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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89화 (89/202)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89

그로부터 한 달 뒤.

홍언박과 서달이 돌아왔다.

그들이 탄 쾌선에는 귀화를 선택한 심부의 아내와 어린 아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친인척이 함께 타고 있었다.

무려 이십여 명이 넘어갈 정도였다.

함께 따라온 노비와 기물 그리고 재물도 있기에 두 척의 쾌선을 가득 채웠다.

현재 절강에 남은 이들은 상단의 일을 돕는 몇 명의 친척이 전부였다.

당연히 그들이 살 곳은 개경에 상주하고 있는 심부의 상단 사람이 마련해놨다.

매년 한두 번씩 개경에 오는 심부라 여관에서 지내는 것도 애매해서 이미 개경 안에 그의 소유의 저택이 세 채나 됐다.

그것도 아주 비싼 동네였는데 확실히 심부가 돈이 많기는 했다.

물론, 나도 신경을 꽤 써줬다.

그들이 사는 지역은 순군만호부의 순찰을 강화하는 등의 조치를 취해야 했다.

마침 그 인근에 동오의 저택도 있었기에 꼭 필요한 일이었다. 두 사람이 고려 경제에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컸다.

하지만 지경탁도 만만치 않았다.

괜히 고려 최고의 상단을 이끌고 있는 게 아니라는 듯이 최근에 성과가 상당했다.

그는 왜국의 독점 거래를 발판으로 삼아서 상당한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현재 그가 들여오는 대표적인 상품은 유황과 은 그리고 삼나무 목재였다.

“확실히 재복(財福)은 있는 것 같군.”

최근 그가 들여온 물품의 목록을 살피던 중에 저절로 휘파람이 나올 정도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세금을 내는 것은 역시 은이었다. 지난달에 낸 세금만 합쳐도 양곡 수백 석 규모였다.

혹시나 싶어서 불법적인 행동은 없나 살펴보고 있는데 감찰사의 보고에 의하면 생각보다 지경탁은 법을 잘 지켰다.

“아직 특별하게 꼬투리 잡힐 일은 하지 않고 있는 것이오?”

“아무리 찾아봐도 의심되는 것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이인복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감찰사를 담당하는 그로서도 지금 이 상황이 그리 달갑지는 않았다. 지경탁은 트집 잡힐 일을 아예 하지 않고 있었다.

어렵게 잡은 단독 무역 권한이라 그런지 상당히 조심하는 것 같았다.

“계속 지켜보시오. 언젠가는 짓누르고 있던 탐욕이 인내심을 넘어서는 순간이 올 것이오.”

그와 같은 부류는 오래 못 갈 것이다.

아주 작은 편법부터 시작해서 그 규모는 점차 커질 게 뻔했다. 제 버릇 개 못 준다는 속담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아직 그를 나락으로 떨어뜨릴 시기는 아니었다. 적어도 도로 공사가 끝날 때까지는 지켜볼 생각이었다.

지경탁은 일종의 저금통과 같았다.

기를 쓰고 부정을 축재해 놓겠지만, 언젠가는 배를 가르게 될 것이다.

지금은 그 순간을 위해서 준비하는 것에 불과했다. 여태까지 수집한 그의 불법 행위도 적지 않으니 애태울 필요는 없다.

“그나저나 화포를 장사성에게 판매한 것을 두고 우려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미 결정일이오.”

“혹시 그게 다른 나라로 흘러 들어갈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하옵니다.”

“어차피 가장 중요한 것들은 제외했으니 상관없소.”

수철연의환과 개량된 화포와 화약.

이렇게 세 가지의 조합만 제외해도 고려가 현재 보유하고 있는 화포보다 사정거리가 절반 정도로 짧아진다.

지금 화포를 하나 팔면 개량 화포 몇 개를 더 만들 수 있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더구나 지금은 장사성이 조금 더 분발해줘야 했다.

“하루라도 빨리 대주국이 산동성을 차지해야 우리에게도 더 유리하오.”

“그곳에 있다고 알려진 초석 광산 때문이옵니까?”

“당장은 정휘 장군이 잘 막아주고 있다지만, 마두라이 술탄국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대비는 해야 하지 않겠소.”

가능하면 투 트랙으로 가고 싶었다.

지금의 고려에서 화포는 대체 불가능한 주요 전력이다. 한 곳에 문제가 생겨도 염초는 꾸준하게 들어와야 한다.

이번에 장사성과 맺은 계약 중에 염초와 소금의 판매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중에 말을 바꿀 가능성이 있지만, 원나라에게 남은 마지막 초석 광산이다.

산동성을 대주국이 차지하면 원나라는 그나마 얼마 안 되는 화포의 사용조차 거의 불가능해질 정도다. 그걸 빼앗는 것만으로도 의미는 충분했다.

