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109
이방실의 선택은 옳았다.
서둘러 움직인 덕분에 고려군은 늦지 않게 요양성에 들어설 수 있었다.
만약 그가 심양성을 고집했다면 아마 진군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서 뒤에 처져 있던 보급대는 합류하지 못할 뻔했다.
그리고 얼마 뒤에 나하추는 마침내 요양성까지 추격해와서 포위했다.
그때부터 공성전이 펼쳐졌다.
치열한 공방전 와중에도 고려군의 수성 실력은 소문으로 들었던 것보다 상당했다.
이미 회안에서 엄청난 공세를 막아내며 절대 지지 않는다는 명성을 다시 한번 보여주고 있었으나 상황은 좋지 않았다.
수성을 준비할 틈도 없었다.
더구나 성곽의 형태가 낯설었다.
고려에서는 볼 수 없는 형태였고 주력 무기인 화포를 쏠 수 있는 구조도 아녔다.
전장식 화포의 단점 때문이었다.
아래로 포신을 기울이면 철환이 그대로 굴러서 떨어지는 경우가 상당히 허다했다.
철환에 들어가는 재료가 상당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너무 아까운 일이었다.
물론, 격목을 사용하면 어느 정도 보완이 가능했으나 규격에 맞게 만드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라 당연히 부족했다.
그나마 화승총의 활약이 대단했다.
이번 정벌에 가져온 것이 겨우 수백 정에 불과했으나 화포 못지않은 활약이었다.
그게 가능한 이유는 화승총은 일반적인 화포와 다르게 한 차례 토격이 더 들어간다.
<화약-토격-철환-토격>
그 덕분에 아래를 향해 조준할 수 있었다.
거기에 들어가는 작은 철환은 산탄총처럼 여러 갈래로 날아가서 살상력도 엄청났다.
많은 병사가 뭉쳐있을 때 한 차례 발포하면 여러 명의 병사가 나뒹굴었다.
타아앙!
그때마다 검은 연기가 흩날렸다.
메케한 연기로 인해 다들 얼굴이 거멓게 변하고 기침이 멈추지 않았으나 여유를 부리는 병사들은 아무도 없었다.
사수가 발사한 총을 뒤로 넘기면 곧장 부사수가 장전된 총을 넘기고 빈 총에 화약과 철환을 넣고 토격을 다졌다.
부사수의 옆에는 고려 유민이 있었다.
그들은 토격에 사용할 흙을 열심히 나르고 물을 부어서 진흙을 만들었다.
누구도 그들에게 시키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다들 자발적으로 고려군과 함께 요양성을 지키는 일에 참여했다.
불과 며칠 전에는 요양성을 공격했던 고려군인데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고려 유민은 그렇다고 쳐도 나머지 사람들까지 이렇게 나서는 이유는 나하추의 악명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강제 징병과 고된 노역.
두 가지는 백성들이 무척 싫어한다.
거기에 과도한 세금까지 걷는 나하추는 세력 확장을 위해서 조금 무리했다.
지금까지 원나라의 관직에 있으며 배운 것이 그런 것 밖에 없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는 했다.
“여기 흙이 부족해!”
“물도 조금 더 가져와.”
“사수들은 최대한 철환과 화약을 아껴라.”
모두가 한마음으로 움직였지만,
가장 큰 문제는 화약과 철환이었다.
보급을 충분히 가져오기는 했으나 언제 이 짓거리가 끝날지 아무도 몰랐다.
실제로 공성전이 시작된 것도 거의 보름이 넘어서고 있었는데 식량도 조금씩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중이었다.
이 시기가 보릿고개이니 당연했다.
다들 지칠 대로 지쳤다.
밤낮없이 싸우고 있는 중이다.
나하추는 병사를 나눠서 끊임없이 요양성의 성벽을 공략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잃는 병력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당연히 고려도 피해가 누적되고 있었다.
오죽하면 이번 정벌에 동행한 이야기꾼 조풍서마저 화승총을 쥐고 있을 정도였다.
원래는 정벌에 대한 여정과 병사들부터 시작해서 장군들의 이야기를 엮기 위해서 감찰사의 요청으로 함께 온 그였다.
하지만 상황이 급박하니 불편한 한쪽 다리를 이끌고 싸울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그는 경험이 꽤 많았다.
“이야! 조풍서 아직 쓸만한데?”
“당연하지, 회안성에 있을 당시에 그 열악한 상황에서 싸우던 것을 생각하면 이 정도쯤이야 식은 죽 먹기 아닌가.”
“카아악, 퉷!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네.”
이제는 하사와 중사가 된 옛 동료들.
그들은 원나라에서 조풍서와 함께 어깨를 맞대고 죽을힘을 다해 싸우던 이들이다.
모처럼 함께 싸우는 조풍서의 생기 넘치는 모습을 보고 그들은 흡족해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조풍서는 그 누구보다 빠른 다리를 가졌던 친구였기 때문이었다.
