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117
원자를 찾는 것은 쉬웠다.
예상했던 곳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녀석을 찾은 곳은 마두라이에서 온 채윤이 머무는 임시 거처 근처였다.
그렇게 쉽게 찾을 수 있었던 이유는 지난밤에 원자가 한 이야기 덕분이었다.
‘각시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시퍼요.’
눈동자는 무슨 색인지,
머리에 뿔이 있는 것은 아닌지,
확인해야 할 게 많다고 내게 말했다.
여섯 살이 혼인이 뭔지 제대로 알고 있기는 한 것인지 궁금할 정도였다.
친우 정도라 생각하는 걸까.
하지만 원자는 그 안으로 들어서지 않고 주변을 맴돌며 서성이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 느낌이었다. 원자는 호불호가 뚜렷하고 나름 쿨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평소답지 않게 왜 그러는지 지켜보니 마두라이 사람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왜 그러는 건지 알 것 같았다.
마두라이에서 온 이들은 피부색도 다르고 언어도 고려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궁궐 내에는 다양한 인종이 들어와 있지 않아서 원자가 보기에는 이상할 것이다.
그나마 이번에 귀화한 설손 같은 회회국 혈통을 가진 이들이 몇 명 있으나 원자가 그들을 만날 기회는 거의 없었다.
조금 아쉬운 일이었다.
고려에 귀화한 색목인은 많다.
당연히 관직에 오른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벽란도와 지방 관리에 머물렀고 중앙 진출은 아직 요원했다.
도당이 생각보다 보수적인 것도 있으나 아직 그만큼의 능력을 갖춘 이가 없었다.
“네 이놈! 공부해야 할 시간에 여기서 무엇 하고 있는 것이냐?”
모처럼 장난기가 발동된 나는 몰래 원자의 뒤로 가서 크게 호통쳤다.
그 소리를 듣고 원자는 펄쩍 뛰었다.
상당히 놀랐는지 눈을 커다랗게 떴는데 그 모습을 보자 심장이 너무 아팠다.
건강에 해로울 정도로 귀여웠다.
생김새가 수달을 똑 닮았다.
당장 달려가 볼을 꼬집어주고 싶었다.
평소에는 그런 애정 표현을 아끼지 않고 있으나 지금은 훈육 중이라 참아야 했다.
혼내야 할 때는 제대로 혼내야 한다.
“아바마마···!”
“여기에서 무엇 하고 있냐고 물었다.”
“공부하러 가기 전에 이걸 가져다주려고 왔사옵니다.”
원자는 홀치의 손에 들려져 있는 보따리를 앙증맞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안에 뭐가 들은 건지는 알 수 없었기에 물어보자 원자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소자가 아끼던 동화책이옵니다.”
원자의 동화책은 조금 특별했다.
시중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물건이다.
화공이 삽화도 그려서 넣은 탓에 그 수준이 상당했다. 원자도 그걸 알기에 무척이나 애지중지하는 물건이었다.
“동화책은 왜 가지고 온 것이냐?”
“고려에 친구도 없을 테고 심심할 것 같아서 가지고 왔사옵니다.”
“멀리서 온 이를 배려하는 것은 좋으나 수업을 빠지기 위한 핑계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
아무리 좋은 의미라도 핑계로 보여지기 십상이다. 원자도 그걸 알기에 고개 숙여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다.
이왕에 여기까지 왔으니 나는 원자를 데리고 채윤이 머무는 곳으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이인미도 있었는데 갑작스러운 나의 방문에 깜짝 놀랐다.
“지나던 길에 차나 한잔 하려고 잠시 들렸소.”
말도 안 되는 핑계였다.
하지만 이인미는 눈치가 빨랐다.
원자를 향해 눈짓을 주자 그는 금방 상황을 알아챘다. 같이 온 원자가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두 아이를 만나게 하기 위해 온 것이라 판단한 그는 곧장 다과를 준비시켰다.
잠시 대청마루에 앉아있으니 밖에서 들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채윤이 문을 열어서 고개를 빼 곰이 내밀었다.
그 아이는 원자를 보더니 미소를 띠고 나와서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둘 다 성격이 조금 외향적이라 그런지 쭈뼛거리거나 그런 것도 없었다.
‘친화력 하나는 갑이네.’
나는 두 아이가 함께 놀 수 있게 놔두고 이인미와 대화를 나눴는데 얼마 뒤에 궁녀가 차와 함께 간단한 다과를 내왔다.
그런데 내 눈길을 끈 것이 있었다.
그건 바로 커리였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이었다.
평소에 귀찮을 때면 3분 만에 조리가 가능한 카레를 질릴 정도로 자주 먹었다.
카레 특유의 향이 코끝에 맴돌자 침이 저절로 고일 정도였다.
