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94화 (94/202)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94

쓰시마 중부의 니이(仁位).

그곳은 현재 쓰시마의 중심지다.

원래 이즈하라에 있던 집무소를 이곳으로 옮긴 것이 불과 8년 전의 일이었다.

그런데 그게 지금 와서 오히려 문제가 되고 있었다. 니이는 아직 외침에 대한 방비가 전혀 이뤄지고 있지 않았다.

지형적으로도 꽤 불리했다.

니이항에서 넓은 바다로 빠져나가는 해로는 상당히 좁은 편에 속한다.

워낙 해안의 지형이 복잡해서 매복하기는 좋았지만, 열세일 때는 독 안에 갇힌 생쥐처럼 도망칠 구석이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성이 있지도 않았다.

쓰시마는 가네다 성이 유일했다.

일부 성벽이 남아있는 곳들도 최소 수백 년이 지나 형태만 겨우 찾을 수 있었다.

대부분 과거 신라의 해적인 신라구와 여진의 해적을 막기 위해 세워진 곳이다.

문제는 가네다 성도 멀쩡한 것도 아닌 데다가 바다 건너에 세워져 있었다.

습격을 받은 지금 그곳으로 이동해서 농성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애초에 쓰시마는 농사지을 땅이 터무니없이 부족한 탓에 누구도 탐내지 않던 관심 밖에 있는 섬에 불과했다.

당연히 방비가 되어있을 리가 없었다.

“어서 무기를 꺼내오지 않고 뭣들 하고 있는 건가!”

무사들이 바쁘게 움직였지만,

애초에 싸울 수 있는 이가 부족했다.

쓰시마의 인구는 면적에 비해서 부족한 곳이었는데 무턱대고 아이를 낳아 봐야 굶어 죽기 십상이니 꺼릴 수밖에 없었다.

얼마 되지 않는 아이들은 고려군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간고(ガンゴー)가 왔다며 울음을 터트렸다.

간고는 원나라와 고려를 뜻한다.

이 무렵의 쓰시마에서는 간고가 호랑이와 동급일 정도로 아이들이 무서워했다.

과거에는 여몽연합군에게 당했고 최근 들어서는 사략 함대의 약탈도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니이 앞바다는 고려의 배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채워졌다.

“시벌, 저게 도대체 몇 척이야?”

“지금이라도 도망쳐야 해.”

“도대체 어디로 도망친단 말인가?”

“이즈하라로 가면 되지 않을까?”

“저기 연기가 피어오르는 게 안 보이나. 이미 이즈하라도 공격받고 있다는 뜻이지 않은가.”

그들의 말처럼 남쪽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는데 이즈하라를 비롯해 여러 마을이 불타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즈하라는 니이로 이전하기 전에 쓰시마의 중심지였기에 주민들이 받는 심리적인 타격은 상당히 컸다.

하지만 고려군은 곧장 쳐들어오지 않았다. 니이항을 바라보고 배들이 줄지어 서며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걸 지켜보던 왜인들은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곧장 알아차렸다. 주덕유의 함대에게 지금까지 당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멍하니 보고 있지 말고, 다들 피해!”

몇 명의 사람들이 서둘러 경고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넋이라도 잃은 것처럼 고려군의 배를 지켜보고 있었다.

다들 정신줄을 놓은 것 같았다.

그리고 머지않아 예상대로 배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름과 동시에 굉음이 터졌다.

그제야 왜인들은 혼비백산하며 흩어지기 시작했다.

쿠웅! 쿵!

고려군은 상륙할 생각조차 안 했다.

그저 멀리서 화포를 계속 쏠 뿐이었다.

화약보다 사람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쓰시마 사람들은 오히려 그게 더 두려운 일이었다. 어떻게 반항할 수단조차 없기 때문이었다. 일부 무사들이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칼을 쥐고 발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혀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수백 발의 화포를 쏘자 메케한 연기가 항구 쪽으로 가득 밀려왔다.

숨을 쉬기조차 어려울 정도였다.

그쯤 되자 고려의 전선도 움직였다.

화포가 쏘아지는 소리가 현저하게 줄었는데도 왜인들은 머리를 내미는 이조차 없을 정도로 사기가 바닥을 쳤다.

“지금이다. 모두 돌격하라!”

이성계과 조인벽이 선두에서 외치자.

그의 뒤를 따라서 육군의 병사들이 기쁜 표정으로 배에서 뛰어내리기 시작했다.

땅을 밟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살 것 같다는 표정을 지을 정도였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왜인들이 칼을 뽑아 들고 덤볐으나 상대가 안 되었다.

수적인 차이가 워낙 컸다.

아무리 날뛰어도 소용이 없었다.

대부분은 접근을 하기도 전에 무수히 많은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그중에는 튼튼한 갑주를 입은 이들도 있었지만, 화살 비를 견딜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압권인 이가 있었다.

그건 바로 활을 쏘고 있는 이성계였다.

명궁이라는 칭호가 부끄럽지 않게 연달아 쏘아대는 화살은 모두 명중했다.

