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120
임금의 행차가 서경으로 들어서자,
백성들의 환호성은 생각보다 매우 컸다.
지금껏 여러 반란이 생긴 탓에 서경 사람들이 당한 고초가 적지 않았다.
인종 당시에는 묘청이 지기쇠왕설을 내세워 서경 천도로 사기 친 일도 있어서 그 여파가 아직도 이어지고 있었다.
그로 인한 서러움은 작지 않았다.
서쪽에 있는 수도라 하여 서경이라 불리었으나 완전히 배척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서경 천도가 이뤄지며 모든 것이 완벽하게 바뀌고 있는 중이었다.
변방의 도시에서 고려의 중심으로 순식간에 탈바꿈한 것이다.
개경 사람의 콧대가 얼마나 높았던가.
고려의 3경에 속해 있다고 하더라도 격이 다르다고 말하던 이들이 이제는 서경으로 이주하기 위해서 줄을 서고 있었다.
당연히 인구도 폭증하기 시작했다.
한산했던 거리는 사람으로 넘쳐났고 비어있던 집에도 살림살이가 들어왔다.
그만큼 물류도 서경으로 집중됐다.
사람이 늘어났을뿐더러 수많은 공사가 진행되고 있기에 각지에서 생산된 기와를 비롯해서 목재가 계속 들어와야 했다.
미리 구획 정리를 해놓고 상당수의 저택과 서민이 살 수 있는 곳들을 만들어 놓아서 다행일 정도였다.
[오늘부로 서경은 평양이라 칭하며 고려의 수도임을 천명하노라]
이와 같은 방문이 전국에 붙여졌다.
기존의 서경이란 명칭은 임금을 중심으로 서쪽에 있다는 뜻인데 내가 이곳으로 옮겨온 터라 그대로 쓸 수는 없었다.
그와 관련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었다.
처음에는 왕이 거주하는 수도이니 왕경(王京)으로 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원래의 이름을 되찾는 방향으로 정해졌다.
조선의 수도인 한양도 따지고 보면 한강의 북쪽이라는 뜻의 지명이다.
평양이라고 쓰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갑작스러운 변화라 볼 수는 없었다.
꽤 오래전에 동경은 계림부로 남경은 한양부로 이미 바뀐 상태였다.
개경만 다시 개성부로 돌리면 끝난다.
고려 3경의 시대가 막을 내린 것이다.
나는 이번이 기회라 생각했다.
이왕에 행정구역을 건드렸으니 지금껏 미뤄왔던 개편도 진행했다. 우선은 조선 팔도를 기본으로 삼고 요동을 추가했다.
탐라와 대마도는 규모의 한계가 있기에 전라도와 경상도 편입시켰다.
훗날 아이들은 역사책에서 이 시대를 고려 구도(九道)라 배울지도 모르겠다.
그와 동시에 각지에 아직 남아있던 향, 소, 부곡 등을 모두 일반 군현으로 승격시켜서 요역에 동원되는 일을 금했다.
공방과 협동조합 형태의 생산 시설이 곳곳에 생긴 터라 가능한 일이었다.
“대동강 하류에 있는 남포에 항구를 만드는 것은 어디까지 진행되었소?”
평양에 있는 궁궐에 들어선 나는 여독을 풀 틈도 없이 공부 상서 황석부를 불러내서 가장 시급한 일부터 물었다.
아직은 개성에 있는 벽란도를 최대한 활용하고 있지만, 결국에는 평양 근처에 항구를 만들어서 물량을 소화해야 했다.
그 대안이 평양 남서쪽으로 130리 정도 떨어져 있는 남포항이었다.
위치상 그곳만 한 곳이 없었다.
대동강을 따라서 평양까지 더 올라올 수도 있으나 소형은 몰라도 다수의 대형 선박이 들어올 정도로 여유롭지는 않았다.
더구나 강물을 거슬러 올라오는 것도 생각보다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올해 안에 공사가 마무리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사옵니다.”
“일단 상선이 접안할 수 있는 잔교와 창고부터 완성시켜야 하오.”
“심려치 않으셔도 되옵니다.”
항구의 시설은 나중에 보완해도 되지만, 상선이 물건을 나를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나마 서경 천도를 결정한 뒤로 지금껏 항구와 도로도 공사했기에 그리 오래 걸릴 거라 생각되지는 않았다.
다행이라고 말하기는 뭐하지만, 어차피 조운선이 옮길 양곡의 양이 많지 않았다.
올해는 전국 곳곳에 가뭄이 들어서 평년대비 수확량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구휼미와 노동에 대한 대가를 치른 탓에 창고도 많이 비어있는 상태였다.
그나마 작년에 풍년이라 다행이다.
