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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103화 (103/202)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103

장사의는 상당히 평범했다.

당연히 그는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형들과 모든 면에서 비교당했다.

집안에서 맏이인 장사성은 자신만의 세력을 모아서 한 나라의 왕이 됐다.

그리고 둘째인 장사덕은 용맹한 장수가 되어 모든 병사가 우러러보고 있었다.

그렇다고 머리가 좋은 것도 아니다.

셋째 형인 장사신은 어린 시절부터 천재라 불리며 꾀주머니 역할을 했다.

장사의가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집안에서 그는 한량에 가까운 존재였고 대부분의 나날을 술과 함께 보냈다.

어쩌면 그게 장점일지 몰랐다.

설명하기는 어려우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그의 주변엔 사람이 많았다.

장사의는 사람의 마음을 쉽게 잡았다.

아마도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매력 때문인 것 같았다. 실제로 그와 대화를 나누면 어렵던 문제도 쉽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욕심이 많지도 않았다.

그가 고려에 와서 하는 일이라고는 개경과 시전을 구경하는 게 전부였다.

마음 맞는 이들과 술잔을 기울이는 것을 제외하면 넓은 세상을 구경하는 것이 그의 유일한 취미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고려는 기대 이상이었다.

“허허. 이곳은 참 신기하구나.”

가장 눈에 띄는 곳은 세책점이었다.

장사의가 살던 곳에 책방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곳처럼 평범한 양인이 드나드는 그런 장소는 아니었다.

고려의 세책점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삼삼오오 모여서 책을 보고 있었다.

도대체 뭘 보는 건지 궁금해서 살펴보았는데 알 수 없는 글자만 가득했다.

“저건 무슨 글자인데 저리 생긴 것인가?”

장사의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고려에서 호위로 붙여준 무사에게 물었다.

그가 자신에게 붙은 감시라는 것은 알고 있으나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남들이 보면 거의 친우처럼 보일 정도로 장사의는 무사들과 거리낌 없이 지냈다.

“얼마 전에 전하께서 직접 창제하신 훈민정음이라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글자도 만드셨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미 널리 사용 중인 문자가 있었다.

그런데 굳이 새로 글자를 만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그런 고정 관념은 반나절도 안 되어서 바뀌었다.

직접 그 글자를 배워보니 이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것인지 알 것 같았다.

말하는 대로 쓸 수 있다.

그건 상상도 못 해본 일이었다.

장사의가 아주 어린 시절에는 집에 돈이 없어서 글을 배우는 것이 꽤 힘들었다.

그나마 형님들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후부터는 그런 염려는 없었으나 그 시절의 동무들 대부분이 글을 떼지 못하였다.

하지만 고려는 완전히 달랐다.

배포된 지 얼마 안 된 글자였다.

그런데 동네 곳곳에 한글로 낙서가 되어 있었고 책을 보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이런 일이 가능할 거라 상상도 못 했다.

아마도 이때부터 그는 소설이란 것에 완전히 빠져들게 된 것 같았다.

기묘한 이야기들이 많았다.

한번 책을 잡으면 놓기 어려웠다.

인질(?)로 오게 된 고려였으나 나름 재미있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던 중에 그는 나관중이 고려에 와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우연히 본 책 덕분이었다.

고려에서 가장 인기가 좋다던 그 책은 인쇄될 때마다 완판을 기록할 정도였다.

어렵게 구한 책의 표지에 적힌 나관중의 이름을 본 장사의는 깜짝 놀랐다.

“정말 내가 아는 호해산인 그분이 여기 고려에 있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현재 그분은 고려 최고의 작가라 불릴 정도입니다.”

“자네가 말하는 작가라는 말이 글을 쓰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맞나?”

“맞습니다.”

“허허. 혹시 어디 사는지 알고 있는가?”

장사의와 나관중은 꽤 친했다.

장사성 아래에서 일할 때부터 종종 장사의를 찾아와서 술을 기울였던 이였다.

자라온 환경도 처지도 많이 달라서 두 사람이 가진 공통점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시를 읽고 풍류를 좋아하며 술을 즐긴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장사의는 나관중을 찾아갔다.

수소문을 할 필요도 없는 것이 현재 그가 작업실로 쓰는 곳은 문화부의 별관이었다.

어서 다음 편을 내놓으라고 저택까지 직접 찾아오는 이들이 적지 않아 집에도 거의 못 들어갈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나관중은 꽤 초췌했다.

하지만 눈빛 하나는 형형했는데 자료를 읽는 것인지 인기척이 나도 서책 더미 사이에 앉아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장사의는 그런 그의 앞으로 다가가서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그제야 고개를 든 나관중은 그를 보고 벌떡 일어났다.

“어허! 이게 누군가?”