심지어 아주 좁은 투구 사이로의 눈을 맞추는 신기에 가까운 모습도 보였다.

조인벽도 만만치는 않았다.

그는 언월도를 들고 종횡무진 날뛰었다.

무게감이 상당한 조인벽의 공격을 막아내는 왜구는 거의 없을 정도였다.

왜구 대부분이 체구가 작은 탓에 심지어 뒤로 튕겨 나가는 모습도 종종 보였다.

“누가 더 많이 잡는지 내기한 거는 잊지 않았겠지? 그렇게 굼벵이처럼 움직이면 절대 나를 이기지 못할 걸세.”

“이런 잔챙이보다 두목을 잡아야지. 인생은 한 방이야.”

“하하하! 내가 이미 찜해놨으니 기대는 접어두게.”

오히려 여유가 넘칠 정도였다.

소 소고의 병사들은 수백 명에 불과했다.

그것도 급하게 마을의 장정을 끌어모은 덕분에 그 정도였다. 애초에 쓰시마는 왜구의 중간 정착지에 불과한 곳이다.

병사가 그리 많을 필요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상륙은 계속됐다.

바다에서 김휘남이 화포 사격을 통제하는 사이에 변안열과 주덕유도 합류했다.

두 장군은 각각 육군과 해군을 이끌고 소 소고가 있을 곳을 향해 돌격했다.

그들이 니이항과 집무소를 접수하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반 시진에 불과했다.

“저놈이 소 소고인 것 같은데?”

조인벽이 한쪽을 가리켰다.

그쪽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니 이성계의 눈에도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다급하게 산골짜기 쪽으로 달리는 게 보였다.

갑주를 차려입은 무사들이 누군가를 호위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쫓아가 볼까?”

“당연하지. 모두 나를 따라오거라!”

“우리도 함께 간다. 너는 장군께 추격을 시작한다고 알리거라.”

무단이탈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성계가 부하 한 명을 보고를 위해 보낸 뒤에 병사를 이끌고 뛰기 시작했다.

이번 정벌은 말을 가져오진 않았다.

산지가 대부분인 대마도에서 말을 타고 싸울 일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속도가 느리지는 않았다.

매일 아침 빼놓지 않고 하는 일이 구보였다. 뜀박질과 체력 하나는 어디 내놔도 부족하지 않은 고려군이었다.

더구나 뛰는 중에도 이성계의 화살은 계속해서 뒤를 노리고 있는 중이었다.

거리가 멀어서 명중률은 낮았다.

하지만 위협이 안 될 정도는 아니었다.

두 발 중에 한 발 정도는 정확하게 도망치는 이들의 등판에 꽂히고 있었다.

화살을 피하고자 갈 지(之)를 그리며 뛰어가니 그만큼 속도가 늦춰졌다.

당연히 얼마 못 가서 그들은 따라잡혔다.

“이곳은 저희가 맡을 테니 어서 가십시오!”

소 소고만이라도 도망칠 수 있도록 무사들이 멈춰서 돌아섰다.

그러나 그런 의도가 무색하게 조인벽은 그들 뒤로 돌아가서 퇴로까지 막았다.

산기슭 쪽으로 움직여서 앞지른 덕분이었다. 그때부터 쓰시마의 무사들과 치열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채앵! 챙!

산골짜기에 금속성이 가득 메워졌다.

확실히 보통의 병사들과 달리 소씨 가문에 소속된 무사들은 뛰어났다.

그들은 상처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 마리의 야수가 된 것처럼 날뛰었다.

하지만 고려군의 대응은 차분했다.

굳이 무리할 필요가 없는 것이 후속 부대가 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서둘러서 추격하라! 왜구의 수장을 놓쳐서는 안 된다.”

멀리서 주덕유 장군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때까지 굳이 기다릴 필요는 없었기에 이성계와 조인벽은 양쪽에서 쇄도하며 쓰시마의 무사들을 제압했다.

두 장수의 활약은 정말 대단했다.

주덕유가 도달하기도 전에 그들은 고려군의 병사들과 힘을 합쳐서 무사들 대부분의 목을 베어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소 소고로 추정되는 이를 사로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었다.

이성계와 조인벽은 아직 살아있는 이들을 추포하여 곧장 항구 쪽으로 돌아왔다.

그들을 안우 장군 앞에 꿇려 놓자 주덕유의 사략 함대에 소속되어 있는 왜국 출신의 병사가 얼굴을 확인해줬다.

“확실합니다. 저자가 소 소고입니다.”

왜국 출신으로 하사 계급에 오른 그 남자의 정체는 백 년 전까지 대마도를 지배한 아비류 씨(阿比留)의 후손이었다.

백제 계통의 성 씨를 가진 그들은 대대로 왜국보다는 한반도와 더 연이 깊었다.

당연히 그들의 고향을 빼앗긴 탓에 아비류 씨의 후손은 소 씨에 대한 원한이 상당했다. 그쯤 되자 소 소고도 더는 정체를 숨길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안우에게 소리쳤다.

