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107화 (107/202)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107

고려군은 압록강을 쉽게 넘었다.

해군의 전선을 동원해서 만든 배다리를 통해 강 너머로 도강한 이방실은 군사를 이끌고 곧장 첫 목적지인 요양성으로 진군했다.

반면에 서달은 그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

이틀 전에 받은 명령대로 그는 이천 명의 병력을 추려서 의주 방면으로 이동했다.

당연히 고려군의 움직임은 원나라에게도 포착되었고 그 소식은 곧장 심양에 있는 심양왕과 대도의 기황후에게도 전달되었다.

요동에서 대도는 생각보다 가까웠다.

요서만 지나면 원나라의 수도인 대도까지 도달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당연히 발칵 뒤집힐 수밖에 없었다.

고려가 조서를 찢고 사신을 핍박했을 때만 하더라도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저자세를 유지하던 고려였다.

그 덕분인지 대부분 고려의 왕이 잠시의 혈기를 참지 못해 벌인 실수라 여겼다.

아니 그렇게 믿어야만 했다.

고려마저 돌아서게 될 경우.

정말 돌이키지 못할 일이 생긴다.

예전에 쌍성총관부를 공격했는데 황제가 그냥 넘어간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그런데 모두가 우려했던 일이 터졌다.

지금껏 잠잠하던 고려가 마침내 군대를 일으켜 원나라를 향해 칼을 빼 든 것이다.

기황후는 승상인 초스간을 불러들였다.

그녀는 초스간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이제 어떻게 할 거냐며 닦달하기 시작했다.

예전부터 기황후는 어떻게든 고려의 왕을 끌어내려야 한다고 계속해서 주장했다.

하지만 개인적인 원한 때문이라 여겨서 그런지 몰라도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렇게 고려의 왕이 딴마음을 품고 있는 것 같다고 조심하라고 했건만.”

“송구하옵니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이오?”

“요동에는 심양왕과 요양행성의 군벌이 있으니 심려치 않으셔도 되옵니다.”

“그들만으로 고려의 병사들을 막는 것이 가능할 거라 생각하는 것이오?”

이미 쌍성총관부와 대마도를 통해서 고려의 전투력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되었다.

그 과정에서 고려가 화포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도 알려졌는데 그렇게 많은 화포를 쏘았는데 원나라에서 모르고 있을 수 없었다.

고려군은 엄청난 화력을 보유했다.

그들이 참가한 전투는 대부분 매우 손쉽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승리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장수들이 무능한 것도 아니다.

이미 고우성에서 고려의 장군들이 얼마나 대단한 이들인지 직접 증명까지 해냈다.

아마 요동은 쉽게 넘어갈 것이다.

우습게도 고려의 왕을 가장 높게 보는 것은 기황후였다. 그녀가 본 왕기(王祺)는 겉과 속이 다른 종잡을 수 없는 이였다.

똘루게로 있던 왕기가 약관이 되기 전부터 단본당(端本堂)에서 수없이 봐왔으나 이런 성격인지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뒤돌아 생각해 보면, 조금 이상하긴 했다.

왕기를 고려의 왕으로 세우려고 했던 그 무렵부터 다른 사람을 보는 느낌이었다.

그때는 그러려니 하고 넘겼으나 지금 보면 속 안에 능구렁이 몇 마리쯤 품고 있었던 것이 아녔던 걸까 의심될 정도였다.

어쨌든 이제 더는 영토를 잃을 수 없다.

이러다가 아들인 아이유시리다라가 훗날 황제가 되어도 물려받을 영토가 남아나질 않을 것 같다는 불안감이 밀려왔다.

아니 그 이전에 원나라가 망할 것 같았다.

만약에 고려가 요동을 넘어서 요서까지 쳐들어 오면 누가 그를 막는단 말인가.

“심양왕인 토크토아부카는 태자궁을 숙위하던 이라 누구보다 내가 잘 아오. 그는 천성이 심약한 편이라 항복할 것이오.”

그 역시 고려의 왕족이지요.

초스간은 그 말이 목 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간신히 내뱉지 않고 참아냈다.

누구보다 원나라에 충성을 다하던 고려가 이렇게 뒤돌아선 이유가 따로 있을까.

