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93
바다는 미지의 세계였다.
땅에서 태어나서 자라는 일반적인 이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에 불과했다.
더구나 이주의 자유가 없는 고려 사람 상당수는 배를 타 본 경험도 없었다.
그나마 강과 바다 주변에 사는 이들만 어느 정도 물과 친할 뿐이다.
“우우욱!”
“아이고··· 나 죽네.”
“대마도는 아직 멀었습니까?”
당연히 멀미에 약할 수밖에 없다.
해군에 소속된 이들을 제외하면 다들 처음 겪는 파도에 하나둘 쓰러졌다.
가장 심한 것은 용호군 출신이었다.
대부분의 병사가 출항한 지 한 시진도 안 되어 먹은 것을 전부 게워내고 있었다.
기존에 탐라 토벌을 다녀왔던 변안열의 병사들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고작 항해 한 번에 멀미 증상이 사라질 리 없었다. 그 모습을 보며 해군 병사들은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하하하! 땅개비 녀석들 모습 보소!”
“진정한 남자라면 이 정도 파도쯤은 즐길 줄 알아야지. 다들 약해빠졌군.”
“얼굴이 하얗게 질린 것이 꼴 좋네.”
해군이 지닌 자부심은 대단했다.
억지로 끌려와서 배를 타던 시절과는 상당히 달랐다. 해군 특유의 복장과 모자는 아이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지난 수년 동안 왜구를 성공적으로 방어하고 있는 덕분이었다.
하지만 자부심은 얼마 전에 완전히 재편성된 육군도 뒤처지진 않았다.
개경에 주둔하는 모든 병력을 1군으로 서북면과 동북면은 2군과 3군으로 편성한 이후에 모든 병사를 육군이라 칭했다.
문제는 남해안 이남 지역이었다.
남해안과 탐라 그리고 대마도까지 있기에 하나의 지휘권으로 묶기 어려웠다.
그 때문에 4군으로 통칭하기는 했으나 지휘권은 각자 나누어 가진 상태였다.
“물방개 놈들이 더럽게 시끄럽네.”
“뭍에 발만 디디면 한 주먹도 안 되는 녀석들이 할 말은 아니잖아.”
“나중에 한 판 제대로 붙어보자고!”
그중에서도 멀쩡한 몇 명의 병사들이 맞받아치자 곳곳에서 야유가 터졌다.
하지만 분위기가 살벌하거나 그렇지는 않았다. 누구도 얼굴을 붉히거나 주먹다짐을 하지는 않았다.
전투를 앞두고 그런 짓을 했다가 손모가지가 잘려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멀미가 신분과 직급을 가리지 않기에 안우도 멀쩡하진 않았다. 그는 가슴을 부여잡고 헛구역질을 멈추지 못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윤호가 찻잔을 들고 다가와서 건넸다.
“이거라도 조금 마시십시오.”
“마시는 족족 토하는 데 의미가 있겠나.”
“그래도 계속 수분을 보충해야 합니다.”
주덕유의 부관인 윤호는 바다 위에서 수년째 복무하고 있는 중이었다.
원래는 주덕유의 함선에 같이 타고 있어야 정상이나 이번에는 안우가 탄 쾌선을 맡아서 근거리에서 보좌 중이다.
바다 위에서 지휘하는 것이 다소 미숙한 안우를 위한 주덕유의 배려였다.
“그대의 말이라면 믿어야지. 이리 주게.”
안우는 잔을 받아서 입을 축였다.
뜨뜻한 차가 목구멍을 넘어가면서 시큼한 맛이 났으나 조금 진정되는 기분이었다.
그제야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는지 다른 이들의 상태를 물어봤다.
“다른 이들은 괜찮은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변옥란과 정몽주를 비롯해서 대다수가 선창에서 죽은 듯이 잠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저 두 사람은 아까부터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건가?”
안우의 시선을 쫓아서 고개를 돌리자 이성계와 조인벽이 보였다.
두 사람은 선수에 꼿꼿이 서서 거친 파도를 온몸으로 맞고 있는 중이었다.
가끔 물보라가 튀어 올라서 몸을 적시고 있으나 꿈쩍도 안 하고 있었다.
“하하, 해군들이 종종 하는 경쟁인데 먼저 균형을 잃고 넘어지면 지는 것입니다.”
“젊음이 좋기는 하군.”
“경쟁 상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많이 성장할 수 있는 시기죠.”
그렇다고 둘 사이가 나쁘진 않았다.
서로 경쟁하며 한계에 도전하고 있지만, 승패는 깔끔하게 받아들이는 편이었다.
반면에 이원계는 변안열과 함께 주덕유의 쾌선에 타고 있었는데 정벌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동년배인 그들은 무척 친해졌다.
안우는 그들을 보니 흡족해졌다.
“고려의 앞날이 참으로 밝은 것 같소.”
