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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119화 (119/202)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119

대마도의 소식은 개경에 전해졌다.

규슈에 있던 소 쓰네시게를 유인해서 죽였다는 소식은 상당히 기쁜 일이었다.

누군가의 죽음을 두고 기뻐하는 일은 바람직하지는 않으나 어쩔 수 없었다.

그냥 놔뒀으면 후환이 될 것이다.

정몽주가 마련한 계책은 미리 내게 전달되어서 승인까지 받은 것이었다.

단순하게 쓰네시게만 잡는 게 아니라 쇼니 요리히사와 맺은 협약을 통해서 북조와의 관계 개선도 걸린 문제였다.

그걸 대마도에 있는 정몽주와 안우가 독단적으로 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정몽주의 계책은 성공했으니 그에 대한 보상과 칭찬을 담은 서신을 보냈다.

이번에 활약한 무관 중의 일부는 승진과 석 달이라는 포상 휴가를 주었다.

휴가가 상당히 길어 보여도 대마도에서 개경까지 오가는 시간을 따지면 실제 휴가는 한 달 정도에 불과했다.

그와 별개로 안우와 정몽주에게는 서경에 있는 저택 한 채씩 주는 거로 마무리됐다.

최근 서경에서 쓸만한 저택을 찾는 것은 상당히 힘들 정도로 가격이 엄청나게 올랐으나 전혀 아깝지 않았다.

“한글 보급은 어찌 되고 있소?”

문화부를 맡고 있는 유숙을 부른 나는 가장 먼저 한글 보급에 대해서 물었다.

요즘 나의 관심사는 훈민정음을 널리 보급하는 것이었다. 이미 반포를 마치고 학당을 통해 널리 퍼지고 있는 상태인데 이제 와서 무슨 소리냐고 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지금 생각하는 대상은 고려의 백성이 아니었다.

북쪽의 요동과 남쪽의 대마도.

새롭게 영토가 된 곳에 고려의 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기초 작업이었다.

당연히 그와 함께 고려의 말을 배우게 하는 것도 같이 진행되고 있었다.

“현지에 학당을 세우는 것은 성균관과 협의하고 있는 중이옵니다.”

한글의 배포는 중요하다.

언어는 문화적 지배의 시작이다.

천축국만 하더라도 수십 개의 언어가 있다는데 그런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지역마다 전통문화의 차이가 있더라도 적어도 서로 말과 글이 통해야 동질감이 생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세계 역사를 보더라도 융합이 제대로 되지 못해서 부족 간의 전쟁과 살육하는 일은 21세기에 들어서도 볼 수 있었다.

이른바 제노사이드라 불리는 집단 학살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었고 한반도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게 둘 수는 없었다.

“필요한 지원은 아끼지 않고 해줄 테니 서둘러서 진행해주시오.”

“어명을 받들겠사옵니다.”

“국경에 세우는 비석은 어찌 되었소?”

“밀직사에서 작성한 표문을 가지고 석공과 관리가 떠난 지 꽤 되었으니 거의 마무리 단계일 것이옵니다.”

새롭게 확장한 국경에 비석을 세우고 고려의 국경임을 확실히 적어놔야 했다.

대마도는 기존에 끝냈으나 요동 지역은 워낙 넓어서 아직까지 진행 중이었다.

이 문제는 생각보다 무척 중요한 일이다.

백 마디의 말보다 그런 비석 하나에 적힌 내용이 더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광개토대왕비였고 진흥왕이 세운 순수비도 그중의 하나다.

당연히 훼손되고 손상될 가능성이 있기에 한두 개만 만들 생각은 없었다. 지금 작업 중인 정벌 기념비만 십여 개가 넘는다.

그중에 한두 개만 남아도 다행이다.

최근에는 독도와 울릉도를 비롯해서 고려에 속해 있는 섬에도 사람을 보내서 바위 같은 곳에 표문을 새기고 있었다.

이번에는 논란이 될 만한 여지를 아예 두지 않게 준비할 생각이었다.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최근 유행하는 조각상 쪽으로 주제가 바뀌었다.

요즘 고려에서는 화강암보다는 수입되어 들어오는 대리석을 재료로 조각하는 이들이 수가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다.

훨씬 더 자유롭고 쉽게 조각이 가능하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처음에는 불상을 조각하려고 시도하는 이들이 많았으나 특유의 무늬가 있어서 요즘에는 산수화 형태가 많사옵니다.”

“산수화와 조각상이라니 전혀 이해가 안 되는 조합이지 않소.”

“최근에 소신이 본 것은 무늬의 결을 따라서 험준한 산의 형세를 만든 작품도 있었사옵니다.”

