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95화 (95/202)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95

개경에 정벌 소식이 전해질 무렵.

규슈에 있던 소 쓰네시게도 뒤늦게 쓰시마에서 벌어진 일을 알게 되었다.

평소에 정기적으로 오가던 연락선이 오지 않았기에 이쪽에서 따로 쓰시마로 사람을 보냈는데도 계속 감감무소식이었다.

처음에는 사고가 난 줄 알았다.

아무리 노련한 선장이라도 바다에서는 별별 일이 다 생기기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최근 날씨가 좋진 않았다.

그게 아니면 해적에게 나포당한 것이라 여겼는데 배 한두 척도 아니고 쓰시마를 통째로 빼앗길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

“도대체 이 자식은 뭘 하고 있었던 거야!”

고려에 대한 분노보다 무능력하게 당한 동생에 대한 환멸이 먼저 들었다.

자신이 이룩한 업적에 먹칠을 해놨다.

쓰시마는 전쟁터를 떠돌며 생긴 수없이 많은 상처의 보상으로 받아낸 것이다.

그런데 그걸 홀랑 빼앗겼다.

뭘 해내라고 강요한 것도 아니었다.

지니고 있는 것만 잘 지키라고 했다.

지금까지 해적에게 계속 수탈당해도 어느 정도까지는 이해해줬다.

하지만 가족을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이 자꾸 쓰네시게의 자존심을 긁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는 약자보다는 강자였다.

누군가에게 빼앗기는 입장이 아니라 항상 빼앗는 입장에 서 있는 편이었다.

자신이 소유한 것을 누군가 건드리는 것은 생각조차 못 해본 일이었다.

“그래서 상황이 어떻더냐?”

“귀면문 깃발이 걸려 있는 배가 쓰시마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었습니다.”

“또 그놈들인 것이냐?”

주덕유의 악명은 꽤 드높았다.

귀면문 깃발을 달고 바다를 유린하는 그들은 언제부턴가 약탈도 서슴지 않았다.

그걸 보다 못한 슈고(守護)께서 숙고 끝에 고려로 사신을 보냈을 정도였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조롱이라도 하듯이 쓰시마를 집어삼켰다는 소식이었다.

“이것들이 우리를 얼마나 업신여기고 있길래 이렇게 오만방자하단 말인가?”

마음 같아서는 자신이 지휘하고 있는 치쿠젠(筑前)의 수호대(守護代)를 이끌고 당장 쓰시마로 달려가고 싶었다.

그가 키워낸 병력은 수가 그리 많지는 않으나 정예 중의 정예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치쿠젠을 지키라는 명령을 어기고 마음대로 병력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 외에 다른 소식은 없더냐?”

그가 뭘 묻는 건지는 뻔했다.

가족과 동생의 생사를 묻는 것이다.

그쯤 되자 수하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어민을 통해 들은 내용을 꺼내야 했다.

진실을 숨기고 모른 척하고 있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쓰시마를 대관하고 있던 소고 님은 효수되어 이니 항에 걸렸고 다른 가족분의 생사는 불명확하다고 합니다.”

“소고가 죽었다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르자.

쓰네시게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오르고 눈에 핏발까지 섰다. 왜 그가 오니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지 설명하기 충분했다.

이런 모습을 보일 때가 가장 위험하다는 것을 알기에 소식을 가지고 온 수하는 저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의좋은 형제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혈육이었다.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자칫 잘못하면 소씨 가문의 대가 끊길 거란 위기감이 들었다. 살아있다면 아들이라도 쓰시마에서 구출해야 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쓰네시게는 곧장 갑주를 챙겨 입기 시작했다.

“어딜 가시려는 것입니까?”

“일단 주군께 보고는 해야 할 것 아니더냐. 어서 말을 준비시키거라.”

“알겠습니다.”

주군인 쇼니 요리히사를 만나야 했다.

쓰시마는 자신이 관리하는 곳이나 그 이전에 슈고인 쇼니 씨의 영토였다.

더구나 군대를 움직여서 복수를 하려면 적어도 주군의 승인이 필요했다.

그로부터 이틀이 지난 뒤.

쓰네시게는 쇼니 요리히사의 성에 도착했다. 뜬금없는 방문이었으나 요리히사는 곧장 그를 집무실로 들였다.

안 그래도 최근에 규슈를 기습한 고려의 해적들 때문에 부르려고 했던 참이었다.

하지만 그는 예상외의 보고를 했다.

“송구하오나 쓰시마가 고려군에 의해 점령당했습니다. 저에게 군대를 내어주시면 다시 되돌려 놓겠습니다.”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인가? 고려의 해적이 약탈한 뒤에 돌아가지 않고 아예 그곳에 눌러앉았다는 말인가?”

쓰네시게는 그의 말을 정정해줬다.

고려의 해적이 아닌 고려군이란 정황이 곳곳에서 보였다. 고려가 아무리 발뺌해도 증거가 너무 많이 있었다. 그건 쇼니 요리히사도 충분히 알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쓰시마를 점령했다는 것은 믿기지 않았다.

