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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88화 (88/202)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88

오국공(吳國公) 탕화.

그는 중요한 기로에 서 있었다.

올해 집경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곽자흥의 아들인 곽천서까지 죽고 말았다.

이제 명실상부한 지도자가 된 것이다.

지금까지 그에게 채워져 있던 족쇄가 모두 풀렸으나 오히려 막막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뭘 해야 할까.

앞으로 나가야 할 길은 무엇일까.

지금까지는 살아남기 위한 여정이었기에 아직 거기까지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었다.

백성들을 위해서라도 싸우는 것을 멈출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직접 말한 약속은 지켜야지.’

집경에 들어서며 한 가지 약속을 했다.

지금까지 몽골인에게 당해오던 수많은 수모를 그대로 갚아주겠다는 내용이었다.

그 덕분에 집경의 백성은 자신과 병사들을 기꺼이 해방군으로 맞아주었다.

그만큼 원한이 상당히 깊었다.

이곳에 사는 한족은 강간과 약탈 그리고 불공정한 재판에 의한 살해에 익숙했다.

그만큼 몽골인에 대한 적대심이 강했다.

당연히 탕화는 그걸 최대한 이용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칼날을 원나라로 겨뤄도 될까?

솔직하게 말하면 아직은 조금 어려운 면이 있었다. 차라리 장사성이 그들과 싸우는 동안에 방국진 등을 도모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실리를 따지면 그게 맞는 말이기는 했다.

그러나 좀처럼 내키지 않았다.

장사성이 이끄는 대주국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뭐에 홀린 것처럼 북진을 계속하고 있는 중이다.

바로 뒤에 자신이 있다는 것도 잊은 것 같았다.

그들의 뒤를 치자니 다음에 당하는 것은 자신이 되는 것이 아닌가 걱정됐다.

원나라의 저력을 과소평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들의 전력을 분산시킬 필요가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생각을 할 무렵에 곽영이 들어왔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한 그는 현재 집경의 성문을 지키는 일을 맡고 있었다.

한참 근무를 서고 있어야 할 시간에 이곳에 나타난 것이 의아했다.

“무슨 일이 있는 건가?”

“고려에서 사신이 왔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랑 관계가 전혀 없던 고려에서 갑자기 사신이 왜 온단 말인가.”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사신의 일행 중에 서달이 있었습니다.”

탕화는 잘못들은 줄 알았다.

그는 곽영에게 어린 시절 동무였던 그 서달이 맞는지 재차 물어야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자신은 어린 시절의 동무들을 데려오려 애썼다.

하지만 몇 명은 찾을 수 없었다.

대표적인 예가 주중팔과 서달이었다.

가장 원하던 이들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고려의 사신과 함께 왔다니 이해가 안 되었다.

“확실히 서달이 맞습니다.”

십여년 이상이 지났으나 어린 시절의 서달의 얼굴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곽영은 그와 대화를 나누며 서달이 맞는지 직접 확인까지 했다.

“지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를 따르는 이들이 장군이라고 부르더이다.”

“확실히 어린 시절부터 남다르긴 했지.”

“어찌할까요?”

“당연히 만나야지. 그들을 불러오거라.”

고려의 사신이 무슨 말을 하려고 찾아온 건지 궁금했다. 서달도 함께 왔으니 잠시 시간을 내는 것쯤은 해줄 수 있었다.

더구나 장사성과 고려가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소문도 항간에 돌았다.

그게 사실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잠시 후에 곽영은 고려의 사신으로 집경에 온 홍언박과 서달 그리고 심부를 데리고 다시 탕화에게 돌아왔다.

이번에 집경으로 온 사절단을 책임지는 것은 당연히 홍언박의 몫이었다.

서로 격식을 차려서 인사를 나눈 뒤에 탕화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로 고려에서 이곳까지 찾아오셨소?”

“폐하의 서신을 가지고 왔습니다.”

“언제부터 고려의 왕이 스스로를 폐하라 칭하였소?”

“원래 고려는 동쪽의 패권을 쥐고 있었고 자체적인 연호를 쓰는 독립적인 나라이니 이상한 일은 결코 아닙니다.”

“하지만 부마국이기도 하지 않소.”

탕화가 보기에는 똑같은 놈들이었다.

원나라 황실의 피가 이어져 있는 고려도 다르지 않았다. 머지않아 그들도 미륵불의 심판을 받을 거라 생각되었다.

그날을 위해서 봉기한 탕화였다.

하지만 홍언박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이미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반응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오히려 웃는 얼굴로 그렇지 않다고 설명을 해줬다. 내륙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탕화가 고려에 대해 잘 아는 것도 이상한 일이기는 했다.

“그런 것이라면 병사를 일으켜서 쌍성총관부를 수복하진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 봐야 고작 한 줌의 땅에 불과한데 그냥 내줬다고 보는 것이 옳지 않소.”

“그 한 줌의 땅조차 지키지 못하고 잃고 있는 것이 지금의 원나라입니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시간 낭비를 할 생각은 없었다.

탕화가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자며 제안하자 홍언박은 서신을 꺼내 건넸다.

고려의 왕이 썼다는 서신을 받아든 그는 천천히 펼쳐서 읽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한 가지 제안이 적혀 있었다.

“흐음··· 장사성과 함께 동맹을 맺어서 원나라를 견제하자는 이야기인데 고려는 정작 하는 일이 전혀 없지 않소.”

“대신 오국공께서 지금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을 내드릴 생각입니다.”

“내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 그게 뭔가?”

“군량미입니다.”

