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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116화 (116/202)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116

그로부터 몇 개월 뒤.

벽란도에 상선 몇 척이 들어왔다.

딱 봐도 마두라이 술탄국의 배였다.

그곳에서 오는 배에는 항상 여덟 마리의 하얀 말이 그려진 깃발이 걸려있다.

누가 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관심을 가지는 이들은 없었다.

마두라이와 국교를 맺은 뒤부터 양국을 오가는 상선은 시간이 갈수록 늘어났다.

인적 교류도 제법 많이 이뤄진 상태다.

이제 벽란도에서 천축국 출신의 외모를 가진 이들을 상당히 흔하게 볼 수 있었다.

고려에 머무는 이유는 다양했다.

상단에 소속되어 장기간 머물거나 잠시 들린 이들도 있으나 모든 가족이 고려로 귀화해서 자리 잡은 이들도 적지 않았다.

최근 들어 주변국에서 고려는 기회의 땅이라 여겨지고 있을 정도였다.

일단 상인이 살기가 좋았다.

원나라에서는 몰래 주머니 차는 항구 관리의 전횡이 엄청나서 항상 정해진 세금보다 훨씬 많은 비용이 들었다.

이게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위에서 시작해서 말단까지 줄줄이 이어질 정도다.

반면에 고려는 그런 게 없었다.

더구나 돈이 되는 물건도 많았다.

고려필부터 시작해서 다양한 물건이 아시아 권역 전체에서 인기가 높아졌다.

수년 전부터 다양한 공방이 생기더니 수준급의 물건을 만들어내는 덕분이다.

심지어 요즘에는 불상을 사 가려고 오는 불교국도 제법 많아지고 있었다.

끼이이익.

거친 소음을 내며 마두라이 상선이 접안을 마치자 사람들이 하나둘 내렸다.

일반 상선이 아니라 탄야가 직접 운영을 하는 마두라이 국적의 상단이라 다른 상단과 달리 복잡한 과정은 전혀 없었다.

화물에 대한 수량 파악만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옷차림이 심상치 않았다.

다들 순백색의 옷에 황금빛이 감도는 금사로 자수를 놓은 의상을 입고 있었다.

무척 호화로운 느낌이었는데 마침 햇살도 좋아서 각종 장신구가 반짝이고 있었다.

그런데 일행 중에는 대여섯 살 정도의 여자아이도 있었다.

“이곳이 고려인가요?”

아이의 눈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지금까지 살던 곳에서 볼 수 없던 것들이 가득했다. 처음으로 마두라이를 벗어나 멀리까지 왔으니 당연했다.

그런데 신분이 범상치 않아 보였다.

곁에는 호위와 시녀가 가득했다.

그 아이는 마두라이 술탄의 공주이자 고려의 원자인 왕현과 몇 년 전에 혼약을 맺은 탄야의 장녀인 아유쉬였다.

“아유쉬 공주님, 아직 바람이 차니 겉옷을 걸치시지요.”

“그 이름 말고! 채윤이라 불러 달라고 했짜나.”

아유쉬에게는 다른 이름이 있었다.

아버지인 탄야의 모계 핏줄인 평강 채씨의 성을 따서 만든 고려식 이름이다.

평소에 그녀는 자신의 원래 이름보다 채윤이라 불리는 것을 훨씬 좋아했다.

그보다 더 신기한 것은 따로 있었다.

채윤이 쓰는 고려말은 아직 발음이 조금 어눌한 부분이 있으나 상당히 유창했다.

어린 시절에 이미 고려와 혼약을 맺었기에 고려 출신의 가정 교사에게 매일 고려말을 배운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여기는 벽란도라는 항구이고 개경은 더 들어가야 합니다. 피곤하실 테니 곧장 이동하겠습니다.”

채윤에게 설명을 해주고 있는 이는 이번 여정의 책임을 맡아 동행한 이인미였다.

형인 이인임을 따라서 마두라이로 떠난 것이 5년 전이니 오랜만의 귀국이었다.

신기한 것은 이인미도 마찬가지였다.

겨우 5년에 불과한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 다시 돌아온 벽란도는 달라졌다.

전에 없던 활기가 가득했고 어디 출신인지 알 수 없는 이들도 보였다.

상당히 혼잡한 모습에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나마 이것도 탐라에서 중계 무역을 하면서 조금 줄어든 것이었다.

기존에는 워낙 배가 몰려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바글거렸는데 종종 배끼리 충돌하는 사례도 발생할 정도였다.

그들은 곧장 만월대로 향했다.

환영식조차 없었으나 미리 연락을 해놓은 것은 아니기에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마차를 타고 이동한 탓에 개경까지는 금방이었는데 당연히 내게도 방금 도착한 마두라이에서 온 공주의 소식이 전해졌다.

