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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99화 (99/202)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99

그날의 소식은 곧장 내게 전해졌다.

정도전은 확실히 대단한 인재이긴 했다.

다른 이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으려고 애써도 안 되던 것을 한 달도 안 되어 백련교의 흔적을 찾아낸 것이었다.

확실히 이인복이 탐낼 만한 인재였다.

하지만 문제도 분명히 있었다.

미리 보고하지 않았다는 점과 그 때문에 죽을 뻔한 위기를 넘겼다는 것은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만 했다. 말단에 불과한 백련교 몇 명 더 잡는 것보다 정도전의 목숨이 훨씬 더 중요했다.

늙어서 더는 일 하지 못할 때가 되어 벼슬에서 물러나 치사(致仕)할 때까지 곁에 두어야 하는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적어도 40년 이상은 부려먹을 수 있을 인재였다.

‘내 허락도 없이 조기 퇴직하는 것은 말도 안 되지.’

나는 그 벌로 정도전의 녹봉의 3할을 감봉시켰다. 하지만 보여주기 용도에 불과한 솜방망이 처벌이기는 했다.

세운 공이 있기에 어쩔 수 없었다.

“녹봉을 감봉한다고 하니 정도전은 어떤 반응을 보이던가?”

보고를 위해 들어온 이인복에게 묻자 그는 살짝 미소지으며 내게 답했다.

“감봉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안 쓰는 것 같은 모습이었사옵니다.”

“정도전의 집안이 그리 넉넉하진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도 그렇소?”

“이번 일로 인해 어느 정도는 문책받을 거라 각오했단 뜻이라 생각되옵니다..”

“그래도 너무 무모했소.”

다시 한번 이인복에게 주의를 줬다.

감찰 어사 하나를 키우는 데 들어가는 비용과 시간이 적지 않았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체계를 다시 잡을 필요가 있었다.

가장 먼저 생긴 변화는 감찰사에서 운용할 수 있는 병력을 주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염두에 두지 않던 일이다.

그전에도 권력이 집중되어 있어서 온갖 말이 많이 나오던 곳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벌어진 일을 보니 급할 때 병력을 동원하는 과정이 너무 복잡했다.

거기에는 감찰 어사의 보호라는 의미도 담겨 있었다.

“당분간 응양군 소속의 병사 이백 명을 감찰사에서 상시 운용할 수 있도록 말해놓도록 하겠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칠석날 화장사(華藏寺)에서 집회하는 백련교는 어떻게 하기로 했소?”

칠석날 저녁 무렵.

화장사에서 집회가 열린다.

정도전이 목숨 걸고 찾아낸 정보였다.

용암산 너머 화장산 중턱의 화장사는 지공이 터를 잡아서 세운 곳이다.

당연히 그곳도 이번 개혁으로 인해 폐사된 곳 중에 하나다.

현재의 고려는 불교 개혁으로 인해서 폐사된 사찰이 전국에 넘쳐났다.

지방의 경우에는 흔하지 않으나 산적의 소굴이 되는 부작용이 있기도 했다.

그래서 일부 사찰의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완전히 허물어 버리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곳을 허물 수는 없었다.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을 만큼 사찰의 수는 너무 많았다. 심지어 개경 부근에 화장사라는 사찰이 있는 것도 몰랐다.

이 주변에 수십 개의 사찰이 있었으니 다 기억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백련교의 주요 인사가 개경에 온다고 하니 이번 기회에 잡아야 하옵니다.”

“확실한 정보인 것이오?”

“그러하옵니다. 중복되는 증언도 많이 나왔으니 확실하옵니다.”

“이번에 잡아 온 이들이 많아서 미리 눈치채고 피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소.”

이미 일은 벌어진 상태다.

다행히 이인복은 그날 밤 추포하는 과정부터 지금까지 보안 유지에 충실했다.

당시에 잡은 수십 명은 옥사에 가두지 않고 당분간 개경 밖의 안가에 가두었다.

혹시라도 밖으로 새어 나가면 안 되었다.

백련교는 서민의 종교라 보면 된다.

지금껏 억눌린 울분이 바탕이 된다.

아무리 내가 선정을 베풀어도 불만이 없을 리가 없었다. 타인의 불행 위에서 행복이 피어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어려운 상대지.’

지금까지 상대하지 못한 유형이다.

귀족이나 다른 나라를 적으로 놓고 싸우던 것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었다.

단순하게 싸워서 이기는 형태가 아니라 음지에 숨어 있는 백련교를 추적하여 끄집어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일반 백성하고 백련교도를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은 현장에서 잡아들이는 방법 외에는 없다고 봐도 되었다.

