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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97화 (97/202)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97

문화와 예술을 다루는 문화부.

그곳은 요즘 상당히 바쁘게 움직였다.

새로 신설된 지 얼마 안 되었으나 맡고 있는 일이 적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개경에 있는 여러 인쇄소를 직간접적으로 관리할뿐더러 예술의 부흥을 위해서 힘을 쓰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예술가 지원이다.

요즘 문화부에서 밀고 있는 것은 김홍도의 풍속화나 행렬도처럼 이 시대의 상황을 담고 있는 그림과 조각이었다.

글로 전달되는 내용도 중요하나 시각적인 것만큼 확실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 시대로 와서 세우는 업적만큼.

더도 덜도 말고 사실 그대로의 역사를 전달해주고 싶었다. 어쩌면 터무니없이 부족했던 사료에 대한 갈증일지도 모른다.

역사 공부를 하면서 가장 안타까웠던 것이 시각적인 자료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심지어 고려의 수도에 있는 만월대가 어떤 구조였는지 그림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당연히 후원에 들어가는 재물은 서책을 인쇄해서 남긴 것으로 진행됐다.

하지만 아직 넉넉한 수준은 아니기에 내수사의 재물도 상당 부분 끌어다 썼다.

하지만 부담이 될 정도는 아니었다.

지금까지 내수사가 벌인 사업이 하나둘이 아니라 생각보다 그 규모가 엄청났다.

오죽하면 고려의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것은 동오나 지경탁 같은 대형 상단이 아니라 곽충수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지원금은 얼마나 남아있소?”

“아직 올해 문화부로 배정된 예산이 충분히 남아 있사옵니다.”

“부족하면 언제든 말하시오.”

당연히 그 모든 재물의 주인은 나다.

필요한 곳에 쓰기 위해서 일부러 분리한 것인데 개인적인 만족을 위한 용도로 쓰는 것도 아니고 낭비를 한 적도 없었다.

예술가를 위한 후원이라고 해봤자 먹고 살 정도의 쌀과 안료 등의 재료를 살 저화를 챙겨주는 것이 거의 전부였다.

유숙은 알겠다며 내게 대답했다.

하지만 추가로 더 지원금을 달라고 하진 않을 것이다. 내가 아는 그의 성격상 예산 내에서 어떻게든 맞출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확보된 예술품들은 훗날 만들게 될 미술관에 전시하기 위해서 보관하거나 일부는 경매장을 통해 판매하기도 했다.

“그나저나 요즘 서책 인쇄에 대한 심사가 많이 밀리고 있는 중이라 들었소.”

“인력을 최대한 확보 중이옵니다. 기존에 나온 서책 중에 일부를 한글로 다시 출간하는 중이라 쉽지는 않사옵니다.”

“이번에 견습으로 보낸 진방회 사람들은 잘 적응하고 있소?”

“하나같이 상당히 영민하고 다들 일 처리가 빨라서 문화부에서도 두각을 드러내고 있사옵니다.”

나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름 심혈을 기울여서 키운 인재다.

그 정도는 해줘야 하는 것은 당연했다.

훈민정음 해례본에 참여했던 진방회는 올 초에 언해본을 내놓은 뒤에 일정 나이가 넘어서는 이들은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아직 과거 시험을 본 것은 아니지만, 일종의 인턴 제도를 하는 중이었다.

지금은 음서제를 통해 관직 생활을 잠시 경험하는 것에 불과했고 다시 과거를 봐야 더 높은 요직에 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급제하지 못할 거란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 정도도 통과하지 못할 수준이라면 진방회에 못 들어온다.

나름 머지않은 미래에 고려의 도당을 이끌 신진 지식인이 불리는 이들이었다.

“그런데 정도전이 인쇄소에서 보낸 서책을 심사하는 과정에서 이걸 발견하였사옵니다.”

“무엇을 발견하였기에 그러시오?”

유숙이 굳은 얼굴로 서책 하나를 꺼냈다.