조금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공주를 이렇게 보낼 줄은 몰랐다.

어쨌든 탄야의 딸이니 서둘러 궁궐로 불러들여서 이인미와 일행을 맞았다.

아유쉬 공주의 일행은 수십 명에 달했다.

탄야가 딸을 위해 보낸 수행원이 절반 이상이었다.

다행히 아유쉬 공주의 인상은 좋았다.

아직 어린 나이인데 어쩜 그렇게 말을 조리 있게 잘하는지 원자와 비교하면 상당히 조숙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고려식으로 만든 이름도 있고 심지어 고려말을 배워왔다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많은 점수를 땄다.

“오랜 항해를 해서 피곤할 테니 당분간 머물 곳으로 안내를 부탁하오.”

나는 가진에게 아이를 부탁했다.

그녀 역시 채윤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는지 흔쾌히 내 부탁을 들어줬다.

하지만 이인미는 태평전에 남아야 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 다들 내보낸 것이다.

“이렇게 연락도 없이 오는 법이 어딨소?”

“송구하옵니다.”

“탄야가 아니라 다른 이었다면 예법에 어긋난다고 그냥 돌려보냈을 것이오.”

이인미는 아무런 말도 못 했다.

내가 하는 말이 틀리진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 그들의 입장이 이해가 되기는 했다. 워낙 먼 곳에 있기에 서신 하나 오가는 데 한 해가 지난다.

그만큼 조급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이인임이다.

당연히 바뀐 정세를 파악했을 것이다.

현재 마두라이 술탄국은 고려와 맺은 염초 교역에 적신호가 켜진 상태다.

산동성에 초석 광산이 있다는 것은 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대주국이 그곳을 차지했다.

양국의 교류가 잦다는 것은 이제 비밀도 아닐 정도로 널리 알려진 상황이다.

대주국에서 초석 광산을 개발하면 앞으로 마두라이에서 생산되는 염초의 교역량이 대폭 줄어들 것이 뻔한 상황이었다.

“앞으로 염초 교역량이 줄어들 것 같아서 무리수를 둔 것 같은데 내가 생각하는 것이 맞소?”

이인미는 쉽게 답하지 못했다.

표정을 보니 정확하게 짚은 것 같았다.

어쩌면 그게 당연한 수순이기는 했다.

아무리 마두라이의 염초가 질이 좋다고 하더라도 운송하는 것이 쉽지 않다.

일단 거리 차이가 너무 컸다.

마두라이는 거의 열 배 정도 더 멀었고 온갖 위험이 가득한 장거리 항해다.

반면에 대주국은 요동 반도 너머에 있는 산동 반도를 통해서 고려로 오면 된다.

최근에 다시 비사성이란 이름을 찾은 대련에서 화약을 생산하면 운송 거리도 대폭 줄어들게 된다.

“술탄께서 근심이 꽤 많으십니다.”

“이제 남이라 말하기도 어려운 관계이니 과인도 솔직하게 말해주겠소. 아무래도 기존처럼 염초를 들여올 수는 없소.”

“지금까지 쌓아온 양국의 관계를 염두에 두어주시길 간청드리옵니다.”

“물론이오.”

탄야를 못 본 지 꽤 오래되었으나,

나와는 형제처럼 지내고 있는 이였다.

그런 관계가 아니었다면 정휘와 같은 이를 마두라이에 보내주진 않았을 거다.

당연히 염초 확보도 중요한 이유였으나 나는 진심으로 탄야가 잘 되길 바랐다.

멀리 떨어진 곳에 있지만,

든든한 우방이 하나쯤 있길 원했다.

만약에 천축국을 통일한다면 고려에게는 이익이지 손해 볼 것은 없었다.

당연히 당장 염초 거래를 끊거나 대폭 줄일 생각은 없었다.

영원한 아군은 없기 때문이다.

산동성의 광산이 언제까지 유지될까.

솔직히 말하자면 그리 오래가지는 않을 것 같았다. 지금 계획은 빠른 시간 내에 광산에서 최대한 많이 채광하는 것이다.

지금 분위기라면 언젠가 장사성이 고려와 패권을 다툴 날이 올 것이라 생각됐다.

“하지만 기존의 거래 조건을 그대로 가져가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소.”

더 저렴하고 빠르게 구할 수 있는 초석이 있으니 거래 조건은 바뀌어야 했다.

이인미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마두라이는 어떤 조건이라도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이었다.

여전히 그들은 전쟁 중이다.

그리고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종교적인 원한이 끼어 있는 탓이다.

그나마 지금 마두라이가 비자야나가르의 공세를 이겨내고 반격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고려에서 가져온 화포 덕분이다.

거기에 비교할 수 없는 성능의 화약.

두 가지의 조합은 마두라이를 단숨에 엄청난 성장세에 올려놓았다.

