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102
당연히 도당은 발칵 뒤집혔다.
다른 이도 아니고 황제의 조서를 사신이 보는 앞에서 찢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대부분의 이들은 후환을 두려워했다.
그런 이들의 대부분 문신이었는데 원나라에 의해 긴 시간 학습된 공포는 쉽게 지워지진 않는 것 같았다.
그러나 무신의 반응은 달랐다.
그들은 오히려 후련한 표정이었다.
상당수의 무관이 원나라로 출정을 다녀온 이후로 대국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지워버린 지 오래됐다.
아니 오히려 자신감이 넘쳤다.
숫자만 많은 오합지졸.
그게 원나라의 현실이었다.
아마 나도 몇 년 전이었으면 이렇게 막 나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계속 원나라 황실에게 끌려다닐 수는 없었다.
언젠가는 손절해야 했고 나는 그걸 지금 이 순간이라고 판단한 것이었다.
“잘하셨습니다. 아주 잘하셨어요.”
가진도 내 의견에 동의했다.
아니 오히려 침착한 것은 나였다.
그녀는 언성을 꽤 높였는데 그런 모습은 상당히 긴 시간 함께한 나도 처음 봤다.
정말 어렵게 태어난 나이 어린 원자를 대도로 보내라니 뚜껑이 열릴 만도 했다.
의도가 뻔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고려는 겉으로 보면 납작 엎드려 있지만, 대마도와 쌍성총관부를 정벌하였다.
더군다나 모병을 계속하고 있는 탓에 원나라에서도 위기감이 든 것 같았다.
어떻게든 억제할 인질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무리수를 둔 것이었다.
현재 원나라에는 뚤루게가 없었다.
마지막 희생자는 나였고 그 이후로는 왕족의 씨가 말라서 보낼 사람도 없었다.
그나마 남은 이는 내가 즉위하자 곧장 원나라로 도망간 덕흥군이 전부다.
충선왕의 서자이자 나의 삼촌.
덕흥군의 존재감은 거의 없었다.
인질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 오히려 고려는 그를 찾아내서 없애려 애썼다.
후환을 없앨 필요가 있다는 감찰사와 김첨수의 판단 때문이었다.
“회임 중이니 그만 고정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조금 걱정될 정도였다.
씩씩거리고 있는 가진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어떻게든 노력해야 했다.
아직 회임한 지 얼마 안 되었다.
안정을 취하는 것이 중요한 시기였다.
그제야 가진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후우··· 전하께서 무슨 수를 쓰더라도 원자를 지켜주실 거라 믿고 있겠습니다.”
“당연한 일이오.”
한동안 곁을 지켜주던 나는 오후에 잡은 약속이 있기에 일어나야 했다.
일을 저질렀으니 수습은 해야 했다.
당장 오늘만 하더라도 이른 아침부터 도평의사사를 열어서 혹시 모를 원나라의 움직임을 미리 대비해야 했다.
고려는 오늘부로 전시 체제가 되었다.
일반 병사에게는 안타까운 일이나 휴가를 나왔던 이들과 교대로 개경에 내려와 있던 북부의 병력도 모두 다시 복귀시켰다.
회의 결과에 따라 전방에 위치한 서북면과 동북면에도 원나라를 주의 깊게 지켜보라는 전령도 보낸 상태다.
“태평전으로 가자.”
가진의 처소에서 나온 나는 성큼 거리는 걸음으로 태평전을 향해 걸었다.
그녀를 진정시키느라 조금 늦은 감이 있었기에 서둘러서 움직여야 했다.
오늘 잡은 약속은 대주국에서 온 시라부카가 요청한 면담이었다.
지금 상황이 여러모로 애매했지만,
이미 잡은 약속을 미룰 수는 없었다.
잠시 후에 태평전에 들어서자 세 명의 남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눈에 누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덩치가 큰 이가 장사덕일 테고, 나이 많은 남자가 사신으로 온 시라부카인 것 같은데···.’
하지만 나머지 한 명은 감이 안 왔다.
감찰사의 보고에 의하면 성왕의 동생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머리가 좋다고 알려진 장사신인지 막내인 장사의인지 구분은 안 되었다.
“바쁘실 텐데 시간을 내어주셔서 감사하옵니다. 이쪽은 성왕 전하의 아우님들이십니다.”
“소장은 장사덕이라 하옵고 여기는 제 막내 동생인 장사의입니다.”
“먼 길을 오느라 고생하셨소.”
나는 일단 그들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러는 중에도 요즘 상당히 명성을 떨치고 있는 장사덕을 유심히 살폈다.
최근에 대주국이 점점 더 영토를 넓히는데 그가 세운 공이 적지 않았다.
탐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혈연으로 맺어진 성왕이 있기에 나는 잠시 그 욕심을 내려놔야 했다.
그리고 장사의는 특출난 곳은 없으나 사람이 좋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확실히 인상 하나는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장군의 명성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소.”