격전 중에 다리를 다친 이후.
고려 최고의 이야기꾼이 되었지만,
부상을 입어서 좌절하던 그의 모습은 아직도 그들의 뇌리에서 잊혀지진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경험 많은 이들도 무서워하는 것이 있었다.
“또 날아온다! 엎드려.”
그때 거대한 바위가 날아왔다.
다행히 머리 위로 스치고 지났지만,
요양성 안에 떨어지며 먼지구름이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지금 고려군을 골치 아프게 만드는 존재는 투석기였다.
나하추 쪽에서 누가 머리를 쓴 것인지 울창한 수목 너머에서 투석기를 쏘는 탓에 화포로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확실히 나하추는 조금 달랐다.
그가 거느린 병사들은 지금껏 만났던 허술한 원나라의 병사와 비교할 수 없다.
과거 징기스칸과 휘하에 있었던 무칼리의 후예답게 공성에 무척이나 익숙했다.
장춘에서 나하추가 빠르게 세력을 늘린 이유가 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나하추도 속이 편하진 않았다.
지금까지 잃어버린 병사의 수가 2만이 넘어서고 있는데 여전히 요양성은 무너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대로 계속해서 병력이 소모되면 고려군보다 먼저 나가떨어질 것 같았다.
그는 장수들을 향해 호통을 쳤다.
“도대체 언제 성을 함락시킬 것이오?”
“막대처럼 생긴 소형 화포 때문에 접근하는 것조차 쉽지 않습니다.”
“시끄럽소! 박살 났던 성문이 왜 아직도 멀쩡하게 붙어있는 거냔 말이오!”
“성문에 돌을 쌓은 뒤에 석회를 발라 놓은 거로 보이는데 쉽게 깨어지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성문을 공략했다.
실제로 그중의 하나는 깨졌다.
하지만 성문 안쪽은 완전히 막혀 있었다.
그곳은 고려군이 박살 냈던 성문이었는데 복구를 하지 않고 고려의 보급대가 가져온 시멘트 콘크리트로 아예 막아버렸다.
농성을 위해 고려군이 돌아온다는 것을 들은 만호 최원이 제때 복구가 어렵다고 판단해서 내놓은 기지(機智)였다.
그 덕분에 어느 정도 시간을 벌었는데 그럴 때마다 나하추의 마음은 급해졌다.
산동성에서 있는 차칸 테무르.
그가 병사를 이끌고 이쪽으로 오고 있는 중이었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피해는 자신만 보고 정작 모든 공은 그에게 넘어갈 것은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황제가 보낸 조서에 적힌 약속이 무산된 가능성이 너무 컸다.
원나라에서는 고려군을 격퇴시키면 요동에 대한 통치권 보장을 약속했다.
그걸 어떻게든 손아귀에 넣어야 했다.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명분이다.
그래야 만주를 다스리는 요왕 아자스리 같은 거대한 나라를 세울 수 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나하추도 이제 슬슬 결단을 내려야 했다.
“오늘 끝장을 보고 말 것이오. 그러니 지금 당장 다들 나가서 요양성을 지키고 있는 이방실의 목을 가지고 돌아오시오!”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장수들은 도망치듯 흩어졌다.
하지만 그중에서 단 한 명은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남아야 했다.
나하추가 콕 집어서 기다리라는 말을 남겼기 때문이었다. 그는 바로 간신히 쌍성총관부에서 도망쳤던 조소생이었다.
“오늘은 그대가 선봉에 서시오.”
“제 역할은 고려로 넘어간 이후에 길잡이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양성조차 함락시키지 못하고 있는데 그딴 소리나 하고 있을 거요?”
나하추의 성격은 무척 급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 잔악무도했다.
한번 수가 틀어지면 목이 남아나지 않는 것을 조소생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어쩔 수 없다는 심정으로 그는 지시에 따르겠다는 대답을 하고 곧장 나와서 조도치에게 병사들을 준비시켰다.
그런 뒤에 도살장에 끌려가는 기분으로 나하추의 진형 가장 앞쪽에 서야 했다.
도저히 빠져나갈 구석이 없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신호가 떨어졌다.
그때부터 조소생과 조도치를 비롯한 얼마 안 되는 병사들은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
뒤에 달려오는 8만이나 되는 대군에게 밟혀 죽지 않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고려군도 가만히 보고 있지는 않았다.
화포와 화승총 그리고 쇠뇌까지.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싸웠다.
고려군도 나하추의 공세가 지금까지와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금방 눈치챘다.
아끼고 있을 때는 확실히 아니었다.
이방실과 변안열 그리고 최원 등은 5만의 고려군과 요양성의 주민들과 함께 최선을 다해서 막기 시작했다.
“이번 공세만 막아내면 된다!”
