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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123화 (123/202)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123

거의 엇비슷한 병력이었지만,

결과를 보면 고려의 대승이었다.

4만여 명에 달하던 홍건적은 절반 가까이 포로로 잡혔고 나머지 절반은 죽었다.

포위를 뚫고 도망친 이들은 거의 없었다.

해군과 연합하여 새벽에 진행된 기습이 제대로 먹힌 덕분이었다. 반면에 고려군의 사상자는 3천여 명에 불과할 정도였다.

고려가 가진 미친 화력 덕분이었다.

포위당한 상태로 앞뒤에서 동시에 두들겨 맞으니 홍건적의 사기는 바닥을 쳤다.

그리고 승자총통 형태로 만들어진 기존에 보급된 화승총의 활약도 생각 이상이었다.

산탄 효과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 소식은 평양에도 전해졌다.

확실히 북쪽으로 많이 이동한 덕분인지 전달되는 소식도 예전보다 훨씬 빨랐다.

이방실과 종군 중인 사관이 정리해서 올린 서신을 읽은 나는 충분히 만족했다.

이길 거라 믿고는 있었으나 생각보다 병사들의 피해가 적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2만여 명의 포로가 생겼다는 것이 상당히 기뻤다. 모거경이 공짜 노동력을 조공해준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들은 고려에서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도로 공사와 요동의 개척부터 남부 지역 저수지까지 대규모 공사가 산적해 있었다.

하지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하사 계급인 윤송이 보여준 엄청난 활약이었다.

아직 일개 조장에 불과했으나 적장인 모거경을 화승총으로 잡았고 요서에서 진행된 기습 작전에서도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놀랄 일은 아니었다.

‘원래 크게 될 인물이기는 했지.’

아직 나이는 어린 편에 속하지만,

기대를 가지고 지켜보는 무관이었다.

원래의 역사에서도 그는 정룡과 함께 왜구를 격파하는데 선봉장 역할을 했다.

그로 인해 병마사 자리까지 올라가는데 전투 중에 왜구의 화살에 맞아 죽게 되나 공적이 적다고 할 수는 없었다.

“이번에 공을 세운 이들의 명단을 정리하여 올리고 사망한 이들의 유족에게 위로의 서신과 함께 충분한 위로금을 보내는 것은 절대 잊지 마시오.”

“그렇게 준비를 하겠사옵니다.”

“그리고 포로로 잡은 이들은 공부 상서 황석부와 의논하여 배치하시오.”

백문보는 알겠다며 대답을 했다.

그 뒤로도 내 지시는 계속 이어졌다.

국경 지역에서 제법 큰 전투가 벌어진 탓에 처리해야 할 문제가 산더미 같았다.

가장 큰 문제는 북부 지역으로 이동시킨 주민들의 불안감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얼마 전에 요동 안렴사 김광재가 요청한 안렴부사로 변옥란을 보내시는 것은 어떠시옵니다.”

요동의 민심을 안정시키는 것이 조금 버겁게 느껴졌는지 김광재는 사람이 더 필요하다고 백문보를 통해 요청했다.

그걸 보고 무능하다 말할 수는 없다.

환갑을 넘어선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주어진 일이 조금 과중하기는 했다.

안렴부사는 안렴사를 보조하는 자리다.

변옥란 정도면 충분히 자격이 있었다.

그는 천품이 강명하고 백성에게 인자하고 공정한 것으로 유명해서 김광재와 유사한 성격이라 아마 잘 맞을 것이다.

“얼마 전에 대마도에서 평양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곧장 다시 북방으로 보내도 괜찮겠소?”

“본인이 원한 것이기도 하옵니다.”

“그러면 도당에 안건을 올리시오.”

참고로 그와 함께 대마도로 보내졌던 정몽주도 평양으로 돌아와서 얼마 전부터 밀직사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벌써 2년 넘게 대마도에서 일했다.

이제 슬슬 도당에 들일 때가 되었다.

나이를 생각하면 제법 높은 자리였으나 소 쓰네시게를 잡은 공이 매우 컸기에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는 이는 없었다.

그들이 떠나온 대마도의 빈자리를 그냥 놔둘 수 없기에 염제신의 장남인 염국보와 신덕린을 보내서 대신하게 해놨다.

지금까지 거론된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

그들 모두 진방회 소속이라는 것이다.

최근에 정도전이 원나라에 있는 김첨수 밑으로 이동한 것까지 포함하면 진방회 출신이 여러 곳에서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계속 진방회 소속은 아니었다. 관직에 오른 뒤에도 사적인 조직에 소속되는 것이 바람직하진 않았다.

