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92
상당히 반가운 소식이었다.
단계별로 보고 받고 있었지만,
마지막까지 괴롭히던 문제가 있었다.
하윤린의 압착기는 생각보다 빨리 만들어졌으나 인쇄용 잉크가 문제였다.
목판 활자에 사용하던 것이 있었다.
하지만 비싼 종이를 쓰지 않으면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번짐이 심했다.
그 문제를 어떻게든 개선해야 했다.
아무리 잘 찍어도 글씨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하윤린 마저 잉크의 개량을 위해서 투입되었다.
그 결과물이 이제야 나온 것이다.
나는 그가 내민 인쇄물을 받아서 꼼꼼히 살펴보았다.
“생각보다 선명하게 잘 찍힌 것 같소.”
“기존에 사용하던 먹물보다 마르는 속도가 다소 느리지만, 그래도 지금 당장은 이게 최선이었사옵니다.”
“고생이 많으셨소.”
글씨에서 살짝 광택이 도는 것으로 봐서는 오일류를 사용한 것 같았다.
인쇄용 잉크는 활자를 뒤집어도 흐르지 않는 적당한 점성과 롤러로 바를 때 잘 펴져야 하는 특징을 잘 잡아내야 했다.
잠시 인쇄된 종이를 살피던 나는 직접 그 과정을 보기 위해 태평전을 나섰다.
이미 날이 어두워진 후였지만,
궁궐과 인근의 관청 중에 불이 꺼진 곳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 탓인지 거리를 오가는 이도 제법 많았다.
확실히 면실유가 보급된 후부터 사람들의 활동 시간이 조금씩 길어지고 있었다.
인쇄소는 그리 멀지 않았다.
성균관 공학 건물 한쪽 편에 만들어진 그곳에는 십여 명의 사람들이 아직도 바쁘게 움직이며 인쇄를 하고 있었다.
당연히 활자 제작을 맡은 황순염과 계정골의 사람들도 마지막까지 일을 돕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내 나를 발견하고 다들 엎드려서 머리를 숙였다.
“인쇄하는 과정을 시연해 보시오.”
내 지시가 떨어지자 다들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금속 활자를 배열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지만, 마침 거의 다 완성된 것이 있기에 그걸 마무리하기로 했다.
옆으로 다가가서 지켜보고 있자 황순염이 활자 몇 개를 가져와서 내게 보여줬다.
“한글 활자는 받침이 있는 글자를 절반으로 분리하는 방식으로 채택하였사옵니다.”
글자의 형태는 그리 예쁘지 않게 나오지만, 활자의 수를 줄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채택한 꼼수였다.
그 덕분에 만들어야 하는 활자의 숫자가 대폭 줄었다. 읽을 수 있는 수준만 유지할 수 있다면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인쇄소의 직원들이 머리를 맞대고 활자 배열을 끝내자 하윤린이 직접 그 위에 이번에 만든 잉크를 꼼꼼하게 칠했다.
그런 뒤에 인쇄 전용으로 만든 종이를 위에 올리고 압착기를 눌렀다.
인쇄 과정은 그게 전부였다.
[참 쉽쥬?]
귀에서 이런 말이 들리는 기분이었다.
준비하는 과정은 오래 걸리지만, 실제 인쇄 과정은 매우 간단한 편이었다.
인쇄기에서 꺼낸 종이에 적힌 글씨는 아까 하윤린이 가져온 것과 흡사했다.
누락되거나 못 알아볼 정도의 글자는 전혀 없었다. 다만, 높낮이가 달라서 조금 희미한 부분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조금 손을 봐서 다시 찍자 금방 수정되었다.
“상당히 만족스러운 결과요.”
“전하께서 설계도를 만들어주지 않으셨다면 이렇게 금방 성공하진 못하였을 것이옵니다.”
“다들 노력한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소.”
흡족한 얼굴로 말을 하자.
인쇄소 사람들 모두가 크게 기뻐했다.
이 순간을 위해서 지난 반년 가까이 잠도 제대로 못 자며 고생을 한 이들이었다.
당연히 포상에 대한 기대도 컸다.
최근에는 괄목할 성과를 낼 경우.
결과에 따라 성과금을 주고 있었다.
당연히 보상은 땅이 아닌 저화였다.
저화가 유통된 지 몇 년이라는 시간이 흘러서 지금은 어느 정도 안착하였기에 불만을 가지는 자는 거의 없었다.
“성과금은 기대하여도 좋소.”
내가 확답을 주자 인쇄소의 직원들은 뛸 듯이 기뻐했다. 당연히 입이 쩍 벌어질 만큼의 성과금을 줄 생각이었다.
인쇄기는 앞으로 이 나라의 발전에 큰 영향을 줄 것이기에 전혀 아깝지 않았다.