“마두라이에서 가져온 음식인데 화덕에 넣고 구운 난을 찍어서 드시면 되옵니다.”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었지만,
나는 이인미의 말대로 맛을 보았다.
과거에 먹었던 맛과는 상당히 달랐으나 기대를 저버릴 정도는 아니었다.
다음에 동오 상단에게 커리를 조금 가져오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이건 말이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아기 돼지 삼 형제에 대한 이야기야.”
그러는 사이에 아이들은 벌써 동화책을 놓고 나란히 앉아서 읽고 있었다.
채윤도 고려말과 함께 한글을 배웠기에 글을 읽는 것에 문제없었으나 차분히 원자가 하는 말을 듣고만 있었다.
확실히 조숙해 보였다.
하지만 둘 다 아직 어리기는 했다.
차가 식기도 전에 채윤은 완전히 깨 발랄한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탄야가 애지중지 키운 티가 났다.
“그렇게 큰 동물이 어딨냐?”
“정말 있다니까. 왜 사람 말을 못 믿니.”
“말도 안 되니 그렇지. 어떻게 코가 이이이이렇게 길어?”
왕현은 두 팔을 길게 펼쳤다.
채윤은 그보다 훨씬 길다고 했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으며 왕현은 그런 동물이 있을 리 없다고 단정 지었다. 아무리 큰 뱀도 그 정도로 길지는 않을 것 같았다. 어른들이 보기에는 별거 아닌 것 같아도 둘은 꽤 심각했다.
“진짜 그런 게 있나요?”
왕현은 답답했는지 이인미 곁으로 후다닥 달려와서 그게 진짜인지 물어봤다.
이인미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 지 망설였다. 괜히 중간에 껴서 밉보이기 십상이라 내가 대신 답해줬다.
“마두라이에 가면 그런 동물이 있단다.”
“아바마마가 직접 보신 것도 아니잖아요!”
“정휘 장군과 마두라이의 재상이 보낸 서책에도 나오는 내용인데 그들의 말은 믿을 것이 못 되더냐?”
“하지만···.”
왕현은 지기 싫었는지 고집을 부렸다.
어린 나이어도 자존심 하나는 대단했다.
그렇게 한동안 우기다가 자기편은 하나도 없다는 생각에 서러웠는지 금세 눈가가 촉촉해지기 시작했다.
“어! 너 설마 우는 거냐?”
“울기는 누가 울어. 먼지가 들어간 거야.”
“에이 아닌 것 같은데.”
채윤은 아들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며 지켜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상당히 우스꽝스러웠는지 아들은 피식 웃었다.
둘은 금방 화해했고 다시 동화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그 모습이 너무 예뼜다.
둘이 천생연분인지 아직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채윤이 지금 내 곁에 있는 가진처럼 원자의 곁을 지켜주길 바랐다.
왕좌에 오르는 순간부터 원자는 무척 외로운 길을 걷게 될 것이다.
내가 평범한 삶을 살아봐서 외로움이 더 크게 느껴졌던 걸지도 모른다.
친구와 술잔을 기울이며 푸념도 늘어놓고 싶었고 스트레스를 풀려고 노래방에서 목청 높여 소리 지르고 싶을 때가 많았다.
하지만 그놈의 체면이 뭐라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그리 많지 않았다.
“최근 원자에게 사부(師傅)를 붙여서 공부를 시키고 있는데 공주도 같이 공부하게 하는 것은 어떻소?”
이왕에 이렇게 되었으니 아예 둘이 같이 공부하게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적어도 같이 공부하는 이가 있으면 쉽게 도망치지는 못할 거란 판단 때문이었다.
더구나 교육 과정 중에는 궁중 예절도 포함되어 있었고 한자도 배우고 있는 중이라 그것도 같이 배워두면 좋았다.
당연히 이인미는 내 의견에 동의했다.
그렇게 반 시진 정도 지나자,
다른 일정 때문에 슬슬 일어나야만 했다.
아직 읽어야 하는 상소문도 산더미 같았는데 같이 따라나서야 하는 원자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모처럼 궁궐 내에 자신과 같은 또래가 들어왔다. 친우처럼 지내는 변안열과 주덕유의 아들인 변현과 주표가 있지만, 그들은 이레에 한두 번씩 오는 편이다.
원자는 항상 그걸 아쉬워했다.
비록 같이 공놀이를 할 수는 없지만,
궁궐에 항상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한 것 같았다. 나는 잠시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첫인상이 어떤지 물었다.
“직접 보니 어떻더냐?”
왕현은 곧장 대답을 했다.
웃음이 가득한 것만 봐도 어떤 답이 나올지는 뻔했는데 아들도 남자이긴 했다.
“너무 예쁩니다!”
*
궁궐에서 행복한 봄날을 즐길 무렵.
