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101화 (101/202)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101

동오가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아마 지경탁과의 경쟁 때문일 것이다.

비교적 짧은 거리를 오가며 왜국과 무역을 시작한 지경탁은 점점 더 고려 최고의 상단 자리를 굳히고 있었다.

겨우 손에 닿을 거리까지 좁혔지만,

다시 격차를 벌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동오도 조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그의 상단에서 대형 선박을 만들 생각이라니 마침 잘 됐다.

원래의 역사에서는 조선이 세워지며 상당히 폐쇄적으로 바뀌었으나 이번에는 반대로 세계를 향해 나가볼 생각이었다.

당장은 힘들더라도 준비는 해야 했다.

고려로 와서 가장 절실하게 바라는 것이 태평양 너머에 있기 때문이었다.

‘쉽지 않은 여정이긴 한데···.’

불가능에 가까운 영역이기는 했다.

지금도 마두라이까지 상선을 보내고 있으나 절대 쉬운 여정은 아니었다.

기존에 비해 상당히 많이 개선되었으나 아직 중간에 난파되는 배도 있었고 풍랑을 피하느라 시간도 오래 걸렸다.

북미는 마두라이보다 훨씬 멀다.

적어도 두 배에서 세 배 이상이 걸리는 여정이고 베링 해를 통해서 간다고 하더라도 중간에 보급은 힘들 것이다.

50년 후쯤 거대한 규모로 떠나는 정화의 함대도 몇 차례 도전 끝에 오스만 제국과 모가디슈에 도달하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도전해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

아메리카 대륙에 있는 고추와 감자 그리고 고구마와 옥수수를 들여와야 했다.

고려는 현재 구황 작물이 절실했다.

언제 대기근이 발생할지 모른다.

실제로 올해 동북면에 큰 기근이 들어서 상당량의 구휼미가 보내졌다.

현재 구황작물로 구분되는 것은 기껏해야 토란과 조, 메밀 같은 것이 전부였다.

그중에 토란은 알레르기 반응이 나올 수 있기에 적극적으로 내세우기도 어렵다.

개인적으로는 고추가 절실했다.

허여멀건 김치도 이제는 질렸다.

고추만 있더라도 해먹을 수 있는 음식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닭볶음탕과 떡볶이 그리고 얼큰한 김치찌개까지 생각만 해도 침이 고일 지경이었다. 거기에 아락주까지 곁들이면 천국이 따로 없을 것 같았다.

돌솥에 지은 밥에 고추장 팍 넣어서 참기름에 비벼 먹어도 대만족이다.

이건 무조건 해내야 하는 일이었다.

잠시 그런 생각을 하던 나는 저절로 고이는 침을 삼키며 설계도를 살펴봤다.

그런데 생각보다 완성도가 높아 보였다.

기존의 쾌선에 비해서 보완된 곳이 곳곳에서 엿보였다. 가장 큰 변화는 파도를 헤치고 나가야 하기에 선수가 상당히 높아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설계도는 누가 만든 것이오?”

“마두라이와 원나라 등에서 최고의 조선 기술자를 데리고 만든 것이옵니다.”

“그런 기술자들이면 쉽게 올 이들이 아니었을 텐데 수완이 좋구려.”

“지금까지 모은 재물이 많다는 게 이럴 때는 상당히 큰 도움이 되었사옵니다.”

역시 돈이 좋기는 했다.

하지만 이게 완성이라 볼 수 없었다.

기존에 쾌선을 만든 경험이 있지만,

아예 새롭게 배를 만드는 수준이었다.

실제로 동오가 꿈꾸는 배가 완성되려면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나는 사심을 가득 담아서 동오의 이번 계획을 응원하기로 했다.

“과인도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테니 맡아서 진행을 해보시오.”

*

여름은 순식간에 지났다.

동오가 새로운 형태의 배를 만들겠다고 말한 것도 벌써 2개월 전의 일이다.

그사이에 일이 꽤 많이 진척되어 설계는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리고 동오의 상단은 내가 직접 쓴 서신을 가지고 마두라이 술탄으로 떠났다.

내 답변은 ‘Yes’였다.

탄야와 사돈이 되기로 했다.

황족인 가진도 원자의 의무와 마두라이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기에 동의를 해줬다.

다만, 아직 아기에 불과하니 본격적인 혼례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했다.

마두라이가 반격을 시작하고 있다고 하나 아직 불안한 정세인 탓도 있었다.

그러는 사이 하윤린도 바빠졌다.

지난해 인쇄기를 만든 그는 현재 장거리 항해에 필요한 것들을 만들고 있었다.

조금 더 정확하게 나침반을 개선하고 해수를 끓여서 담수로 만드는 증발식 장치도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풍랑을 이겨내도 식수가 부족하면 끝장나기에 상당히 중요한 문제였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장거리 항해에서 엄청나게 많은 희생을 일으킨 괴혈병은 어떻게 이겨낼지 안다는 거다.

그러는 사이에 팔관회가 다가왔다.

매년 참석하는 나라와 상단이 늘어나고 있는 탓에 올해도 고려는 행사 준비를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제 팔관회는 고려만의 행사가 아니라 동아시아 경제의 중심이 되고 있었다.