그렇다고 다 죽일 수도 없었다.

과연 백련교의 교도는 몇 명이나 될까.

어림잡아 추측하건대 대충 수천 명은 될 것 같았다. 고려의 전체 인구를 생각하면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는 수치였다.

“워낙 점조직 같은 곳이라 감시 중인 이들 중에 특별한 움직임은 없었사옵니다.”

“병력 차출은 어떻게 할 생각이오?”

“이원림 장군과 의논하여 홀치와 용호군 중에서 믿을 만한 이들만 추려서 오백 명 정도를 동원할 예정이옵니다.”

조금 적은 것은 아닌가 생각되었지만, 어차피 군벌을 토벌하는 것도 아니었다.

더구나 은밀하게 진행되는 집회라 많은 사람이 모일 것 같지도 않았다.

참석하는 이가 많아질수록 비밀 유지가 힘들어지니 교도 중에 믿음이 강한 이들만 모일 가능성이 제법 높았다.

이인복은 이번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겠다며 내게 굳은 다짐을 했다.

“이번 기회에 일망타진할 수 있도록 철저히 준비하겠사옵니다.”

*

견우와 직녀가 만난다는 칠석.

그날은 정화수를 떠 놓고 수명신(壽命神, 북두칠성)에게 가족의 무병장수와 평안을 기원하는 이들이 많다.

일부 아낙네들은 바느질 솜씨를 늘게 해달라고 빌기도 했는데 용암산의 기슭에 사는 꽃분이도 성심을 다해 빌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그녀는 생각보다 절실했다.

동네 아낙 중에 가장 바느질 솜씨가 좋지 않아서 일감도 거의 받지 못했다.

하지만 남편의 건강이 지난해부터 좋지 않아서 자신이라도 돈벌이를 해야 했다.

그나마 그녀의 사정을 알기에 마을 사람들이 일감을 조금씩이나마 주어서 입에 풀칠할 정도는 되었다.

하지만 벼룩도 낯짝이란 게 있다.

언제까지 실력이 아닌 인정에 기대어 폐만 끼칠 수는 없었다.

그때 인기척이 들렸다.

한두 명이 내는 소리가 아니었다.

싸리로 만든 담 너머에서 나타난 것은 수많은 병사들이었다. 횃불조차 들지 않고 걸어가는 그들은 화장산 방향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들의 얼굴은 뭘 바른 건지 온통 검었고 눈만 반짝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이 괴력난신 같았다.

깜짝 놀란 나머지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그전에 하사 계급장을 단 병사가 다급하게 다가와서 조용히 하라고 다그쳤다.

하지만 위협적인 모습은 아니었다.

“쉿! 우리는 전하께서 보낸 병사이니 아무 소리도 내지 말고 들어가시오.”

“도대체 무슨 일이옵니까?”

“역적의 무리가 이 부근에 있다고 하여 온 것이니 오늘 밤은 집 밖으로 절대 나오지 마시오. 그러면 아무 일도 없을 것이오.”

“알겠습니다.”

꽃분은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로 뒤도 안 돌아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는 사이 병사들은 멈추지 않고 계속 화장산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머지않아 화장사 부근에 도착한 그들은 각자의 위치로 은밀하게 찾아갔다.

머뭇거리는 이들은 하나도 없었다.

하사 계급 이상의 지휘관은 이미 이틀 전에 이곳에 와서 사전 답사한 상태다.

그러는 사이에 하나둘 별이 떠올랐다.

병사들은 어둠 속에 완전히 몸을 파묻고 숨소리마저 죽이며 은하수가 서서히 퍼져나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여름날의 끈적한 공기와 성가신 모기떼가 괴롭히고 있기에 좋은 환경은 아니었다.

하지만 병사들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인내심을 가지고 계속해서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화장사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나이와 성별 그리고 신분까지 다른 다양한 이들이 존재하는 집회였다.

심지어 돈 많은 상인과 귀족으로 보이는 이들도 적지 않게 보였다.

하지만 이인복은 미동도 안 했다.

아직 가장 중요한 이가 보이지 않았다.

이인복은 조용히 병사 하나를 불렀다.

오늘 소탕 작전을 위해서 눈이 좋은 이들을 차출해서 데리고 온 그였다.

“아직 보이지 않는 것이냐?”

“의심되는 이는 아직 없었습니다.”

“유심하게 살펴봐야 한다.”

이인복은 신신당부를 했다.

다른 이들은 놓치더라도 이 자리를 주선한 ‘사도(使徒)’는 잡아야 했다.

