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98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아직은 추측에 불과했다.
정도전은 이걸 알리기 전에 조금 더 확실하게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그토록 바라던 감찰사에 들어왔다.
첫 임무부터 실패로 기억되고 싶지는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가장 믿을 만한 홍사우를 찾아갔다.
“곧장 보고할 것이지 이걸 왜 나한테 가져온 것이냐? 공을 세우려고 하는 것이라면 그런 생각은 접거라.”
정도전이 현재 상황을 설명하자.
한동안 듣고 있던 홍사우는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감찰사에 들어온 지 이제 겨우 한 달 정도 지났을 뿐이다.
괜히 어설프게 잘못 건드렸다가 일을 그르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저 혼자 일망타진하여 모든 공을 가지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보고하기 전에 조금 더 확실한 증거가 필요합니다.”
정도전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한 번 꽂히면 집요하게 파고드는 그의 성격을 잘 알기에 홍사우는 난감했다.
그쯤 되자 정도전은 한발 뒤로 물러나서 같이 확인만 하자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만약, 수상한 사람이 나타날 경우.
그때는 정식으로 보고하자는 말에 홍사우는 살짝 흔들렸다.
“그러니까 네가 보여준 연꽃 문양이 그려진 곳이 백련교의 접선 장소일 가능성이 높다는 거지?”
“맞습니다. 예전에 잡은 백련교도의 집과 접선 장소에서도 이 문양을 찾았습니다.”
“어째서 이걸 다들 놓친 것이지?”
“당시에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정보원들이 시전에 도는 소문을 모아 보니 그런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 문양이 한곳에 있지는 않았다.
새로 생기기도 하고 사용되지 않는 접선 장소는 누군가 지워버리는 것 같았다.
워낙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기에 혼자 그걸 찾아 나서는 것은 조심해야 했다.
어쩔 수 없이 홍사우는 정도전을 도와주기로 했다.
“나흘의 시간을 주마. 그 시간 내에 단서를 찾아내지 못하면 포기하고 지금까지 알아낸 것 그대로 보고 하거라.”
정도전은 환하게 웃었다.
그 정도면 가능할 것 같았다.
그때부터 두 사람은 몇 명의 감찰 소유(所由)들과 함께 가장 의심되는 장소 한 곳을 지켜보며 은밀하게 잠복을 시작했다.
가장 최근에 우연히 발견한 곳인데 담벼락의 기와 하나만 연꽃 문양이었다.
누군가 기와를 바꿔치기한 것이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그 기와 주변을 기웃거리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루가 지날수록 정도전은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잘못 짚은 거라는 생각은 여전히 들지 않았다.
그렇게 약속했던 나흘이 다 지나버렸다.
“이제 슬슬 복귀해야 한다.”
날이 지려고 하자 수풀 너머에 몸을 숨기고 있던 홍사우는 일어서려 했다.
더 이상은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였다.
정도전을 도와주고 싶어도 매일 밖으로 나도는 터라 감찰사의 눈치가 보였다.
오늘은 데리고 나올 수 있는 감찰사 소속의 소유도 없어서 집안의 사병 몇 명을 데리고 나왔을 정도였다.
심지어 정도전은 온갖 핑계를 대고 휴가까지 받아서 나온 상태였다.
“딱 하루만 더 지켜보고 아무 반응이 없으면 보고하시죠. 부탁드립니다.”
“약속했던 것을 벌써 잊은 것이냐?”
“그러면 두 시진만 더 기다려 보시죠. 약속했던 시간이 되려면 적어도 그 정도는 남아 있습니다.”
홍사우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앉았다.
두 시진이라고 무시했다가 나중에 정도전이 그걸 꼬투리 잡을지 모른다.
그렇게 한동안 말없이 지켜보던 두 사람은 수상해 보이는 남자를 발견했다.
행색을 보면 노비인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어두워져서 얼굴을 확인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 남자는 주변을 살피며 상당히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더니 지금까지 눈이 빠질 정도로 지켜보고 있던 기와를 들추고 뭔가를 넣어뒀다.
“그것 봐요. 제 말이 맞지 않습니까.”
“쉿!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내려가서 뒤쫓을 사람을 붙일 테니 너는 여기서 꼼짝 말고 기다리거라.”
“절대 놓치면 안 됩니다.”
정도전이 신신당부를 하자.
홍사우는 걱정 말라며 웃어주었다.
그의 데리고 온 사병은 정식 훈련까지 받은 이들로 응양군 출신도 섞여 있었다.
아버지인 홍언박이 전하의 이종사촌인 덕분에 개경 내부에서 소수나마 사병을 거느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가문이었다.
그렇게 그가 내려간 뒤에도.
