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108
의주 전투는 승리로 끝났다.
유익의 병사들은 고려군에게 박살 났다.
초반의 열세를 딛고 일어선 서달은 양관의 지원을 받아서 도망치는 적의 뒤를 끈질기게 따라붙어서 전멸시키는 데 성공했다.
아끼던 부하 중에 여럿이 죽거나 크게 다친 터라 그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이번 승리는 양관과 해군 덕분이었다.
만약 그가 적절한 시기에 돌아오지 않았다면 서달은 물론이고 이천 명에 달하는 아까운 병사를 모두 압록강에 수장시킬 뻔했다.
그런 뒤에 서경까지 밀고 왔을 것이다.
뒤늦게 그 소식을 들은 나는 궁금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런데 양관은 도대체 어떻게 알고 의주로 돌아간 것이오?”
솔직히 그게 가장 궁금했다.
원래의 계획대로면 그는 최소 이틀이 지난 후에 의주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의주에 나타났다.
내 질문에 답을 하는 이는 모처럼 얼굴을 보는 감찰 어사 김첨수였다.
“감찰사에 소속된 정보원이 요동 곳곳에 있는데 그들이 보낸 소식 덕분이었사옵니다.”
그가 해주는 설명은 간단했다.
원래 대련에 있던 유익은 고려군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서둘러 병사를 이끌고 나섰다.
하지만 이미 이방실은 멀어진 후였다.
그의 뒤를 쫓자니 병력 차이가 너무 심했고 그냥 돌아서면 황실에서 책임을 물을 것이다.
뭐라도 해야 했기에 만만해 보이는 의주를 친 것이고 그 움직임을 감찰사가 파악해냈다.
“소신도 뒤늦게 그 소식을 듣고 서둘러 양관 장군을 찾아서 되돌릴 수 있었사옵니다. 이번 정벌은 하늘이 도와주는 것 같사옵니다.”
역시 정보는 곧 힘이었다.
하지만 손실이 적다고 할 수 없었다.
뒤늦게 양관이 합류해서 다행이지 그 이전에 공세를 막다가 잃은 병력이 적지 않았다.
현재 파악된 사망자만 천 명이 넘는다.
더구나 서달 장군을 비롯해 병사들을 이끌던 상당수의 장수가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
초반에 잃은 병력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유익을 추격하며 그의 병사를 완전히 몰살시키는 과정에서 잃은 이들도 꽤 있었다.
단순하게 숫자만 보자면 8천 명의 원나라 병사를 전멸시켰으니 대승이라 할 수 있다.
“이번 전투에서 서달 장군도 다쳤다고 들었는데 어느 정도인지 아시오?”
“몸 곳곳에 자상이 생겼으나 생명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오.”
“오히려 서달 장군은 요동 반도를 고스란히 고려에게 귀속시킬 수 있었다고 무척이나 기뻐하였사옵니다.”
지휘관인 유익이 뒤도 안 돌아보고 십여 명의 기병과 함께 요서 지역으로 빤스런 했다.
더구나 그가 데리고 온 8천 명의 병사는 요동 반도의 모든 병력을 긁어모아서 만든 것이다.
그 덕분에 지금 요동 반도를 지키는 병력은 거의 없었고 있더라도 자경단 수준이었다.
당연히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서둘러 요동 반도로 병사를 이끌고 들어간 서달과 양관은 그대로 반도의 끝에 있는 대련까지 함락시켰다. 이번에 손아귀에 넣은 요동 반도가 가지는 의미는 상당히 컸다.
대주국이 산동반도까지 차지할 경우.
보하이 해협이 완전히 닫히게 될 것이다.
고려의 해군을 대련에 상주시켜서 말뚝 박으면 원나라의 바닷길은 모두 막힌다.
지금 당장 고려 해군의 적수가 될만한 이는 왜국의 막부와 방국진 정도가 전부였다.
원나라는 바다를 장악할 만한 힘이 없기에 이제는 비좁은 보하이 해(渤海) 밖에 안 남게 된다. 앞으로 모든 물품은 육로로 이동해야 하니 적잖은 타격이 있을 것이다.
“그나저나 김 어사의 외지 생활이 상당히 길어지고 있는데 괜찮은 것이오?”
“어린 시절부터 원나라에 있었던 시간이 길어서 고생이라 여기지는 않고 있사옵니다.”
“감찰 판사가 이미 말해놨겠지만, 조만간 고려로 불러들일 생각이오. 그러니 일을 인수인계할 준비를 서서히 하시오.”
“그리하겠습니다.”
하지만 당장은 어렵다고 했다.
