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111
쌍성 총관이었던 조소생.
그의 명줄은 생각보다 길었다.
공성전에 나선 대부분의 병사들이 죽는 상황에서도 그는 멀쩡하게 살아남았다.
조도치의 희생 덕분에 가능했다.
가장 선두에서 병력을 지휘해야 하는 일을 그가 대신했고 그래서 죽었다.
조소생이 한 일은 숨는 게 전부였다.
그렇게 끈질기게 살아남은 그는 요양성의 성문이 열리고 패색이 짙어지자 곧장 일반 병사로 위장하는 일도 마다치 않았다.
소속이 다른 병사들이 워낙 많아서 그의 정체를 알아차리는 이는 없었다.
하지만 그의 운도 이제 끝났다.
하필이면 이자춘에게 걸린 것이었다.
당장 그는 포박되어 내 앞으로 끌려왔다.
머리는 산발이 되어 있었고 제대로 씻지도 못해서 몸에서는 피가 썩어서 나는 역한 냄새가 진동을 하고 있었다.
“쌍성에서 도망간 뒤로 나하추에게 빌붙었다는 소식은 과인도 들었소.”
냉소적인 목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따지고 보면 고려의 핏줄이 흐르는 조소생이지만, 그는 조상들처럼 고려를 팔아먹는 것에 망설임조차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에 나하추가 움직이는데 조소생의 역할이 컸을 것이다.
그 때문에 생긴 피해가 막심했다.
심양왕이 항복을 할 때만 하더라도 의주에서 생긴 사망자가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피해가 그리 크지는 않았다.
아무리 많아 잡아봐야 사상자는 천오백 명도 안 되었기에 쉽게 끝나는 줄 알았다.
하지만 4년이나 빠르게 그것도 요동 정벌이라는 절묘한 시기에 나하추가 움직인 덕분에 생각보다 희생이 컸다.
조소생은 목이 잘린 나하추와 함께 수없이 많은 죽음에 대한 값을 톡톡히 치러야 했다.
“오해십니다. 소신(小臣)은 잠시 나하추에게 몸을 의탁했을 뿐이옵니다.”
“역적의 입에서 감히 소신이라는 말이 나오다니 역겨운 일이오. 그렇지 않소?”
“참으로 방자한 놈이옵니다.”
고개를 돌려 이자춘을 바라봤다.
그러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대신해서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는 차마 내가 입에 담지 못할 수준의 욕설인 듯 욕설 아닌 말로 사람을 팼다.
일종의 팩트 폭행에 가까웠다.
오랜 시간 동안 쌓아온 울분이 제대로 터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반면에 조소생은 인격 모독에 바르르 떨었다.
아무리 숨기려 해도 티가 났다.
‘이 양반은 래퍼 해도 되겠네.’
시대를 잘못 태어난 것 같았다.
욕은 조소생이 듣고 있는데 왠지 내 귀에서 피가 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쌍성총관부에 있을 때부터 조소생은 계속해서 이자춘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나 있던 상태였다
한동안 그렇게 퍼붓자 이자춘은 속이 시원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러났다.
시시콜콜 트집을 잡는 그의 횡포를 무려 이십 년 이상이나 참고 살아야 했다.
나는 그걸 풀 기회를 준 것이었다.
하지만 조소생이 가지고 있는 삶에 대한 애착은 생각보다 상당히 강력했다.
그는 마지막까지도 비굴했다.
등 뒤로 손이 묶인 채로 바닥에 이마를 찧어가며 눈물과 콧물을 질질 짰다.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며 억울한 표정을 짓는 것을 남들이 보면 내가 죄 없는 이를 핍박하고 있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살려만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아무리 애원한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
지금까지 내 지시로 목이 떨어진 이들이 적지 않았다. 나도 좋아서 그런 일을 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필요하면 해야 했다.
쌓은 공이 있어야 귀양을 보내고 노역을 시키기라도 할 텐데 조소생은 어느 곳에도 포함되지 않았다.
“당장 끌고 나가서 처형하시오. 그리고 성문에 걸어서 고려를 배신한 부역자의 최후가 어떤 것인지 알려주시오.”
“소신이 직접 맡아도 되겠사옵니까?”
“그렇게 하시오.”
누가 처형을 하더라도 상관없었기에 이자춘에게 맡으라고 허락을 해줬다.
이게 마지막이라 여긴 건지 조소생은 온갖 저주를 내뱉었다. 곧장 무관이 그의 입을 틀어막았으나 신경 쓰진 않았다.
한쪽 귀로 그냥 흘려버리면 그만이다.
조소생이 끌려나가길 기다린 뒤.
조용해지자 자리에 함께하고 있는 이번 정벌의 주축인 장군들과 김첨수를 한 차례 살핀 뒤에 슬슬 본론으로 들어갔다.
