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104
북벌을 준비하는 사이.
원나라에서는 어떤 반응도 없었다.
한껏 기대하고 있던 터라 오히려 기운이 빠질 정도였다. 이 악물고 아예 그런 일은 없었던 걸로 마무리할 생각인 것 같았다.
현재 원나라 황실에 여력이 없긴 했다.
마지막 보루인 차칸 테무르는 탕화와 장사성을 막기에도 버겨운 상태다.
고려까지 숟가락을 얹을 경우.
정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그녀는 당장 고려로 군사를 보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으나 이번에도 그 의견은 현실적인 이유로 무시되었다.
얼마 전에 김첨수가 보낸 황실 동향을 보면 기황후가 길길이 날뛰다가 성질을 못 이겨서 화병으로 쓰러졌다고 한다.
황실에서 일하고 있는 고려 출신의 궁녀와 환관을 통해서 들은 거라니 헛소문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방심할 수는 없었다.
심양왕을 잡는 것은 걱정 없었다.
전력을 비교해봐도 우리 쪽이 훨씬 우위에 있다. 장담하건대 심양왕은 얼마 못 버티고 항복할 것이 분명했다.
오히려 지금은 그보다 요동과 만주에 있는 다른 세력이 더 걱정이었다.
요왕(遼王) 아자스리.
과거 칭기스칸의 부하였던 옷치긴 왕가 출신인 그는 동북아에 엄청난 영향력을 펼치고 있었다. 거기에 유익과 고가노 같은 나머지 요양행성 세력과 최근에 엄청난 성장세를 보이는 나하추도 있었다.
심양 위에 자리 잡은 나하추는 명장 무칼리의 후손으로 원나라에서 관직에 올랐으나 최근에 독자적인 세력을 꾸렸다.
고려가 이번에 심양을 차지하면 바로 국경을 맞대는 것이니 이번 북벌을 가장 껄끄럽게 생각할 세력이었다.
그렇다면 가장 최악의 경우가 뭘까.
북벌에 나선 고려군이 모든 세력의 목표가 되어 몰매를 맞는 것이다.
길게 끌수록 불리한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전략은 속도전으로 맞춰졌고 고려의 모든 역량은 전쟁 준비에 초점을 맞춰서 변형되기 시작했다.
“일부 부대에서 병장기가 부족하다는 말이 들리던데 어찌 된 것이오?”
그중에서 가장 바쁜 이는 공부 상서 황석부였다. 지금까지 개경 및 북부의 축성을 맡고 있었지만, 공부는 군기감(軍器監)의 관리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고려의 모든 전쟁 물자는 군기감을 통해서 만들어진다고 봐도 되었다.
“미리 상단을 통해 북부에 옮겨 놓은 양이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황석부는 차분하게 대답을 했다.
이런 상황이 된 이유가 있기는 했다.
기존에 수년 동안 쉬지 않고 계정골과 군기감 등에서 만든 물량이 있었다.
양이 적지 않기에 개경에 보관할 장소가 없어서 미리 서북면으로 옮겨 놓았다.
“그러면 전쟁 중에 화살과 철환 등의 보급이 부족할 일은 없는 것이오?”
“얼마나 오래 싸우냐의 문제지만,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사옵니다.”
“수많은 이들의 목숨이 달린 일이니 절대 차질이 생기면 아니 되오.”
그를 탓하려고 부른 것은 아니다.
어느 정도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지만,
독단적으로 북벌을 결정한 것은 나였다.
당연히 그와 관련된 반발이 상당했고 설득을 하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그나마 심양이기에 어느 정도 이해를 구할 수 있었지 안 그랬다면 도당에서 끝까지 반대했을 것이다.
어쨌든 전쟁은 보급이 중요하다.
병력만 많다고 이기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그들에게 입힐 갑옷과 쥐여줄 무기는 있어야 싸울 게 아닌가.
2년 전까지는 이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갑자기 수만 명씩 모병을 하니 수백 명에 불과한 군기감의 장인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은 이미 한참 넘어섰다.
‘그렇다고 죽창을 쥐여줄 수는 없잖아.’
가장 부족한 것은 역시 갑주였다.
만약에 민간쪽의 도움이 없었다면 맨몸으로 전쟁터에 내보낼 뻔했다.
최근 몇 년간 대장간과 가죽을 다루는 수많은 공방이 곳곳에 생겨났다.
그들의 손을 빌려야 했다.
내수사에서는 지금까지 쌓인 재물을 가지고 그들에게 주문을 넣었다.
그걸로도 부족해서 심지어 상단을 보내 왜국에서는 칼을 사들이고 대주국에서는 여분의 갑주를 사들일 정도였다.