중계 무역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고려는 각 상단의 거래를 돕고 있었다.

예를 들면 왜국의 상단이 탐라에 상품을 놓고 가면 보관하고 있다가 절강의 상인이 오면 넘겨주는 방식까지 나왔을 정도다.

그렇다고 빈 배로 오가지는 않았다.

반대로 절강의 상인도 물건을 내려놓고 가면 고려나 왜국의 상단에서 가져갔다.

어차피 각 상단을 대표하는 이가 탐라에 머물기에 창고를 대여해주는 수준이었다.

그렇게 버는 소득이 적지 않았다.

물품마다 매겨지는 수수료가 다른데 전체 거래 금액의 1~2할이 고려의 몫이다.

거기에는 상품을 보관하고 지켜주는 대가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래도 상단들의 만족도는 상당히 높았다.

항해하는 거리가 대폭 줄어든 탓이다.

당연히 도당도 상당히 바빠졌다.

다들 이 무렵이 되면 얼굴이 환해졌다.

각지에서 온갖 희귀한 물건이 들어오는 시기인데 그걸 내가 다 갖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의 진귀한 물건이 경매로 넘어갔다.

하지만 정작 행사를 준비하는 문하시중 백문보는 눈코 뜰 사이 없이 바빴다.

“대주국의 성왕이 이문(理問) 시라부카를 보내 토산물을 받쳤사옵니다.”

“부족하지 않게 잘 대접하시오.”

“팔관회 전에 전하를 따로 뵐 수 있는 자리를 요청하였는데 어찌하옵니까?”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 것이오?”

이유는 백문보도 알지 못했다.

무슨 일 때문인지 물어봤으나 시라부카는 대답하지 않았다고 했다.

“감찰 판사의 말에 의하면 성왕의 아우 중에 두 명이 이번에 함께 들어온 것으로 파악되고 있사옵니다.”

“혹시 장사덕이라 하던가?”

백문보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장사덕이 이곳까지 온 이유가 뭘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딱히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일단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문하시중이 시라부카와 이야기해서 따로 만날 수 있도록 시간을 잡아 보시오.”

“그리 하겠사옵니다.”

“내일이 안보의 사십구재인 걸로 기억하는데 맞소?”

“그러하옵니다.”

얼마 전에 안보는 졸하였다.

향년 56세였던 그는 천기를 거스르지 못하였는데 평소 지병은 없었으나 뇌졸중인지 갑자기 쓰러져 사망했다.

지난해에 훈민정음을 이 시대에 재현하면서 그가 세운 공은 적지 않았다.

그런 그가 그렇게 가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과인이 직접 가보지는 못하니 대신 사람을 보내 조의를 표하시오.”

“소신이 유가족을 만나서 애도를 전하겠사옵니다.”

“그렇게 하시오.”

생각해 보니 두 사람은 꽤 친했다.

비슷한 나이인 둘은 충숙왕 시절에 문과에 급제했고 생각하는 바도 비슷해서 개인적으로 의기투합도 자주 했다.

잠시 표정이 어두워진 백문보를 지켜보던 나는 생각난 김에 삼년상에 대해 물었다.

지난해 내가 내린 교서가 잘 지켜지고 있는 건지 궁금해졌다.

“지난해 삼년상을 금지한다고 했는데 백성들이 잘 지키고 있는 것이오?”

“먹고 살기 어려운 이들은 애초에 삼년상을 치르지 않았으니 상관없으나 일부 성리학자는 온갖 핑계로 삼 년을 채우고 있다고 하옵니다.”

“효를 다하는 것은 마땅히 칭찬할 일이나 삼 년은 너무 과한 것이 아니오.”

부모님을 모두 챙기려면 도합 육 년이다.

이 시대의 평균 기대 수명을 고려하면 인생의 상당 기간을 날려버리는 것이다.

한 명의 인력이라도 아쉬운 고려에서는 삼년상을 절대 권장할 수 없었다.

돌아가신 후에 아무리 울어봐야 무슨 소용인가 살아있을 때나 잘하지.

백문보는 다시 한번 전국에 있는 관리들에게 주의를 주겠다며 대답했다.

현재 도당의 관리들은 대부분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으나 오히려 지방으로 갈수록 성리학에 몰입했다.

내가 즉위한 것이 몇 년이나 되었으나 성리학의 뿌리는 강하고 질겼다.

“얼마 전에 사천소감(司天少監) 우필흥의 상소는 어찌하실 생각이시옵니까?”

최근에 상소가 하나 올라왔다.

종4품의 우필흥이 올린 것인데 그는 오행의 논리로 이 나라의 모든 이들이 검은 옷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걸 거역하면 나라에 변고가 일어날 것이라는 약간의 협박(?)도 있었다.

당연히 나는 한 귀로 흘렸다.

원래의 공민왕은 그 상소를 받아들여서 한동안 흰색 옷을 입지 못하고 잠시 흑의(黑衣)의 민족이 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너무 허황된 이야기였다.