기황후와 그의 가족들의 패악질.

그게 고려를 돌아서게 한 것이라 여기는 초스간이었다. 어지간히 했어야 참을 텐데 이미 고려는 그 한계점을 넘어선 것이다.

잠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 기황후는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방책을 내놨다.

“아무래도 산동성에 있는 차칸 테무르를 불러들여서 당장 요동으로 보내야겠소.”

“불가하옵니다. 그를 지금 전장에서 빼내면 산동성이 무너질 것이옵니다.”

“이사제가 있지 않소.”

“그는 탕화가 이끄는 홍건적을 막고 있지 않사옵니까.”

차스간은 강하게 반발했다.

그 문제만큼은 물러설 수 없었다.

차칸 테무르와 그의 병사들은 무너지고 있는 원나라를 지키는 마지막 방벽이자 보루였다.

지금도 아슬아슬한 빙판길을 걷는 기분인데 그가 움직이는 순간에 무너질 것이다.

하지만 기황후도 만만치 않았다.

“승상! 지금 황실과 폐하의 안위가 위태로운 것이 보이지 않으시오? 만약에 고려가 요서를 돌파하면 곧장 대도이지 않소!”

기황후는 황제까지 들먹이며 차스간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쯤 되자 그도 슬슬 지쳤고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지금 여기서 아무리 말해봐야 들을 이가 아니었기에 차스간은 어쩔 수 없이 기황후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하지만 책임은 면피해야 했다.

아무리 승상인 차스간이라 하더라도 현재의 차칸 테무르를 통제할 수는 없다.

그를 움직이게 하려면 적어도 폐하께서 직접 내리신 조서가 있어야 한다며 한발 뒤로 물러나서 기황후에게 하소연을 했다.

“폐하는 어떻게든 설득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오.”

기황후는 자신만만해했다.

그녀가 승상인 차스간을 내보내자 옆방에 있던 채하중이 들어왔다. 그는 정말 운이 좋게도 두 번의 사화를 모두 피했다.

명줄 하나는 정말 상당히 긴 이였다.

이번에 차칸 테무르를 요동으로 움직이게 하자는 제안도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이제 더는 고려에 돌아갈 수 없는 그는 어떻게든 복수하고자 하는 일념만 있었다.

그게 지금 그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차칸 테무르가 어떻게 나올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니 대안도 필요하옵니다.”

“지금 누가 대안이 될 수 있단 말이오?”

“만주에 있는 요왕이 움직이면 가장 좋으나 쉽게 움직이지는 않을 테니 나하추가 가장 적당할 것이라 생각되옵니다.”

“나하추면 최근에 요동에서 사사로이 병사를 모아 군벌이 된 자가 아니오.”

기황후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관직을 내버리고 세력을 키우고 있는 이들의 대부분은 반역을 꿈꾸는 자들이다.

나하추도 다른 이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하지만 채하중은 차악을 선택하는 대신에 시간을 버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봤다.

“지금은 반란군을 정벌할 동안 약간의 시간이라도 벌어 놓는 것이 중요하옵니다. 나하추로 하여금 고려의 기세를 꺾고 나머지 일은 훗날에 정리하시옵소서.”

“그대는 나하추라는 자가 우리가 의도한 대로 움직여줄 것이라 보시오?”

“분명 그러할 것이옵니다. 더구나 그곳에는 쌍성의 총관이었던 조소생이 몸을 의탁하고 있다고 하니 도움을 줄 것이옵니다.”

“그자가 아직 살아있었소?”

쌍성총관부가 함락당할 당시.

탁도경과 대부분의 관리가 죽었다.

하지만 유일하게 조소생과 그의 휘하에 있던 조도치만 생사 불명이었다. 그런데 그가 멀쩡하게 살아서 나하추 아래에 있었다.

채하중은 조소생이라면 누구보다 고려의 왕에 대한 복수심이 강할 거라며 설명했다.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차칸 테무르의 병력에 나하추까지 합세하면 고려 하나쯤은 지워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지금이 오라버니들의 복수를 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일지도 모른다.

기황후는 그렇게 하라며 승낙해줬다.

“좋소, 그리하시오.”