“모든 것이 전하께서 계시기에 얻을 수 있는 홍복(洪福)입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네.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런 장관을 볼 수 있을 거라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네.”
안우가 선미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수백 척의 배가 뒤따라오는 것이 보였다.
바다를 가득 메운 그 모습은 경험 많은 안우와 윤호도 처음 보는 장관이었다.
실제로 그 모습은 종사관과 화공에 의해서 글과 그림으로 담기고 있었다.
“과거 낭도 대첩 당시보다 훨씬 큰 규모인 것은 확실합니다.”
윤호도 낭도 대첩에 참전했었다.
하지만 이 정도의 규모는 아니었다.
삼백여 척에 달하는 전선의 뒤로는 동오의 상단에서 차출된 상선이 보급품을 싣고 뒤를 따라서 오고 있는 중이었다.
이번 정벌은 단순하게 대마도만 노리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왕에 대규모 선단을 꾸린 김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대마도에 머물 주덕유를 제외한 김휘남의 함대는 이키와 고토 열도를 한 차례 습격한 후에 탐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하지만 해군 전력의 전부가 정벌에 나선 것은 아니었다. 먼바다에서 항해가 불가능한 판옥선 수십 척은 불참했다.
혹시 빈집을 털러 오는 소규모 왜선이 있을지도 모르기에 누군가는 남아야 했다.
그 결정은 틀리지 않았다.
지난밤에 거친 풍랑이 불어왔다.
대부분은 가까스로 위기를 넘겼으나 운이 없었던 누전선 한 척은 그대로 수장됐다.
최대한 빨리 병사들을 구하려고 애를 썼으나 그 과정에서 죽거나 실종된 이가 십여 명이나 발생했다. 만약에 2층 구조라 선체가 높은 판옥선이 같이 왔다면 피해가 훨씬 더 커졌을 것이다.
“이제 슬슬 상륙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그때 해군 하사 한 명이 다가왔다.
발음이 상당히 어색하고 왜소한 체구를 보면 왜국 출신인 것 같아 보였다.
그의 보고를 들은 윤호는 슬쩍 주변을 살피더니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우는 그런 그에게 물었다.
“대마도에 당도했는가?”
“1차 상륙 지점에 도달했습니다.”
“읏챠···.”
안우는 풀린 다리에 힘을 주고 서서히 일어섰다. 그러자 어느 사이에 부쩍 가까워진 대마도의 해안선이 보였다.
그의 지시가 내려지기도 전인데 이미 쾌선에 타고 있는 병사들은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상륙 훈련을 여러 차례 받은 덕분이다.
대마도는 주덕유가 안방처럼 오가던 곳이기에 지형은 훤히 알고 있었다.
거기에 왜국 출신의 해군도 있기에 출발 전에 각자의 임무는 충분히 시간을 가지고 숙지할 수 있었다.
“깃발을 올려서 상륙 신호를 보내시오.”
어느 사이에 안우는 투구를 쓴 뒤.
평소와 다를 것이 없는 모습으로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전투가 코앞에 다가온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기 때문이다.
그의 지시를 받은 윤호가 신호를 맡고 있는 무관에게 다가서자 곧 노란색의 깃발 두 개가 동시에 흔들렷다.
그러자 선단의 일부가 앞으로 나왔다.
그 배에는 1차 상륙 지점에 내릴 병사들이 타고 있었다. 대마도는 남에서 북까지 200리에 달하는 기다란 섬이다.
단순한 습격이 아니라 점령을 하러 온 것이게 확실히 한 번 쓸어내야 했다.
그 일은 변안열이 맡았다.
4군에 소속된 직속 병사들과 해군을 섞어서 5천 명의 병사를 지휘할 예정이다.
그들은 최남단인 이곳부터 시작해서 대마도 성주가 있는 곳까지 밀고 올라가야 했다. 당연히 중간에 대마도에서 가장 많은 이들이 모여서 살고 있는 이즈하라도 접수해야 했다.
“우리도 변안열 장군님이 이끄는 저쪽으로 배정됐어야 하는데 아쉽군.”
“어쩔 수 없지 않나. 대신 대마도 성주의 목을 따는 것으로 만족해야지.”
“그건 내 몫이니 꿈도 꾸지 말게.”
이성계와 조인벽은 병력이 내리는 것을 보며 아쉬움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어린 나이에 명장 반열에 오른 변안열 장군이 어느 정도인지 직접 보고 싶다는 호승심이 있는 두 사람이었다.
한편으로 이성계는 형인 이원계에게 아무 일도 없기를 바랐다. 조인벽도 그걸 눈치채고 걱정말라고 다독였다.
“형님이 쉽게 당할 분은 아니잖은가. 그러니 걱정하지 말게.”
“누가 누굴 걱정한단 말인가.”
“하긴 그럴 여유는 없지. 그나저나 대마도의 성주인 소 쓰네시게가 오니 교부(鬼刑部)라 불리던데 도대체 어떻게 생긴 자인지 궁금하군.”