떠들썩한 그들을 뒤로하고 나는 인쇄소장인 홍천성과 따로 자리를 가졌다.
홍천성은 원래 한지 장인이었다.
공부에 소속되어 있던 그가 인쇄소를 맡게 된 이유는 그보다 종이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이가 없기 때문이었다.
대신 인쇄 전에 활자 검수는 밀직사에서 파견 보낸 관리가 맡을 예정이었다.
“현재 보유하고 있는 인쇄기를 이용하면 하루에 몇 장 정도나 인쇄할 수 있겠소?”
“순수하게 인쇄만 한다면 수백 장도 문제없지만, 활자를 재배열하는 것을 고려하면 아직 정확하게 가늠하기 어렵사옵니다.”
“대량 인쇄만 할 테니 심려치 마시오.”
이곳은 국영 인쇄소였다.
몇 권만 찍을 거면 이런 시설을 짓고 인쇄기를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최소 수백 권 단위로 찍을 생각이다.
인쇄기와 인부를 조금 더 들이면 매달 수백 권 이상의 책을 찍어낼 수 있을 거란 계산이 나왔다.
“아까 보니 인쇄기를 돌릴 때 다칠 위험이 있어 보이니 속도는 조금 줄이더라도 다치지 않게 주의를 주시오.”
“명하신 대로 하겠사옵니다.”
“종이의 수급은 원활한 것이오?”
“최대한 저렴하게 인쇄하기 위해서 품질과 원가를 고려해서 사들이고 있사옵니다.”
서책의 인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종이였다. 잉크와 종이가 원가의 대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최고급 고려지를 사용하면 책 한 권의 값이 엄청나게 오르게 된다.
더 많은 이가 서책을 보게 하려면 보관용을 제외한 나머지는 최대한 저렴하게 인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목화와 황칠나무를 심을 당시에 미리 닥나무를 대량을 심어놨다는 것이었다.
“비용은 계산해 보았소?”
“소신이 직접 계산한 것은 아니나 곽충수 전수의 말에 의하면 권당 가격은 필사하는 것에 비해 절반도 안 된다고 하옵니다.”
“그걸로 부족하면 내수사에 말해서 원나라 등에서 종이를 사들이시오.”
고려는 종이를 수출하는 나라였지만,
필요하다면 수입해서라도 써야 했다.
하지만 쓸데없는 것을 인쇄하며 낭비할 생각은 없었다. 앞으로 이곳에서 인쇄되는 것들은 문화부에서 심의를 거칠 예정이다.
첫 인쇄도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
“학당의 학생들에게 줄 교과서의 준비는 어떻게 되고 있소?”
“내일부터 인쇄에 들어갈 예정이옵니다.”
서책이 가장 필요한 곳은 학당이었다.
지난해 육성된 교사들은 벌써 맡은 지역으로 이동을 마친 상태였다.
과목은 기초 산수부터 시작해서 한글과 한문 그리고 체력 단련을 위한 가벼운 군사 교육도 시킬 예정이었다.
일종의 교련 과목이라고 봐도 됐다.
고구려의 경당(扃堂)을 거의 그대로 가져왔기에 권박(拳博)과 검술(劍術)을 비롯해서 배울 게 산더미 같았다.
거기에 예절과 성리학의 기초도 포함된 탓에 필요한 책이 상당히 많았다.
하지만 아깝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훗날을 위한 투자는 아끼지 말아야지.’
심지어 장학금 제도도 준비해놨다.
양현고라 이름이 붙여진 그곳에서는 총명하나 돈이 없는 이들을 위해 공부하는 기간 동안 대출도 해줄 생각이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기에 당연히 빌려 간 만큼 훗날 관직에 오르면 갚는 구조였다.
물론, 실패할 확률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인재가 한 명이라도 더 도당에 들어서고 병사들을 이끄는 장수가 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성공이었다.
과연 어떤 이들이 학당을 통해서 새롭게 두각을 드러낼지 기대되었다.
그쯤에서 인쇄소에서 나온 나는 밤하늘에 가득한 별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과연 쓸만한 인재가 얼마나 나오려나.”
*
인쇄기는 다음 날부터 곧장 가동됐다.
당연히 그에 따른 지원이 이어졌는데 인력 충원은 물론이고 인쇄기도 추가로 제작되어 열 대나 배치되었다.
인쇄기가 많아질수록 인쇄 속도가 빨라질뿐더러 인쇄기의 구조가 간단해서 그리 비싼 물건도 아니었다.
성과는 즉시 나오기 시작했다.
한 달도 안 되어 인쇄소에서 수백 권에 달하는 책이 시중에 배포되기 시작했다.
