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114화 (114/202)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114

탐사선이 벽란도를 떠난 뒤.

며칠 후에 심부가 고려로 왔다.

대주국에서 머물며 상단 운영을 하던 그가 고려에 온 이유는 두 가지였다.

오랜만에 가족을 만나러 온 것도 있으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이번에 대주국에서 가져온 광산의 채굴권 때문이었다.

대주국의 광산 채굴은 심부가 맡기로 이미 내정되어 있었다. 굳이 고려에서 대주국으로 사람을 보낼 이유가 없었다.

현지 사정에 밝고 영향력이 큰 심부가 있기에 광산의 관리와 광물의 운송도 그에게 모두 맡길 생각이었다.

심부가 고려로 귀의를 결심한 후.

그는 상당히 많은 일을 해주고 있었다.

대륙 전체에 널리 퍼져있는 그의 상단을 통해 감찰사가 많은 정보를 얻고 있다.

거기에 더불어 현재 고려에서 대외적인 교역으로 얻는 이익 상당수가 그를 통해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둘이서 술을 함께 하는 것도 상당히 오랜만이구려.”

나는 그의 술잔을 채워주었다.

술상 위에는 온갖 산해진미가 가득했다.

평소에 나도 먹기 힘든 것들이었는데 상당히 신경을 많이 쓴 것이었다.

“자주 찾아뵙지 못해서 송구합니다.”

“상단 일이 바쁜데 어쩔 수 없지.”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가 언제였는지 기억나는가?”

“벌써 7년 정도 된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둘 다 이십 대 초중반이었다.

그런데 벌써 서른인 이립(而立)을 앞두고 있다니 시간이 정말 빨리 흘렀다.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심부와 나는 사적인 공간에서는 편하게 지냈다.

그 역시 편할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눌 상대가 내게는 그리 많이 있지는 않았다.

그나마 변안열과 항상 옆을 지키는 신소봉 그리고 가진이 전부였다.

기분 좋게 술을 마시고 싶었으나 취하기 전에 해야 할 일은 끝내야 했다.

“광산의 관리는 어떻게 할 생각이오?”

“평판 좋은 광산업자 몇 명을 고용하여 맡길 생각입니다. 당연히 소신의 상단에서 믿을 만한 이들도 상주시킬 겁니다.”

“감찰사에서도 혹시 모르니 관리 몇 명을 보낼 거라 하던데 괜찮은가?”

심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는 당연한 일이라 여겼다.

일을 맡겨 놓으면 돈에 눈이 멀어서 뒷주머니를 차는 경우도 꽤 많았다.

정치와 장사의 공통점이 있다면 사람을 잘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흠··· 확실히 그렇긴 하지.”

“사람 하나 잘못 써서 망하는 경우가 생각보다 허다합니다.”

“도당도 비슷하다네.”

누구라고 꼬집어 말하진 않았지만, 심부는 누굴 말하는지 대충 눈치를 챘다.

평소에 내가 성리학에 심취한 자를 극도로 싫어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정확하게는 성리학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죽어라 사서삼경을 외우는 데 인생을 허비하는 이들을 경멸하는 것이었다.

철학과 국정 운영은 다른 이야기다.

“채굴권을 행사하는 대신에 대주국에도 일부를 상납해야 하는 것은 잊지 말게.”

“이미 그 부분은 성왕의 아우이자 재상 자리에 앉아있는 장사신과 어느 정도 협의를 마쳤습니다.”

심부는 거기까지 말하고 잠시 말을 멈췄다. 말을 꺼낼까 말까 고민하는 눈치였다. 내가 무슨 일이냐고 묻자 그는 동오에 대한 이야기를 슬며시 꺼냈다.

“이번에 초석 광산을 얻게 되면서 마두라이 술탄국과의 교역이 줄어드는 것이 아닌지 걱정이 상당히 많습니다.”

“과인도 그 부분은 염두에 두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지금까지 염초는 모두 마두라이에서 가져와야 했다. 하지만 초석 광산을 얻은 후부터는 상황이 많이 달라질 것이다.

우리가 얻는 광산 외에도 대주국이 염초를 보내면 가공해서 다시 화약으로 파는 것도 이제 가능해진 것이다.

하지만 마두라이는 물론이고 어용 상인인 동오를 이제 와서 버릴 생각은 없었다.

도로를 깔면서 약속한 게 3년이다.

어차피 몇 개월 후면 마두라이와 왜국에 대한 독점 무역에 대한 권한이 끝난다.

그 이후에는 다시 경쟁 체제로 돌아가게 될 것이고 귀금속에 대한 세금도 대폭 늘릴 예정이었다.

“만약 동오가 왜국과의 거래를 원한다면 그전에 준비를 마치는 게 좋을 것이오.”

“그리 말해놓겠습니다.”

“요즘 상단에는 별일이 없는가?”

심부는 잠시 표정이 어두워졌다.

무슨 일이 있기는 한 것 같아 보였다.

내가 무슨 일이냐고 묻자 그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대주국은 성왕이 신경을 많이 써줘서 문제가 없는데 방국진이 문제입니다.”

“그자는 무슨 짓을 저질렀는가?”

