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96
안 그래도 요즘 말이 많았다.
다행히 원자인 왕현은 건강했지만,
이 시대는 워낙 돌림병이나 돌연사가 많은 터라 후계자 한 명으로는 부족했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 대안이 필요하기는 했다. 그래서인지 은연중에 둘째를 언급하는 이들이 꽤 많았다.
“환궁할 테니 앞장서거라.”
변안열에게 양해를 구한 뒤.
궁궐로 돌아가겠다며 돌아섰다.
어차피 모병소는 내가 없더라도 잘 돌아가고 있는 곳이다. 오히려 내가 빠지면 다들 업무에 집중할 것이다.
하지만 궁궐이 가깝지는 않았다.
넓은 공터가 필요한 탓에 모병소는 경마장을 활용하고 있는 중이었다.
시전을 살필 겸 걸어온 탓에 궁궐까지 걸어가기에는 거리가 제법 되었다.
신소봉은 눈치 빠르게 곧장 사설 마차 쪽으로 나를 안내했다.
처음에는 이인민에게 말해서 경마장의 말을 타고 갈까 고민했으나 일행이 한두 명도 아니고 일이 복잡해질 것 같았다.
다행히 경마장 앞에는 항상 마차가 몇 대씩 서 있었는데 내가 올라타자 마부가 반가운 기색으로 맞아줬다.
“어서 옵쇼! 어디로 모실까요?”
“궁궐로 가자.”
“광화문 앞을 말씀하시는 게 맞습니까?”
“일단 출발하거라.”
내가 재촉하자 그는 곧장 고삐를 쥐고 마차를 몰기 시작했다. 구간별로 요금은 고정되어 있기에 흥정할 필요도 없었다.
호위로 따라 나온 홀치들도 다른 마차에 서둘러 올라탄 후에 내 뒤를 쫓아왔는데 신소봉은 자신이 타고온 말을 탔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서 광화문 앞에 도달하자 마부는 멈추려고 했다.
“마차는 안쪽까지 들어갈 수 없습니다.”
“무시하고 달리거라.”
“어이구! 큰일 날 소리하지 마십시오. 재추 같은 높은 어르신들도 저곳부터는 말에서 내립니다.”
“내가 책임질 테니 어서 달리거라.”
마부는 그렇게는 안된다고 하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신소봉이 탄 말이 앞질렀다.
그가 성문 앞에 도달하자 순군만호부의 병사들은 신소봉을 알아보고 길을 터줬다.
뒤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마차에 누가 탄 건지는 뻔한 것이었다.
그렇게 광화문과 승평문까지 통과해서 궁궐에 들어서자 마부는 사색이 됐다.
눈치가 아예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제야 그는 자신의 마차에 태운 사람이 누군지 감을 잡은 것 같았다.
그쯤에서 마차에서 뛰어내린 나는 신소봉에게 저화가 든 주머니를 던졌다.
미복 잠행을 나갈 때는 백성들에게 쓸 용도로 두둑하게 챙겨나가는 편이었다.
“넉넉하게 값을 치르거라.”
성은이 망극하다는 마부의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뒤로한 채 나는 곧장 가진이 머무는 처소를 향해 뛰듯이 걸었다.
그곳에 도달하자 요즘 부쩍 큰 원자가 몇 명의 아이들과 뛰어노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변안열과 주덕유의 아들인 변현과 주표였는데 세 아이는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서 친구처럼 지내고 있었다.
“여기로 줘야지!”
“어서 달려.”
“에잇! 또 저기로 차면 어떻게 해.”
녀석들은 요즘 공놀이에 빠져 있었다.
확실히 무관의 피가 흐르는 아이들이라 그런지 활동량 하나는 엄청났다.
그건 원자도 비슷했는데 같이 놀아주고 있는 환관들이 힘들어서 혀를 내밀며 쩔쩔매고 있을 정도였다.
‘너희의 아버지들이 그랬듯이 앞으로도 계속 원자의 곁을 지켜주거라.’
내가 두 아이에게 바라는 것은 그게 전부였다. 왕좌라는 것이 생각보다 사람을 외롭게 만든다. 원자에게는 지금이 유일하게 친우를 사귈 수 있는 시기였다.
더 나이가 들면 서로의 위치가 다르다는 것을 어느 순간 알게 될 것이다.
왕이란 자리가 그런 것이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게 왕좌라지만, 정작 이 자리에 앉은 뒤로 누군가와 온전히 속마음을 터놓고 대화한 적은 없었다.
그나마 가진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온전한 내 편은 그녀밖에 없었다.
잠시 아이들이 노는 것을 보고 있자.