꽤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걸 과연 어디에 쓸까.

이 시대에 예술품을 전시하는 공간은 아직 없었다. 족자나 병풍 형태로 집 안에 둘 수 있는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현재 서경에 미술관으로 쓸 건축물을 짓고 있다.

그러나 규모가 큰 편은 아니었다.

대부분 회화 작품으로 채워질 예정인데 당연히 내가 그린 것도 몇 점 넣을 거다.

지금까지 틈틈이 그린 초상화가 적지 않게 있었다. 대부분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이들의 얼굴을 그린 것이었다.

거기에는 내 개인적인 욕심도 있지만, 충성심에 대한 일종의 보상이기도 했다.

임금이 직접 신하의 얼굴을 그려주는 일은 그리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

다들 대대로 가보로 삼을 기세였는데 그중에 몇 점은 내가 가지고 있었다.

“저택의 벽면을 대리석 조각으로 장식하려고 하는 이들이 꽤 많사옵니다.”

“고려로 들어오는 대리석의 가격이 싼 것도 아닌데 허세가 조금 지나친 것 같소.”

“그래도 조각가들이 그들 덕분에 작업을 계속 이어갈 수 있으니 단점만 있지는 않사옵니다.”

나도 유숙의 의견에 동의했다.

하지만 요즘 조각가들만 잘나가는 것은 아니었다. 출판된 서책 중에 일부는 해외까지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중이었다.

처음에는 마두라이에 있는 고려인을 위해서 조금씩 보내줬는데 요즘은 아예 번역해서 판매할 정도였다.

그중에는 동화책도 포함되어 있었다.

덕분에 고려의 이야기꾼과 소설을 쓰는 이들의 위상이 조금씩 높아지고 있었다.

과거처럼 무시당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고려와 조선의 예술이 발전하지 못한 이유가 천하다고 여기던 이들 때문이다.

정말 이해가 안 되는 이들이었다.

난을 치면 고귀한 것이고 풍속화는 저급한 것인가. 꼭 그런 이들이 몰래 숨어서 19금인 춘화(春畵)를 보더라.

어쨌든 나는 예술을 하는 이들에게 계속해서 후원할 계획이었다.

‘문화의 힘만큼 강한 것은 없지.’

* * *

시간이 흘러서 가을이 될 무렵.

마침내 서경 천도가 시작되었다.

무려 10만 명이 움직이자 엄청난 행렬이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동원된 상선과 해군의 배가 수백 척에 달할 정도다.

하지만 거기에 내가 탈 수는 없었다.

왕실 전체가 한배에 탔다가 자칫 좌초라도 당하면 모든 게 끝장난다.

그래서 선택한 경로는 육로를 통해서 서경으로 향하는 것이었고 그 여정에는 오천여 명의 병사와 함께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몸만 간다고 끝나진 않았다.

서고와 창고에서 옮길 게 적지 않았다.

내수사 같은 경우에는 거의 반년 가까이 이전 계획을 잡고 천천히 진행 중이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이전이 본격화되자 왕실도 서경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왕현은 궁궐 밖으로 나오자 무척 신난 표정으로 주변을 살폈다.

“우와아··· 너무 신기해요.”

날아가는 새만 봐도 까르르 거릴 정도로 원자의 기분은 상당히 좋아 보였다.

충분히 이해가 가는 반응이었다.

궁궐에서 태어난 후에 궐 밖으로 나오는 것이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는 아이를 데리고 나올 이유가 전혀 없었다.

가진도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서경으로 가는 행렬이 잠시 쉬는 중에 그녀는 찻잔을 기울이며 주변 경관을 살피느라 바빴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처음에 고려에 왔을 때 이후로 궁궐에서 이렇게 멀리 나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렇게 보니 제가 개경으로 왔을 때와 비교하면 많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

“종종 같이 나오자고 말만 했지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송구하오.”

“바쁘시니 어쩔 수 없지요.”

둘이 함께 개경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온천도 다녀오고 조금 여유롭게 살고 싶었지만, 매년마다 해결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았다.

지금도 홍건적과 백련교 문제 때문에 상당히 골머리가 아픈 상황이었다.

가진도 그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쉬움을 토로하진 않았다.

대신에 새롭게 수도로 정해진 서경에 대한 기대감은 상당한 것 같았다.

대도에서 수년 동안 살았던 그녀의 입장에서 개경은 조금 정신 사나웠다.

무분별하게 지어진 건축물.

혼잡한 도시는 대도와는 무척 달랐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구획 정리가 깔끔하게 되어있는 서경이 취향에 맞을지도 몰랐다.