그가 조심스럽게 내게 내민 서책은 일견 보기에는 평범한 불교의 경전으로 보였다.

하지만 내용을 자세히 뜯어보자 이상한 부분이 곳곳에서 많이 보였다.

고려에 온 이후에 나름 불교에 대한 이해도가 꽤 높아졌기에 그게 무엇인지 곧장 알아챌 수 있었다.

“이건 백련교의 교리 아니오?”

“혹시 몰라서 왕사인 보우 대사를 통해 확인해 보니 맞는 것 같다고 하옵니다.”

“어디서 발견한 것이오?”

“저시에 있는 인쇄소에서 출간 전에 보낸 서책이옵니다.”

인쇄 전에 심사하는 이유가 있었다.

내용 중에 반체제적인 사상을 담고 있을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량으로 인쇄하는 특성상 파급력이 크기에 최소한의 심사는 해야 했다.

그 때문에 지금도 해당 부서의 관리들이 밤을 새워서 읽고 검토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인쇄소에서 내용을 알고 보내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어찌 생각하시오?”

“아마 인쇄소를 맡고 있는 이가 꼼꼼히 살펴보진 않은 것 같사옵니다.”

“몰래 인쇄할 가능성도 있을 것 같은데 감찰사에 이 사실을 알려주었소?”

“전하께 보고하는 것이 우선이라 여겨서 아직이옵니다.”

고려는 종교를 선택할 자유가 있었다.

불교를 대체할 종교가 없어서 그렇지 고려인 중에 이슬람교도도 있었다.

완전히 생소한 쿠란 낭송과 라마단 등의 교리 때문에 널리 퍼지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백련교를 두고 볼 생각은 없었다.

불교 입장에서 보면 백련교의 교리는 사이비 집단에 가까운 이들이었다.

더구나 체제를 부정하며 들고 일어난 그들의 존재는 고려에게도 위협적이다.

부조리한 이 세상을 개벽한다고 그들이 바라는 이상향적인 세상이 될까.

‘절대 그럴 리가 없지.’

이미 역사가 그걸 증명해줬다.

백련교를 등에 업고 주원장이 세운 명나라도 민초를 위한 나라는 아니었다.

오히려 명나라는 훗날 백련교에게 등을 돌리고 탄압하는 데 앞장섰다.

당분간은 뭔가 바뀐 것 같아 보여도 시간이 흐르면 다시 썩기 마련이다.

고려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부패를 뿌리뽑겠다고 피를 본 게 몇 년도 안되었는데 벌써 탐관오리가 나오고 있었다. 어쨌든 고려에 백련교가 퍼지는 것은 두고 볼 수 없었다.

“혹시 이런 책이 또 있을지 모르니 철저하게 인쇄소를 관리하시오.”

아마도 이 책을 인쇄하려고 한 이유는 포교 활동에 활용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나는 일단 유숙을 내보내고 신소봉을 불러서 이인복을 불러들이라고 전했다.

그러자 차 한 잔을 다 마시기도 전에 이인복이 태평전에 들어섰다.

“부르셨사옵니까?”

“이것 때문에 보자고 했소.”

“그게 무엇이옵니까?”

“백련교가 포교하기 위해 만들려고 시도했던 책이 인쇄소에서 발견되었소.”

이인복은 굳은 표정으로 내가 내민 서책을 받아서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번 일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다.

서책을 천천히 처음부터 끝까지 살펴본 그는 한숨을 내쉬며 그걸 내려놓았다.

“송구하옵니다. 소신이 어떻게든 이자들을 발본색원하여 고려에 뿌리내릴 수 없게 반드시 몰아내겠사옵니다.”

최근 감찰사의 관심은 해외에 있었다.

하지만 그걸 탓할 수는 없는 것이 그 지시를 내린 것이 나였다. 고려 내에서는 그다지 특별한 이슈가 없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탐관오리와 반복되는 개혁으로 불만을 가진 이들을 지켜보는 게 전부다.

현재 모든 관심은 왜국에 쏠려 있었다.