생각보다 할 일이 많았다.
“이번에 잡은 포로들은 대마도 같은 곳으로 멀리 보내되 허튼짓을 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감시하게 하시오.”
“대마도에서 노역 중인 왜인을 북부로 올려보내고 그만큼 내려보내는 것으로 주덕유 장군과 협의하겠사옵니다.”
“그리고 과인은 이제 그만 개경으로 돌아가 볼까하오.”
개경에서 떠나온 지 벌써 석 달째다.
돌아가서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다.
이방실을 비롯한 장수들에게 그 소식을 전하자 다들 눈에 띄게 표정이 밝아졌다.
아무래도 내가 최전방에 있는 것이 지금까지 꽤 부담이 되었던 것 같았다.
조금 섭섭할 정도였다.
언제 다시 이렇게 나올 수 있을까.
이번에 저지른 일이 있기에 다음에는 더 힘들어질 것이 분명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요동으로 향하던 차칸 테무르가 다시 돌아갔다는 것이었다.
대주국이 과연 산동성을 차지할 수 있을지는 조금 더 상황을 두고 봐야 했다.
“요동은 누구에게 맡기실 생각이옵니까?”
그때 이방실이 조심스레 물었다.
군사적인 것을 묻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요동의 병마사로 이방실이 내정되어 있었다. 그가 묻는 것은 행정적인 부분을 담당할 안렴사를 의미했다. 나는 그의 질문에 전 첨의평의인 김광재를 언급했다.
“송당(松堂) 김광재를 염두에 두고 있소.”
“송당은 모친의 병환 때문에 몇 년째 은거 중이라 들었사옵니다.”
“병환이 많이 좋아진 것으로 알고 있소.”
“그렇다면 안심이옵니다.”
이방실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무관은 김광재에 대한 평가를 상당히 높게 했다.
그럴 만한 것이 그는 과거에 강직한 성품으로 오히려 간신의 모함을 받아서 파직당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청렴하고 어진 관리가 필요했다.
이방실과 무관이 아무리 애써도 내정에 실패하면 이 지역을 유지할 수 없었다.
빠른 시간내에 백성들을 고려의 품으로 안아서 받아들여야 하는 시기였다.
마지막으로 여러 당부를 한 뒤.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서달을 따로 불렀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는 그에게 내민 것은 화려하게 장식된 상자였다.
서달이 조심스레 그걸 열자 장군들에게 하사하는 부대기가 들어 있었다.
서달의 부대기는 멧돼지였다.
날카로운 어금니가 강조된 문양이었다.
이걸 그리느라 꽤 골머리가 아팠으나 적장의 목을 벤 공이 적지 않았다.
더구나 변안열이 슬쩍 귀띔을 해준 덕분에 더 미루는 것도 불가능했다.
“이번 정벌에서 네 공이 무척이나 커서 내리는 것이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서달은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그게 너무 심해서 오히려 늦게 준 내가 무안할 지경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일찍 준비해줄 걸 그랬다.
거기에 마지막으로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전장에 서는 장수라면 용맹함과 무모함은 구분할 줄 알아야 하느니라.”
이번에는 상황상 어쩔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목숨이 귀한 줄 알아야 한다.
그의 뒤를 따르는 병사들의 목숨까지 걸려 있기 때문이었다. 서달은 잊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고 그를 내보내자 신소봉이 들어왔다.
“손님이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누군지 전혀 예상이 안 되었다.
대부분의 일 처리는 이방실이 맡아서 했고 개인적인 만남은 갖지 않았다.
유일하게 이곳에서 대외적인 활동을 한 것은 요양과 심양의 유지를 모아서 한 차례 그들의 민원을 들어준 게 전부였다.
“대도에서 황태자를 교육하던 단본당(端本堂) 정자(正字)였던 설손이옵니다.”
“설 선생이 와있단 말인가?”
“그러하옵니다.”
꽤나 반가운 손님이었다.
설손은 내가 대도에 뚤루게로 있었을 당시에 상당히 친하게 지내던 이였다.
일과의 시작이 단본당부터였기에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나에게 있어서 사적으로는 스승이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소식이 끊겼다.
원나라 승상과 사이가 틀어진 뒤.
단주로 간 뒤로 어떻게 지내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내가 그를 특별하게 여기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몽골인이나 한족이 아닌 위구르 지역의 회회인 핏줄이었다.
외모도 서역인의 느낌이 매우 강했다.
‘훗날 경주 설(偰)씨의 시조이기도 하지.’
그가 온 이유는 뻔했다.
아마 홍건적 때문일 것이다.
소문에 의하면 장사성이 산동성을 치자 탕화는 설손이 우거(寓居)하고 있던 대령(大寧)까지 치고 올라갔다고 한다.