담소를 나누고 있던 가진이 나를 발견하고는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녀의 곁에 있는 이들은 주덕유의 처인 이연과 변안열의 처인 원민이었다.
공방 일을 거들어준 이연과 둘이 자주 만나더니 이제는 변안열의 처도 합세했다.
‘의지할 사람이 있다는 것은 좋은 거지.’
오히려 그 모습이 보기 좋았다.
어린이집 학부모 모임 같은 느낌이 물씬 풍겼다. 같은 나이의 아들을 키우고 있는 이들이라 공감대도 많을 것이다.
더구나 두 장군 모두 타향에 부임해 있는 기간이 길어서 챙겨줄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세 여인의 성향은 꽤 달랐다.
가진이 말괄량이 기질이 있다면 이연은 차분했고 원민은 말보다 행동이 앞섰다.
그래도 그녀들을 자세히 보면 닮은 구석이 상당히 많았다. 외유내강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 같았다.
한 마디로 여장부들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도 가진을 향해 손을 흔들어줬다. 전통적인 궁중 예법에는 어긋나는 것이나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고려가 바뀌는 만큼이나 궁궐의 법도도 조금씩 내 입맛에 맞춰 변화하고 있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내가 답답해 죽을 것 같아서 권위가 떨어지지 않는 선에서 보이지 않는 벽을 허물고 있는 중이다.
그제야 두 여인도 나를 보고 허겁지겁 일어나서 고개 숙여서 인사했다.
“그간 강녕하셨사옵니까?”
“주 장군을 멀리 대마도까지 보냈다고 과인을 너무 미워하진 마시오.”
“그런 생각은 해본 적도 없사옵니다.”
이연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혼례를 치를 때부터 무관의 안사람이 되면 그런 일이 있을 거라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라며 괜찮다고 했다.
더구나 자신만 그런 상황은 아니잖냐며 오히려 다른 이들을 걱정했다.
그녀의 말이 맞기는 했다.
국경을 지키는 대부분의 병사들이 가족과 떨어져서 타지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강원도 최전방에서 만기 전역을 했던 내가 그 고단함을 모를 리가 없었다.
매년 병사들에게 고향을 다녀오라며 휴가를 보내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수만 명의 건장한 남자들이다.
그들이 가정을 비우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출산율의 저하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인구가 곧 국력인 탓에 가끔 집으로 보내줘야 했고 미혼인 이들은 그때를 노려서 혼례를 올리고 돌아오기도 했다.
그래도 미안한 것은 사실이었다.
멀쩡히 살아있는 남편을 계속 타지로 보내서 생과부로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생각해보면 함대를 이끌고 있다는 이유로 유독 그만 계속 밖으로 돌고 있었다.
그런데도 벌써 둘째가 태어난 것을 보면 부부 사이에 금슬은 상당히 좋아 보였다.
주덕유와 이연 사이에 태어난 둘째는 딸이었는데 엄마를 닮아서인지 예뻤다.
그 아이를 보면 자꾸 딸이 하나쯤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원자 아기씨는 저희가 잠시 돌보고 있겠사옵니다.”
궁궐에 자주 들어오는 두 사람이라 내가 이런 시간대에 가진의 처소에 찾아오는 일은 거의 없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회임 소식을 듣고 온 것이 분명했기에 그녀들은 알아서 자리를 피해줬다.
나는 가진의 곁에 나란히 앉아서 그녀의 손을 살포시 잡아주었다.
“회임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왔소.”
“그런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걱정보다는 축하를 받고 싶군요. 예전의 제가 아닌 것은 잘 알고 계시죠?”
“물론이오. 이날을 위해 지금까지 그렇게 노력한 것이 아니오.”
가진은 많이 달라졌다.
아마도 원자가 태어날 무렵에 몸에 생겼던 부담이 계속 걸렸던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산후조리를 마친 후부터 지금까지 운동을 하면서 스스로 건강을 챙기고 있었다.
가장 좋아하는 것은 역시 승마였다.
새로 들어온 아라비아와 마두라이의 명마를 타는 것이 그녀의 취미였다.
말을 타는 실력은 나보다 월등하게 좋은 터라 종종 둘이서 경주를 해도 내가 지는 경우가 더 많았다.
4년이란 시간은 상당히 길었다.
그동안 가진은 예전보다 건강해졌다.
아직 이십 대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녀가 운동할 때 가능하면 같이 하기 위해서 애썼다.
건강에 대한 염려는 나도 가지고 있었다.
단명한 조선의 왕들 때문이다.
대부분의 왕은 스트레스와 운동 부족으로 성인병에 걸리기 쉬운 상태이기는 했다.