그 대신 다른 이들이 자리를 이어받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하륜과 조준 그리고 정지 같은 또 다른 기대주였다.

그들도 이제 십 대 초에서 중반이니 적어도 몇 년 후면 관직 생활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 예상되었다. 그들을 보자니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흐르는 기분이었다.

‘그 천방지축 같던 하륜의 나이가 벌써 열네 살이라니 믿기지 않는군.’

만으로는 아직 열두 살이지만,

그래도 이제는 상당히 어른스러워졌다.

어린 시절 눈가에 가득하던 잔망스러운 느낌도 많이 사라졌다. 그래도 여전히 내 눈에는 아직도 귀여운 녀석이었다.

그 이후로도 백문보의 보고는 계속 이어졌다. 그가 만춘전(萬春殿)이라 이름이 붙여진 편전을 나선 것은 날이 거의 어두워지고 난 이후였다.

식사가 들어오기 전에 잠시 등을 기대고 쉬고 있던 나는 한 가지가 마음에 걸렸다.

모든 것이 다 계획대로 진행 중이다.

예상에서 크게 벗어난 것은 아직 없었다.

하지만 유독 동쪽으로 떠난 장사의에 대한 소식이 전혀 없었다.

그가 벽란도에서 다섯 척의 대형 쾌선을 이끌고 떠난 것이 14개월 전이다.

지금쯤이면 돌아와야 정상이었다.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

그 무렵 태평양의 바다 위.

망망대해를 떠도는 배가 있었다.

고려에서 출발한 장사의가 탄 배였다.

하지만 주변에 떠 있는 선박의 숫자는 처음에 출발했을 때보다 부족했다.

다섯 척이던 배는 이제 세 척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나머지 두 척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풍랑에 삼켜져서 바다 밑 심해 속에 계신 용왕님을 만나러 갔다.

그로 인해 잃은 선원도 적지 않았다.

어떻게든 선원을 구하려고 애를 썼으나 집채만 한 파도 위에서는 방법이 없었다.

키를 조금이라도 잘못 틀면 그대로 집어 삼켜져 버릴 위기였다.

자연은 생각보다 위대한 존재였다.

살아남은 세 척도 멀쩡하진 않았다.

두 척은 돛이 거의 누더기 수준이었고 다른 한 척도 돛대 중의 하나가 부서졌다.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문제는 그 이후에 바람 한 점 없는 무풍지대에 들어섰다는 것이었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오?”

장사의는 선장을 붙잡고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여기서 말라 죽는 것을 기다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선장이라고 딱히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바람뿐만 아니라 해류도 너무나 잠잠했다.

“지금으로서는 방법이 없습니다.”

“물과 음식 모두가 다 떨어졌소. 어떻게든 육지를 찾아야 하오.”

장사의는 선장을 닦달하기 싫었다.

그러나 지금은 수백 명의 선원이 죽고 사는 문제가 걸려 있는 상황이었다.

식수는 물론이고 먹을 것도 바닥났다.

심지어 쥐를 잡기 위해서 태웠던 고양이까지 잡아먹자는 의견이 나왔다.

하지만 무엇보다 식수가 문제였다.

출항할 때 가득 채웠던 식수는 이미 바닥을 드러냈고 해수를 퍼 올려서 증류를 시켰으나 불을 땔 목재도 다 떨어졌다.

심지어 배의 난간과 구조물을 뜯어내서 불을 피웠을 정도였다. 지금은 입만 축이며 죽지 않을 정도만 유지해야 했다.

하지만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아주 작은 섬 하나 발견되지 않았다.

“신대륙에서 가져온 작물을 먹는 것은 어떠십니까?”

“그게 무슨 소리요! 절대 안 되오.”

“살고 봐야 하지 않습니까.”

“그걸 먹어도 하루 이틀 더 버틸 뿐이지 않소. 전하께서 우리를 보내며 어명을 내리셨던 것을 벌써 잊은 것인가?”

장사의는 불같이 화를 냈다.

그걸 가져오느라 지금까지 희생한 이들의 숫자가 적지 않았다. 그들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침몰할 것을 우려해서 모든 배에 나눠서 실은 것이다.

만약에 침몰한 배에 모조리 넣어 놨으면 일 년여 동안 죽을 위기를 여러 차례 넘겨가며 했던 고생이 헛될 뻔했다.

지금까지 다양한 이유로 선원이 죽었다.