“오랜만입니다. 그간 잘 지내셨죠?”

“굶주리지 않고 글만 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런 호사가 없지. 그런데 자네가 어찌 이곳에 있는 건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나관중이 고려에서 관직을 얻어 일하고 있으나 그에게 모든 것을 말해줄 수 없다.

몇 개월 뒤에 진행될 일은 고려에서도 아직 극비에 부치고 있는 비밀이었다.

평소처럼 유랑 중이라고 대충 얼버무리자 나관중은 지레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또 가출한 것인가?”

“가출이라니 말씀이 너무 심하십니다.”

“자네 방랑벽이 워낙 유명하지 않은가. 틈만 나면 곳곳을 유랑하고 다니더니 그 병은 아직 못 고쳤나 보군. 이곳에는 얼마나 머물 생각인가?”

“글쎄요. 아무래도 당분간은 개경에 머물 예정이니 술 상대나 자주 해주십시오.”

“하하. 개경이 조금 특별하지.”

장사의도 동감할 수밖에 없었다.

상당히 많은 곳을 돌아다닌 경험이 있으나 개경 같은 곳은 보지 못했다.

벽란도부터 개경까지 깔려 있는 도로며 마차 그리고 시전을 보면 마치 이곳만 완전히 다른 세상인 것 같았다.

“그나저나 지금 쓰고 계시는 삼국지 연의 다음 편은 언제 나옵니까?”

“자네도 그걸 보고 있는 건가.”

“요즘 고려에서 가장 인기 좋은 소설이니 당연하지요. 고려의 태조는 언제까지 궁예 밑에 있는 건지 궁금해 죽겠습니다.”

“미리 알려주면 재미없지.”

역사를 책으로 쓰는 것이지만,

생각보다 그 시절의 이야기를 아는 이들은 별로 없었다. 더구나 장사의는 대주국 출신이니 더 그럴 수밖에 없다.

“요즘 글을 쓸 시간이 너무 부족해서 미칠 지경이네.”

“뭐가 그리 바쁜 겁니까?”

“내가 나름 고려의 문화부에서 높은 관직에 앉아 있지 않은가. 인쇄하기 전에 검토해야 하는 책이 이렇게 많네.”

나관중의 옆에는 수십 권의 서책이 놓여 있었다. 그걸 보는 그의 눈빛은 애증이 가득한 느낌이었다. 책을 읽는 것은 좋으나 많아도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장사의는 그중에서 가장 위에 놓여 있던 서책 하나를 꺼내서 살펴봤다.

“흐음··· 이건 견문록인 것 같은데 이런 것도 인쇄를 합니까?”

“전하께서 얼마 전에 내리신 어명이 있어서 그렇지.”

“어명이요?”

“요즘 견문록에 관심이 많으시다네. 그런데 현재 구할 수 있는 서책은 대부분 수준 미달이라 난감한 상황이지.”

모험에 관련된 글을 찾아내야 했다.

하지만 대부분 너무 허황되거나 수준이 너무 낮아서 도저히 인쇄소에 넘길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장사의는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직접 쓰시면 되지 않습니까?”

“내가 경험이 있어야지. 대주국 밖으로 나온 게 고려가 처음일세. 경험해보지 못한 것을 어떻게 글로 쓴단 말인가.”

“삼국 시대는 가봐서 쓰시는 겁니까?”

“하하. 연의랑은 또 다른 거지. 그리고 안 그래도 연의 연재가 늦다고 난리인데 어찌 한눈을 팔 수 있단 말인가. 그러지 말고 자네가 써보는 것은 어떤가.”

괜히 하는 말은 아니었다.

장사의가 처음 들어올 때부터.

마침 잘 되었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나관중이 아는 사람 중에 장사의 만큼 세상 경험이 많은 이가 없었다.

실제로 그는 어린 나이에 교역로를 따라서 서역도 다녀온 경험도 있었다.

“제가 어떻게 글을 쓴단 말입니까?”

“누구는 태어날 때부터 책을 썼다던가. 그냥 자네가 여기저기 배회하며 경험했던 것을 그대로 적으면 되니 걱정할 것 없네.”

“제가 비록 한글을 익혔다지만, 고려말에 능숙한 것도 아닌데요.”

“나도 마찬가지일세. 완성되면 나중에 훈민정음으로 옮겨 적어주는 이가 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네”

도무지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관심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반년 가까이 고려에서 하는 일도 없이 지내기 지루하긴 했다.

차라리 소일거리 삼아서 글이나 써볼까 하는 마음도 없지는 않았다.

나관중은 모르고 있으나 유랑 중에 일기처럼 써놓은 글이 적지 않기는 했다.

언제 어느 때나 기록이 가능한 연필이 보급된 후부터 생긴 습관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까짓거··· 써보죠.”

