄 필요는 없었다.
언감생심 물욕을 부릴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본 이들의 숫자가 이미 적지 않았다.
관리 역시 깜짝 놀라서 이게 도대체 뭐냐는 표정으로 장사의를 바라봤다.
“밀무역은 아니니 걱정 마시게. 그리고 보다시피 가지고 돌아온 재물이 상당하니 병사들을 불러서 지키고 있어 주게.”
그런 상자가 한두 개가 아니라는 말에 관리는 급하게 항구 경비를 맡고 있는 상사 계급의 무관을 불러야 했다.
궁금한 것이 산더미 같았으나 그 이상은 물어볼 수가 없었다. 얼마 되지도 않아서 감찰사 사람이 왔기 때문이었다.
“전하께서 많이 기다리셨습니다.”
“안 그래도 지금 곧장 입궐할 생각이었소. 가져가야 할 물건이 있는데···.”
“궁궐까지 마차를 타고 가시면 되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벌써 남포항과 평양의 도로가 이어진 것이오?”
감찰사의 관리는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장사의가 벽란도를 떠날 때는 서경 천도를 하기 전이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일 년 반 동안 고려는 다시 한 차례 크게 바뀌었다.
참으로 신기한 나라였다.
잠시 그런 생각을 하던 장사의는 감찰사의 관리에게 신세를 지겠다고 답하자 그는 곧장 마차를 준비시켰다.
얼마 뒤에 그는 가지고 온 물건 중에 일부를 싣고 곧장 평양의 궁궐로 향했다.
당연히 그 소식은 내게도 전해졌다.
장사의가 거의 일 년 반 만에 돌아왔다는 소식에 나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껏 아무 소식이 없기에 내 앞에서 말을 꺼내지는 못했으나 다들 죽은 것이 아닌가 예상하고 있었을 정도였다.
선원들의 가족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이들이 생환에 대한 기대를 포기했다.
들어보니 이번에 항해를 하는 중에 피해도 꽤 큰 것 같았으나 절반이나마 돌아온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겼다.
나는 그를 만춘전으로 불러들였다.
장사의의 얼굴은 상당히 많이 상한 느낌이었으나 눈빛만은 살아 있었다.
그는 나를 보자 곧장 엎드려서 너무 늦게 돌아온 것에 대해서 사과했다.
“전하의 심려가 크셨다고 들었습니다. 오래 걸려서 송구하옵니다.”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오.”
“괜찮으시다면 여정에 대해 지금 보고 드려도 되겠사옵니까?”
나는 흔쾌히 그러라고 허가해줬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했기에 안 그래도 다른 일정은 모두 뒤로 미뤘다.
그때부터 장사의는 길었던 탐사에 대한 이야기를 요약해서 해주기 시작했다.
생각 이상으로 그의 여정은 험난했다.
그가 이끌고 출발한 다섯 척의 탐사용 쾌선은 홋카이도와 알래스카를 통과해서 무려 중미 부근까지 내려갔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는 과정에서 풍랑과 무풍지대를 경험하고 하와이에 들렸다.
거기서 배를 보수하고 교지국(베트남)와 탐라를 거쳐서 다시 고려로 돌아온 것인데 지구 반대편을 찍고 왔다고 봐야 했다.
당연히 그가 이런 지명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고 장사의가 말하는 특징을 조합해 보면 대충 이런 경로인 거로 추측되었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탐라에서 받은 도움을 잊지 않고 내게 전달했다.
“탐라에서 김휘남 해군 원수와 이공수 안렴사의 도움을 많이 받았사옵니다.”
탐라와 대마도에 조선소는 없으나 수리를 위한 시설은 마련되어 있었다.
풍랑에 의해 부서지는 배가 매년 적지 않기에 그때마다 돌아올 수는 없었다.
적어도 현지에 어느 정도 파손은 수리할 수 있도록 장인과 시설을 마련해놨다.
당연히 그로 인한 부수입도 있었다.
탐라에서 중계 무역을 하는 왜국과 절강, 강남 상인들의 배를 수리해주고 금과 은으로 비용을 받는 일이 잦았다.
더구나 표류하다가 구조되는 경우나 운항이 불가능한 경우에는 대신 배송을 해주고 그만큼 비싼 가격을 받았다.
“그리고 이것들은 이번 항해를 통해 가져온 것들 중에 일부이옵니다.”
장사의는 상자를 열었다.
그곳에는 보물과 황금이 가득했다.
단순하게 금괴 형태가 아니라 예술이 가미된 장식품이 대다수를 차지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낯설지는 않았다.
‘이건 아스테카 문명쪽에서 온 건가?’
아스텍과 마야의 차이를 정확하게 구분 할 수는 없으나 예전에 박물관에서 아스텍 특별 전시를 본 적이 있었다.
거기서 본 것과 상당히 흡사했다.
그중의 하나는 아예 똑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 이걸 어떻게 가져온 건지 상당히 궁금해졌다.
“화약과 교환을 한 덕분이옵니다.”
“설마 화포나 화승총도 원주민에게 팔아치운 것이오?”