정도전은 유심히 계속 살폈다.
그러자 동네 아낙으로 보이는 여인네와 심지어 승려 복장을 한 이들까지 한두 명씩 와서 그곳을 들추고 있었다.
그들은 쪽지로 보이는 것을 읽고 다시 넣어 놓은 뒤에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생각보다 조심성이 많았다.
그런데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쪽지를 확인한 이들에게 미행을 붙이겠다고 내려간 홍사우는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서서히 조바심이 날 무렵에 허리춤에 칼로 보이는 것을 찬 이가 나타났다.
그는 기와 틈에서 쪽지를 꺼내더니 그걸 쥐고 서둘러 이동하기 시작했다.
“제길··· 저러다 놓치겠는데.”
정도전은 마음이 급해졌다.
저 사람은 놓치면 안 될 것 같았다.
제법 좋은 옷을 입고 있는 그 남자는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아 보였다.
어쩔 수 없이 정도전은 아래로 내려와 그의 뒤를 쫓기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홍사우가 데리고 온 사병의 수보다 쪽지를 보고 흩어진 이들이 더 많았다.
아마 다들 그들을 뒤쫓느라 정신이 없는 것 같았다. 적어도 저 남자가 어디로 향하는 건지는 확인해야 했다.
그때부터 어설픈 미행이 시작됐다.
정도전이 따라붙은 정체불명의 남자는 상당히 발걸음이 빨랐다. 설마 눈치챈 것은 아닌지 걱정됐으나 어둠은 정도전의 편이었다. 개경 외곽의 한적한 길을 걷던 그 남자는 산길로 접어들었다.
목적지가 어딘지 알 것 같았다.
그 길로 올라가면 사찰 하나가 나온다.
하지만 지난 불교 개혁 당시에 그곳은 폐사가 된 상태다. 일반적인 불교 신자가 그것도 야밤에 그곳으로 향할 리 없었다.
의심은 점점 확신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도달한 사찰은 적막했다.
하지만 어디선가 사람들이 하나둘 나타났는데 그 숫자가 적지 않았다.
횃불조차 들지 않아 확실하진 않으나 대충 헤아려도 수십 명은 되었다.
그들은 남자의 곁으로 다가가서 그가 가져온 쪽지를 돌려보기 시작했다.
“이틀 후에 그분께서 직접 이곳 개경에 오셔서 집회를 여신다고 합니다.”
“오··· 드디어 직접 뵙는 것입니까?”
“어렵게 만든 자리이니 주의하되 차질 없이 준비하십시오. 미륵불께서 이 세상을 정화하기 위하여 내려오셨습니다.(弥勒佛当有天下)”
남자가 미륵을 거론하며 합장을 하자 다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한 곳을 바라보며 똑같이 중얼거렸다.
그곳에는 범패(梵唄)가 놓여 있었다.
그러더니 소리 낮춰서 주문 같은 것을 다 같이 외우기 시작했다.
“오마니 반메훔.”
금방 끝날 분위기가 아니었다.
한동안 계속 그들의 주문 소리를 들으며 빠져나갈 틈을 살피고 있던 정도전은 다리가 저려와서 죽을 것 같았다.
근처에 낮은 수풀밖에 없어서 자세가 너무 좋지 않았다. 참다못한 그는 다리를 펴는 데 성공했지만, 그게 실수였다.
따악···
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밟아서 부러진 것이었다. 정도전은 급하게 몸을 숨겼으나 소리를 어떻게 할 방법은 없었다.
주문을 소리 낮춰서 하고 있었기에 그 정도의 소리는 사찰에 크게 울렸다.
그들은 곧장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웬 놈이냐! 뭣들하고 있는 건가 어서 주변을 샅샅이 살펴보시오.”
동물이 내는 소리는 아니었다.
적어도 그 정도의 구분은 할 줄 알았다.
방금 들린 소리는 누군가의 인기척이다.
고려 내에서는 사이비 취급을 받는 그들에게는 비밀 유지가 가장 중요했다.
당연히 소리가 난 쪽을 향해 곧장 달려들었고 정도전은 도망쳐야 했다.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
하지만 무턱대고 달리지는 않았다.
정도전은 현실적으로 자신이 뜀박질로 누군가를 이길 수 없다고 여겼다.
얼마 못 가서 잡힐 것이 뻔했다.
어쩔 수 없이 어둠 속으로 숨어야 했는데 어차피 저들도 횃불을 켜지는 못했다.
아무리 외진 곳이라도 개경 내부다.
그렇게 난리를 치면 그들 역시 순군만호부에게 들키게 될 것이다.
하지만 숨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근방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한 그들의 포위망은 점차 좁아지고 있었다.