누군가는 생전 처음 보는 야수에게 잡아 먹혔고 원주민이 갑자기 공격해서 죽은 이들도 적다고 할 수 없었다.

그들의 무기가 원시적이긴 하더라도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고려의 병사도 만만치 않았다.

그런 일이 있을까 봐 고르고 골라서 배에 태웠고 갑주를 입고 있는 고려의 병사는 맨몸인 원주인이 감당하긴 어려웠다.

더구나 배에는 화포와 함께 휴대가 가능한 초기 형태의 화승총도 있었다.

그걸 한 번씩 쏠 때마다.

원주민은 깜짝 놀라 도망갔다.

그 덕분에 위기를 넘긴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고 전하께서 어떻게든 찾아오길 바라시던 작물도 찾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모두 다 발견한 것은 아니었다.

감자와 고추라는 것은 찾았지만,

옥수수와 고구마는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 과정이 쉬운 것도 아니었다.

가장 어려웠던 것이 감자였는데 토란처럼 땅 밑에서 자라는 터라 수없이 땅을 팠다.

원주민과 말이 안 통하니 어쩔 수 없었다.

운반이 쉬운 것도 아니다.

감자를 썩지 않게 옮기는 것도 어려웠다.

혹시 몰라서 주변의 땅을 파내서 그대로 상자에 담아오는 방법까지 동원됐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하루빨리 고려로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바다 위에서 발목이 묶였다.

바람 하나 없는 잔잔한 바다는 정말 지옥과 같았다. 이곳만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바다 위에서 표류한 것이 벌써 나흘째였다.

“하오나 지금처럼 바람이 불지 않으면 저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습니다.”

“진짜 방법이 없는 거요?”

“선원 중의 일부는 용왕님에게 공물을 바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기는 합니다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시오!”

그들이 말하는 공물이 뭔지 뻔했다.

사람을 바다에 빠뜨리는 인신 공양이다.

예로부터 바다 사나이들은 온갖 미신을 믿었고 인신 공양은 그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장사의는 그것만은 하기 싫었다.

누굴 희생양으로 쓸 건지 아직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으나 대충 예상되었다.

아마 가장 어린 막내가 될 것이다.

한동안 두 사람은 그걸로 다퉜다.

선장은 미신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선원들의 사기를 위해 어쩔 수 없다고 계속해서 주장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없는 기운을 끌어내며 싸우고 있을 무렵에 종소리가 났다.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뒤로 들자 돛대 위에서 망을 보는 이가 소리쳤다.

“육··· 육지가 보입니다!”

처음에는 믿기지 않았다.

무풍지대에 들어와 꿈쩍도 못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육지가 나타날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바다 위에서는 종종 헛것이 보이는 때가 많기에 선장은 혀를 차며 신경을 안 썼다.

하지만 점점 더 갑판 위에 있는 선원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소란스러워졌다.

“어랏! 도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해류가 쎄게 흐르기 시작한 거지?”

“진짜 육지가 맞잖아!”

“뭐하고 서 있어? 어서 선장님을 모셔와.”

그쯤 되자 선장과 장사의도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다급하게 갑판 위로 뛰어서 올라갔다.

그러자 생각보다 커다랗게 보이는 섬이 아주 멀리에 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근처에 있던 다른 배에서도 이제야 섬을 본 건지 뒤늦게 환호성이 울러 퍼졌다.

귀신에게 홀린 기분이 들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게 있다면 고려는 아닌 것 같다는 것이었다. 멀리 보이는 육지에는 처음 보는 식생이 가득했다.

조금씩 가까이 가보니 잔가지 없이 하늘 위로 높게 치솟은 나무가 보였다.

“저 나무 위에 있는 것들은 사람 머리를 효수해서 걸어 놓은 건가?”

“에이 설마···.”

“식인종이 있다는 것을 직접 보고도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나무마다 사람 머리통만 한 열매가 맺혀 있기에 처음에는 다들 오해할만했다.

하지만 경험 많은 장사의는 그게 뭔지 알 것 같았다. 저 나무를 직접 본 것은 아니나 섬라곡국을 통해서 들어온 열매를 봤다.

정확한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나 단단한 열매의 껍질을 깨 내면 안에 수분이 가득한 건 알고 있었다.

그걸 보니 조금 살 것 같았다.

말라 죽진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이곳이 어딘지 전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섬은 크게 네 곳으로 나뉘었고 높게 치솟은 화산이 곳곳에 보였다.

처음에는 탐라가 아닌가 생각되었으나 아무리 봐도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았다.

장사의는 꽤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도대체 여기는 어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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