원나라와 홍건적에 대한 정보는 현지에 있는 김첨수가 전담하지만, 왜국은 여전히 정보망을 깔고 있는 단계에 불과했다.

혹시라도 대마도를 수복하기 위한 움직임이 없는지 살필 필요가 있었다.

“혹시 탕화가 보낸 것일지도 모릅니다.”

나는 그건 아닐 거라며 고개 저었다.

지금 탕화에게 그럴 여력은 없는 상태다.

요즘 그는 천완국의 서수휘와 대주국의 장사성을 견제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같은 백련교라도 파벌이 나뉘었다.

내부적인 갈등도 있기에 다른 곳에서 넘어온 이들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이인복은 잠시 고민하다가 내게 인력 보충에 대해서 언급했다.

“현재 감찰어사들이 교체 시기가 되어서 사람이 더 필요하옵니다.”

그 부분은 예전에 보고를 받았다.

벌써 대부분의 어사가 감찰사에서 6년 가까이 근무하고 있었다. 그들은 나와 약속했던 대로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크고 작은 사건이 있기는 했으나 그 정도의 과오는 넘어갈 정도였다.

사사로이 권력을 쓰지 않고 뇌물을 받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칭찬할 만했다.

하지만 한 번쯤 바꿔줄 때가 되었다.

“이번에 교체될 감찰 어사들의 수가 얼마나 되오?”

“황상까지 포함해서 다섯이옵니다.”

“혹시 염두에 두고 있는 이가 있소?”

“현재 문화부에 배치된 정도전과 홍사우를 감찰사로 보내주시옵소서.”

두 사람을 눈여겨보던 이인복이었다.

언젠가 그가 물러나면 원나라에서 활동하는 김첨수를 감찰 판사로 올리기로 내정된 상태다. 그러기 위해서는 원나라에 머물고 있는 김첨수의 후임도 키워놔야 했다.

그들이 필요한 이유를 설명하면서 정도전은 감찰사 체질이라고 주장했다.

이인복이 하는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너털웃음이 터트렸다.

“도대체 뭘 보고 그리 생각하는 것이오?”

“심지가 굳고 한번 뜻을 세우면 물러서지 않는 것이 불의를 보면 끝까지 물고 늘어질 성격이기 때문이옵니다.”

“하하. 부정할 수는 없군.”

모처럼 크게 웃는 것 같았다.

나도 그의 의견에 동의하는 바였다.

그러나 약관도 되지 않은 정도전에게 감찰 어사 지위는 너무 빨랐다.

“적당한 자리로 준비하겠사옵니다.”

“그런데 홍사우는 스스로 문관이 아닌 무관으로 진로를 바꿨는데 감찰사로 데려가는 이유가 무엇이오?”

“이번에 감찰사에 소속되어 형관의 보조를 맡고 있는 소유(所由)를 지휘할 이가 필요하옵니다.”

납득이 되는 이유이기는 했다.

감찰 어사들이 급하게 죄인을 압송하거나 추포할 일이 종종 있기에 힘을 쓸 줄 아는 인력이 어느 정도는 필요했다. 그런 일을 하는 것이 바로 소유들이다.

워낙 형관들이 원한을 많이 맺어서 종종 목숨을 위협당하는 때가 있기에 그들은 어사의 안전을 책임지기도 했다.

기존에는 황상이 맡았던 역할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감찰 어사에서 물러나서 서북면의 안무사로 떠난다.

고민할 것도 나는 정도전과 홍사우의 차출을 허용했다.

“데리고 가서 중히 써보시오.”

*

다음날 두 사람은 감찰사로 옮겼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얼마 전부터 문화부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갑작스러운 이동이라 조금 뜬금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정도전은 발령 소식을 들은 후부터 표정을 좀처럼 감추지 못했다.

오죽하면 홍사우가 주의를 줄 정도였다.

“그렇게도 좋으냐?”

“제가 가장 일해보고 싶다고 했던 곳이 감찰사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항상 언행에 조심해야 한다.”

권력의 핵심이라 불리는 감찰사다.