지금 같은 순간을 위해 돈을 벌어 놓은 것이었고 소모품에 가까운 화살을 제외하면 계속해서 쓸 수 있는 장비다.
앞으로 10년쯤은 계속 써야 하기에 충분히 본전은 뽑을 수 있을 것이다.
“최무선과 공학 박사들이 함께 개발한 화포는 어찌 되고 있소?”
“이번 출정에는 현재까지 만들어 놓은 오백 정을 가지고 나갈 예정이옵니다.”
“앞으로도 많이 써야 하는 것들이니 계속해서 생산에 힘써주시오.”
얼마 전에 새로운 화포가 개발됐다.
최무선의 아이디어로 만든 것인데 개인 화기로 구분되는 그 무기는 승자총통의 위치를 계승하는 거라 봐도 되었다.
아직 총의 형태라 보기는 어렵지만,
화포에서 화승총으로 넘어가는 단계다.
그래서 총통 N호라 붙여지던 넘버에서 벗어나서 <화승총 1호>라 붙여졌다.
이제 슬슬 본격적으로 화승총을 개발할 시점이 되었기에 확실한 분류가 필요했다.
길이는 1미터 정도 되는데 혼자서 들고 쏠 수 있는 무게라 운반도 쉬웠다.
힘이 좋은 이들은 급하면 쇠몽둥이처럼 쓸 수 있을 정도였다.
최대 사거리는 800보 정도다.
하지만 그렇게 사용하면 관통력을 기대할 수 없어서 실제 사거리는 300보였다.
조선 시대에 만들어내는 승자총통보다 3할 이상 사거리가 더 늘어난 것이다.
개량된 화약을 사용한 덕분이었다.
작은 철환이 들어가는 터라 일종의 샷건과 흡사해서 기대가 큰 물건이었다.
‘화포랑은 완전히 다른 개념의 무기이지.’
기존의 화포는 장단점이 뚜렷했다.
정해진 위치에서 싸우는 공성과 수성에서 화포의 위력은 이미 충분히 검증됐다.
하지만 성을 벗어나 야전에서 펼쳐지는 유격전이나 기마병을 상대할 때는 화포를 가지고 싸우기 쉽지 않다는 단점이 있다.
아직 격발의 시기를 선택할 수 없다.
화포에 불을 댕겨서 화약이 터지는 순간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그 이전에 사격 범위를 벗어나는 경우가 허다했다.
예측 사격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그걸 보완하는 것이 바로 화승총이다.
한마디로 기마병을 상대하기 위한 비장의 무기라고 봐도 되었다. 편성도 한 자루당 2인 1조로 화포보다 대폭 줄어들었다.
부사수는 장전을 돕고 화약과 철환을 나르는 등의 업무를 맡는다고 보면 된다.
“전하, 신소봉이옵니다.”
그때 밖에서 신소봉의 목소리가 들렸다.
황석부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방해하지 말라고 미리 말해놨기에 살짝 짜증 났다.
하지만 뒤이어 그가 들어와서 하는 말을 듣자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한번 말해보거라.”
“마마께서 산통이 오셔서 지금 어의와 함께 산실(産室)로 옮기셨습니다.”
“지금 당장 갈 테니 채비를 하거라.”
나는 황석부에게 양해를 구한 뒤.
곧장 미리 준비되어 있던 산실로 향했다.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두 번째 출산인데도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은 다르지 않았다.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일은 신비로우나 그만큼 산모에게는 고된 일이었다.
안 그래도 만삭이 오래 지속됐다.
나올 때가 되었는데도 가진의 배 안에서 버티고 있는 아이가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보통은 초산이 가장 어렵다고 하던데 이상하게 더 몸이 무거워 보였고 그만큼 상당히 힘들어했다. 얼마나 덩치 좋은 우량아가 태어나려는 지 궁금할 정도였다.
산실 앞에 도달하자 마침 어의 설주가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의 뒤로는 몇 명의 의녀가 뒤따르고 있었다. 최근 들어 고려에서는 의녀의 활약이 상당했다.
올해부터 성균관 등에서 의학을 배운 이들이 하나둘 배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번 출정에 나선 군의관들 대부분이 그때 이후로 양성된 이들이었다.
“산모는 괜찮은 것인가?”
“원자 아기씨를 출산하실 때와 비교하면 상당히 양호하옵니다. 그간 건강에 신경을 많이 쓰신 덕분인 것 같사옵니다.”
“하아··· 다행이오.”
“소신의 예상으로는 한 시진 이내에 출산을 마치실 것 같사옵니다.”
생각보다 너무 빨랐다.
지난번에 원자를 볼 때는 산실에서 거의 일곱 시진 가까이 고생을 했었다.