원래의 역사에서도 그 때문에 귀화를 결심하고 고려까지 먼 길을 온 이였다.
“들어오라 전하거라.”
곧장 환궁을 준비할 생각이었지만,
잠시 시간을 내주는 것쯤은 가능했다.
오직 나만 보고 먼 길을 왔으니 옛정을 생각해서라도 그래야만 했다.
어차피 준비를 내가 하는 것도 아니었다.
잠시 후에 들어온 그는 풍채가 좋던 예전과 다르게 상당히 야위어 보였다.
“이게 얼마 만이오.”
“먼 곳에서나마 전하의 명성을 익히 접하고 있었던 터라 마지막으로 뵌 것이 어제처럼 느껴질 정도이옵니다.”
“우리 사이에 부끄럽게 그런 소리는 하지 마시오. 이번에 가족 모두를 데리고 고려로 향하던 길이라고 들었소.”
“홍건적의 횡포가 극심하여 부족하나마 고려의 귀의하고자 했는데 설마 요양성에 계실 줄은 생각지도 못했사옵니다.”
운이 좋기는 했다.
하필 내가 여기 있을 때 왔다.
나는 그에게 환궁 행렬에 동행하기를 권했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보여 조금 편하게 갈 수 있게 하고 싶었다.
설손은 한두 차례 사양했으나 결국에는 내 고집을 이길 수 없었다.
“내 기억으로는 그대의 장자인 설장수가 내후년에 약관이 되는 것이 맞소?”
“그 아이의 이름까지 기억하시는 것이옵니까?”
“과인이 대도에 있을 무렵에 그대의 저택으로 초대되어 같이 식사를 한 게 한두 번이 아니지 않소.”
물론, 그 때문에 기억하는 것은 아니다.
설장수는 서역인이라는 악조건과 차별을 딛고 여말선초에 외교에서 맹활약을 하던 이로 나중에 중히 쓸 인재였다.
나는 설손에게 최근 고려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진방회에 대해 이야기해줬다.
“그곳이 싫다면 성균관에서 공부할 수 있게 자리를 마련해 줄 수도 있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당장 결정을 내리기 어려우면 나중에 대답을 해도 좋소.”
당연히 그의 선택은 진방회였다.
진방회에 들어가는 이들은 인재임을 증명할 수 있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하지만 유일하게 내가 지목하는 이는 그런 과정이 필요하지 않았다.
보통 그런 경우는 아직 특별난 모습을 보이지 않으나 역사로 검증된 이들이다.
당연히 설장수도 거기에 속했다.
“그나저나 어디 몸이 불편한 것이오?”
“세월의 흔적이 이제 나타나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사옵니다.”
“의원에게 진찰은 받아 보았소?”
“여러 의원을 불렀으나 아직 정확하게 이유를 찾아내진 못했사옵니다.”
“개경에 돌아가면 과인이 어의를 보내줄 테니 진찰을 받아보시오.”
그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이었다.
대충 증상을 들어보기는 했으나 딱히 짐작이 가는 부분이 없었다. 내가 의학을 배운 것도 아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설손이란 사람이 아까웠다.
그에게 남은 시간은 2년도 안 되었다.
이 시대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죽는 경우가 허다했다. 왕은 등창으로 죽고 병사는 파상풍에 걸려서 죽는다.
괜히 백성들이 생과 사는 하늘이 결정한다고 믿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외과적인 발전은 상당했다.
지난 몇 년 동안 다른 것은 제치고 상처를 꿰매고 소독하는 것을 중점적으로 배운 군의관이 백여 명이나 양성되었다.
다만, 헌혈하는 것은 아직 기술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넘지 못할 벽이 있었다.
그로부터 이틀 후.
개경을 향해 환궁 행렬이 떠났다.
요동 정벌을 마치고 돌아가는 것이라 발걸음은 가볍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게 4개월 만에 돌아온 개경은 성문을 들어서기 전부터 분위기가 묘했다.
뭔가 조금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성문을 통과하자 왜 그런지 알 수 있었다.
개경의 백성들이 나와서 요동 정벌을 마치고 돌아온 나와 홀치들에게 승리를 축하해주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다들 손아귀에 쥐고 있던 꽃잎 한 웅큼씩 던지자 순식간에 개경은 꽃길이 되었다.
직접 칼을 들고 싸운 것은 아니나 개선장군이 된 기분을 체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인파 사이에서 그 누구보다 내 눈길을 사로잡은 이가 있었는데 그들은 마중 나온 가진과 첫째 아들 왕현이었다.
원자인 왕현은 나를 보자 곧장 달려와 가진보다 먼저 내 품을 차지했다.
“아빠마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