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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122화 (122/202)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122

커다란 폭발이 일어나는 순간.

멀리서 그 모습을 아무런 말 없이 흡족한 웃음을 지으며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다.

강 너머에 있는 야산에 수풀이 우거진 곳에 있는 그들은 최무선과 이방실이었다.

이번 작전에서 최무선은 화약을 이용한 함정을 만들었고 이방실은 그걸 승인하고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번 폭발로 저들의 수뇌부 중에 얼마나 죽었을지 궁금하지 않소?”

“적지 않은 타격을 입혔을 것입니다.”

“그랬으면 좋겠소.”

이번 책략은 중요했다.

가능하면 우두머리를 잡아야 했다.

홍건적의 조직력은 그리 좋은 편은 아니라 가장 위에 있는 몇 명만 잡아도 모래성처럼 와르르 무너질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일부러 인력을 동원해서 진지까지 세우고 함정을 파놓은 것이었다.

원래 저기에 진지가 있지는 않았다.

이번 일을 위해서 작년에 만든 곳이다.

어느 곳으로 올지 알 수 없어서 저런 곳이 요하강 주변에 십여 곳이나 있었다.

하지만 이건 겨우 시작에 불과했다.

고려가 세운 대비책은 무척 많았다.

전하의 명령을 받아서 수년 동안 이날을 대비해 머리를 맞댄 결과물이었다.

원래는 압록강의 의주에서 외침을 막기 위해서 마련된 계책 중의 하나인데 이곳에서 써먹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이제 시작에 불과합니다.”

최무선은 꽤 자신 있는 표정이었다.

요서 지역은 아직 고려의 영토가 아니기에 본격적인 작전을 펼치기 어려워서 그냥 놔둔 것에 불과했다.

저들이 요하강을 건너는 것조차 불가능한 일에 가까우나 만약에 이쪽으로 건너와도 살아서 되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정도로 수많은 함정이 도사리고 있었고 이번 폭발은 그중의 일부였다.

한 잔의 물을 마시더라도 생과 사의 경계선에서 줄타기를 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걷다가 멀쩡하던 땅이 꺼져서 죽창에 찔려서 죽을지도 모르고 아궁이에 불을 피우다가 폭사 당할지도 모른다.

아마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할 것이다.

근거 없는 자신감은 아니었다.

최무선은 수년째 이날만을 기다려왔다.

그가 준비한 것 중의 하나가 요서 지역에 들어가서 활약한 정찰 부대의 화승총이다.

현재 그들에게 지급된 것은 화포의 크기를 줄인 승자총통이 아니었다.

최소 백 년 후에 나와야 할 화승총이란 이름에 걸맞은 진짜 총이었다.

“이번에 새로 만든 화승총이 엄청난 활약을 했다고 들었소.”

“아직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상당한 발전이었다.

지금 보급되는 화승총은 개머리판과 가늠자가 있었고 삼에 염초를 먹여서 만든 화승을 적용한 상태까지 도달했다.

사수가 격발의 시기를 정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정확도가 엄청나게 개선됐다.

하지만 단점도 분명히 있었다.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이 날씨였다.

더운 날씨에 활의 아교가 녹아내리는 단점이 있듯이 화승총도 비 오는 날과 바람이 거센 날씨에 쏠 수 없었다.

당장 그걸 해결할 방법은 없기에 차차 고민해야 할 문제였다.

최무선은 생각할수록 전하가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화승총이란 개념을 어떻게 생각해내신 건지 궁금할 정도였다.

더구나 양초를 비롯해서 여러 함정에 대한 단초(端初)를 주신 것도 전하였다.

자신은 그걸 실현하는 역할에 불과했다.

“현재 병사들에게 지급된 화승총을 모두 합치면 몇 정이나 되는 것이오?”

“정찰 부대에 지급된 이백 정과 삼백 명의 화통방사군 사수에게 지급된 것이 전부입니다.”

아직 수량이 많지는 않았다.

하나 만드는데 드는 품이 적지 않았다.

기존에 사용하던 화포나 핸드 캐논에 가까운 초기 형태의 화승총과 비교하면 지금의 것은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쇠뇌에서 쓰던 격발 장치.

가느다란 총열과 개머리판.

그리고 화승도 만들어야 했다.

같은 시간을 들이더라도 기존의 화포에 비해서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들어갔다.

당연히 제작 비용도 엄청났다.

하지만 그만큼의 효과가 있었다.

이번에 정찰 부대가 요서에서 올린 전과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대단했다.

애초에 전군에서 엄선하여 뽑은 이들인 것도 있으나 지금까지 훈련하는데 들어간 엄청난 양의 화약이 아깝지 않았다.

한참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눌 무렵.

뒤쪽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리자 해군을 이끄는 양관이 서 있었다.

현재 그가 이끄는 백여 척에 달하는 제3함대는 요동 반도에 상주하며 원나라의 선박을 완벽하게 막아내고 있었다.

“하하! 이런 멋진 장관을 두 분만 보시다니 서운합니다.”

그는 멀리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를 보고 기분이 좋은지 허허거리며 웃었다.