내가 그걸 언급하자 초산이 아닌 경산부(經産婦)라 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더구나 가진이 현재 겪고 있는 산통이 지금 막 시작된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의녀에게 들어보니 적어도 두어 시진 전에 산통이 시작되었다고 하옵니다.”
“이런 미련한 사람 같으니···.”
대충 짐작 가는 게 있었다.
산실로 옮기는 순간 내가 올 것이라 생각한 탓에 거처에서 참았던 것 같았다.
고려의 명운을 건 출정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기에 신경 쓸 것이 많아 요즘의 내 일정은 무척이나 빡빡했다.
잠시의 시간이라도 방해하지 않으려고 그녀 나름대로 애를 쓴 것 같았다.
나는 이왕에 설주를 만난 김에 그가 맡고 있는 의학 교육에서 부족한 부분은 없는지 물었다. 어차피 한 시진 가까이 기다려야 하는데 멀뚱거리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그러자 그는 난처한 빛을 띠었다.
“아직 소독에 중요성을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고 있사옵니다.”
“의술을 펼치는 이들은 어떻소?”
“사려 깊거나 경험이 많은 이들은 기존의 환자 사례를 통해서 어느 정도 이해하나 일부는 병균을 괴력난신과 같은 취급 하며 오히려 질타하고 있사옵니다.”
설주를 의학 박사로 만든 후.
가장 크게 노력을 기울이는 부분이 의료진의 양성이었다. 그리고 그다음이 바로 청결도의 유지였다. 전염병을 최소한으로 막으려면 그게 최선이었다.
하지만 예상대로 쉽진 않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병균.
그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그나마 설주와 어의들은 내가 긴 시간을 들여서 설명하며 설득해낸 이들이었다.
이건 어명으로 믿으라고 지시를 내릴 수도 없기에 정말이지 막막했다.
“성균관에서 배우는 이들이 점차 고려 전역으로 하나둘씩 퍼져나가면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옵니다.”
“그대만 믿고 있겠소.”
고려 사람들이 씻는 것을 워낙 좋아하는 편이지만, 그래도 강조해서 나쁠 것이 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충분히 이해가 되는 면도 없지는 않았다.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펑펑 나오는 시대가 아니다.
동네에서 우물을 가진 집은 특별했고 맘처럼 쉽게 물을 접하기 어렵다.
“설주 어르신, 어서 들어와 보셔야 할 것 같사옵니다.”
그때 의녀 하나가 산실에서 나왔다.
설주는 서둘러 산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공간을 나누기 위해서 발을 늘어뜨려 구분해놨다. 그 안에 있는 가진을 접할 수 있는 것은 의녀뿐이었다.
설주는 밖에서 전달해주는 증상을 듣고 지휘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는 다시 기다려야 했다.
멍하니 서 있던 그 순간만큼은 북벌이고 뭐고 전혀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겨우 몇 걸음 너머에서 고통에 겨워 신음을 터트리고 있는 가진의 목소리가 머리에서 계속 맴돌고 있었다.
적당히 좀 하고 나와라!
이런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다.
그걸 듣기라도 한 것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산실의 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의녀들과 어의인 설주마저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여러 상상이 되고 있을 무렵에 산실에서 다시 아이의 우렁찬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그 소리가 조금 이상했다.
자세히 들어보니 소리가 겹치는 것이 한 명이 내는 소리는 절대 아니었다.
그게 의미하는 것은 한 가지였다.
“응애!”
“으···응애!”
잠시 후에 산실의 문이 열리자.
의녀 두 명이 각자 품에 아이를 안고 밖으로 나왔다. 얼핏 이야기를 들어 보니 왕자와 공주라고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쌍둥이에 대한 미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우습게도 쌍둥이가 태어났는데 성별이 다를 경우에는 전생에 부부의 연을 채우지 못한 연인이라고 믿는 이들이 많았다.
그래서 근친끼리 붙어먹는다는 말도 안 되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나도 여기 와서 처음 듣는 소리였다.
당연히 그딴소리를 하는 것을 두고 볼 생각은 없었다. 만약에 그런 말을 하는 이는 입을 꿰매버릴 거라고 다짐했다.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이나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뻔히 그려졌기 때문이다.
온갖 소문이 뒤따라올 것이다.
하지만 저 아이들은 복덩이였다.
무사히 잘 커 준다면 앞으로 나와 가진이 더는 압박을 받지 않아도 된다.
2남 1녀 이상 바라는 것은 내가 종마도 아니고 솔직히 욕심이라 생각되었다.
어쨌든 한 번에 두 아이를 얻게 되었으니 기분은 정말 좋았다.
‘이거야 말로 일거양득이로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