거기에 정휘와 임견미 그리고 홀치의 활약 덕분에 대륙의 남부 해안 지역은 이미 마두라이의 영역이 되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제는 값이 떨어진 염초는 조금 줄이는 대신에 금과 은 같은 귀금속을 원했다.

그리고 거기에 한 가지를 더했다.

요리를 하려면 가장 중요한 몇 가지가 있는데 지금 고려에 부족한 것이 있다.

달콤함을 채울 설탕이 필요했다.

“설당(雪糖)을 가져오시오.”

이인미는 내 요청을 받아들였다.

생각보다 관대한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인도는 사탕수수가 자라는 나라이고 천 년 전부터 설탕을 만들 수 있었다.

아직 대량으로 유통될 정도는 아니었으나 그 정도의 노력은 해야 했다.

“술탄께서도 기쁘게 받아들이실 것이옵니다.”

*

이인미를 만나고 며칠 뒤.

모처럼 나는 후원을 거닐었다.

만월대에서 맞는 마지막 봄이었다.

가을로 예정된 서경 천도는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후원을 무척 아끼던 터라 조금 아쉬울 정도였다.

물론, 서경도 꽃단장 중이다.

평소에 가진이 좋아하는 꽃들로 화원도 만들고 전체적인 조경도 신경 썼다.

하지만 궁궐 내부에 넣게 되는 후원만 신경 써서 만들지는 않았다. 내성 안에도 관리들이 쉴 공간이 필요했다.

한동안 걷던 나는 정자에 앉아서 신소봉이 들고 온 상소문을 읽었다.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읽는 상소문의 대부분은 속에서 열불이 나는 내용이 가득 담겨 있었다.

상소문의 내용은 다양했다.

서경 천도를 반대하는 이도 있었고 백성들의 군사 훈련을 우려하기도 했다.

흘려들어도 되는 것이 대부분이었으나 종종 생각지 못했던 것들도 있기에 그런 내용은 따로 적어서 백문보에게 넘겼다.

한동안 그렇게 야외에서 업무를 보던 중에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멀리 가시지는 못하셨을 테니 샅샅이 찾아보아야 하오.”

고개를 들어 좌우를 살펴보니 궁인들이 바쁘게 후원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신소봉을 바라보며 무슨 일이냐고 묻자 그는 서둘러 그들에게 다가갔다. 잠시 후에 돌아온 그는 꽤 난감한 표정이었다.

“원자 아기씨께서 수업에 오지 않으셨다고 하옵니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기분이었다.

올해부터 원자는 수업을 받고 있다.

제왕학이나 그런 거창한 것은 아니다.

조선에서는 어릴 때부터 온갖 영재 교육을 가르쳤지만, 나는 조금 더 녀석이 어린아이답게 자라길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기초 정도는 배워야 했다.

적어도 한글과 한문은 떼어야 했고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은 김광재에게 맡겼다.

첨의평리 출신인 그는 충정왕 당시에 서연(書筵)을 설치하고 사부(師傅) 자리를 거절했으나 이번에는 수락해줬다.

원자의 스승이 된 그가 가장 많이 신경을 쓰는 것은 도덕적인 관점에 대한 것이다.

왕좌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는 곳이라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엇나가게 된다.

역사만 보더라도 한순간에 나라 전체를 망칠 수 있는 위험한 존재가 바로 왕이다.

일그러진 개념을 가진 왕만큼 무서운 것도 없었기에 성군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 성리학의 기초는 가르쳐야 했다.

뭐든 깊게 들어가면 문제가 되는 거지 성리학이 도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린 시절에 인격의 완성을 위해서라도 가르쳐야 했다.

하지만 원자는 공부를 꽤 싫어했다.

아직은 뛰어노는 것을 좋아했고 종종 이렇게 어딘가로 도망칠 때가 있었다.

매번 혼을 내도 한결같은 녀석이다.

그래도 숙위를 담당하는 홀치가 붙어 있을 테니 그리 걱정되지는 않았다.

‘네놈이 뛰어봐야 벼룩이지.’

만월대에서 벗어나진 못했을 거다.

내가 참아주는 한계가 딱 거기까지다.

수업에 한두 번 빠지는 것은 참아주고 있으나 궐 밖으로 나가는 것은 아무리 원자라도 벌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백련교 때문에 안심할 수 없었다.

언제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당연히 숙위도 더 신경 쓰는 중이다.

방심하다가 궁궐 내에서 어떤 일이 생길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원자가 생떼를 부려도 궐 밖으로 나선 적은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른 게 있었다.

어제 원자와 나눴던 대화가 마음에 걸렸는데 대충 어디 있을지 감이 왔다.

나는 상소문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그러자 신소봉이 어딜 가냐고 물었다.

“원자를 찾으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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