“아마도 여기에 없을 걸세.”
이성계는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감찰사에서 보낸 정보에 의하면 현재 그는 규슈 지역에서 쇼니의 대관으로 머물고 있다고 했다. 현재 대마도는 그의 동생인 소 소고(宗宗香)가 실질적인 성주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
두 사람이 한가롭게 대화를 나눌 무렵.
이원계는 변안열과 함께 대마도에 드디어 상륙하는 데 성공했다. 그들이 발을 디딘 곳은 작은 항구였으나 인기척도 없었다.
과거에 주덕유가 세 차례나 털어버린 덕분에 고려로 잡혀갔거나 섬 속 깊숙한 곳으로 터전을 옮긴 탓이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어디선가 불쑥 귀신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다.
하지만 다들 상륙하느라 바빠서 그런 것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 같았다.
이원계는 육지에 발을 딛자마자 병사들에게 경계 지시부터 내렸다.
“척후병들은 5인 1조로 나눠서 주변을 탐색하라.”
먼저 안전부터 확보해야 했다.
병사들이 넓게 퍼져서 위협이 될 요소가 없는지 살피는 동안 배에서는 병력과 물자들이 계속해서 내려지고 있었다.
하지만 보급품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산을 타고 상당히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하기에 화포도 없었다.
상륙하는 일은 꽤 더뎠다.
백여 척에 배가 접안을 해야 했다.
하지만 워낙 작은 항구라 동시에 두 척 이상 진행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덕분에 배를 접안하면 병사들이 뛰어내리듯이 움직여야 할 정도였다.
그렇게 5천 명의 병사를 내려놓은 뒤에 모든 배는 최종 목적지인 성주의 집무소가 있는 니이(仁位)로 향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는군요.”
“각자 맡은 임무가 있지 않은가. 시간에 맞추려면 우리도 어서 움직이지.”
“알겠습니다.”
변안열은 변수를 좋아하지 않았다.
정벌을 대비하며 훈련을 함께했기에 이원계도 그걸 알기에 서둘렀다.
본진과 합류하는 날짜를 넉넉하게 잡기는 했으나 여유를 부릴 정도는 아니었다.
“척후대부터 이동을 시작한다. 다들 서둘러라!”
*
그 무렵 쓰시마 성은 발칵 뒤집혔다.
인근에서 고기를 잡던 어민이 고려의 정벌군을 발견하고 알려왔기 때문이다.
대마도 성주 대행인 소 소고는 그들이 하는 말이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
“고려에서 수백 척이나 되는 선단이 이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게 사실이더냐?”
“귀면문과 푸른 파도 깃발을 제가 똑똑히 보았습니다.”
“망할 고려 놈들!”
동쪽도 아니고 북쪽에서 내려왔다.
거기에 고려의 해군 깃발까지 걸려 있으니 약탈을 떠나기 위해서 오는 막부 쪽의 배는 확실히 아니었다.
하지만 여전히 소 소고는 고려가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하고 있었다.
정말 뜬금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고려는 대마도에 관심조차 두지 않고 있었다. 그나마 최근에 고려의 해적이 백여 대의 배를 끌고 와서 약탈하고 돌아가던 것이 전부였다.
이곳을 점령하려는 시도는 없었다.
하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다.
고려의 대형 선단을 보았다는 소식이 계속해서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 규모가 수백 척이나 된다니 고려가 아예 쓰시마를 정벌할 생각인 것 같았다.
얼마 전에 규슈에서 사신으로 보낸 모가미가 뭔가 큰 실수를 한 것 같았다.
그게 아니면 갑자기 이럴 리가 없었다.
그쯤 되자 소 소고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도대체 모가미 쿠스레 그 작자가 무슨 말을 했길래 이런 일이 벌어지냔 말이다!”
팔걸이를 있는 힘껏 내리쳤다.
그러자 곧장 부서져 바닥을 뒹굴었다.
하지만 소 소고는 거기에 신경도 쓰지 않고 성에 모인 무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고작 십여 명에 불과한 규모였으나 지금 믿을 것은 그들밖에 없었다.
“어서 가서 방어할 준비를 하지 않고 뭣들하고 있는 것이오!”
소 소고의 호통이 떨어지자.
무사들은 곧장 도망치듯 뛰어나갔다.
그런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그는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쓰시마의 병력으로는 고려의 공세를 막을 수 없다.
아마 이곳에 있는 모든 인구를 다 합쳐도 고려군보다 적을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그는 최후의 수단부터 미리 준비해야 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가족부터 대피시키는 것이었다.
고려군이 포위를 완성하기 전에 자신과 형님의 가족을 규슈로 빼돌려야 했다.
소 소고는 가신 중에 가장 믿을 만한 자를 골라서 명령을 내렸다.
“형님의 가족과 아이들을 규슈로 대피시키고 어서 이 사실을 알리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