“반격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으니 조금만 더 힘을 내서 버텨라.”
“북쪽 성벽에 철환이 부족하답니다.”
모든 것이 부족한 상태였다.
화약은 어느 정도 남아 있지만,
무게가 상당한 철환은 그리 많지 않았다.
심지어 요양성의 대장간에서 철을 모아 급하게 만들고 있으나 한계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화승총을 쏠 수 없어서 조약돌까지 넣고 쏘는 이들마저 생겼다.
그렇게 장장 두 시진 동안 싸우게 되자 마침내 요양성의 한쪽 편에 나하추의 병력이 결국에는 올라오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지금까지 당하고만 있었던 울분을 토하며 한 마리의 늑대처럼 날뛰며 병사들을 쓸어 버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틈을 노려서 더 많은 병사가 올라왔다.
“어서 막아라!”
변안열은 그들을 밀어내기 위해서 직속 부하를 데리고 움직였으나 점차 그와 비슷한 일이 곳곳에서 생기고 있었다.
누적된 피로도가 상당한 탓에 병사들의 사기와 체력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나하추의 병사를 그렇게 많이 죽였으나 안타깝게도 병력의 규모는 비슷했다.
확실히 10만 명이 많기는 했다.
이러다가 요양성이 함락당하는 것은 순식간일 것 같았다. 그렇다고 그게 패배를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피해가 조금 더 커질 뿐이다.
오히려 고려군 대부분은 갈증을 느꼈다.
이방실 장군이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참고 있는 중임을 다들 알고 있으나 슬슬 나가서 정면으로 붙어보고 싶어했다.
실제로 이방실도 그 시기를 고민하고 있었는데 멀리 나하추의 후방에서 묘한 변화가 일어났다.
“후방에 적군이 나타났다!”
보급대와 투석기가 박살 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에 그곳에서 나타난 이들은 나하추의 병사는 아니었다.
복장만 봐도 고려의 병사들이었다.
유심히 그쪽을 바라보던 이방실은 잠시 눈을 비볐다. 절대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되는 삼족오 깃발이 보였기 때문이다.
삼족오가 의미하는 것은 홀치였다.
그들은 언제나 전하와 함께 하는 이들이었고 심지어 전하의 깃발이 그 중앙에서 흔들리고 있는 게 보였다.
그게 의미하는 것은 서경에 있어야 할 전하께서 직접 이곳까지 오셨다는 것이다.
“우와아, 홀치들이다!”
“전하께서 구원하러 직접 오셨다.”
“서달 장군과 이자춘 장군도 보입니다.”
눈이 좋은 이들은 금방 그들의 정체를 알아냈다. 거기에 해군 깃발까지 있었는데 개경과 의주에 있던 병사가 온 것이었다.
그들의 제대로 본 것이 맞기는 했다.
숙위를 위해 서경으로 이동한 홀치와 응양군 그리고 서달과 양관 외에도 별도로 분리해놨던 이자춘의 가별초도 합류했다.
모두 합치면 적어도 1만은 되었다.
생각보다 많은 숫자였는데 서경의 토호가 내놓은 사병과 의병까지 가세한 덕분이다.
팽팽하던 균형을 무너뜨리기 충분한 숫자였고 이방실은 그 기회를 잡아야 했다.
“성문을 열어서 전하를 맞이하라!”
진짜 전하가 오신 걸까?
진실이 무엇이든지 상관없었다.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생각이 가득할 뿐이었다. 실제로 병사들의 분위기는 단숨에 바뀌어 전의가 충만해 보였다.
일단은 서둘러 나가서 합류해야 했다.
병력의 차이도 이제는 심하지 않았다.
서로 엇비슷한 숫자였기에 갑자기 태세를 바꿔서 성문을 열고 공격을 퍼붓자 오히려 나하추의 병사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고려군의 목표는 삼족오 깃발이었다.
방해하는 것들은 모두 부숴버릴 기세로 돌진하는 고려군을 막을 수 없었다.
다들 뭔가에 홀린 기분이 들었다.
그러는 사이에 나하추의 병사를 돌파하며 한 무리의 기마병이 이방실에게 다가왔다.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서달이었다.
“자네 꼴이··· 그게 뭔가?”
“설명하자면 깁니다.”
“삼족오 깃발이 보이던데 설마 전하께서 직접 전장까지 오신 것인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서달이 웃으며 대답을 하자.
그제야 이방실은 다행이란 표정을 지었다.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것이 전장이다. 이런 험한 곳에 오셨다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일이었다.
“휴우, 다행이네.”
“아마 멀리서 지켜보고 계실 겁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이방실이 그게 되물었지만,
그 전에 서달은 전하에게 명령받은 것이 있다며 서둘러 말을 몰기 시작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달려나가기 전에 무슨 명령을 받았냐고 묻는 이방실의 질문에 서달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전하께서 나하추의 목을 원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