*

그 무렵 서달은 의주에 도달했다.

압록강 하류에 있는 그곳은 엄연히 고려의 영토였으나 거의 방치되어 있던 곳이다.

의주를 찾아오는 이들은 원나라로 떠나는 사신이나 요양 행성과 밀무역을 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라고 봐도 될 정도였다.

국경이라고 제대로 만들어진 성곽이 있거나 방어를 위한 시설이 있지도 않았다.

압록강 너머는 원나라의 땅이다.

그들과 싸운다는 생각조차 못 하고 지낸 세월이 길기에 기존에 만들어져 있었던 나무 방책(防柵)은 썩어서 무너진 지 오래되었다.

확실히 백 년이란 시간은 너무 길었다.

서달은 그 문제부터 해결해야 했다.

방책의 건설과 병사들의 훈련.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아야 했다.

오전에는 통나무를 잘라와서 방책을 세우고 오후에는 지쳐 쓰러질 때까지 훈련을 했다.

당연히 병사들은 쉽게 납득하지 못했다.

만약에 요양행성의 병력이 움직여도 이방실 장군이 이끄는 본진으로 향하지 고려로 올 거라 생각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절대라는 것은 없다.

방책이 거의 다 세워질 무렵이 되자,

흥화진에서 피투성이가 된 전령이 왔다.

말을 타고 죽어라 달려온 그의 상태는 상당히 처참했다. 무슨 일을 겪은 건지 상처가 곳곳에 있었고 화살까지 맞았다.

기절하지 않은 것이 용할 정도였는데 그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서달 앞에 멈춰 섰다.

“장군, 큰일 났습니다. 유익이 이끄는 요동 반도의 병사들이 도강하여 흥화진을 점령하고 이쪽으로 몰려오고 있습니다.”

서달은 흥화진이 어떻게 되었는지 굳이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뻔한 것이 그곳을 지키는 이는 수십 명에 불과했다.

그보다 도강을 해온 유익의 병력이 어느 정도인지가 더 중요했다. 그걸 묻자 전령은 대략 8천 명은 될 것 같다고 답했다.

“8천 명이라···.”

이곳의 병력에 비해 네 배나 많다.

의주의 장정을 모두 긁어모아도 수백 명도 안 되는 수준이라 기대조차 안 되었다.

완전히 정예화된 병력이라도 힘든 병력의 차이인데 신병들이 이런 격차를 극복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서달은 파견 나온 해군의 무관을 바라보며 물었다.

“해군은 언제 돌아오는 것이오?”

“사나흘 후에 화약 보급을 위해서 돌아오기로 예정되어 있기는 합니다.”

“이런··· 늦어도 너무 늦소.”

지원 나온 해군의 병력이 3천 명이다

그들만 합류할 수 있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해군이 육지에서 큰 활약을 해줄 거라는 기대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배에는 엄청난 숫자의 화포가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들은 여기 없었다.

원래의 계획대로 해군은 대련 등을 돌며 요동 반도의 병력을 묶어 놓기 위해 떠났다.

그런데 유익의 병사들이 이렇게 빨리 움직일 줄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쳐들어온 느낌이었다.

“지금 당장 연락선을 보내겠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큰 기대는 없었다.

흥화진에서 이곳까지 쉬지 않고 걸어오면 하루면 도달하는 거리다. 아마 연락선이 해군을 찾기 전에 유익이 먼저 올 것이다.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의주가 아닌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면 오히려 고려의 입장에서는 더 큰 문제였다.

지금 그들을 추격해서 격퇴시킬 방법은 없었다. 차라리 엉성하게나마 만든 방책을 놓고 싸우는 것이 더 이득이었다.

길고 길었던 밤이 지난 뒤.

다음날 이른 아침에 유익이 이끌고 온 병사들이 의주에 코앞까지 도달했다.

전령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그들의 병력은 최소 8천 명은 넘었다.

하지만 그리 강해 보이지는 않았다.

서달도 군에 몸담은 지 벌써 몇 년째다.

더구나 신병 훈련을 담당한 경험도 있기에 걷는 것만 봐도 병사들이 어느 정도 훈련을 받은 건지 대충 감이 올 때가 있었다.