일부는 학당에 보내졌고 나머지는 세책점(貰冊店)과 잡화점 등에서 판매되었다.
인쇄된 책의 장점은 역시 가격이었다.
기존에 한 권의 책이 필사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빠르니 효율성의 차이가 컸다.
하지만 아직은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했다.
“아니, 새로 들어오는 학당의 교과서는 저한테 파신다고 하셨잖아요.”
“이 사람아 그러면 시간에 맞춰서 제때 왔어야지. 늦게 와서 이러면 어쩌나.”
“제가 개경에 사는 것도 아니고 반나절 이상 걸리는데 어떻게 합니까.”
“며칠 후에 수십 권 정도 다시 들어온다고 하니 기다려 보게.”
이런 실랑이는 계속 이어졌다.
대부분 이번에 학당에 입학하는 학생들의 부모들이 교과서라 불리는 책을 구하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었다.
학당을 마치고 집에서도 공부를 시키려면 꼭 필요한 것이라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서점을 찾는 이들은 그들뿐만은 아니었다. 일부 사람들은 새롭게 출간된 동화책을 찾는 이들도 많았다.
이번에 만들어진 동화책은 화공들까지 투입되어 삽화가 들어갔기 때문이다.
과시하기 좋아하는 권문세족 출신의 아낙네들은 노비를 보내 어떻게든 그걸 사기 위해서 웃돈까지 줄 정도였다.
하지만 그 수량이 많지는 않았다.
이 시대에도 한정 수량 판매는 상당히 잘 먹히고 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동화책 중에 일부는 몇 배나 되는 금액을 받고 되파는 이들도 많았다.
변화는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심지어 얼마 지나지 않아 사설 인쇄소도 등장했다. 그들은 인쇄기와 활자를 내수사에서 사들여서 소량 인쇄를 했다.
그들이 찍어내는 대부분은 지금까지 전해져오는 설화나 이야기꾼이 공연으로 보여주던 이야기를 묶은 것들이었다.
작가라는 직업도 새로 생겼다.
그들은 몇 쪽씩 내용을 잘라서 연재하며 조금씩 대중의 인기를 끌고 있었다.
나관중도 그중의 하나였는데 시작부터 상당히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고 있었다.
그런 탓인지 사설 인쇄소에서는 잘나가는 이야기꾼과 작가를 거액의 돈으로 섭외해서 전속 계약을 맺기도 했다.
바야흐로 문학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미복잠행을 나와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흡족한 미소가 저절로 나왔다.
“우리나라에서도 셰익스피어 같은 작가가 한 명쯤은 나올 수 있으려나.”
솔직히 그리 큰 기대는 없었다.
최근 인기 좋은 소설 같은 경우에는 한글로 쓰여진 것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내 눈높이에 맞는 수준의 필력을 지닌 이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먹물 좀 묻혔다고 하는 이들은 아직 한글을 쓰지 않았고 한글에 익숙해질 시간적인 여유도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했기에 충분히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되었다.
조금 시간이 필요할 뿐이었다.
“전하, 감찰 대부이옵니다.”
그때 신소봉이 나직하게 옆으로 다가와서 이인복이 다가오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고개를 돌려서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자 이인복이 감찰 어사 몇 명과 함께 다급한 발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여기 계신지도 모르고 입궐했다가 다시 나왔습니다.”
“천하의 감찰 대부가 모르는 일도 있다니 재미있구려.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궐 밖까지 쫓아서 온 것이오?”
“안우 장군이 보낸 전령이 방금 도착했습니다.”
“드디어 시작인 것인가?”
내 질문에 이인복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해 연말부터 시작한 출정 준비가 마침내 끝난 것이었다. 이제 날이 따뜻해졌으니 떠날 시기이기는 했다.
하지만 이번 출정은 따로 날짜를 정해주진 않았다. 먼 거리를 항해하는 여정이기에 날씨에 따른 변수가 많았다.
워낙 종잡을 수 없는 것이 바다의 풍랑이기에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해군과 함께 의논해서 적당한 시기를 알아서 정하라고 했다.
만약에 어명으로 날짜를 지정하면 그걸 지키겠다고 파도가 강한 날에 배를 띄울 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언제 출발한다고 하던가?”
내 질문에 이인복은 별다른 말도 없이 품에서 쪽지를 건넸다.
시전 부근에 있는 골목이라 누가 들을지 모르기에 조심해야 했다.
그 쪽지에는 안우와 정벌군이 대마도로 출정하기로 예정된 날짜가 적혀 있었다.
그런데 그게 며칠 후도 아니고 정확하게 오늘이었다.
드디어 대마도 정벌이 시작된 것이다.
[대마도 정벌 출정일 : 4월 초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