“그건 아니옵니다.”
장사의는 오해라며 고개를 숙였다.
내 질문에 장사의는 어찌 된 일인지 대답을 했다. 화약을 산 이들은 중미 어디쯤에서 만난 어느 부족이었다.
도시 국가 형태를 가지고 있는 그들은 장사의가 가지고 간 화포에 제법 크게 혼쭐이 났다. 그런데 거기 추장이 꽤 야심가였던 것 같았다.
“화약에 엄청난 관심을 보이기에 혹시 작물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물어보려고 자리를 마련했사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교환 요청이 들어왔다고 했다. 검은 가루를 주면 보물을 주겠다는 말에 장사의도 처음에는 거절하려고 했다. 하지만 화약 한 움큼의 가치가 황금으로 가득 채워진 상자와 동등했기에 그걸 포기할 수는 없었다.
‘누군지 몰라도 제대로 눈탱이 맞았군.’
대충 무슨 상황인지 알 것 같았다.
그 원주민 추장은 화약을 무기로 쓰려는 것이 아니라 권위와 위협용으로 사용할 용도였던 것 같았다. 어쩌면 자신을 신이라 주장하기 위한 걸지도 몰랐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판매한 양도 많지 않았기에 위협이 될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스스로 그걸 분석해서 화약을 만들 수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게 가능한 이야기였다면 남미에서도 독자적인 화약의 개발이 이뤄졌을 거다.
하지만 그들은 유럽과 아시아 문명과 달리 완전히 동떨어져 있었다.
“다음에 또 선단을 보내면 다시 교환할 수 있을 것 같소?”
“충분히 가능하옵니다. 제가 제대로 이해한 건지 확실하지는 않으나 보물로 채운 거대한 방이 있다고 했사옵니다.”
솔직히 거기까지는 기대 안 했다.
엘도라도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았다.
아마도 조금 과장되게 해석한 것 같았다.
나중에는 어떻게 변할지 몰라도 일단은 우호적인 세력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었다.
저쪽 대륙에도 거점처럼 사용할 곳이 생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진짜 성과는 지금부터였다.
장사의는 다시 다른 상자를 열어서 감자와 고추를 내게 보여줬다.
혹시 자신이 다른 것을 잘못 가져온 것은 아닌지 상당히 긴장된 표정이었다.
내가 황금보다 작물에 더 관심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가 본다고 뭘 알겠는가.
고추는 확실한 것 같은데 감자는 워낙 품종이 많아서 알아볼 수 없었다.
심지어 카사바로 보이는 것도 있었는데 여기서 찍먹해볼 수도 없진 않은가.
기존에 내가 먹었던 수미 품종은 1970년에 들어온 것이고 19세기에 처음 들어왔던 품종은 먹어본 기억이 없었다.
‘남미에 퍼져있는 감자의 품종이 수천 종이 넘는다고 들었는데···.’
그중에 어떤 것을 가져온 걸까.
이건 완전히 복불복인 느낌이었다.
어쩌면 기후에 맞지 않아서 뿌리를 내리지 못할 가능성도 매우 컸다.
진짜 고비는 이제부터였다.
“과인도 직접 본 것은 처음이라 잘 모르겠소. 일단은 경작을 해서 키워봐야 할 것 같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솔직하게 말했다.
애초에 그에게 감자를 서책을 통해 본 것이라 말했기에 장사의는 이해했다.
나는 그쯤에서 다시 신대륙을 향한 항해에 도전할 생각이 있는 건지 확인해야 했다. 만약에 트라우마 같은 것이 생겼다면 다른 이로 대체해야 했다.
하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 장사의는 상당히 의지를 보였다.
“물론이옵니다. 이번에 쾌선을 두 척이나 잃어서 송구하오나 맡겨만 주신다면 다시 한번 다녀오고 싶사옵니다.”
오히려 그는 내게 부탁했다.
아무래도 이번 탐사가 그의 호기심을 제대로 자극한 것 같았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또 다른 문명을 보았으니 당연했다.
물론, 나도 이걸로 만족할 수 없었다.
만약에 그가 가져온 감자가 이 땅에 뿌리를 내리는 데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더 많은 품종의 감자를 가져와야 했다.
한 가지 품종에 기대고 있다가 엄청난 기근에 속수무책이 되었던 아일랜드 사례를 그대로 답습할 생각은 없었다.
당시에 아일랜드 인구의 절반이 줄었다.
이제 막 인구를 늘려가고 있는 고려에서 그런 일은 가능하면 막아야 했다.
더구나 조선 시대였던 17세기에 닥쳤던 소빙하기를 대비하기 위한 거라 이 정도는 과한 조치라 볼 수도 없었다.
일단은 한고비를 넘겼는데 이걸 어떻게 활용해야 할까. 여러 고민 끝에 나는 미술관과 공연장을 활용하기로 했다.
그가 가지고 온 여러 재물을 보여주고 그 이야기를 들려줘서 새로운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해줄 필요가 있었다.
“이번 여정을 압축해서 한 시진 동안 이야기할 수 있게 준비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