“가당치도 않사옵니다. 소장은 그저 성왕 전하와 대주국을 위하여 작은 재주를 보태고 있을 뿐이옵니다.”
“얼마 후면 팔관회인데 무슨 일로 과인을 따로 만나자고 한 것이오?”
“성왕 전하께서 보내신 서신이 있사오니 먼저 읽어보시는 것이 어떠하시옵니까?”
내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시라부카는 품에서 장사성이 보낸 서신을 꺼내서 신소봉을 통해 내게 전달했다.
그걸 펼쳐본 나는 참 공교롭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왜 하필 이 순간일까.
하늘이 고려를 돕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계속 지지부진하던 산동성 공략을 장사성이 결심한 것이다.
만약 대주국이 움직이면 고려는 원나라의 관심에서 조금 멀어지게 된다.
하지만 이게 공짜는 아니었다.
“아무래도 정면으로 붙자니 피해가 상당할 것 같아서 잠시나마 원나라의 시선을 잠시 돌릴 필요가 있사옵니다.”
장사성이 바라는 것은 간단했다.
핵심만 정리하자면 대주국이 산동성을 공격할 무렵에 고려도 같이 움직여 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렇다고 전면전을 해달라는 것은 아니고 일종의 게릴라 작전이었다.
“고려의 해군을 보내주시어 대도와 인접한 직고(直沽, 톈진)를 공격하여 주시면 훨씬 더 수월해질 것이옵니다.”
대충 그들이 원하는 바는 알겠다.
우리가 직고에서 난동을 부리면 산동의 병력 일부가 움직일 수밖에 없다.
직고는 대도에서 항구로 활용하는 도시인데 걸어서 이동해도 4~5일 거리라 상당히 민감한 곳 중의 한 곳이다.
“혹시 오국공 탕화도 이 계획에 참가하는 것이오?”
“아니옵니다. 현재 오국공은 원제국의 마지막 방패라 불리는 차칸 테무르의 수하인 이사제의 공세를 막는 것만으로도 버거워하고 있사옵니다.”
차칸 테무르는 상당히 유명했다.
홀로 원나라의 멸망을 10년쯤 늦췄다는 평가가 있을 정도의 명장이다.
나도 당연히 그의 이름은 잘 알고 있다.
워낙 유명한 중국 소설에 나와서 그런 게 아니라 원래의 역사에서 차칸 테무르는 주원장의 건국에 꽤 영향을 줬다.
같이 손을 잡고 싸우지는 않았지만,
서로 칼을 겨누고 제대로 붙지도 않았다.
일종의 불가침 협상이 있었던 탓인데 차칸 테무르는 주원장의 경쟁 세력을 차례대로 때려 부쉈고 그게 기회가 됐다.
하지만 이번 역사에서는 그렇게 흘러가고 있지 않았다.
“오국공이 이사제를 상대하고 있다면 혹시 산동성에 차칸 테무르가 있는 것이오?”
장사덕은 그렇다고 답을 해줬다.
그제야 상당수의 의문이 일거에 풀렸다.
지금까지 장사성이 산동성을 정벌하지 못하고 미뤄온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내가 그 이야기를 꺼내자 장사덕은 불편한 기색을 억지로 감췄다.
“현재 산동성에 모인 관군만 15만 명인데 그들을 이끄는 것이 차칸 테무르라 쉽게 볼 수 없는 상황이옵니다.”
마지막 남은 정병이라고 봐도 된다.
그가 무너지면 원나라도 끝장나게 된다.
고려가 움직여야 할 이유이기도 했다.
아무리 토크토아가 좌천당한 뒤에 정예 병력이 흩어졌다지만, 차칸 테무르의 병사는 절대로 쉽게 볼 수 없었다.
“하오나 자신 있사옵니다!”
장사덕은 맺힌 게 많아 보였다.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으나 자존심이 상한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한 차례 붙었던 게 아닐까.
그리고 그 결과가 어땠을지 뻔했다.
아마 대주국의 패배였을 것이다.
산동성은 그만큼 중요했다.
그곳만 차지하면 대도까지 남은 거리는 불과 1,000리에 불과하게 된다.
나 같아도 산동성을 빼앗기면 턱 밑에 날카로운 칼이 닿는 기분이 들 것 같았다.
하지만 우리가 얻는 소득은 없었다.
“대주국은 산동성을 얻으나 고려가 얻을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지 않소?”
“송구하오나 어제 원나라의 사신이 대노하며 돌아갔다는 사실을 들었는데 나쁘지 않은 선택이실 것이옵니다.”
“하하. 그 소식이 벌써 퍼진 것이오?”
하지만 미소는 오래가지 않았다.
잠시 정색하며 나는 시라부카에게 그런 걱정은 해줄 필요가 없다며 주의를 줬다.
애초에 내 계획에 대주국은 없었다.
고려 스스로 헤쳐나갈 수 있다고 생각해서 행동한 것이었다.
“소신이 실수를 하였사옵니다. 앞으로 주의하겠사옵니다.”