“네 놈들이 몸 성히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치쿠젠(筑前)의 수호대(守護代)를 이끌고 있는 형님이 이 치욕을 몇 배로 갚아줄 것이다.”

“소 쓰네시게를 말하는 건가?”

“오니 교부라 불리는 형님은 너희들 모두를 단숨에 도륙 낼 수 있는 분이다.”

“그 전에 물고기 밥이 될걸.”

주덕유가 어림도 없다며 웃었다.

왜국 선박을 보이는 족족 격침시키고 있는 덕분에 이 주변의 바다는 아주 작은 어선 정도만 남겨져 있었다.

그건 규슈도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왜국이 남북조로 찢어져서 싸움을 계속한다면 크게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아마 당분간 규슈는 쓰시마를 잃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할 것이다.

“가서 그놈들을 끌고 오거라!”

주덕유가 신호를 주자 몇 명의 병사들이 집무소 건물에서 사람들을 끌고 나왔다.

그들의 얼굴을 본 소 소고는 안색이 하얗게 질릴 수밖에 없었다. 포위되기 전에 어떻게 빼돌리려 했던 가족들이었다.

더구나 그들 중에는 형님인 소 쓰네시게의 형수님과 아이들도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규슈로 연락을 보낼 게 뻔한데 그냥 놔둘 거라 생각했던 것이냐.”

대마도와 규슈 사이.

1차 상륙도 하기 전부터 그곳에는 쾌선 몇 척이 지키고 있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일반 상선이 쾌선을 피할 수는 없다.

중간에 성공적으로 낚아챈 덕분에 이렇게 다시 대마도로 끌려온 것이었다.

그제야 소 소고도 자포자기했다.

“차라리 나를 죽이고 가족과 아이들은 풀어주시오!”

“이 자리에서 네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안우는 곧장 주덕유에게 신호를 줬다.

그러자 그는 허리춤에서 걸려있던 칼을 뽑아서 소 소고의 목을 내리쳤다.

단숨에 머리가 분리되어 뒹굴자 아주 짧은 격차를 두고 피 분수가 뿜어졌다.

소 소고를 처단하는 것은 이미 정벌 전에 정해 놓은 거라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이걸로 정벌의 끝은 아니었다.

섬 곳곳에 있을 잔존 세력을 완전히 밀어내야 했다.

“서둘러서 보급품을 하역하거라!”

*

그로부터 얼마 뒤.

대마도 정벌 소식이 전해졌다.

개경에 당도한 안우의 서찰은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이번 정벌로 사망한 이는 백 명 단위를 넘어서지 않았다. 워낙 병력 차이가 컸기에 가능한 수치였다.

현재 대마도에 주둔하는 병사를 제외한 나머지는 탐라와 고려로 복귀 중이었다.

“과인이 준비하라고 시킨 것은 어떻게 되었소?”

“며칠 후에 공부에서 엄선한 석공들이 출발할 예정이옵니다.”

“비석(碑石)에 새길 명문은 저번에 보여준 그걸로 확정된 것이오?”

“그러하옵니다.”

이번에 보내는 장인들이 할 일은 대마도 전역에 거대한 비석을 세우는 것이다.

상당히 고생스러운 일이나 훗날을 생각하면 꼭 필요한 일이었다.

백제와의 옛 관계를 서술하고 앞으로 대마도가 고려의 땅이라 알려야 했다.

왜구의 본거지를 소탕했다는 의미도 있기에 명분이 부족하지는 않았다.

“간척을 진행해본 강화 출신의 인부는 수소문해보았소?”

“이번에 석공을 보내는 배편에 십여 명이 함께 보내질 예정이옵니다.”

“필요한 게 더 없는지 꼼꼼하게 살펴보시오.”

대마도는 완전히 바뀔 것이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간척이었다.

염분을 빼려면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자체적으로 식량 수급할 땅이 필요했다.

이미 고려는 강화 등의 섬에서 대규모 간척을 진행한 경험이 있었다. 대마도가 조금 더 크지만, 못 할 것도 없었다.

당연히 간척은 일반 백성의 노동력을 쥐어짜야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이번 간척은 모두 왜인을 동원할 생각이다.

이키와 규슈를 비롯해 고토 열도에서 데려다 쓰면 되니 인력이 부족하지는 않을 것이다.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수탈하고 노역을 시킬 생각이지만, 양심에 걸리거나 안타까운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당시에 그들이 했던 일을 그대로 돌려줄 생각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후손들이 말했던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한국은 우리가 식민 지배를 한 덕분에 잘살고 있으니 감사해야 한다]

그들의 주장은 항상 자신들 덕분에 한국이 잘 사는 게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생긴 수많은 수탈과 노역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 이들이었다.

나는 그걸 그대로 갚아줄 것이다.

모든 비용은 어차피 고려에서 지불할 테니 상황은 거의 비슷하다고 생각됐다.

과연 그들은 당하는 처지가 되어서도 똑같은 소리를 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온갖 착취와 핍박을 당한 뒤에도 그런 소리가 나올 수 있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얼마나 고마워할지 기대되는군!’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