*

장사의가 쓴 견문록은 금방 완성됐다.

그가 한 번 글을 쓰자 지금까지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건지 순식간이었다.

교역로를 따라 움직이며 직접 경험하고 느꼈던 것을 적다 보니 그가 쓴 글에는 생동감이 글 곳곳에서 보일 정도였다.

산문이라고 보기는 조금 어렵고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나 하멜의 표류기 같은 느낌이 물씬 들었다.

그렇게 쓰여진 초고는 나관중을 통해서 나한테까지 전달되었다.

“오호라, 이거 제법인데?”

하도 권하기에 어쩔 수 없이 읽었다.

그런데 장사의가 쓴 글의 퀄리티는 생각 이상이었다. 묘사가 워낙 뛰어나서 직접 그곳에 가본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다른 형제에 비해서 굉장히 저평가받고 있던 그에게 이런 재주가 있는지 몰랐다.

그가 쓴 글은 정확하게 내가 바라던 것이었다. 나관중에게 견문록과 같은 서책을 찾으라고 지시 내린 이유가 있었다.

[모험에 대한 로망]

그걸 어떻게든 키워주고 싶었다.

바다 너머를 보며 두려워하면 안 된다.

오히려 무엇이 있을까 궁금해하고 심장이 두근거려야 한다. 아무리 좋은 배가 있어도 선원 없이 배가 움직이지 않는다.

거기에 부와 명예는 덤이었다.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이 했던 것처럼 온갖 지원을 해주고 보상도 넉넉하게 할 거다.

목숨을 걸고 떠나는 이들에 대한 예우이며 강력한 동기부여가 필요했다.

“거기 아무도 없느냐.”

“시키실 일이 있으십니까?”

“이걸 문화 정랑 나관중에게 다시 가져다주고 그대로 인쇄하라 전하라.”

환관은 책을 받아서 곧장 떠났다.

최근에 그와 비슷한 책이 여럿 나왔다.

하지만 글자에만 매달려 있지는 않았다.

이미 개경에서는 조풍서와 같은 이야기꾼이 모험에 관련된 여러 이야기를 맛깔나게 꾸며서 들려주고 있었다.

당연히 대부분이 내 머리에서 쥐어짜고 있는 내용이었다.

신밧드부터 인디아나 존스까지.

어린 시절부터 영화와 책을 통해 보고 읽은 대부분을 엮어서 만든 것들이었다.

심지어 고무고무 인간이 나오는 만화도 일부 차용해서 요즘 아이들은 태평양에 대한 로망이 조금씩 높아지고 있었다.

당연히 거기에 쓸 배도 조선 중이다.

현재 만들고 있는 배는 다섯 척.

동오의 상단이 조선 중인 배와 별개로 원양 항해에 맞춰 개조된 배였다.

더 많이 만들고 싶어도 그게 한계였다.

곧 있을 정벌에 들어가는 비용이 적지 않았고 아직 초창기라 검증되지 않은 배를 대량으로 만들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 서달이 태평전에 들어왔다.

서북면의 이방실 아래에 배치되어 있던 그는 현재 추가 모병의 담당자였다.

올해 모병 된 2만 명은 변안열이 맡아서 훈련 중이었기에 구분할 필요가 있었다.

서달은 내게 허리 굽혀 인사를 한 후에 현재 모병 중인 현황을 보고했다.

“현재 중부와 남부를 합쳐서 모병된 이는 5천여 명에 불과하나 동북면에서 1만 가까이 모병이 완료되었다고 하옵니다.”

“올 초에 있었던 가뭄 때문이오?”

“그런 것으로 생각되옵니다. 아무래도 상황이 그리 좋지는 않다고 하옵니다.”

아무리 구휼미를 보냈어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함이 많았다.

올해 조세로 걷은 양곡을 더 보내주긴 하겠으나 내년에 닥칠 보릿고개를 피하기 위한 장정들이 적지 않은 것 같았다.

“서북면의 상황은 어떻소?”

“최근에 새로 유입된 유민 상당수가 모병에 참가할 것 같사옵니다.”

추가 모병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몇 개월 전에 2만 명의 병력을 이미 모집했기에 기존과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그렇다고 아무나 뽑을 수도 없었다.

지원해도 떨어지는 이들이 제법 많았는데 그래도 얼추 목표치는 맞출 것 같았다.

이번 모병까지 완료되면 내가 처음에 잡았던 목표보다 훨씬 많은 10만 명의 병사가 완성된다.

몽골과의 40년 전쟁 이후.

유례없던 병력의 증강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훈련도감에서는 이번 정벌에 쓸 전술을 짜고 있었고 감찰사는 심양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있었다.

그렇게 하나씩 준비를 하는 사이.

유난히 매서웠던 겨울은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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