“찾았습니다! 다들 이쪽으로 오십쇼.”
결국에는 꼬리가 잡히고 말았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한 남자에게 덜미가 잡힌 정도전은 발버둥 쳤지만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도전의 주변을 백련교도가 빈틈없이 둘러섰다.
“뭐 하는 놈이길래 이 시간에 이곳을 어슬렁거린 것이냐?”
“산책을 나왔다가 길을 잃은 것인데 갑자기 왜 이러는 것이오?”
“헛소리하지 말거라. 그렇다면 도망칠 이유도 없지 않느냐.”
“아니! 아까 보니 칼을 뽑아 들고 쫓아오던데 누가 가만히 있는단 말이오? 산적··· 아니 산중 호걸이시라면 가진 돈은 다 드릴 테니 목숨만 살려주시구려.”
개경에 산적이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지금 정도전이 가진 유일한 무기는 세 치의 혀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말재주로 이 위기를 헤쳐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쉽게 넘어갈 상대는 아니었다.
“후환을 남길 수 없으니 죽어줘야겠다.”
처음에 따라왔던 남자에게 자비심은 찾아볼 수 없었다. 곧장 쥐고 있던 칼을 들어서 정도전을 내리칠 기세였다.
그 모습을 본 몇 명이 다급하게 그를 막아섰다. 설마 그가 이렇게 나올 줄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어차피 미륵불께서 거두실 목숨이오.”
“하오나···.”
“썩 비키시오!”
남자는 그들을 밀쳐냈다.
어떤 후환도 남겨둘 수 없었다.
다시 칼을 치켜들어 정도전을 내리치려 했지만, 그가 자세를 잡기도 전에 어디선가 화살 한 대가 날아왔다.
정확하게 자신과 그 남자 사이에 꽂힌 화살을 본 정도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형! 어디 갔다가 이제야 오신 겁니까?”
그 화살은 홍사우의 것이었다.
꿩의 깃으로 만든 화살의 끝에는 붉은 실이 묶여 있기에 못 알아볼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둠 속에서 홍사우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하지만 그 혼자 온 것은 아니었다.
감찰사의 소유들도 보였고 옷차림으로 봐서는 홀치로 보이는 이들까지 있었다.
어느 사이에 포위를 한 건지 사방에서 횃불이 하나둘 나타났다.
“천방지축 사제를 찾으려고 이 밤중에 내가 얼마나 고생을 한 지 아느냐.”
“도대체 어떻게 찾아오신 겁니까?”
“그 이야기는 일단 여기를 정리한 뒤에 하자. 지금이라도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면 목숨만을 살려주겠다.”
마지막 경고를 한 뒤.
홍사우는 곧장 칼을 뽑아 들었다.
그것을 신호로 병사들이 사방에서 밀려왔는데 미륵교의 교도들이 보인 반응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뉘었다.
도망치는 자와 납작 엎드린 자.
그리고 끝까지 반항하는 자도 있었다.
당연히 정도전의 목숨을 앗아가려고 했던 이는 후자에 속했다. 그는 주변을 살피다가 상황이 좋지 않음을 깨닫고 정도전을 인질로 잡아서 도망치려고 했다.
하지만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어둠을 뚫고 몇 대의 화살이 날아왔다.
아까와 달리 이번의 화살은 정확하게 그를 노리고 있었다. 어떻게 반응할 틈도 없이 옆구리와 허벅지에 화살을 맞았다.
날이 어두웠으나 홀치 중에 명사수가 제법 많아서 이 정도는 쉬운 일이었다.
치명상은 피했으나 두 눈을 뜨고 정도전이 도망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그쯤 되자 더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그 남자는 접선 장소에서 가져온 쪽지를 찢어버리려고 했다.
어떻게든 비밀의 유출되는 것은 막겠다는 일념이 강하게 느껴졌다.
“사형! 막아야 합니다.”
그걸 본 정도전은 다급하게 외쳤다.
홍사우도 그걸 봤기에 재빨리 달려와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칼을 휘둘렀다.
그러자 남자의 손목이 그대로 잘려서 바닥에 뒹굴었다. 홍사우가 평소에 보검이라고 자랑하더니 확실히 대단했다.
하지만 감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정도전은 다급하게 달려와 네 조각이 난 쪽지를 필사적으로 모았다. 어렵게 찾아낸 백련교를 뒤쫓을 수 있는 단서였다.
바람에 날려가는 마지막 한 조각까지 집어 든 그는 서둘러 조각을 맞춰봤다.
그곳에는 백련교도들이 회합하기로 한 시간과 장소가 적혀 있었다.
[칠석, 술시(19~21시), 화장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