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100
칠석에 진행된 백련교의 토벌.
그건 절반의 성공에 불과했다.
이인복과 한방신의 활약으로 다수의 백련교도를 추포했지만, 사도라 불리는 가장 중요한 인물을 놓치고 말았다.
생각보다 뼈아픈 일이었다.
하지만 그걸 탓할 생각은 없었다.
이인복과 응양군이 실수한 것이 아니라 어디선가 정보가 새어 나간 것이다.
그게 궁궐 내부인지 아니면 차출된 응양군에 있는 건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백련교가 생각보다 폭넓고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어디서 유출된 건지 확인되었소?”
“아직 특정할 수는 없사옵니다.”
“꼭 찾아내야 하오.”
생각보다 신경이 많이 쓰였다.
대부분의 권력자가 암살에 대해 노이로제 반응을 보이는 건지 이해가 됐다.
언제 어떤 방식으로 나와 내 가족을 해칠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적지 않았다.
하지만 당장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이 시대에 CCTV가 있는 것도 아니고 용모를 파악한 것도 아니다.
수면 아래 숨으면 찾을 방법이 없었다.
지금은 물속에 손을 넣어 휘젓는 것보다 다시 실수할 때까지 기다리며 존버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정도전을 비롯하여 다수의 감찰 어사를 백련교의 추적 쪽으로 배정하였으니 최대한 빨리 찾아내겠습니다.”
“자신이 사도라 주장하는 이는 아직도 입을 열지 않고 있는 것이오?”
이인복은 그렇다며 대답했다.
사도를 대신하여 잡혀 온 이는 생각보다 입이 무거운 편이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이 사도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매질과 고문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하지만 그가 하는 주장을 믿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전혀 신빙성이 없었고 반대되는 증언도 제법 나왔다.
“여러 방법을 써보고 있으나 입을 열 생각을 하지 않고 있사옵니다.”
“광신도 대부분이 그럴 것이오.”
“하지만 아예 소득이 없던 것은 아니옵니다.”
이번에 잡힌 이들이 제법 많았다.
그중에는 잃을 것이 많은 이들도 있었는데 대부분 어느 정도의 협박과 회유에 자신이 아는 것을 실토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럴 때는 고려 전역에 퍼져있는 감찰사의 악명이 도움이 됐다.
옥사에서 만나는 감찰 어사는 저승사자와 거의 동급이라 할 수 있었다.
“이번에 잡아들인 백련교도는 어찌하실 생각이시옵니까?”
“어찌하면 좋을 것 같소?”
“현재 진행 중인 도로 공사에 노역을 보내는 것은 어떠하옵니까?”
나도 그의 의견과 같은 생각이었다.
최근 들어 왜국에서 잡아 오는 왜인의 수가 상당히 많이 줄어든 상태였다.
규슈의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잡은 왜인 대부분이 대마도에서 진행 중인 간척 공사에 투입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대마도를 책임지고 있는 안우는 주덕유와 함께 왜국의 도발을 대비하고 있었다.
그들은 좁은 해로 주변에 화포를 설치한 뒤에 화망(火網)의 개념을 도입하여 집중포화를 쏠 수 있게 만들어 놨다.
아마 요새가 완성된다면 대마도를 왜국이 다시 탈환하는 것은 쉽지 않아질 것이다.
“공부 상서 황석부의 말에 의하면 직산군 도로 공사에 동원되는 인력이 다른 곳보다 부족하다고 하니 그곳으로 보내시오.”
“그렇게 하겠사옵니다.”
도로 공사는 멈추지 않고 계속됐다.
하지만 금방 끝날 일도 아니었기에 노동력을 계속 투입해줘야 했다.
개경과 나주 그리고 직산군에서 공사 중인 도로가 완벽하게 연결되려면 적어도 몇 년 정도는 더 걸릴 것 같았다.
그나마 인력 투입이 가장 많은 개경 주변은 상당히 빠른 편이었다.
이미 임진강 너머 서원현(파주)에 도로를 놓고 있는 중이라 적어도 1~2년 이내에 한양까지 문제없이 이어질 것 같았다.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적 평탄한 지형인 것도 상당한 영향을 주고 있었고 기존에 놓여 있던 역로도 있는 덕분이었다.
“혹시라도 노역 중에 다른 이들에게 포교를 하면 엄중히 다스려야 할 것이오.”
“공식적으로 우리 고려는 백련교를 사이비로 규정한다는 교서를 전국에 내리시는 것은 어떠하옵니까?”
“그렇게 준비하시오.”
확실하게 해줘야 할 필요가 있었다.
고려에서 백련교를 믿으면 어떤 결말을 맞이하는 건지 보여줘야 했다.