더구나 궁궐도 아예 새롭게 지었는데 그녀의 의견이 많이 가미된 설계였다.

가장 큰 변화는 내성의 활용이다.

기존에 궁궐 내부에 있던 일부 부서를 내성으로 옮겼다. 궁궐에는 식사와 숙소 그리고 업무를 볼 곳만 남겼다.

불필요하게 입궐할 필요가 없게 만든 것이었다. 그때 가진의 겁령구인 자르갈이 다가와서 빈 찻잔을 가지고 나갔다.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나저나 자르갈의 혼례는 어찌할 것이오?”

자르갈은 가진의 겁령구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몽골인 시종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가진 의미는 꽤 컸다.

가진에게 자르갈은 여동생이자 친구라고 봐도 될 정도로 상당히 가까운 이였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탓이다.

그런 그녀가 벌써 이십 대 중반이다.

고려의 기준으로 보면 혼례를 올릴 시기를 넘겨도 한참 넘긴 상태였다.

가진이 지금까지 손 놓고 있던 것도 아니었는데 쉽게 혼처를 찾지 못했다.

몽골인의 피가 흐르는 자르갈이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자부심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대단했다. 오히려 가진보다 더 자존심이 강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닌 것이 그녀의 혈통은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그런 탓인지 어쭙잖게 다가섰다가 된통 당하고 돌아서는 남자들이 많았다.

“혹시 괜찮은 이가 있사옵니까?”

“어떤 이가 어울릴 것 같은지 감이 오지 않아서 쉽게 답하기 어렵소.”

“생각보다 여린 아이입니다.”

여리다의 기준이 서로 다른 것 같았다.

자르갈이 말을 타는 것을 보면 어지간한 대장부와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았다.

반면에 얼굴은 상당히 고왔는데 내 기준으로 보면 상당히 매력적인 미인이나 이 시대의 기준으로는 너무 말랐다.

그때 문득 조인벽이 떠올랐다.

왠지 그라면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아직 혼례를 올리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요즘 그 때문에 그의 아버지인 조돈의 걱정이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맞아들 때문에 아래로 줄줄이 혼례가 늦춰지고 있기 때문이다.

“쌍성총관부 함락 당시에 활약했던 조돈의 아들인 조인벽은 어떻소?”

“이름은 많이 들었으나 어떤 이인지 기억나진 않습니다.”

“조만간 대마도에서 휴가를 받아서 서경으로 거처를 옮긴 아우들을 보러 돌아온다고 하니 한 번 유심히 봐보시오.”

둘이 맺어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이제 곧 이성계 등을 북부 지역으로 옮겨야 할 때가 되었다. 최영이 버티고 있는 곳이라 그리 걱정되지는 않았다.

그래도 견제를 해줘야 했다.

그걸 조인벽에게 맡길 생각이다.

그곳에 있는 여진족은 이성계 개인이 아니라 고려에게 굴복해야 한다.

현재도 이자춘과 함께 서북면에 배치된 가별초 외에 나머지 절반은 3품 무관인 지병마사가 된 조돈이 이끌고 있다.

당장은 동북면을 정리할 생각은 아니었으나 지금부터 준비는 해야 했다.

내가 거기까지 밝힌 것은 아니었으나 가진은 꽤 흥미가 있어 보였다.

괜찮은 사람이라면 곧바로 자르갈의 혼례를 진행할 것 같았다.

한동안 소소한 이야기를 하는 동안.

행렬은 빠르게 북부를 향해 움직였고 단풍이 떨어지기 전에 서경에 도착했다.

거의 1년 만에 다시 돌아온 그곳의 풍경은 그사이에 또 바뀌어 있었다.

불과 1년 만에 가능할 거라 생각지 못했는데 벌써 수많은 집이 생겼다.

인근 지역의 노동력이 모두 서경의 천도를 위해서 사용된 덕분이었다.

그게 가능한 이유가 있었다.

올해 농사는 실패라고 봐야 했다.

북부와 남부에서 엄청난 가뭄이 발생한 탓에 일찌감치 손을 놓은 이들이 많았다.

그중에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곳이 이앙법으로 농사를 짓는 이들이었다.

그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임금을 챙겨주며 대형 토목 공사에 투입한 것이다.

그나마 지난해 풍년이 들어서 보유하고 있던 양곡이 적지 않아서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고 다들 서경으로 부른 것은 아니고 남부에서는 저수지 공사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어쨌든 얼추 완성되어 가고 있는 서경을 내려다보던 나는 가진과 원자를 불러서 서경을 소개했다.

“이곳이 고려의 역사를 이어갈 새로운 수도인 서경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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