대마도에서는 굵은 땀방울을 흘리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산을 깎아내 흙을 날라서 바다를 조금씩 메우고 있었다.
얼핏 보면 무모해 보이는 일이지만, 확실히 대마도의 지형은 달라지고 있었다.
하지만 금방 끝날 일은 아니었다.
간척은 오랜 시간이 필요한 공사다.
그러나 그곳에서 노역하는 이들 중에 왜국 출신은 그리 많이 있지는 않았다.
대부분 요동에서 잡힌 포로들이었다.
대마도의 왜인과 요동의 포로를 교환한 덕분에 벌어진 일이었다.
코앞에 이키와 규슈가 있다.
바다만 건너면 자유가 있으니 탈주를 시도하는 이들의 수가 많았다.
그래서 최대한 멀리 보내는 것이다.
요동에서 왜국으로 돌아가는 길은 고려가 유일하고 배를 구하더라도 쉽게 통과하진 못하기에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다.
“오늘 할당된 일을 끝내지 못하면 식사는 없으니 각오해라!”
노동의 강도는 절대 낮지 않았다.
그래도 이곳에서 노역하는 이들은 광산에 비해서 나은 편이었다. 그곳에서 일하는 이들은 매년 1할 가까이 죽어가고 있었다.
매몰 사고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바쁘게 움직이는 이들을 지켜보는 정체 불명의 남성들이 있었다.
수풀이 우거진 야산에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을 보면 고려의 병사는 아니었다.
“쓰시마 사람들 같아 보이지는 않는데 어찌 된 일이라고 하더냐?”
“인근 마을에 들어가 보니 원주민 대부분이 강제로 이주되었고 섬에 남은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제길···.”
욕설을 내뱉으며 이를 가는 이는 대마도의 주인이었던 소 쓰네시게였다.
그는 오랫동안 기회를 노리다가 이제야 자신의 처자를 구하기 위해서 온 것이다.
얼마 전에 탈주에 성공한 몇 명이 해준 말에 의하면 혹시나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 인질로 살려두었다고 했다.
그 소식을 듣기 전에는 포기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아내와 아들이 아직 살아있다는 말에 소 쓰네시게는 주군인 쇼니 요리히사에게 부탁하지 않고 곧장 움직였다.
어차피 돌아올 대답은 뻔했기 때문이다.
쓰시마를 잃을 당시.
쇼니 요리히사는 잇시키 노리우지의 아들인 다다우지를 핑계 삼았다.
지금은 다다우지를 몰아낸 상태지만, 쇼니 씨가 다시 북조로 돌아서며 키쿠치 다케미쓰와 결전을 앞두고 있었다.
결국에는 끝도 없을 것이다.
다케미쓰를 이긴다고 그가 과연 자신의 가족에 대해서 신경이나 써줄까.
소 쓰네시게는 아닐 거라 생각되었다.
그래서 직접 사람을 모아서 몰래 올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함께 온 이들은 수없이 많은 전장을 함께한 치쿠젠(筑前)의 수호대다.
그들은 자신의 가족을 되찾기 위한 여정에 두말하지 않고 참가해줬다.
가장 실력이 출중하고 믿을 수 있는 이들만 골라서 왔으니 위치만 알면 쥐도 새도 모르게 빼낼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도대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쓰시마는 자신이 알던 곳이 맞나 싶을 정도로 모든 것이 바뀌고 있는 중이다.
복잡했던 해안선은 모두 메워지고 있었고 고려군은 새로 성벽을 세워서 요새를 만들고 있었다.
“내 아들과 아내가 아직 쓰시마에 있다는 소문이 확실한 것이 맞느냐?”
“마을 주민에 해준 말에 의하면 그런 것 같다고는 하는데 어디 계신지 정확하게 아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상당히 답답한 일이었다.
남은 시간은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이렇게 숨어다니는 것도 한계가 있다.
나흘 후에 오는 어선이 오기 전에 일을 마무리해야 했다. 그 배를 놓치면 다시 돌아가는 것도 힘들어질 것이다.
지금은 쓰시마에 있던 고려의 배들이 대부분 규슈 남부로 떠난 상태다.
만약에 귀면문 깃발을 달고 있는 함대가 돌아오면 빠져나갈 틈은 사라지게 된다.
이날을 위해 꽤 오랜 시간을 기다렸다.
바다에는 항상 고려의 해군이 상주해 있기에 들어올 수 있는 틈이 없었다.
그렇다고 아예 허술한 것도 아니다.
지금도 야음을 틈타서 겨우 작은 어선 한두 척만 몰래 오갈 수 있는 상태였다.
이곳의 지리와 바닷길을 훤히 아는 이가 없었다면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소 쓰네시게는 아직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어떻게든 찾아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