이 문제로 동맹을 맺은 탕화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었다. 그 역시 어느 정도 백련교의 그늘을 벗어나 있는 상태였다.
한동안 이인복과 대화를 나눈 뒤.
그를 내보내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동오가 뒤이어 태평전 안으로 들어왔다.
이번에 마두라이로 직접 상행을 떠났다가 돌아온 터라 그곳의 상황을 확인하고자 일부러 시간을 내서 불러들여야 했다.
상당히 거리가 먼 곳이지만,
고려와 관계를 맺고 있는 우방 중에 탄야의 마두라이 술탄은 가장 중요했다.
지금처럼 화약을 계속 쓰려면 그들이 잘 버텨줘야 했다. 현재 그 가교 역활을 하는 것이 동오와 마두라이의 상단이었다.
하지만 동오가 직접 마두라이까지 다녀오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워낙 먼 곳이라 상단주인 그가 자리를 비우는 것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다.
그런 그가 마두라이까지 먼 여정을 다녀온 것은 올해 성년이 된 아들에게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다는 이유였다.
“마두라이 상행은 잘 다녀오셨소?”
“전하와 술탄께서 배려해주신 덕분에 무사히 거래를 마치고 돌아올 수 있었사옵니다.”
“현재 마두라이 상황은 어떻소?”
“여전히 치열하게 싸우고 있사옵니다.”
동오는 이번에 마두라이의 재상인 이인임과 최전방에 있는 정휘도 직접 만나고 돌아왔다. 동오의 상단이 다루는 화물 중에는 마두라이의 전쟁 물자가 상당수이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그리 좋지는 않았다.
마두라이와 비자야나가르는 일 년 이상 전쟁을 계속하고 있는 중이다.
그 덕분에 고려는 품종이 상당히 좋은 말을 받고 있으나 그만큼 화포와 화약을 만들어서 보내는 양도 상당했다.
그 결과 마두라이는 압도적인 화력을 보유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병사의 수에서 비자야나가르에게 밀리니 호각지세였다.
더구나 이쪽에 정휘 장군이 있다면 반대편에 있는 술탄의 동생인 부카 라야 장군도 만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두 나라가 뮬나누르를 놓고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으나 제가 출발하기 전에 생각지 못한 변수가 생겼사옵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오?”
“이인임 재상이 어떻게 손을 쓴 건지 알 수 없지만, 바흐마니가 비자야나가르와 분쟁 중이던 마라트와다 지역을 기습하였사옵니다.”
그걸 기회로 삼아 정휘 장군이 대대적인 반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곧장 성동격서(聲東擊西)가 떠올랐다.
확실히 이인임이 대단한 인물이긴 했다.
바흐마니와 마두라이는 각각 시아파와 수니파를 믿는 나라이기에 힌두교를 믿는 비자야나가르 못지않게 서로를 증오했다.
그 어려운 일을 해낸 것이었다.
‘그 잘난 재주를 일신의 영달이 아니라 고려를 위해 썼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덕분에 위기는 넘겼다고 했다.
바흐마니의 공세가 워낙 강력한 탓에 비자야나가르는 북부로 잠시 시선을 돌려야 했다. 그러는 사이에 마두라이는 남부의 작은 왕국 다수를 점령하며 오히려 영토를 확장하는 데 성공했다. 그 과정에서 특출난 활약을 한 자가 있었다.
그게 정휘 장군은 아니었다.
그는 뮬나누르와 단디굴에서 적장인 부카 라야의 공세를 막느라 정신이 없었다.
남부에서 활약을 한 자는 임견미였다.
본래 홀치에서 최영의 수하였던 그는 초창기에 넘어갔던 일부 홀치를 교대하기 위해서 마두라이 술탄으로 넘어갔다.
“최근에 마두라이 술탄에서 임견미의 활약이 대단하옵니다.”
“남부 해안을 정벌한 주역이라니 재상의 신임이 상당하지 않겠소.”
임견미를 보낸 것은 내가 아니다.
그는 이인임이 과거에 추가적인 홀치의 지원을 요청하였을 당시에 자원해서 마두라이에 간 이들 중 하나였다.
명단에 있는 그의 이름을 보고 차라리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이후로 홍영통과 염흥방도 추가로 보냈다.
원래 역사에서 이인임의 일파를 이루는 이들 중에 상당수를 축출한 것이었다.
염제신 때문에 아들인 염흥방을 보내는 것은 조심스러웠으나 어쩔 수 없었다.
그가 고려를 위해 지금까지 세운 공이 적지 않으나 아쉽게도 아들 교육은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적어도 장남인 염국보라도 살리려면 염흥방은 멀리 치워야 했다.