그걸 대비하기 위해서 지금껏 내가 들인 노력도 상당했다. 재미있는 것은 그런 분위기가 문무백관에게 옮고 있었다.
‘어쩌면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일지도.’
근무 강도가 높아진 탓일까.
건강에 대한 관심이 드높아졌다.
몸에 좋다는 것은 가리지 않고 먹고 있을 정도였다. 그 덕분인지 몰라도 인삼(人參) 가격이 하늘 높은지 모르고 치솟았다.
내가 즉위하기 전과 비하면 거의 두 배쯤 올라간 것 같았다.
이 무렵에도 가마에 넣고 찐 홍삼이 존재했는데 품귀 현상 때문에 수출이 거의 되지 못하고 있을 정도였다. 덕분에 심부가 요즘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다.
몽골에서는 고려의 인삼이면 만병통치약 수준으로 인식되어 있는 탓이었다.
“이번에는 태몽을 안 꾸셨습니까?”
“아쉽게도 그렇소.”
“저도 딱히 꾼 꿈이 없는데 혹시 모르니 황후마마를 찾아뵙고 여쭤봐도 될까요?”
“그리하시오.”
그다지 큰 기대는 없었다.
아니 태몽이 아예 없길 바랐다.
둘째는 평범한 아이가 되길 바랐다.
엄청나게 실력이 좋은 아우를 가진 대부분의 원자가 훗날 장성하여 어떤 일을 겪는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우애 좋은 형제는 바라지도 않았다.
서로 칼을 겨누고 피를 보는 않는다면 그것만으로도 만족할 것 같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벌써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앞으로 공방은 어찌하죠?”
“아직 시간이 있으니 천천히 고민해 봅시다.”
“최근 몇 년 사이에 공방이 너무 커져서 이번에는 곽 전수와 연이한테 맡기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을 것 같습니다.”
“어찌하면 좋겠소?”
가진의 말에 나도 동의했지만,
일단은 그녀의 의견을 물어봐야 했다.
곽충수에게 과부하가 걸리고 있다는 것은 나도 인정하고 있었다. 내가 벌여 놓은 일이 워낙 많아서 뒤처리도 버거웠다.
잠시 고민하던 가진은 안타깝지만 자신의 한계를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면포 공방은 따로 관리자를 한 명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매년 면화 수확량이 늘어나고 있는 탓에 버겁네요.”
“적당한 사람을 찾아보겠소.”
나는 알겠다며 미소지었다.
왜 그런 결정을 내린 지 알기 때문이다.
현재 그녀가 운영하는 공방은 초창기에 비해서 엄청나게 커졌다. 그런데도 면화 생산량을 따라잡지 못할 정도였다.
그래서 최근에는 하청을 주듯이 소형 공방에 면포를 짜는 것을 맡기고 있었다.
이제 슬슬 민간에 넘길 때가 오긴 했다.
언제까지 내수사에서 모든 면화를 관리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미 의복 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는 요즘이었다.
공방에서 사람을 뽑는 등의 노력을 해도 나라 전체의 옷을 책임질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부분은 민감한 거라 아주 조심스럽게 설명해줘야 했다.
“백성을 위한 거라면 제가 백번이고 양보해야죠.”
가진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생각보다 일이 고되긴 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손을 놓겠다는 뜻은 아니라며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지금까지 공방에서 일하며 꽤 정이 들었는지 아낙네들을 뿔뿔이 흩어지게 하진 않겠다는 의지가 상당히 강했다.
“공방에서 일하는 이들 대부분 형편이 그리 좋지 않아서 일을 그만두게 되면 먹고살기 힘들어지는 이들이에요.”
“당장 모든 것을 넘길 생각은 없소.”
어차피 단숨에 진행될 일은 아니었다.
민간 시장이 자리 잡을 때까지 조금씩 풀어줄 생각이었다. 그때가 되면 내수사는 면화로 만든 실과 목화씨만 팔면 된다.
아직 면포가 상당히 비쌌기에 돈이 되는 일에 사람이 모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내 생각을 밝히자 가진은 그렇게 하자며 힘을 실어줬다.
모처럼 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무렵.
신소봉이 슬며시 다가와서 내 옆에 섰다.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이기에 뭐냐고 묻자 까맣게 잊고 있던 일정을 상기 시켜 줬다.
오후 늦게 문화부를 이끌고 있는 유숙과 논의할 게 있기에 약속을 잡아놨었다.
아차 싶은 마음에 가진을 바라봤다.
이런 날에 또 일하러 가겠다는 말이 쉽게 나오지는 않았다. 가능하면 같이 있어주고 싶었으나 그녀는 미소지으며 그런 것은 바라지도 않았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찮으니 어서 가서 일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