작은 꼬투리라도 잡으려고 혈안이 된 이들이 적지 않았다. 실제로 어사를 모함하다가 발각된 이들도 있었다.

전하께서도 다른 어느 관청보다 더 높은 기준을 강요하는 것이 감찰사였다.

두 사람은 감찰사 건물에 들어섰지만, 근무를 서고 있는 서유 몇 명이 전부였다.

감찰 어사는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꿰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서 있었으나 아무도 그들에게 시선조차 두지 않았다.

하지만 정도전은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감찰사 내부를 구경하느라 꽤 바빴다.

그때 감찰 어사 황상이 나타났다.

“이번에 녹사(錄事)로 온다던 정도전과 신입 감찰 어사 홍사우 맞으신가?”

“처음 뵙겠습니다.”

“판사님과 다른 어사들은 급한 일이 있어서 출타 중이니 나중에 인사하고 일단 나를 따라오게.”

황상은 두 사람을 이끌고 건물 뒤로 갔다.

그곳에는 꽤 커다란 창고 같은 곳이 보였는데 문을 열고 들어서자 퀴퀴한 종이 냄새가 밀려 나왔다. 어떤 설명도 없기에 정도전과 홍사우는 말없이 뒤따라갔다.

안으로 들어선 두 사람은 엄청난 높이로 쌓여있는 문서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이곳은 고려와 원나라 등에서 보내는 정보를 보관하는 곳이네.”

“어마어마합니다.”

“정도전 자네는 여기서 일하게 될 걸세.”

“뭐든 맡겨만 주십시오!”

“훗! 그 기백이 언제까지 갈지 모르겠으나 힘내시게.”

황상은 의미 모를 미소를 지었다.

그런 뒤에 그는 홍사우를 데리고 밖으로 나섰다. 황상은 안무사로 떠나기 전에 자신이 맡고 있던 일을 홍사우에게 인수인계해야 하기에 마음이 급했다.

그러나 정도전이 다급하게 그를 붙잡았다.

“그런데 여기서 저는 뭘 해야 합니까?”

“이곳 담당은 조금 있다가 올 텐데 아마 정보를 분류하고 조합하는 일을 할 걸세.”

“설마 이걸 다 읽어야 합니까?”

솔직히 말하면 엄두가 안 났다.

머리 위까지 쌓인 종이는 위태로웠고 자칫 쓰러지면 깔려 죽을 것 같았다.

황상은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창고 밖으로 나섰다. 홍사우는 좌절하고 있는 정도전을 안쓰러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독서당의 지박령이 감찰사로 옮긴 것이나 다를 것 없지 않으냐.”

“놀리실 거면 어서 가십쇼.”

“나중에 보자.”

홍사우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독서당에서 몇 년이나 책만 보고 살던 그였다. 심지어 얼마 전까지는 심사한다는 이유로 문화부에서 책만 보고 살았다.

이쯤 되자 정도전은 자포자기했다.

한동안 멍하니 서 있던 그는 얼마지 않아 직속 상관인 전녹생을 만날 수 있었다.

“정 녹사는 이곳의 정보를 분석해서 백성을 현혹하는 사이비(似而非) 집단인 백련교의 꼬리를 잡으시오.”

그 외에 맡은 일은 없었다.

상당히 지루하고 고된 일이었다.

하지만 그 일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엄청나게 중요한 일도 결국에는 작은 조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결정적인 조각 하나만 풀어도 큰 그림이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렇게 한 달 가까이 노력한 결과.

정도전은 결정적인 정보를 찾아냈다.

안개처럼 희미하던 존재의 꼬리를 마침내 잡은 것이었다. 상대방이 실수로 남긴 아주 작은 실수를 찾아낼 수 있었다.

정도전은 자신이 찾아낸 단서를 쥐고 크게 웃으며 날뛰었다. 그 덕분에 종이 뭉치가 쓰러져 난장판이 되었다.

하지만 이제 서서히 상대의 실체가 보였기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으하하! 드디어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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