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110
고려군의 반격은 매서웠다.
지원병의 규모는 1만도 안되었지만, 후방에서 완전히 난장판을 만들었다.
거기에 성문을 열고 쇄도하는 고려군도 있기에 양쪽 모두를 막느라 정신없었다.
나하추의 병사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었다.
워낙 급하게 세력을 꾸린 탓이었다.
연합으로 구성된 병력이라 명령 체계도 잡혀 있지 않았고 제각각 움직였다.
중심에서 나하추가 상당히 애쓰고 있으나 급박한 순간이 되자 통제가 불가능했다.
애초에 서로 바라던 것이 달랐다.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있던 나하추와 달리 다른 세력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려던 이들이니 적극적으로 싸울 이유가 없었다.
더구나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욕심을 부리고 있었다.
대다수가 고려 국왕의 깃발을 쫓았다.
나하추의 휘하에 있는 병사들도 다를 게 없었다. 커다란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다른 이에게 빼앗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고려의 왕이 있을 거란 기대는 크지 않았으나 깃발을 빼앗는 것만으로도 전황이 크게 달라질 가능성이 있었다.
그런 움직임은 결국 독이 되었다.
제각각 움직이니 진형이 무너지고 병력 간의 틈은 상당히 벌어졌다.
너무 선명하게 보이는 틈이었다.
고려군은 그걸 놓치지 않고 집요하게 파고들었고 심지어 나하추는 일부 병사들과 함께 포위망 속에 갇혔다.
“드디어 우리가 활약할 기회다. 다들 멈추지 말고 이대로 끝까지 돌파한다!”
병력의 차이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기세가 완전히 기울었다.
고려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가장 큰 활약을 하고 있는 것은 역시 이자춘과 가별초였다.
이자춘은 말과 한 몸이 된 것 같았다.
가별초와 함께 전속력으로 질주할 때마다 나하추의 진영은 절반으로 갈라졌다.
반면에 나하추의 기마대는 전혀 활약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궤멸하고 말았다.
화승총과 쇠뇌 그리고 화포까지.
오늘 이 자리에서 남은 화약과 화살을 모두 쓰더라도 끝장내겠다는 듯이 화력을 집중하니 버텨낼 방법이 없었다.
그 화력의 차이 덕분에 고려는 승기를 잡을 수 있었고 나하추는 폭주 중인 서달의 손에 의해 목이 잘렸다.
꼬리에 불이 붙은 성난 멧돼지.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적합했다.
절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달려드는 그 집요한 모습에 나하추의 병사들은 질린 표정으로 등을 돌려 도망칠 정도였다.
그런 그의 뒤로는 의주에서 살아남은 병사와 양관이 이끄는 해군이 뒤따랐다.
“적장 나하추의 목을 베었다!”
나하추는 고립되어 있었지만,
그를 지키는 호위병은 상당히 많았다.
서달은 어렵게 그들을 뚫고 피투성이가 된 모습으로 마침내 나하추의 목을 베어서 머리 위로 치켜들며 큰소리로 외쳤다.
환호성을 지르는 고려군을 본 나하추의 부하들은 그때부터 뿔뿔이 흩어졌다.
더는 버티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반나절도 안 되어 나하추의 병사는 절반 이상이 사망하여 3만도 안 남았다.
운 좋게 생존한 이들은 그들이 온 장춘 방향을 향해 도망치기 시작했으나 이방실은 그냥 보내줄 생각은 없었다.
“모두 요하까지 추격을 멈추지 말거라.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아니 된다.”
후환을 남겨둬서는 안 된다.
저런 패잔병이 산적이나 마적 같은 백성을 괴롭히는 세력이 되기 마련이다.
이방실은 휘하의 장군들에게 서둘러 추격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마음 같아서는 단 한 명도 돌려보내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무작정 쫓을 수는 없었다.
이방실은 요하까지를 경계로 삼았다.
이번 정벌로 바뀌는 고려의 국경선은 요동과 요서를 가로지르는 요하(遼河)강을 기준으로 삼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 이상은 현재의 고려로는 힘들었다.
이방실은 이 기세를 몰아서 원나라의 수도까지 진격하고 싶으나 현실적으로 따지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늘어나는 영토만큼 인구가 따라와야 하는데 현재의 고려는 그게 부족했다.
“나머지는 부상자를 서둘러 옮기고 포로를 포박하여 가두거라.”
모두가 추격할 수는 없었다.
요양성에 남은 일부는 뒷수습을 했다.
도망도 치지 못하고 항복한 나하추의 병사는 무려 만여 명에 달할 정도였다.
한참을 뒷정리를 하던 이방실은 서달을 발견하고 서둘러 그를 불러들였다.
추격에 나서겠다는 것을 변안열이 한사코 만류해서 요양성에 남아있던 그였다.
“상처는 괜찮은 건가?”
“조금 긁힌 것에 불과합니다.”
“일단은 상처부터 치료하게. 그리고 서경에서 전하를 지켜야 할 병사들이 왜 여기 와있는 것인가?”