홍건적들은 개미처럼 작게 보였는데 꽤 당황한 듯이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이방실은 그런 그를 반가운 얼굴로 맞아주었다. 이번에 준비한 작전에서 그가 해줘야 하는 역할이 작지 않았다.

“어서 오시오. 준비는 다 끝냈소?”

“마지막으로 제가 직접 확인하고 왔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제 저들을 쓸어버리는 일만 남아 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같이 차라도 한잔하면서 그간 밀린 이야기를 하고 싶소만, 그런 것들은 이번 일을 무사히 마치고 합시다.”

양관도 흔쾌히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안 그래도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았다.

정해진 시간에 맞추려면 그 역시 서둘러서 이동을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꽤 길 것 같았다.

“그렇게 하시죠.”

*

그날 밤, 동이 틀 무렵.

요하강 상류에 배가 띄워졌다.

그런데 그 수가 적다고 보긴 어려웠다.

거의 수십 척에 달할 정도였는데 수심이 깊지 않고 폭이 비교적 좁은 요하강이다.

그 모습이 상당히 위태로워 보였다.

폭이 좁아서 한 척이라도 좌초되면 뒤에 있는 배가 지나기 어려울 정도였다.

만약에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이 아니었다면 곳곳에 숨어 있는 모래톱에 박혀서 움직일 수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상한 점이 있었다.

어느 배에서도 불빛이 안 보였다.

그들은 최대한 소음을 내지 않고 물길을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서 내려갔다.

들리는 것이라고는 잔잔한 물줄기가 부딪히며 첨벙이는 소리밖에 없었다.

더구나 오늘은 달도 흐릿했다.

정월이 얼마 전에 지나서 하현달이 뜨는 시기였으나 뿌연 구름이 달빛을 가렸다.

그나마 해가 뜨기 반 시진 전이라 어렴풋하게 시야가 확보된 덕분에 배들은 어둠 속에서도 물길을 놓치지 않았다.

배들의 형태도 조금 독특했다.

모든 배의 오른편에 두꺼운 판자가 방패처럼 줄지어서 세워져 있었다.

틈이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화포가 놓여져 있었고 철환도 쌓여 있었다.

어떻게 중심을 잡은 건지 배가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그로부터 약간의 시간이 지난 뒤.

홍건적이 도강을 위해 진을 치고 있는 곳에 도달했지만, 아무도 배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야간 보초를 서고 있는 병사들은 하나같이 꾸벅이며 졸고 있었다.

날이 저물 무렵에 폭발로 큰 피해가 생겼던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안 되었다.

하지만 요서를 지나 여기까지 오는 동안 밤마다 계속해서 기습 공격을 당한 탓에 피로도가 쌓일 대로 쌓인 상태다.

따뜻한 곳에서 등을 붙이고 잠을 청한 지도 꽤 오래되었기에 대부분의 병사들은 등만 기대면 그냥 잠들었다.

하지만 문제가 없지는 않았다.

추위로 요하강이 모조리 얼어붙었다.

홍건적이 도강하기 위해 자리 잡은 곳은 다른 곳과 달리 강의 중심부까지 얼었다.

물길을 따라서 내려오던 배들이 그대로 부딪치며 얼음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는데 그게 생각보다 상당히 컸다.

“이게 무슨 소리야?”

“얼음 쪼개지는 소리잖아.”

“누가 또 탈영하다가 빠진 거 아냐?”

“도망가도 왜 그쪽으로 가는 건지 알다가도 모르겠네.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미는 꼴이잖아.”

“이봐! 다들 일어나봐. 저게 도대체 뭐야?”

그제야 몇 명의 병사가 강을 메우고 있는 수십 척에 달하는 배를 발견했다.

심지어 하류 쪽에서도 올라오고 있었다.

그들이 상황을 파악하고 경고를 해주기도 전에 배에서 횃불이 좌우로 흔들렸다.

무슨 신호 같았는데 그와 동시에 모든 배에서 횃불이 켜졌다. 불빛을 감추려고 선창 안쪽에 불을 숨겨놨던 것 같았다.

“적군이다!”

병사들이 서둘러 종을 쳤지만,

동시에 수많은 화포가 발사되었다.

대응을 할 틈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각각의 배마다 적어도 너덧 개의 화포가 설치되어 있었기에 거의 수백 개의 철환이 홍건적의 숙영지를 향해 날아갔다.

그 굉음 때문에 바닥이 울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걸로 끝난 게 아니었다.

여기까지 오는 길에 계속해서 괴롭히던 화승총도 화포와 함께 사격을 시작했다.

홍건적의 가장 큰 실수는 숙영지를 강가에 가깝게 자리 잡았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고스란히 그 공격을 받아야 했다.

당연히 제정신이 아니었다.

일부 철환은 그대로 막사를 덮쳤다.

심지어 불화살까지 줄기차게 쏘아대니 비를 막기 위해서 기름을 먹여놨던 일부 막사는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모두 무기를 들고 반격하라.”

“살고 싶으면 다들 정신 차려!”