“그렇다고 마음에 담아두진 마시오.”
“하오면 성왕 전하께 어찌 답하면 되온지 여쭤봐도 되겠사옵니까?”
“대주국이 산동성을 치는 것과 동시에 고려도 심왕의 지위를 되찾아 올 것이오.”
북벌에 나서겠다는 의미였다.
현재 그곳은 한때 고려의 태자였던 연안군 왕고의 손자인 토크토아부카가 제5대 심왕으로 즉위한 상태다.
심왕은 나의 조카이기도 했는데 역사에서 그의 행보를 보면 악감정은 없었다.
기황후가 원 순제를 꼬셔서 심양왕을 고려의 왕으로 옹립하려 할 때도 한사코 마다하며 사양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이후에 북원에게 고려의 왕권을 주장하기는 했으나 그 무렵의 공민왕은 노국대장공주를 잃고 반쯤 미쳐있었다.
‘어쩌면 생각보다 쉽게 접수할지도 모르는 곳이지.’
심양 지역에 거주하는 이들의 상당수가 고려 유민이다. 더구나 변안열처럼 고려로 넘어와 충성을 맹세한 이들도 많았다.
언젠가 원래 우리가 가지고 있던 땅을 수복하기 위해서 북벌을 할 생각이었는데 지금이 기회인 것은 확실했다.
아직 고려의 영토는 천리장성에 머물러 있었다. 내가 알던 한반도 지도 그대로 복원하려면 한참 올라가야 한다.
원래는 홍건적의 1차 침입을 막은 뒤로 어느 정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때는 홍건적의 잔당을 토벌하기 위해 진군한다는 명분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전쟁은 남의 땅에서 하는 게 옳았다.
지금의 국경선에 요새와 성을 만드는 이유는 그곳을 최종 방어선이라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내 목표는 계속되는 외침을 천리장성 도달 전에 막는 것이다.
“정녕 심양을 치실 생각이시옵니까?”
“못 할 것 같소?”
“그게 아니라··· 전혀 생각지 못한 터라 조금 놀랐사옵니다.”
“심양이면 충분하옵니다.”
장사덕이 말끝을 흐리자 시라부카가 끼어들어서 만족스럽다는 결론을 냈다.
그곳에서 대도까지의 거리는 산동성에서 대도까지의 거리와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충분히 원나라에서도 반응이 나올 것이다.
“고려와 대주국이 양쪽에서 쳐들어가면 황제가 옥좌에 앉아서 무슨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지 않소?”
“크하하. 정말 보고 싶은 모습이옵니다.”
“언젠가 직접 볼 날이 올 것이오.”
내 말을 들은 장사덕은 눈을 반짝였다.
이 계획의 끝이 어디까지인지 상당히 궁금한 눈빛이었다. 고려에 오면서 가져온 책략은 동생인 장사신의 작품이다.
하지만 정작 뚜껑을 열어보니 주도권은 어느 사이에 고려 쪽으로 넘어가 있었다.
그런데 고깝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냥 자연스럽게 흘러서 그렇게 되었다.
외교에 능숙한 시라부카마저 눈 뜨고 당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다. 내가 매년 만나는 사신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따로 배우지 않아도 저절로 외교 실력이 늘어날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다.
잠시 이번 책략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가장 중요한 문제를 아직 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주국은 대략 언제쯤으로 예정하고 있소?”
아무리 좋은 작전이 있더라도.
시기가 맞지 않으면 아무 소용 없다.
이번 책략은 두 나라가 동시에 때를 맞춰서 시작해야 한다. 만약 한 곳이라도 삐끗하면 반대쪽이 피해를 볼 것이다.
당연히 시작은 고려부터 할 예정이다.
일단은 산동성에서 병력 일부를 이동하게 만드는 것이 목표였고 그런 뒤에 비어있는 산동성을 장사덕이 칠 것이다.
우리는 심양에서 손을 털 생각이었다.
괜히 길게 끌어봐야 응원군으로 출발한 병력이 우리 쪽으로 올 가능성이 커진다.
“이제 곧 북부는 겨울이니 봄꽃이 필 무렵이 좋을 것 같사옵니다.”
대충 반년 정도 남았다.
그 정도면 준비할 여유가 충분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심양을 칠 수는 있으나 그 이전에 내년에 예정되어 있는 모병을 마쳐야 했다. 전쟁이 나면 당연히 병사가 되려는 이가 대폭 줄어들 게 뻔했다.
나는 일단 그 일정에 동의했다.
“과인도 동의하는 바요.”
“그럼 성왕께 그리 전하겠사옵니다. 그리고 약속의 증표로 동생인 이 녀석을 고려에 남겨 놓겠사옵니다.”
장사덕은 아우인 장사의를 고려에 남기는 것으로 양국의 신뢰를 다지려고 했다.
애초에 거기까지 이야기가 되어있던 건지 지금껏 한마디도 안 하고 있던 장사의는 풀 죽은 모습으로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