“우리도 늦지 않게 서둘러서 병사들을 모병해야 하오.”

지금의 고려는 너무 허약했다.

지난해 오천 명의 병사를 모병했지만,

여전히 고려의 육상 전력은 3만 명 정도에 불과했다. 그것도 유민과 사찰에 소속되어 있던 노비 중의 일부가 병력으로 흡수된 덕분이었다.

처음에는 그럴 의도가 없었다.

하지만 노동력이 생각보다 넘쳐났다.

주덕유가 잡아 온 왜구와 죄를 지어서 노역형에 처해진 이들만 합쳐도 삼천 명을 넘어설 정도였다.

거기에 원나라의 유민 출신과 사찰에 소속되어 있던 노비까지 있으니 국책 사업만으로는 소화할 여력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는 군역으로 돌려야 했다.

덕분에 고려군은 오천 명에 달하는 새로운 병사들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는 없었다.

처음에 목표로 했던 5만 명의 정예병을 채우려면 아직 2만 명은 더 필요했다.

“내년과 내후년에 각각 1만 명의 모병이 준비되어 있으니 심려치 마시옵소서”

“아니, 그걸로는 부족하오. 원래의 계획보다 두 배로 늘리시오.”

“하오나 징집도 아니고 모병을 하게 되면 지출되는 비용이 상당합니다.”

군역과는 차원이 달랐다.

징집된 이들은 먹는 것과 자는 것만 해결해주면 되지만, 모병하는 이들은 월급 개념으로 녹봉이 주어지게 된다.

1만 명이 넘는 해군까지 포함할 경우.

녹봉으로 지출되는 저화가 상당했다.

사찰에서 소유한 땅을 몰수하지 않았다면 5만 명조차 엄두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서 두 배로 모병을 늘리면 해군과 치안을 담당하는 만호부와 궁궐을 지키는 이들까지 합쳐서 10만 명이나 된다.

아무리 최근에 고려의 재정이 여러 이유로 풍족해졌으나 부담될 수준이었다.

한두 해만 유지하는 군대가 아니다.

꾸준하게 재물이 들어오지 않는다면 결국에는 커다란 문제가 될 것이다.

더구나 노동력의 유출이 심각해질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강제 노역이 아니라 농사를 짓는 이들의 빈 자리였다.

아무리 최근에 고려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더라도 새로 태어난 아이들은 아직 어리기에 무리가 많았다.

“꼭 필요한 일이오.”

“전시 상황도 아닌데 도당에서 너무 과하다는 반발이 있을 것이옵니다.”

“이미 고려는 전시 상황이오.”

당연히 이인복은 잘 알고 있었다.

쌍성총관부를 공격할 때부터 이미 전쟁은 시작된 것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는 내가 어디까지 노리는지 잘 알고 있다.

두만강 이남은 필수라 할 수 있다.

그보다 더 위에 있는 곳도 염두에 두고 있지만, 그 모든 것은 원나라와 홍건적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방어한 후의 일이다.

그래도 아예 불가능하진 않았다.

고정적으로 들어오는 세금 덕분이다.

수년간 공들인 보람이 있기는 했다.

최근에는 상업 활동을 하는 이들의 수가 상당히 많이 늘어나고 있었다.

소규모 공방뿐만 아니라 생산자들도 판매를 목적으로 운영되었는데 심지어 초기 형태의 과수원도 나타났다.

기존에는 없던 개념이었다.

보통 자연스럽게 피어나는 과일이나 마당에 심어진 것들을 따먹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일정 구역에 과실을 얻을 수 있게 나무를 심어서 판매용으로 수확하는 이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농사를 지어야 먹고 살 수 있다.

그런 고정 관념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는 것이었다. 당연히 대부분 그런 이들은 제대로 된 경작지조차 없는 이들이었다.

‘목화로 얻는 수익도 이제는 무시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지.’

최근 목화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지난 수년 동안에 남해안 일대는 목화 재배가 꾸준하게 이뤄졌고 그 결과로 수확되고 있는 면포가 상당히 많아졌다.

당연히 두툼하고 따뜻한 면포도 이제 서서히 대중적인 옷감이 되고 있었다.

권문세족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부유한 양인도 이제는 면포를 입고 다니기 시작했다. 당연히 그만큼 가진의 공방은 바빠졌으나 보람은 확실히 있었다.

그리고 그중의 일부는 전방에 배치된 병사들을 위해서 북부로 보내졌다.

“그건 그렇고 서달과 주덕유에게 특별한 움직임은 없는 것이오?”

“전혀 없습니다.”

“앞으로도 유심히 지켜보시오.”