비밀 조직으로 만들어 놓은 상태라 조직도를 바꾸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나도 곧장 그를 불러들일 생각은 없었다.
최소 몇 년 이상을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을 이는 감찰사로 옮긴 한방신과 정도전 중의 한 명이 될 것이다.
“백련교를 소탕할 당시에 정도전이 상당히 활약을 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사옵니다.”
“두 사람 모두 감찰사와 고려를 위해 큰일을 할 재목이라 과인의 관심이 지대하오.”
“소신이 맡아서 잘 가르치겠사옵니다.”
“그리고 이번에 훈장을 받게 될 이들을 선별해야 하니 준비해주시오.”
최근 고려는 바뀐 점이 하나 있었다.
지난해부터 매년 6월이 되면 순국선열을 위한 작은 행사를 진행하고 있는 중이다.
이미 현충원이라 불리는 납골당도 만들었고 공을 세운 이에게는 무공 훈장도 수여 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것이 얼마나 고귀한 일인지 인식을 심어줄 필요가 있었다.
나라에서 그들을 잊는 순간.
누가 과연 목숨을 걸고 싸우겠는가.
적어도 고마움을 표시할 필요가 있었다.
올해는 내가 서경에 있어서 직접 추모할 수는 없으나 가진과 백문보가 주관할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는 도당에 소속된 문무백관은 한 명도 빠짐없이 참석해야 한다.
내가 내린 교서가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바빠도 일 년 중에 하루만큼은 순국한 이들을 위한 추모를 매년 하기로 했다.
내 기준으로 보자면 연등회보다 이쪽이 훨씬 의미가 깊었다. 한동안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던 중에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김첨수는 곧장 무슨 일인지 물었다.
“무슨 일이 있느냐?”
“방금 대주국에서 온 소식이 있사옵니다.”
“어서 가지고 오너라.”
문이 열리자 감찰사의 관리가 보였다.
그는 두 개의 서신을 김첨수에게 건넸다.
하나는 대주국의 성왕이 보낸 것으로 보였는데 김첨수는 그걸 내게 주고 자신은 다른 서신을 펼쳐서 읽었다.
거기에 적힌 내용은 간단했다.
[대주국, 산동성 출정]
장사성은 약조한 대로 움직였다.
만약 그가 여기서 배를 째면 고려는 꽤 곤란한 상황에 빠진다. 원나라의 분노를 고려가 혼자 감수해야 할 것이다.
나는 김첨수가 받아서 읽은 나머지 서찰에 적힌 내용은 뭐라고 적혀있는지 물었다.
“우리가 기다리던 소식이 맞소?”
“맞사옵니다. 감찰사에서 대주국이 산동성 방향으로 출정한 것을 확인했사옵니다.”
“그 외에 다른 소식은 없소?”
“차칸 테무르도 얼마 전에 요동 방면으로 5만의 병사와 함께 이동하였다고 하옵니다.”
이제는 폭탄 돌리기에 가까웠다.
차칸 테무르와 그의 병사들이 어디로 갈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지금쯤이면 그는 대도 부근을 지나고 있을 거라 예상되었다.
어디로 가든 이상할 게 없는 상태다.
요동으로 올 수도 있고 산동성으로 발길을 되돌릴 가능성도 있었는데 당연히 고려의 입장에서는 다시 산동성으로 가길 바랐다.
불필요한 희생을 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고 주사위는 이미 던져진 상태였다.
지금부터는 전적으로 이방실 장군과 출정한 고려군만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번 출정이 고려의 흥망성쇠를 결정할 가장 큰 고비가 될 것이 분명했다.
*
고려군은 진격을 멈추지 않았다.
대주국이 약속을 지키든 말든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이방실에게 내려진 명령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심양을 정벌하는 것이다.
가장 처음 목표로 삼은 고가노가 지키는 요양성까지 그들을 막는 이들은 없었다.
기껏해야 수백 명 단위에 불과한 저항은 고려군의 발목을 잡을 수준은 아니었다.
오히려 고려군이 가는 길목마다.
고려의 유민과 옛 고구려의 후예들이 열렬하게 환영해주고 있었다. 그들도 최근의 고려가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소문이란 게 발 없는 말과 같아서 요동이며 만주까지 그 소문이 닿을 정도였다.
마을마다 먹을 것을 내놓거나,
여러 가지 편의를 봐줬는데 요동의 백성이 바라는 것은 그리 많은 것이 아니었다.
누가 이 지역을 차지하던지 때때로 나타나는 산적과 여진족의 침략을 막아주는 것만으로 만족할 사람들이었다.
병사와 장수들이라고 다를 게 없었다.
약속된 녹봉을 제대로 받는 것도 아니었다.