며칠 전에 잡은 이들을 통해 미륵의 사도라 불리는 이가 고려에 들어온 백련교의 핵심이라는 정보를 얻었다.

구심점을 없애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사이비 집단이 더 커지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한동안 그렇게 지켜만 보고 있자 한 무리의 사람이 나타났다. 그들을 본 백련교의 교도들은 곧장 바닥에 엎드렸다.

“오마니 반메훔.”

무리에서 가장 앞서 걷고 있는 남자.

백련교 특유의 흰옷을 입고 죽립을 쓴 그는 얼굴에 하얀 가면까지 쓰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추종자들은 광신도가 아니랄까 봐 점점 더 광기 어린 목소리로 주문을 멈추지 않고 외우기 시작했다.

그쯤되자 이인복은 확신이 들었다.

지금껏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사도가 나타난 것이다. 그가 살짝 손을 올렸다가 내리자 병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끌고 있는 이는 최근 상사 계급에 제수된 한방신이었다.

개인적인 무력이 뛰어나진 않지만, 문과에 급제한 이답게 머리가 좋았다.

그가 이백오십 명의 병사를 이끌고 달려가자 반대편을 지키고 있던 나머지 병사들도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화장사를 포위한 그들은 백련교도를 포박하기 시작했다.

“한 놈도 놓치지 말거라!”

다들 어떻게든 도망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훈련된 병사를 이길 수는 없었다.

대부분의 추종자들은 어떻게든 사도를 이 자리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얼마 후에 사도는 사로잡혔고 이인복은 포박되어 있는 그에게 다가갔다.

“네 놈이 사도라 불리는 그놈이더냐?”

“보면 모르겠느냐.”

“어디 어떻게 생긴 놈인지 얼굴이나 보자꾸나.”

이인복은 사도의 가면을 벗겼다.

그 아래서 나타난 얼굴은 이십 대 후반쯤으로 보였는데 눈빛 하나 만큼은 매서웠다. 하지만 이인복은 아주 짧게나마 사도라 주장하는 이의 입가에 조소 어린 표정이 지어진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걸 보는 순간 기분이 싸했다.

뭔가 위화감이 느껴졌다.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나 지금 잡힌 이는 가짜고 진짜 사도는 도망친 것 같았다.

정보가 어디서 새어나간 건지 아니면 눈치가 좋은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진짜를 놓쳤다는 사실은 변함 없었다.

“빌어먹을 것들!”

이인복은 서둘러 주변을 둘러봤다.

혹시라도 어딘가 숨어있을 지도 몰랐다.

하늘로 솟은 게 아니면 도망칠 구석은 없었다. 그가 애타게 진짜 사도를 찾고 있을 무렵에 화장산 정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가 있었다.

이인복이 애타게 찾던 사도였다.

그는 횃불로 인해 환하게 밝아진 화장사를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잠시 미소를 지었다.

화장사에 도달하기 직전에 매복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덕분에 그는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네 덕분에 이렇게 무사히 피할 수 있었구나.”

사도가 고개를 돌리자.

무관 하나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는 사도를 추종하는 이들 중에 가장 날카로운 칼날이었다. 하지만 어둠 속에 있기에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당분간 개경을 떠나 남해안 지역으로 내려가서 교리를 설파할 생각이다.”

“소인도 따라가면 아니 되옵니까?”

“어떻게든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거라. 네 힘을 중히 사용할 날이 올 것이다.”

“사도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무관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천천히 반대편으로 내려가는 산길을 따라 걸어갔다. 한동안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사도는 쓰고 있던 가면을 벗었다.

그의 정체는 편조(遍照), 훗날 신돈이라 불리는 이였다.

왜 그가 백련교도가 되었을까.

그 이유는 지난해 갑자기 예고도 없이 진행된 불교 개혁 때문이었다.

당시에 편조가 몸담고 있던 사찰도 폐사 되었고 도첩체가 시행되면서 편조도 승려 자격을 잃어버렸다.

그때만 생각하면 부글거렸다.

불교를 개혁한다는 말로 무수하게 많은 일반 승려가 사찰에서 쫓겨났다.

지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대다수의 승려는 자격이 없다고 여기는 그였고 그 죄는 임금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백련교를 알게 됐다.

미륵불이 이 세상은 뒤집어엎을 거란 말이 너무나 달콤했다. 편조는 미륵불이 못하면 자신의 손으로 이 부조리한 나라를 끝장낼 생각이었다.

“기다리시오. 머지않아 이 손으로 당신들에게 천벌을 내려주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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