두 사람을 믿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쉽게 변하는 것이기도 했다. 옛 동무를 만나 혹시 변심하는 게 아닌가 지켜봐야 했다.

당연히 그들의 주변에는 수년 전부터 감찰사에서 사람을 심어 놓은 상태였고 아직도 유지하고 있었다.

“감찰어사 김첨수에게 연락은 왔소?”

“예정대로 심부의 상단을 통해 정보망을 확대하는 것을 진행 중이라고 하옵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내수사에 요청하시오. 그런데 현재 원나라에 있는 이들은 교대해주지 않아도 되는 것이오?”

김첨수와 정보원들이 걱정됐다.

그들은 내가 즉위한 이후부터 계속 원나라에 머물며 작전 중이었다.

가장 오래된 이들은 5년이 넘어갔다.

귀국조차 하지 못하는 탓에 가족 중에 일부는 그들이 죽은 지 알고 있을 정도다.

북부의 병사들도 그 정도 수준은 아니다.

그들은 사기 유지를 위해서라도 적어도 2년에 한 번씩은 후방 근무라도 한다.

하지만 이인복은 그게 쉽지 않다며 고개를 숙였다.

“대부분이 위장 신분으로 살아가고 있거나 조직에 침투해 있기에 쉽게 교체하기가 쉽지 않사옵니다.”

“저번에 백련교에게 발각되어 목숨을 잃었다는 이는 어떻게 되었소?”

“다행히 유골은 수습하였으나 아직 고려로 돌아오지는 못했사옵니다.”

객사를 하면 원귀가 된다고 한다.

그것도 이역만리 타향에서 임무 중에 사망한 이였다. 적어도 고향 땅에 돌아올 수 있게 해주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내가 그걸 말하자 이인복은 고개를 저었다.

“고려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칠 이들이옵니다. 그들을 잊지 않으시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것이옵니다.”

아니 그걸로는 부족했다.

나는 잠시 고심하다가 현충원과 무공훈장을 떠올렸다. 적어도 그 정도는 해줘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매장하는 문화를 유행시키고 싶진 않았다.

이 시대는 화장하는 이들이 많았기에 납골당 정도면 적당했다. 나는 곧장 이인복에게 내 생각을 전해주었다.

“추모 공간이 마련되는 것은 상당히 좋은 일인 것 같사옵니다.”

“화장부터 납골에 필요한 항아리까지 모든 비용은 나라에서 부담하고 왕사인 보우가 직접 관장하게 하시오.”

“하지만 대규모 전쟁이 벌어진다면 감당되지 않을 수 있사옵니다.”

“공을 세워서 훈장을 받은 이들만 그곳에 들어오게 하면 되지 않소.”

적어도 명예는 챙겨주고 싶었다.

아마도 본격적인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감찰사 소속과 해군의 병사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생각난 김에 아예 하루를 정해서 현충일처럼 만드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충분히 의미가 있을 것 같사옵니다.”

이인복도 그 생각에 동의했다.

납골당 부근을 잘 꾸며서 학당과 성균관 학생을 소풍처럼 오게 하는 방법도 있다.

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고양시킬 수 있다면 그 정도의 투자는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장 국가적인 행사까지 염두에 두고 있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말한 것을 진행하려면 무엇이 필요하겠소?”

“납골당과 화장 시설 그리고 유골을 담을 항아리 등이 필요하옵니다.”

“거기에 정원을 만들 이들까지 추가해서 도당에서 의논을 해보시오.”

“전하께서 직접 공표하시지 않으실 것이옵니까?”

그럴 생각은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이번 건은 도당의 문무백관에게 전적으로 맡길 생각이었다. 녹봉 값은 해야 되지 않겠냐는 말에 이인복은 멋쩍게 웃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현재 고려가 진행하는 대부분의 일을 내가 주도하는 중이다.

일을 진행하는 것은 도당의 관리였지만, 제대로 된 큰 그림을 그리는 이가 없었다.

워낙 내가 앞에 나서서 일을 챙기니 생기는 부작용인 것 같았다.

그나마 이인복과 몇 안 되는 이들만 자발적으로 생각하고 움직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년부터는 관청별로 일 년간의 계획을 세워오면 그에 따른 예산을 줘야 할 것 같소.”

언제까지 주먹구구식으로 예산을 집행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적어도 계획과 예측이 있어야 우선순위를 정할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은 이인복이 입을 떼기도 전에 신소봉이 들어와서 백문보가 왔다고 알려왔다.

“마침 문하시중도 들어야 할 이야기인데 잘 되었구나. 들어오라 하거라.”

내 명령이 떨어지자 백문보가 곧장 들어왔는데 본론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잠시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가 예상외의 보고를 해왔기 때문이었다.

“왜국에서 보낸 사신이 벽란도에 도착했다고 연락이 왔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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