그게 아니었다면 서경 천도는 물거품이 될 정도로 상황이 그리 좋지는 않았다.
심부와 동오도 상당히 노력했다.
그들은 정문빈을 통해서 강남 지역의 양곡을 대량으로 사들여서 고려로 보냈다.
“저택을 지을 평양의 땅을 분양하는 것은 어디까지 진행이 되었소?”
“대동강 북부는 5할 이상, 남부는 3할 정도 분양이 되었사옵니다.”
“허락 없이 성안에 집을 짓는 것은 절대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오.”
“순군만호부의 협조를 받아서 진행을 하고 있사옵니다.”
수도 이전에 들어가는 저화는 생각보다 상당히 많았다. 아무리 현재의 고려가 풍요롭다고 하더라도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원래의 역사에서 고려는 상당히 어려움을 겪는 와중에도 한양 천도를 했던 것을 보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더구나 최후의 수단이 있었다.
평양의 땅은 대부분 국유지였다.
본격적인 북부 개발을 하기 전에 사들인 덕분이었다. 당시의 평양은 개발에서 뒤처져서 헐값으로 땅이 거래되고 있었다.
대동강 이남은 허허벌판에 불과했다.
그걸 뒤집어엎고 도시로 만든 터라 구획 정리가 끝난 땅을 조금씩 팔고 있었다.
많이도 아니고 정확하게 저택을 지을 정도만 팔고 있었는데 평양 외곽에 서민이 초가집을 짓는 곳은 생각보다 저렴했다.
‘상단에서 걷는 세금도 적지 않지.’
각지에서 올라오는 건축 자재에도 일정량의 세금이 매겨지고 있는 중이다.
그리 부담될 정도로 책정된 것은 아니나 워낙 양이 많으니 상당히 도움이 됐다.
하지만 생각 외로 세수 확보에 도움을 주는 곳이 있었는데 그곳은 바로 새롭게 평양의 명물이 되고 있는 미술관이었다.
그곳은 일종의 핫플레이스가 되었다.
고려를 비롯해서 원나라에서 그린 명화와 명필의 작품이 걸려있기 때문이었다.
개중에는 정말 구경하기 어려운 물건도 상당히 많이 있었다. 대부분 심부가 구해온 것들이었고 내 그림도 걸렸다.
거기서 나오는 입장료가 상당했다.
오죽하면 미술관을 보기 위해서 개성과 계림에서 평양까지 올라오기 시작했다.
별다른 생산도 필요하지 않고 유지비는 거의 들지 않는데 수입은 계속 들어오니 이런 종류의 수입원은 상당히 중요했다.
“원형 극장은 어떻게 되었소?”
“오백 명 정도의 규모로 평양 북부에 있는 시전 근처에 짓고 있사옵니다.”
“좌석이 너무 적은 것이 아니오?”
“서서 공연을 보는 이들까지 합치면 천여 명 정도는 들어갈 수 있사옵니다.”
당연히 그 형태는 유럽의 것과 같았다.
이미 검증된 무대가 있는데 새롭게 고민을 하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여론 형성을 위해서 공연의 형태를 자주 활용하기에 꼭 필요한 시설이었다.
그곳이 완성되면 조풍서를 비롯한 여러 이야기꾼과 연극이 무대에 올려지고 입장료의 일부분은 나라에서 걷을 것이다.
‘이런 걸 꿩 먹고 알 먹고라고 하지.’
*
평양이 뜨겁게 달아오를 무렵.
국경선 부근에 추위가 몰려왔다.
압록강 너머의 겨울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심각할 정도로 엄청난 수준이었다.
숨을 쉴 때마다 폐가 얼어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는데 남부 지역 출신의 병사들은 좀처럼 적응하기 어려웠다.
“아흐··· 추워.”
저절로 이가 덜덜거릴 정도였다.
하지만 열 명의 병사들은 누구도 불을 피울 생각조차 안 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몸을 녹이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으나 지금 있는 곳이 요하강 너머이기 때문에 그럴 수는 없었다.
연기는 생각보다 멀리까지 보인다.
정찰 임무를 나온 것인데 괜히 다른 이의 눈에 띄어서 좋을 것이 전혀 없었다.
최근 요서는 요동에서 쫓겨난 고나노와 유익을 중심으로 재편성된 상태였다.
거기다 원나라에서 영혼까지 긁어모아서 보낸 수만 명의 병력이 상주해 있었다.
“나 때는 말이야, 이런 따뜻한 면포로 지은 옷도 없었어.”
노병의 수다는 쉽게 멈추지 않았다.
면포의 중요성은 다들 알고 있었다.
두툼한 겨울옷이 없었다면 이렇게 정찰을 나오는 것조차 불가능했을 것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면포는 아무리 돈을 많이 줘도 구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런 옷이 전방에 배치된 부대에 적어도 한 벌 이상 지급되고 있는 중이었다.