고려가 그럴 리가 없었다.

“규슈를 도모하는 것도 아니고 섬 하나를 점령하자고 군대를 일으켰다는 것인가?

“얼마 전에 규슈와 고토 열도를 습격한 것도 연관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하필 이럴 때···.”

쇼니 요리히사의 머리는 복잡해졌다.

안 그래도 사신으로 보냈던 이의 소식이 끊어진 뒤였다. 하지만 지금은 고려와 정면으로 부딪칠 여력이 안 되었다.

그래서 경고하는 의미로 보낸 것인데 오히려 역효과가 나온 것 같았다.

“지금은 고려와 아웅다웅하고 있을 여력이 없으니 자중하고 있게. 잇시키 가문부터 뿌리 뽑는 것이 더 우선이네.”

규슈는 현재 혼란 그 자체였다.

그걸 타개하기 위해서 얼마 전에 요리히사는 남조와 손을 잡아야만 했다.

아시카가 세력이었던 잇시키 노리우지(一色範氏)는 규슈 단다이를 맡고 있는데 그를 몰아내는 것이 더 중요했다.

현재까지는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것은 아니다.

잇시키 노리우지의 아들인 다다우지가 여전히 잔여 세력을 이끌고 있었다.

원래 몸담고 있던 북조에서 이 일을 문제 삼기 전에 하루빨리 마무리해야 했다.

그런데 지금 병사를 빼서 아무 의미 없는 쓰시마를 재탈환할 필요가 있을까.

당연히 아니라는 답이 나왔다.

본거지인 규슈부터 안정시켜야 했다.

지금 잇시키를 몰아내지 않으면 언젠가 큰 후환이 될 것이 분명했다.

가뜩이나 상황이 좋지 않았다.

2년 전에는 다다후유에게 공격당해서 교토를 점령 중이던 막부의 초대 쇼군인 아시카가 다카우지 님이 규슈로 돌아왔다.

한마디로 패주해서 도망쳐온 것이다.

지금은 재기를 위해 온 힘을 다해야 했다.

이제는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다.

아주 사소한 결정 하나라도 잘못되면 생사를 가를 수 있는 시기였다.

쓰네시게는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는 요리히사에게 다시 한번 간청했다.

“아직 쓰시마에는 생사 조차 확인되지 않은 소장의 가족이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쩔 수 없네.”

“주군!”

“현실을 봐야지. 지금 병력을 내준다고 하더라도 저들의 전선을 물리치고 쓰시마에 도달할 가능성이 없지 않나!”

요리히사 역시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정면으로 부딪치면 쓰시마에 도달하기도 전에 다들 물고기 밥이 될 것이 뻔했다.

객관적으로 보면 그들이 지닌 해상 전력은 고려를 상대할 수준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배를 잃었다.

수년 사이에 수백 척이나 손해를 봤는데 지금은 새로운 배를 만들 여력이 없었다.

기존에 고려의 해군과 싸운 이들의 말에 의하면 다시 북부 바다를 되찾으려면 적어도 수백 척의 배를 조선해야 한다.

“자네도 알다시피 지금 그럴 여력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지 않은가.”

차라리 거기에 재물을 쏟아 넣을 바에는 남북조로 나눠진 규슈부터 정리해야 했다.

더 큰 문제는 그렇게 배를 마련해도 그걸 이끌고 운항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배만 잃은 것이 아니라 숙련된 뱃사람도 대부분 잃은 상태다.

그쯤 되자 요리히사도 짜증이 났다.

쓰시마를 그에게 준 뒤로 온갖 문제가 생기고 있었다. 가장 먼저 고려의 해적을 막아야 할 이가 쓰네시게 아니던가.

제 역할도 못 하더니 오히려 자신에게 달려와서 따지고 있었다.

하지만 내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쓰네시게는 전투에서 항상 선봉에 서는 아주 중요한 수하였다.

어쩔 수 없이 요리히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그를 진정시켜야 했다.

그렇게 얼마나 대화를 했을까.

아무리 애를 써도 요리히사가 꿈쩍도 하지 않자 쓰네시게는 자포자기했다.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그의 아래에서 세운 공이 적지 않기에 실망이 컸다.

얼마 뒤에 험상궂은 표정으로 성에서 나온 그는 뒤돌아보며 침을 뱉었다.

쓰시마를 무단 점령한 고려군에 대한 분노보다 자신의 편이라 생각했던 요리히사에 대한 실망이 더 컸다.

“이 치욕은 절대 잊지 않으마.”

*

쓰네시게의 충성심이 흔들릴 무렵.

고려도 꽤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지난해부터 계획하고 있던 2만 명의 모병이 날이 풀리자 곧장 시작되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모병이 될지는 아직 장담할 수 없었다. 기존에 비해 병사들이 받아 가는 녹봉의 규모가 작아졌다.