“뭣들 하고 있는 것이냐, 궁수들은 어서 활을 쏘아라.”

홍건적도 어떻게든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이리저리 뛰면서 안간힘을 썼다.

당연히 그중에는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는 모거경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폭발로 지휘를 해야 하는 장수와 참모 대부분을 잃은 타격이 컸다.

지휘 계통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병사들은 제각각 움직이고 있었다.

“크아아! 망할 놈들아, 이 강이 바로 삼도천이니라 이 몸이 직접 저승길까지 인도해줄 테니 어서 와보거라!”

배를 이끌고 나타난 것은 양관이었다.

그는 습관처럼 선수 끝에 올라서서 큰소리로 외치며 병사들을 지휘했다.

화포가 쏘아질 때마다 배가 요동쳐서 상당히 위태로워 보였으나 해군들은 다들 익숙한지 각자의 임무만 신경 썼다.

그러는 사이에 얼음도 박살 났다.

몇몇 배들은 얼음에 화포를 쏴서 배가 지나갈 길을 열고 있었는데 일부 홍건적은 배를 향해 달려오다가 강물에 빠졌다.

이 추위에 강물에 빠지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실제로 얼마 지나지 않아 얼어붙은 시신이 강물을 따라 흘러갔다.

그쯤 되자 홍건적은 도망치기 시작했다.

살아남기 위한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최대한 강가에서 벗어나야 살 수 있기에 몸뚱이만 챙겨서 달리는 이들도 많았다.

모거경은 그걸 보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으나 그들을 탓할 수 없었다.

초인적인 인내심이 발동된 것은 아니다.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생겼다.

“여기서 한 명도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전군 돌격하라!”

벗어날 곳은 없었다.

이미 그들은 포위당한 상태였다.

어느 사이에 수많은 고려군이 나타나서 둘러싸고 있었다. 이방실 장군이 칼을 빼 들고 외치자 사방에서 달려들었다.

요동에 배치된 5만의 병력 중에 무려 4만 명이 이곳으로 이동한 상태였기에 수적인 우세도 고려군에게 있었다.

선두는 역시 서달의 몫이었다.

도끼를 쥐고 목숨을 사리지 않은 기세로 달려드는 그의 모습은 상당히 흉흉했다.

멧돼지 문양의 부대기를 휘날리는 서달 휘하의 병사들도 두려움이 없어 보였다.

지난 1년 동안 신병의 티를 벗고 완벽한 돌격대가 된 것이다.

하지만 가장 두려운 존재는 따로 있었다.

홍건적은 중앙에 세워진 곰 문양의 대장기(大將旗)를 보고 다들 두려워했다.

이미 요동 정벌에서 한 차례 당했던 이들은 뼛속 깊이 새겨진 공포가 있었다.

이방실은 요서와 만주 전역에 무신이라 불릴 정도로 유명했는데 차칸 테무르의 명성과 견줄 정도였다.

그때부터는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홍건적은 배수의 진을 칠 수도 없었다.

앞뒤에서 동시에 화승총과 화살 그리고 화포에서 쏜 철환이 날아오고 있었다.

도저히 막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쯤 되자 병사들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항복하는 자와 반항하는 자.

대부분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했으나 일부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고려에게 포로로 잡히면 힘든 노역에 동원된다는 소문은 이미 널리 알려졌다.

차라리 죽기를 선택한 것이었다.

“어차피 잡혀도 노역에 시달리다가 죽게 될 것이다.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라!”

“노예로 살 바에는 지금 죽는 것이 덜 고통스러울 것이다.”

홍건적 중에 가장 정예라 불리는 이들은 한곳에 뭉쳐서 고려군의 취약한 부분을 공략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이곳을 뚫고 나가려는 기세는 상당히 맹렬했다.

살고자 하는 의지가 통한 것인지 그들은 마침내 아주 작은 활로를 뚫어냈다.

하지만 그곳을 통과한 이는 적었다.

대부분 말에 올라탄 이들만 포위를 뚫어냈고 나머지는 신속하게 보강된 고려군에 의해서 앞길이 가로막혔다.

아직 모거경의 운은 다하지 않은 건지 그 역시 활로를 뚫은 이들 중에 속해 있었다.

하지만 그 기쁨은 아주 잠시에 불과했다.

타아앙!

그가 박차를 가하며 본격적으로 달려 나가기도 전에 멀리서 날아온 총알이 그의 미간을 정확하게 뚫고 지나갔다.

회색 연기 사이로 총구를 조준하고 있던 것은 윤송과 그의 조원들이었다.

처음에 쏜 조원들의 탄환은 빗나갔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조준을 하고 있던 윤송의 탄환은 정확하게 모거경을 맞췄다.

적장이 피를 흘리며 떨어졌으나 윤송은 신경도 안 쓰고 다시 재장전을 했다.

한 명이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하지만 조원들은 조금 달랐다.

능숙하게 재장전을 하면서도 모두에게 조장의 공적을 알리기 위해서 애썼다.

목청껏 소리치는 그들의 목소리는 요하강에 울러 퍼졌다.

“하사 윤송이 적장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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