“얼마 전에 제가 절강에서 운용하는 상단의 배 몇 척을 약탈했습니다.”

“그런 이야기는 금시초문이오.”

“최근 강남 지역에서 방국진이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원나라 관직과 취국공의 인(印)을 받았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방국진이 원래 좀 그렇기는 하다.

변덕도 많고 박쥐처럼 움직이는 자다.

때로는 원나라와 치고받고 싸우다가 어느 순간에는 그들과 손을 잡고 장사성을 공격한다든지 정말 종잡을 수 없었다.

고려가 그와 거리를 두는 이유였다.

안 그래도 올해 방국진은 고려에 사람을 보내서 방물을 바쳤다. 그런데 뒤로는 그런 짓을 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심부가 고려와 깊은 연관성이 있다는 것은 다들 안다. 그가 쌓은 부의 대부분이 고려의 물건을 팔아서 생긴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누구에게도 고려의 어용상인이 된 것을 알리진 않았다.

그게 알려지면 아무래도 심부가 움직이는 것이 조금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감찰사도 엮여 있기에 조심해야 했다.

자칫 심부와 동오를 비롯해 상당수의 이들이 첩자로 잡힐지도 몰랐다.

“최근 방국진의 병력이 어느 정도인가?”

“자세히는 모르지만, 해상 전력이 최근에 대폭 늘어서 적어도 삼백여 척에 달한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해적 출신이라 그런지 확실히 해상 전력은 상당하군.”

“그 덕분에 강남 지역 상당수가 그의 손아귀에 있다고 봐도 됩니다.”

확실히 쉽게 볼 상대는 아니다.

마음 같아서는 싹 밀어버리고 싶지만, 그가 필요한 순간이 분명히 올 것이다.

방국진의 가치는 탕화와 장사성을 견제하는데 있다고 봐도 된다.

아마 원나라도 그래서 그에게 공을 들이고 있을 것이다.

대륙의 통일은 막아야 했다.

그래서 주덕유를 미리 빼내서 고려로 데리고 온 것이다. 가능하면 지금처럼 여러 세력으로 나누어져야 한다.

그들끼리 오래 싸울수록 고려는 관심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진우량과 장사성 그리고 탕화.

그리고 원나라까지 얼추 세력이 비슷한 지금이 가장 이상적이다. 나는 그게 고착되어 길게 이어지길 바라고 있다.

조금 욕심일지 몰라도 이 상황이 수십 년 넘게 지속한다면 저물어가던 고려가 재기할 바탕을 마련하기 충분할 것이다.

“그나저나 얼마 전에 강절성해도 방어만호인 정문빈이 고려에 방물을 보내 상호 무역을 제안했는데 어떤 인물인가?”

“정문빈이라 하셨습니까?”

“내 기억이 맞다면 그러하네.”

고려사에서 본 기억이 있지만,

그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다.

사료에서도 살짝 언급만 될 정도였다.

자세한 기록도 없을뿐더러 김첨수의 정보망 안에 들어있지도 않았다.

만호공(萬戶公)인 그는 만호이기 이전에 상인이기도 한 것만 알고 있다.

물론, 그의 의도는 뻔했다.

방물을 보내며 적었듯이 고려와 무역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하지만 무턱대고 그와 거래를 하는 것은 힘들었다.

엄연히 심부의 영역인데 어용 상인이 되어 감찰사를 돕는 그를 무시할 수 없다.

심부는 망설일 것도 없이 자신이 평소 들었던 소문을 토대로 내게 말해줬다.

“지금은 비록 절강에 있으나 저와 비슷한 시기에 강남에서 거대한 부를 쌓은 상인 출신입니다. 수완이 좋기로 유명하니 고려에게도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게 정확하게 무슨 뜻이오?”

심부는 천천히 설명을 해줬다.

그의 상단은 동오와 함께 중원부터 대도 너머까지 그리고 서쪽으로는 장강을 중심으로 영역을 넓히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여러 나라가 세워지며 국경을 넘는 일이 생각보다 어려웠다.

몇 년 사이에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당연히 심부도 상단을 이끌고 들어가기 어려운 지역이 분명히 있었다.

그중에는 강남과 그 너머에 있던 과거 대리국의 영토가 포함되어 있었다.

심부는 그들을 통해 이익을 챙기라고 권유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양보하는 이유가 무엇이오?”

“소신은 정문빈을 통해서 그 지역에 있는 대리석과 은을 가져다가 팔고 싶습니다.”

“대리석과 은이라···.”

원래는 정문빈에게 관심이 별로 없었다.

지금 당장은 심부를 통해서 중원에서 유통되는 물건만 처리하기도 바빴다.

현재 만드는 물량은 중원과 강남에서 대부분 소비되고 있는 중이다.

“얼마 전에 소신에게도 그가 보낸 사람이 왔었는데 아마 정문빈이 원하는 것도 고려필이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고려필의 판매량은 여전히 증가하고 있다. 생산량이 부족해서 연필심만 심부가 있는 곳으로 보내고 있을 정도였다.