그래도 모병소는 북적거렸다.

승승장구하고 있는 전적 덕분이다.

거기에 인생 역전할 기회가 존재했다.

최근 고려는 성공 신화를 쓰는 이들이 상당히 많이 존재했다. 하지만 대부분이 상업이나 제조 계통에 쏠려 있었다.

상업적 재능이나 손재주가 없는 이들 중에 성공에 목마른 이들의 선택지는 대부분 군대 쪽으로 몰리고 있었다.

고려의 군대를 이끌고 있는 대부분이 명문가의 출신이지만, 중하급 무관인 상사까지는 누구라도 진급이 가능했다.

“그게 말이 쉽지. 대부분 홀치 출신이 차지하는 자리 아닌가?”

“가능성이 아예 없진 않잖아. 우리 같은 양인 출신이 그런 기회를 언제 얻겠나.”

“원나라에서 징집당했던 이들 중에 몇 명도 그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더라. 중사 정도만 되어도 살림살이가 필 정도잖아.”

“살아있어야 부귀영화도 누리지.”

부정적으로 보는 이들도 있었지만,

가진 것이라고는 몸 밖에 없는 이들은 대부분 모병에 지원하고 있었다.

출산율이 높아진 덕분에 먹여 살려야 할 부양가족이 많아지고 있는 탓이기도 했다.

모병이 진행될수록 녹봉의 양이 계속 줄어들 거란 소문도 한몫 했다.

어차피 군에 몸을 담을 생각이라면 조금이라도 빨리해야 한다는 계산쯤은 있기에 이번에는 꼭 합격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예전에 모병할 때도 그랬지만,

모병소가 모두를 받아들이진 않았다.

최소한의 기준을 통과한 이들만 병사가 될 수 있었다. 일종의 체력장과 비슷했는데 이것도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 더 체계적으로 바뀌고 있었다.

“개경 다음에는 어느 곳에서 모병소가 진행될 예정인 것이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이번 모병의 총책임자인 변안열에게 물었다.

남해안을 한동안 책임지던 그의 병력은 탐라와 대마도에 나눠서 배치되었다.

기껏 키워낸 병력을 다른 지휘관에게 내주는 일은 상당히 속 쓰린 일이다.

당연히 나는 그에 대한 보상으로 이번에 모병 되는 병사를 그에게 맡겨야 했다.

그렇다고 2만 명 전부를 그에게 보낼 수는 없는 일이다. 현재 그가 4군의 지휘관이기는 해도 북부가 더 중요했다.

아마도 4군으로 배치되는 이들은 절반쯤인 1만 명 내외가 될 것이다.

“서경과 화주 등의 북부 지역을 거쳐서 남부의 계림부로 내려갈 예정이옵니다.”

“가능하면 북부보다는 남부에서 뽑는 비중이 높아야 하오.”

“염두에 두고 진행하겠사옵니다.”

한동안 모병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에 자연스럽게 대화는 육아로 넘어갔다.

대마도 정벌 때문에 변안열은 반년 가까이 집에도 못 들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별거 아니라며 웃었다.

“항상 외지를 떠도는 주덕유 장군을 생각하면 소장은 약과에 불과하옵니다.”

“그러게 이번에 처자를 데리고 가라고 했는데도 주 장군은 왜 거절한 것인가?”

“생각보다 대마도가 척박하옵니다. 먹는 것부터 시작해서 부족한 게 많아서 괜히 고생시킬 것 같다고 거절했사옵니다.”

대마도로 떠난 장수 중에 장기간 체류가 예정된 이들이 있다. 휴가가 주어져도 워낙 멀어서 쉽게 돌아올 수 없었다.

그래서 그런 이들에게는 가족을 데리고 가도 좋다고 허락했으나 그걸 실행한 이들은 정말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다.

다들 주덕유와 같은 이유겠지.

사람이란 편리함을 쉽게 잊지 못한다.

현재 개경은 유행의 중심지이자 문화와 경제 모든 것이 하루가 다르게 바뀌었다.

물류가 강화된 덕분에 기존까지는 쉽게 볼 수 없던 각지의 특산물도 쉽게 접했다.

개경에 사람이 모이면 모였지 이곳을 벗어나려고 하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그때 신소봉이 허겁지겁 뛰어왔다.

궁궐에서 나올 무렵에 안 보여서 그냥 나왔더니 뒤늦게 쫓아온 것이었다.

오늘은 그가 나를 수행하는 날이기에 근무 태만이 아니냐는 듯이 핀잔을 줬다.

“도대체 어디 갔다가 이제 오는 것이냐?”

“마마님의 처소에서 오는 길입니다.”

“갑자기 거기는 왜?”

신소봉은 잠시 머뭇거렸다.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그는 자신이 이 이야기를 전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며 어렵게 입을 뗐다.

“조금 전에 어의인 설주와 의녀가 다녀갔는데 마마께서 회임하셨다 하옵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