이방실은 그게 가장 궁금했다.
아까는 워낙 급박하여 묻지 못했다.
그리고 전하가 이곳까지 행차하셨을 거라 생각지 않았다. 홀치와 깃발만 보냈을 거라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막상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게 아닐지도 몰랐다.
성격이 워낙 독특하신 분이었다.
개경에 있을 때가 차라리 나았다.
그곳에서는 문무백관이라도 있으니 어느 정도 자제하셨으나 서경으로 나오는 순간부터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
그가 묻는 질문에 서달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이방실에게 답을 해주었다.
“전하께서는 천산 자락에서 이번 전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천산이면 저곳을 말하는 건가?”
이방실이 뒤돌아섰다.
그곳에는 높은 산이 하나 있었다.
조금 떨어져 있는 곳이기는 하나 요양성을 내려다보기는 상당히 좋았다.
서달이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이방실은 사색이 되었다.
“패잔병이 뿔뿔이 흩어졌지 않은가! 어서 전하를 안전한 곳으로 모셔야지 무엇하고 있는 것인가?”
“이미 이원림 장군이 홀치와 함께 뫼시러 출발하였습니다.”
“자네라도 전하를 말렸어야지!”
“말린다고 들으실 분입니까?”
서달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전장까지 오시겠다는 것도 다들 힘을 합쳐서 간신히 막았다. 어쩌면 애초에 그럴 생각도 없으셨는지도 모른다.
그 결과 숙위를 맡은 이원림 장군마저 출정시키는 것은 전하의 의중대로 되었다.
“이제 슬슬 도착할 때가··· 하하! 저기 오셨습니다.”
*
요양성의 전투가 마무리된 이후.
나는 곧장 성으로 들어가서 성주의 거처로 들어섰다. 아직은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없게 이방실이 막았다.
얼마 전까지 원나라의 영토였고 많은 이들이 수성을 도왔으나 흑심을 품고 있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이방실 장군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이미 요양성까지 내가 직접 왔다는 것 때문에 경기를 일으킬 정도였다.
왜 그러는 건지 이해가 되기는 했다.
만약 내가 아주 작은 상처만 생겨도 다들 상당히 곤란한 처지가 되기 때문이다.
“너무 무모하셨사옵니다.”
“예상치 못한 10만의 병사가 심양을 향해 내려오고 있다는 데 다른 방도가 없었소.”
나도 직접 오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내가 움직여야 홀치와 응양군이 움직일 테고 서경의 호족은 자신들의 사병을 어쩔 수 없이 내놔야 했다.
더구나 내가 고려에서 가장 아끼는 것이 이제 겨우 십만을 달성한 병력이었다.
정말 어렵게 만든 병사들이었다.
만약 여기서 커다란 손해를 보게 된다면 지난 몇 년 동안 모병하고 훈련을 시켰던 그 지난하던 과정을 다시 거쳐야 했다.
더구나 출정을 떠난 이방실과 같은 중요한 장수를 잃을 가능성도 매우 컸다.
물론, 상황이 매우 안 좋아질 경우.
곧장 요동반도의 대련으로 가서 개경까지 빠져나갈 계획도 김첨수가 마련해놨다.
혹시 몰라서 의주에도 쾌선 한 척을 준비해 놓았기에 적어도 내 몸 하나는 피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그보다 피해는 얼마나 되는 것이오?”
“아직 추정에 불과하지만, 사망자와 불구가 된 이들을 합치면 대략 팔천여 명에 달합니다.”
“흐음···.”
희생이 적다 할 수 없었다.
의주에서 생긴 사망자까지 합치면 대략 만 명에 가까운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아마도 당분간 고려에는 곡소리가 끝이지 않고 흐를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엄청난 대승인 것도 사실이기는 했다.
지금은 칭찬이 필요했다.
거의 두 배 가까이 되는 10만의 나하추 병력을 완전히 공중분해 시켰다.
추격에 나섰다가 저녁에 다시 돌아온 가별초는 퇴로를 확보하여 패잔병을 격퇴시켰다. 살아서 장춘으로 돌아간 이들은 수천 명에 불과했을 정도였다.
“상벌을 내릴 수 있게 공적과 수훈이 있는 이들을 파악해주시오.”
“그리하겠사옵니다.”
“요양성의 백성들도 수성하는데 공로가 컸다고 들었소. 뛰어난 활약을 한 이들이 있다면 적절한 보상을 해줬으면 하오.”
“지휘관과 무관들에게 물어서 선별하도록 하겠사옵니다.”
그들 역시 목숨을 걸고 싸웠다.
그 과정에서 죽은 이들도 적지 않았다.
고려를 위해 싸웠던 이들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걸 무시하는 순간부터 첫 단추를 잘못 끼우게 되는 것이다.
나는 요동에게 기회를 줄 생각이었다.
앞으로 10년 동안은 세금도 면해주고 무너진 성을 보수하는 것으로 일자리도 어느 정도 보장해줄 생각이었다.