마두라이에서 그들을 어떻게 써먹든 내 상관은 아니었다. 탄야에게는 미안한 일이나 마두라이는 일종의 유배지였다.
그래도 임견미가 단숨에 장군의 자리를 거머쥔 것을 보면 확실히 실력이 있기는 한 것 같았다.
“당분간 마두라이의 걱정은 한시름 덜어놔도 되겠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정휘 장군과 휘하의 홀치들을 믿으면 되옵니다. 현지에서도 장군은 무신의 반열에 올랐사옵니다.”
그게 그리 좋은 소리로 들리진 않았다.
군주보다 더 잘난 장수의 최후가 대부분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있다면 정휘는 탄야의 라인이었다.
애초에 이인임을 견제하기 위해 보낸 이였기에 역할을 충실하게 하고 있었다.
“술탄께서 보낸 서신이 있사옵니다.”
얼추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동오는 서신을 꺼내서 내게 건넸다.
호형호제를 하게 된 후부터 오가는 상단을 통해서 서신을 주고받는 사이라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용이 간단한 것은 아니었다.
탄야는 혈연을 맺고 싶어 했다.
그에게는 네 살이 된 딸이 있었다.
그 아이를 우리 원자와 혼례를 올려서 두 나라가 더 가깝게 지내자는 말이었다.
아직 아이들이 어려서 너무 이른 감은 있으나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나중에 후회하기보다는 미리 원자를 잡아 놓겠다는 탄야의 의지가 엿보였다.
따지고 보면 나도 국제결혼 아닌가.
그러니 다른 나라 출신의 왕비를 들일 수 없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원자의 일을 혼자 결정할 수는 없었다.
가장 먼저 논의해야 할 상대는 가진이고 그다음에 도당에서도 논의해야 했다.
원자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자연스러운 만남을 추구할 수 없는 자리가 바로 이 나라의 원자였다.
애초에 태조 왕건 때부터 정략혼인을 맺어서 만들어진 나라가 고려였다.
그렇다고 그게 꼭 나쁜 일은 아니었다.
나 같은 경우에는 가진이라는 오직 내 편을 들어줄 상대를 만났기 때문이다.
어차피 동오는 서신의 내용을 알지 못하기에 나는 그걸 접어서 품에 넣었다.
“다음 출항은 언제 할 예정이오?”
“실어야 하는 물건이 거의 다 준비되어 있어서 현재 예상으로는 다음 상행은 보름 후에 할 것 같사옵니다.”
“출항하기 전에 과인이 술탄에게 보낼 서신이 있으니 궁궐에 들려서 가져가라 전하시오.”
“명심하겠사옵니다.”
동오는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그쯤에서 그를 내보내고 가진을 찾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동오는 아직 못다 한 말이 있어 보였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그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소신이 전하께 간곡한 마음으로 청을 드리고 싶은 것이 있사옵니다.”
“말해보시오.”
“이번에 소신의 상단에서 대형 선박을 만들려고 하온데 조선에 능한 장인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하옵니다.”
“필요하다면 데려다가 일을 시켜도 좋소.”
어차피 요즘은 예전처럼 해군에서 사용할 함선을 많이 조선하지 않고 있었다.
대마도 정벌 이후에 대부분의 예산은 도로와 북부에서 진행되는 성곽 조성 같은 대형 공사에 쓰이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당분간은 기존의 전선을 최대한 보수해서 쓰도록 유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차피 나가는 녹봉이다.
차라리 동오의 일을 받아서 하면 임금을 그가 지불해야 하니 이득이기는 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쾌선 몇 척을 더 만들려고 하는 건지 알았다.
일반적인 상선의 경우에는 얼마 전에 생긴 민간 조선소에서도 가능했다.
하지만 그런 나의 예상은 빗나갔다.
내 허락이 떨어지자 동오는 품에서 종이를 한 장 꺼냈는데 거기에 그려져 있는 것은 대형 범선이었다.
지금까지 고려에서 만들고 있던 배와 비교하면 규모가 완전히 달랐다.
“생각보다 상당히 큰 것 같소.”
“아무래도 지금 운용 중인 배가 작아서 물량을 감당할 수 없기에 더 크고 빠른 배가 필요하옵니다.”
동오의 말이 틀리진 않았다.
원나라와 절강의 대주국을 오가는 것도 아니고 마두라이는 한 번 오갈 때마다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린다.
효율을 보면 정말 극악한 무역로였다.
그러고 보니 동오가 가져온 설계도는 유럽 쪽의 범선과 비슷한 것 같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지금껏 불가능한 영역이라 여겨서 미뤄놨던 계획이 떠올랐다.
‘이번 기회에 대항해 시대를 열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