고려군이 자신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이탈하는 요양성의 병사가 많았다.
아무리 탈영병의 목을 베며 엄히 다스려도 하루가 지나면 수십 명씩 사라질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이방실이 요양성에 도착한 뒤.
성을 함락하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하루에 불과했다. 화포 수십 대를 세워 놓고 동시에 발포하자 성문이 걸레짝이 되었다.
철로 만든 것이 아니고 나무로 만든 성문은 제아무리 단단해도 부서지게 되어 있다.
“고려를 위하여 검을 들어라!”
“대고려를 위하여!”
“성문을 열어서 이방실 장군과 변안열 장군을 맞이하라.”
거기에 내응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요양성에 있는 고려계 병사들은 무기와 갑주를 내려놓고 순순히 항복하거나 자신의 상관을 죽이고 성문을 여는 이도 있었다.
감찰사에서 지난 몇 년 동안 공을 들인 보람이 지금 나오고 있었다.
선두에 선 변안열 덕분이기도 했다.
그는 이 지역 병사들에게는 전설적인 인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무과에 장원 급제한 이후에 고려로 떠나서 엄청난 성과를 만들었다.
이제 그의 나이가 고작 서른도 되지 않았으니 변안열의 존재 자체가 고려가 귀순하는 이들에게 편견이 없다는 증거였다.
성공에 대한 열망,
더 좋은 세상을 바라는 기대.
모든 것들이 고려를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과하고 고가노를 사로잡는 것은 실패했다. 이방실은 곧장 해주 출신의 만호 최원을 불렀다.
“3천 명의 병사를 내줄 테니 이곳에 주둔하며 지키시오.”
“내어주시는 병력과 함께 부상병을 남겨 주시면 군의를 시켜서 최대한 치료를 해보겠습니다.”
“그리하겠소.”
요양성은 예로부터 천혜의 요새였다.
그리 많은 병력은 아니나 부서진 성문만 보수하면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이곳보다 조금 더 북쪽에 있는 심양성으로 가서 심양왕을 확보해야 했다.
하지만 심양성은 훨씬 더 쉬웠다.
정작 그곳에서는 화포조차 쏠 필요가 없었다.
병사들이 오는 것을 보고 아예 성문을 열고 심양왕이 직접 나와서 항복을 해왔다.
천혜의 요새라 불리는 요양성도 하루 만에 무너뜨린 고려군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심양성이란 곳이 원래 그랬다.
애초에 심양왕은 요동에서 허수아비에 가까운 자리라 고가노보다 병력이 적었다.
방어적인 측면에도 요양성의 중요도가 훨씬 높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겨우 수천 명에 불과한 병사를 가지고 5만 명에 달하는 고려군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심양왕 토크토아부카는 이방실을 만나는 자리에서 심양왕의 권위를 의미하는 금인(金印)을 건넸다. 자신이 즉위한 이후에 수년간 누리던 모든 것을 내려놓겠다는 의미였다.
이방실은 그를 무척이나 정중하게 대했다.
심양왕이 결단을 내려준 덕분에 불필요한 희생을 줄일 수 있었다.
“현명하신 선택을 해주셔서 감사하옵니다.”
“원래의 주인을 찾아서 가는 것이오.”
“전하께서 빠른 시일 내에 직접 뵙고 싶다고 하셨사옵니다.”
“개경으로 가면 되는 것이오?”
이방실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서경에 계시다고 말했다.
그러자 토크토아부카는 알겠다며 곧장 전하를 뵈러 가겠다며 신변을 지키기 위해 붙인 고려군과 함께 서경으로 떠났다.
하지만 기뻐하기는 일렀다.
승리를 자축하고 있을 틈도 없었다.
근방에 정찰을 나선 병사들이 한 시진도 안 되어 다급하게 돌아왔다. 그들은 북쪽에서 대규모의 병력이 다가오고 있다고 전했다.
그들의 정체는 장춘에 있던 나하추가 끌고 온 십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이었다.
“나하추에게 십만 명에 달하는 병사가 있다는 사실은 들은 바가 없소. 감찰사에서 보낸 내용에서는 최대 5만 명이라 하지 않았소?”
“아마도 다른 요양 행성의 군벌 세력과 힘을 합친 것으로 보입니다.”
감찰사의 관리 하나가 대답을 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의 추측이 맞는 것 같았다. 이방실은 잠시 고민하다가 후퇴를 하기로 결정했다. 수성을 하기에는 이곳 심양성보다 요새화가 된 요양성이 유리했다.
성문 하나가 박살 났으나 서둘러 보수하면 저들이 도달하기 전에 마무리될 것 같았다.
머뭇거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서둘러라! 요양성으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