“쓸데없는 잡소리에 불과하오.”

“하오나 이번 달에만 우박이 몇 차례나 떨어졌고 병진일에는 큰 지진까지 발생하였기에 불안해하고 있사옵니다.”

내 입장에서는 그냥 자연현상에 불과한 일이었으나 이 시대는 왕의 치세와 연결 짓는 이들이 많았다. 가뭄이 들어도 내 탓이고 태풍이 와도 내 탓이라 여겼다.

왕이 가진 권리와 함께 뒤따르는 의무라 보면 되었다. 하지만 백의를 금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여파가 상당히 크기 때문이다.

나라에서 법으로 흰옷을 금지하게 되면 자연스레 염색 비용은 커지고 백성에게 상당한 부담이 될 것이 분명했다.

내가 완강하게 버티자 백문보는 절충하여 도당의 관리로 한정 짓자는 제안을 했다.

“그렇게 하시오.”

종교와 샤머니즘은 진절머리가 났다.

도저히 적응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애초에 내가 신이 없다고 생각하는 무신론자라 더 그런지 모르겠다.

한동안 넋두리를 하던 나는 신소봉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잠시 입을 닫았다.

“무슨 일이냐?”

“원나라에서 보낸 사신이 방금 벽란도에 도달하였습니다.”

“황후님의 천추절에 맞춰서 판각문사(判閣門事) 양백안을 보냈으니 그에 대한 답사가 아닌가 생각되옵니다.”

“음··· 문하시중의 말이 맞는 것 같소. 일단 불러들이거라.”

일반적인 사신은 이렇게 오지 않는다.

대부분 미리 통보를 하는 편인데 그래야 그만큼의 대접을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당히 뜬금없는 느낌이 들었다.

쌍성총관부에 대한 용서해주겠다는 조서 이후에 거의 1년 만에 오는 사신이었다.

그사이 원나라는 어떤 간섭도 없었다.

오히려 우리 쪽에서 먼저 사람을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잠시 후에 원나라의 사신으로 온 도타이가 태평전에 들어섰다.

낯이 많이 익었는데 알고 보니 지난해 사데이칸과 함께 사신으로 왔던 자였다.

“도당이 열리지 않았으나 급하게 온 것 같아 보여서 불렀으니 양해를 바라오.”

“괜찮습니다. 충분히 이해하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급하게 온 것이오?”

“황제 폐하의 조서부터 확인하시지요.”

원나라의 사신 도타이는 황금빛이 감도는 조서를 꺼내서 내게 정중하게 내밀었다.

나 역시 기존처럼 경의를 표하며 그걸 받아 들었다. 더럽고 치사해도 이 정도쯤이야 충분히 참을 수 있었다.

모병이 끝나면 이 짓거리도 끝이다.

하지만 나의 평정심은 깨져버렸다.

조서에 적힌 내용이 가당치도 않았다.

거기에는 이제 슬슬 원자인 왕현을 대도로 보내 원나라의 말과 문화를 익힐 때가 되지 않았냐는 말이 적혀 있었다.

강제로 보내라는 말은 없었지만,

엄연히 지시에 가까운 내용이었다.

한 마디로 똘루게라 불리는 독로화(禿魯花, 인질)로 보내라는 말이었다.

심지어 거기에는 황실의 일을 할 환관도 필요하다며 몇 명인지 지정해주었다.

내 아들은 물론이고 고려인은 누구도 원나라에 보내지 않을 것이다.

그게 내가 개고생을 마다치 않고 고려를 부강하게 만들려고 하는 이유였다.

내가 직접 그 생활을 해봤기에 서러움을 물려주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가능하면 참고 지내려고 했는데 이쯤에서 손절해야 할 것 같았다.

현재 고려의 병력은 6만 명.

해군과 궁궐 숙위를 제외한 전국의 만호부와 육군 전체를 합친 숫자였다.

만약 모두 다 합치면 대략 8만 명쯤이 되기에 원나라가 쳐들어와도 최소 10만 명에서 15만 명은 막을 수 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은 아니었다.

원나라 병력의 수준을 뻔히 알고 있을뿐더러 우리는 화포와 신형 무기에 수성이라는 이점도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 일반인 징집도 포함하면 20만의 정벌군도 견딜 수 있을 정도는 됐다.

그런데 과연 20만 명의 여력이 될까?

나는 아니라는 것에 모든 것을 걸었다.

지금 그 정도의 병력을 빼면 당장 대도가 위험할 정도였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나하추 같은 세력을 이용하는 게 전부다.

‘까짓거 한 번 붙어보지.’

일단 마음을 굳히니 후련했다.

더는 원나라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도타이가 보는 앞에서 그 조서를 찢었다. 그 모습을 본 도타이는 물론이고 백문보와 신소봉까지 얼었다.

다들 예상하지 못 한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미소까지 지어주며 황제의 조서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런 뒤에 도타이에게 확실하게 내 의중을 전달했다.

한 글자도 잊지 말라는 의미로 일부러 또박또박 말해주는 친절도 잊지 않았다.

“앞으로 이런 말도 안 되는 조서는 받지 않겠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