전에는 꿈도 못 꾸던 일이다.
하지만 그런 말도 한두 번 들어야 호응을 해줄 텐데 노병의 이야기보따리는 재탕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아무도 안 궁금해하는 옛날이야기를 하는데 귀에 딱지가 생길 정도였다.
모든 이들이 그만 좀 하라고 눈치를 줘도 그는 입을 닫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아니 그런 눈치조차 없었다.
“저 이야기를 또 들어야 됩니까?”
듣다 못 한 고참 중에 하나가 정찰조를 이끌고 있는 조장인 윤송을 바라봤다.
이번에 무관으로 급제하여 전방에 배치된 그는 당장은 하사 계급에 불과하나 얼마 후에 중사 진급을 앞두고 있었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금방 장군까지 올라서는 경우가 많으나 윤송은 생각보다 병사들과 허물없이 지내고 있었다.
“귀는 닫고 눈을 열어두게나.”
윤송은 피식 웃으며 무기를 닦았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그는 아직 노병의 잡담이 그리 싫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가 있어서 심심하진 않았다.
더구나 이 근방의 지리를 그만큼 잘 아는 이는 없기에 꼭 필요한 자였다.
그러는 사이에 다른 이들은 육포 조각을 꺼내서 입에 넣고 오물거리고 있었다.
앞으로 이레 동안 예정된 정찰 일정 중에는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을 수 없었다.
불을 피울 수도 없고 한겨울이라 대부분 음식이 얼어 버리니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다들 아쉬움이 꽤 컸다.
“하필이면 정월 초하루에 이렇게 초병으로 근무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맞습니다. 지금쯤 다들 따뜻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을 텐데 말이죠.”
“나 때문에 다들 고생이 많네.”
원래는 다른 순번의 정찰조가 와야 하는 일정인데 윤송이 새롭게 부임한 탓에 이번 정찰은 그가 맡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경험을 쌓게 하기 위한 배려였다.
누구보다 고생하는 이들이 정찰조인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윤송은 조원들에게 상당히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돌아가면 내가 사비를 들여서라도 맛있는 것들을 사줄 테니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는 말게나.”
“하하! 역시 조장님이 최고입니다.”
“탁주도 잊으시면 안 됩니다.”
“그런데 날이 풀린 후가 아니라 이렇게 추운 겨울에 홍건적이 올까요?”
조원 중의 하나가 의문을 제시했다.
그와 동시 모든 이들이 윤송을 바라봤다.
다들 궁금했던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누가 봐도 지금 병력을 움직이는 것은 미친 짓이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요서가 비어있지도 않았다.
홍건적이 오려면 유익과 고가노가 도망친 이후에 새롭게 병력을 재편성하고 있는 요서를 뚫고 지나와야 한다.
혹시 다른 이유라도 따로 있는 건지 윤송에게 묻고 있는 것이었다.
“그건 말이지···.”
윤송은 입을 뗐지만, 말을 이어가진 못했다. 왜냐하면 한참이나 수다를 떨던 노병이 갑자기 일어나 먼 곳을 봤다.
그의 얼굴은 지금까지와 달리 진중함이 느껴졌기에 다른 병사들도 그가 바라보는 방향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대답은 안 들어도 될 것 같습니다.”
노병은 크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다들 그가 왜 그러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바라보던 방향은 다른 곳과 달리 유독 먼지구름이 자욱한 상태였다.
황무지 지형이나 바람만으로 저렇게 한 곳만 먼지가 피어오르진 않는다.
그게 의미하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대규모 병력이 이동하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다들 직접 확인하지 않은 내용으로 지레짐작을 하지는 않았다.
정찰의 기본은 눈으로 직접 본 것만 판단하고 보고하는 것에 있다.
끝까지 아니길 바라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먼지구름 사이로 보이는 이들은 수많은 군사들이었다.
그것도 머리 위에 붉은색의 두건을 두른 홍건적이었는데 얼마 전에 내린 눈 때문에 더 붉어 보였다.
“뭣들 하냐 어서 짐 챙겨라.”
“정초부터 이게 무슨 일이야. 어째 좀 잠잠하나 했다.”
“우라질! 하필 우리가 정찰할 때 쳐들어올 게 뭐야.”
노병의 말에 다들 짐을 챙겼다.
몸에 익을 대로 익은 움직임이었다.
지금까지 느슨하게 있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다들 오랜 기간 정찰 임무를 한 터라 당연한 일이었다.
윤송도 재빨리 말에 올라타서 조원들에게 출발 신호를 보냈다.
“각자 맡은 지역으로 최대한 빨리 달려가서 이 소식을 알리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