듣기로는 우리가 만든 연필은 실크로드를 따라서 차마고도 너머 지중해 인근까지 운송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고려산이 가장 인기가 좋았다.

많이 만들다 보니 질적인 향상도 눈에 띌 정도였는데 그중에서도 향나무로 만든 고급 재질의 고려필은 부르는 게 값이다.

반면에 은괴는 탁도경이 왜국에서 들여오는 것이 있기에 부족하진 않았다.

현재 고려에서 필요한 양은 대외 무역에서 값을 치를 정도면 충분했다.

하지만 대리석은 조금 욕심이 생겼다.

‘우리나라도 이제 돌을 깎아서 불상만 만드는 게 아니라 대리석으로 예술품을 만들 때가 되기는 했지.’

그쯤에서 일 이야기는 끝내기로 했다.

이 문제는 둘이 결정할 게 아니라 내수사와 곽충수도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였다. 하지만 심부에게 술을 따라주려고 든 술병은 차가웠다.

덥혀놨던 술이 다 식은 것이었다.

겨울로 접어든 탓에 어쩔 수 없었다.

나는 환관을 불러서 술을 다시 데워서 가져오라고 시키려고 했는데 그보다 먼저 신소봉이 안으로 들어왔다.

“매일 내 곁에 붙어 있더니 이제는 텔레파시라도 통하는 것이더냐.”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그런 게 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이냐?”

“방금 이방실 장군을 통해서 홍건적에서 보낸 서신이 도달하였습니다.”

“모거경이 보낸 것이더냐?”

신소봉은 그렇다고 대답을 했다.

나는 손을 뻗어서 달라고 손짓했다.

그러자 신소보는 내게 와서 서신을 공손하게 내밀고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그걸 펼쳐서 살펴보니 일종의 협박 편지였다. 쓸데없는 소리가 많았는데 대충 내용을 정리하자면 이러했다.

[몽골의 오랑캐에 의해 지배당하던 것이 통한스러워 의로서 군사를 일으켰다. 동서남북으로 진출하니 백성은 우리에게 기뻐하며 귀부해왔다. 이제 백성을 괴롭히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만약, 어리석게도 반항하면 처벌할 것이다.]

나는 솔직히 이해가 안 갔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이런 말이 저절로 나올 정도였다. 도대체 이걸 왜 보냈냐고 묻고 싶을 정도였다. 작문 수준도 떨어지고 무슨 내용인지도 애매했다.

이거 혹시 행운의 편지인가?

배송 실수로 다른데 보내야 할 서신이 내게 온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서두에 적힌 내용대로 몽골인에게 쌓인 한을 풀기 위한 싸움이면 자기네들끼리 알아서 지지고 볶으면 될 일이다.

“밀직사를 불러들이겠사옵니다.”

“아니다. 그럴 필요는 없어 보이는구나.”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심부가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이미 그는 중원에서 여러 유형의 홍건적을 질릴 정도 자주 본 상태였다.

내가 살던 시대에 쓰던 무지성이라는 신조어를 그대로 가져와도 될 정도로 말이 통하지 않는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기분 나쁠 필요는 없었다.

나름대로 이 서신은 쓸 데가 있었다.

이거 하나로 모든 국방 정책이 프리 패스가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모거경의 병력이 어느 정도인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알고 있으나 서신에는 그와 관련된 내용이 적혀 있지 않았다.

10만 명이라고 추정한다.

그렇게 말하면 그게 진실이 될 것이다.

원나라 전체를 혼란에 빠뜨린 홍건적이 고려로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이야기는 내부에서의 결집력을 다져줄 것이다.

당연히 백련교에 대한 경계심이 높아질 것이고 지금까지 어쩔 수 없이 미뤄오던 전 국민의 예비군화도 가능해진다.

그것만 가능해져도 앞으로 국란이 생기면 모든 고려의 남성들이 칼과 활을 쥐고 싸울 수 있게 된다는 뜻이었다.

현재 인구를 고려해 볼 때.

적어도 100만 이상은 될 것이다.

십 대 중반에서 오십 대까지 연령대를 넓혀도 200만 명이 넘을 거라 예상됐다.

그렇다고 몇 년씩 군대에서 복무하게 만들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되면 소는 누가 키우고 농사는 누가 지을 것인가.

농한기를 이용해서 한 달 정도씩.

그리고 매월 두 차례 정도 모든 남성을 대상으로 군사 훈련을 받게 할 생각이다.

지금까지 모병 된 정병들처럼 진형을 짜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병장기를 들고 휘두르는 것만 배워도 다행이었다.

평상시에는 일상생활을 하다가 나라가 위급한 순간에 동원되니 고려에서 준비할 것은 칼과 활 같은 병장기밖에 없었다.

누군가는 그 칼날이 내게 향해질지 모른다며 반란의 위험성을 지적할 것이다.

이럴 때 쓰는 방법은 생각보다 쉬웠다.

역사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생각보다 많다. 모든 일이 끝나면 고려의 시선을 모아서 해외로 돌리면 된다. 거기까지가 내가 그렸던 그림의 완성이었다.

당연히 최종 목표는 만주였다.

‘그 이후는 나중에 생각해도 늦지 않아.’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