유익의 병사는 질보다 양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행군하는 모습이 난장판이었다.

그때 감찰사에서 해준 말이 떠올랐다.

최근에 요동의 병사들은 대부분이 모집병이라 했다. 기존의 병력은 대부분 홍건적 토벌에 동원되었다가 흩어졌다.

그걸 떠올린 서달은 어느 정도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되지 않으나 화포와 화승총도 몇 문 있었다.

부우우웅!

그때 멀리서 진군을 알리는 신호가 들렸다.

유익은 숫자가 적은 고려군을 보고 굳이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여긴 것 같았다.

당연히 서달과 그의 병사들도 그냥 당할 생각은 없었다. 어느 정도 거리가 좁혀지자 가장 먼저 화포가 발포되었다.

거기에 화승총과 쇠뇌도 더해졌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유익의 병사를 물리칠 수 없었다. 순식간에 방책까지 도달한 그들은 거친 파도와 같은 모습이었다. 그때부터는 서로 죽이고 죽는 아비규환이 펼쳐졌다.

처음에는 고려군이 우세했다.

방책 위에서 쏘는 화승총은 보급된 지 얼마 안 되었으나 엄청난 위력을 보이고 있었다.

한 번 쏘아질 때마다 엄지손톱 크기의 철환이 넓게 퍼져나가 몇 명씩 쓰러뜨렸다.

하지만 화포는 유익도 가지고 있었다.

“준비되는 대로 발포하라!”

성능은 비교할 수 없으나 화포가 한 번 쏘아질 때마다 방책은 위태롭게 흔들렸다.

엄청나게 둔중한 철환을 맞고 나무로 급하게 만든 방책이 오래 버틸 리가 없었다.

결국, 한 시진도 버티지 못하고 방책이 무너지자 사방에서 원나라의 병사가 밀려들어 왔다.

“모두 물러서지 말고 싸워라.”

서달은 누구보다 앞장서서 싸웠다.

그의 손에 쥐어진 창은 왜국에서 만드는 것처럼 날이 상당히 긴 것이었는데 한 번씩 휘두를 때마다 목이나 손발을 잘라냈다.

고려 최고의 돌격 대장이라는 소문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저돌적이었다.

더구나 그의 곁에는 부하들이 있었다.

서달의 휘하에서 긴 시간 손발을 맞추고 있는 하사와 중사 같은 이들도 몸을 사리지 않고 병사들을 이끌며 분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사람이었다.

체력의 한계가 분명히 있었다.

그래도 그들의 활약 덕분에 유익의 병사들이 만든 포위망을 뚫고 방책에서 나온 고려군은 순식간에 압록강의 하구까지 밀려났다.

이제 더는 물러날 곳이 없기에 배수의 진을 치라며 독려하는 수밖에 없었다.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라.”

“더는 도망칠 곳은 없다. 갈 때 가더라도 저놈들을 각자 두 명씩만 베고 가자.”

“퉤엣! 까짓거 해보자고!”

이제는 다들 악에 받쳐 있었다.

서로 다른 지역에서 모인 이들이었다.

그러나 고된 훈련을 같이 받으며 동지애가 저절로 생겼는데 동고동락한 동료가 코앞에서 죽어 나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모두가 최후를 떠올리는 순간.

유익이 이끄는 병사들이 머뭇거렸다.

지금까지 달려들던 모습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이기에 서달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등 뒤에서 화포를 쏘는 소리가 연달아 터지기 시작했고 유익의 병사들은 속절없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우와아! 해군이 왔다.”

“물방개 자식들아! 도대체 어디에 짱박혀 있다가 이제야 기어 오는 거야?”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다들 반격을 준비하거라!”

서달도 뒤늦게 상황을 파악했다.

그는 서둘러 지시를 내리면서 뒤를 돌아보니 사나흘 후에 온다던 백여 척의 전선이 어느 사이에 위화도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들을 이끌고 있는 고려 해군의 이인자로 알려진 양관은 선수(船首)에 서서 호탕하게 웃으며 외쳤다.

“으하하! 땅개비 아새끼들 뭐 하고 있네, 대가리에 구멍 나기 전에 어서 고개 숙이고 숨이나 고르라우!”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