안타깝게도 안시성과 개모성과 같은 옛 성은 시간이 흘러 흔적만 남아 있었다.
아마 일거리가 부족하진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북부 출신이라고 은연중에 차별하는 풍토를 없애는 것이 중요했다.
지금의 고려가 평등하진 않으나 적어도 공평한 세상은 만들어주고 싶었다.
모두가 똑같은 기회를 받을 자격이 있다.
오히려 더 우대받아야 할 지역이었다.
“나하추가 끼어들어서 중간에 조금 꼬였으나 원래의 계획대로 서북면의 1군은 요양성으로 전진 배치 시키시오.”
“이미 차질없이 진행 중이옵니다.”
“보급은 상단들이 지속적으로 해줄 것이니 부족하진 않을 것이오.”
나하추 때문에 조금 늦어졌지만,
조만간 보급이 계속 들어올 것이다.
원래의 역사에서 요동을 정벌하고 돌아서야 했던 이유가 보급 때문이었다.
하필 식량 창고가 불탔고 그 시기가 겨울 직전이라 무리해서 버틸 수 없었다.
그걸 아는데 같은 실수를 할 리가 없다.
“그런데 혹시 오시는 길에 심양에서 서경으로 떠난 토크토아부카를 중간에 만나셨습니까?
“아마 길이 엇갈린 것 같소.”
“그가 내린 용단 덕분에 고려군의 피해가 줄었습니다. 하오니···.”
“무슨 말인지 알고 있소.”
만약에 심양왕이 버텼다면 어떻게 됐을까. 이제 와 생각하면 상황이 그리 좋지 않게 흘렀을 것이 분명했다.
심양성에서 그대로 나하추를 맞이하여 거의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봤을 것이다.
그리고 요양성의 백성도 고려의 편에 서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순순히 성문을 열어준 덕분에 명분이란 것이 생겼다.
아마 그런 이유 때문에 이방실은 그가 비정한 권력 다툼에 휘말려 죽는 것을 바라지 않는 것 같았다.
‘이미 저지른 짓이 있으니 할 말 없지.’
강화에서 살해당한 경창부원군.
당시의 일을 생각하면 씁쓸해질 수밖에 없었다. 본인이 원치 않아도 타인의 욕심 때문에 희생당하는 것이 왕족이다.
그때는 즉위 초기라 왕권을 강화해야 하는 시기였다는 핑계라도 있었으나 지금은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걸로 이방실과의 독대는 끝났다.
그리고 그날 밤에 요양성에서는 작은 축하연이 벌어졌다. 거나하게 술판을 벌이는 것은 아니고 위령제에 가까웠다.
이번 출정에서 사망한 이들을 위한 자리이기에 분위기는 꽤 무거웠다.
하지만 그것도 아주 잠시였다.
본격적인 연회가 시작되기 전에 그 자리를 빌어 나는 장수들에게 요양성과 요동이 가지는 의미를 다시 상기시켜줬다.
고구려의 최전방이자 전략적 요충지였던 이곳을 지켜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승리에 대한 치하를 아끼지 않았다.
당연히 술과 고기가 함께 주어졌다.
그러나 모두가 취할 수는 없기에 절반의 병력은 따로 자리를 마련하기로 했다.
이자춘도 후자에 속하기에 가별초와 함께 주변 정찰을 나가기 위해 성문을 나섰다.
성문 주변은 아직도 어수선했다.
수만 명의 시신을 하루아침에 치울 수 없기에 포로들이 땅을 파고 있었다.
별생각 없이 지나던 이자춘은 갑자기 말을 멈췄다. 포로 중에 생각지도 못한 낯익은 이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잘못 본 건가 싶었다.
그런데 애써서 얼굴을 감추려고 하는 모습이 역력한 것이 뭔가 수상하긴 했다.
그걸 본 이자춘은 말에서 내려서 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어이, 거기 잠깐 고개를 들어보게.”
주변에 있는 포로는 모두 무슨 일인가 싶어서 바들바들 떨며 지켜봤다.
전투에서 지켜본 가별초의 무위는 엄청났고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유독 그 남자만 못 들은 척을 하며 어떻게든 얼굴을 숨기려 애썼다.
“내 말이 안 들리는 건가? 저놈을 잡아 오너라.”
이자춘의 명령이 떨어지자,
그 남자는 이자춘 앞에 꿇려졌다.
강제로 고개를 들게 만들어서 얼굴을 확인한 이자춘은 크게 웃으며 기뻐했다.
일반 병사 사이에 숨어 있었으나 역시 자신이 잘 못 본 것이 아니었다.
예전과 다르게 남루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수십 년 동안 보던 얼굴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의 얼굴을 몰라 보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이자춘은 이번 정벌의 승리보다 지금 이 순간이 훨씬 더 짜릿하게 느껴졌다.
“쥐새끼 같은 네 녀석이라면 아직 살아있을 줄 알았다. 오랜 원한이 오늘 씻겨지겠구나. 이놈을 당장 포박하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