탕화의 표정은 미묘해졌다.

그걸 도대체 어떻게 안 것일까.

가까운 곳도 아니고 한참 멀리 떨어진 고려인 걸 생각하면 더 이상했다.

어쨌든 요즘 군량미가 부족한 것은 사실이기에 상당히 고민 중이었다.

집경을 공략하는 데 성공했지만,

보유하고 있는 군량미가 다 떨어졌다.

그 때문에 최근에는 남안의 태평과 무호를 공략하는 것도 검토 중이었다.

당연히 그곳을 차지하고 있는 장사성과 싸워야 하겠지만, 병사들을 먹이고 재우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결정이 쉽지는 않았다.

남안은 수로가 상당히 발달된 곳이다.

공략을 위해서 도강 준비는 필수였다.

그러나 탕화의 군대에는 아쉽게도 수군과 선박이 거의 없었다.

기회가 없지는 않았다.

얼마 전에 합류 의사를 표명한 안휘 출신의 홍건적 수군이 있긴 했다.

하지만 원나라 군대의 포위망을 뚫어내지 못해서 그들은 합류조차 하지 못했다.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은데 군량미는 충분하니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되오.”

하지만 그걸 내색할 정도로 탕화가 순진하진 않았다. 군량미와 같은 전쟁물자에 대한 정보는 일급 비밀이다.

저들이 어디서 그런 소리를 들은 건지 몰라도 일단은 딱 잡아뗐다.

“이것은 모두의 이익을 위해서입니다. 고려가 쌀을 공급하면 대주국과 오국공께서 싸울 이유는 없습니다.”

둘이 싸우다가 자멸하는 것.

그것은 고려에겐 최악의 상황이다.

가능하면 그들의 병력이 모두 원나라로 향해야 방비를 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두 나라를 동맹으로 만들 수 있다면 약간의 손해 정도는 감수할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공짜로 줄 생각은 없었다.

자선단체가 아니기에 당연히 돈을 받고 판매할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심부도 이 자리에 참석한 것이었다.

탕화는 거기까지 이야기를 듣고 심부를 유심히 바라봤다. 최근에 갑부 반열에 오른 그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어봤다.

“그러면 대주국의 쌀을 받고 그 값으로 동과 철광석을 내주면 된다는 말이오?”

“그거면 충분합니다.”

“대주국에서도 동의한 것이오?”

“물론입니다.”

홍언박은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대주국과는 협의가 끝난 내용이다.

그들은 최근에 주요 무역항을 차지한 덕분에 교지국과 섬라곡국을 통해 상당량의 식량을 확보하고 있었다.

대주국은 식량을 내놓는 대신에 고려에서 화포를 받기로 했다. 당연히 최신형은 아니고 개량하기 전인 총통 2호였다.

총통 2호는 내구성이 그리 좋지 않다.

많이 쏴봐야 수십 회였고 운이 좋지 않으면 십여 회 만에 터졌다.

소모품이라 봐도 될 정도였다.

더구나 그 거래에 가장 중요한 각도기와 코닝 된 화약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러니 어느 정도 수준까지는 화포를 팔아도 고려에게 위협이 되진 않았다.

대신 고려는 구리와 주석 같은 화포의 재료를 얻을 것이다. 최근에 워낙 많은 화포를 만든 탓에 재료가 부족해졌다.

지금은 어떻게든 광물을 최대한 많이 확보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그런 모든 것까지 말해준 것은 아니었으나 탕화로서는 상당히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기는 했다.

광물을 내주고 당장 부족한 군량미를 얻는 일인 데다가 홍언박이 제시한 5년간의 동맹이 필요하기는 했다.

“동맹이라···.”

그리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

잠깐이나마 북부나 남부로 확장을 꾀할 수 있는 시간을 버는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탕화는 어느 정도 마음을 굳혔다.

“그대들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소.”

“현명하신 판단이십니다.”

“모처럼 친우를 만났으니 회포를 풀려고 하는데 괜찮으시겠소?”

“물론이옵니다. 저희는 먼저 숙소로 가보겠습니다.”

홍언박과 심부는 흔쾌히 자리를 비켜줬다. 그들이 밖으로 나가자 곧장 술상이 서달과 탕화 앞에 차려졌다.

두 사람은 잠시 마주 보고 있다가 크게 웃으며 각자 술잔을 채웠다.

“이렇게 살아서 다시 보다니 반갑네.”

“오국공께서도 무탈하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이 사람이! 친우끼리 뭐 그리 격을 차린단 말인가. 지금은 지위 같은 것은 내려놓고 편하게 술이나 마시자고.”

“뭐··· 그러면 나야 편하지.”

서달은 피식 웃으며 잔을 비웠다.

그라고 옛 친구가 안 반가울 리 없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서달과 탕화는 어린 시절 단짝이었다. 하지만 각자의 입장이 있기에 쉽게 말을 틀 수 없었던 것이다.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었는가. 내가 자리 잡은 이후에 동무들을 수소문했는데 도무지 찾을 수 있어야지.”

“그랬었군.”

“자네가 고려에 있을 줄을 몰랐네.”

“생각해줘서 고맙네. 우리도 자네를 찾았는데 그땐 이미 늦은 후였더군.”

엇갈린 운명이었다.

만약에 조금만 더 일찍 탕화를 찾았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서달은 그게 조금 아쉬웠으나 그래도 이렇게 성공한 모습을 보니 작은 위안이 되었다.

“우리라니 무슨 말인가?”

“주중팔··· 아니 이제는 주덕유이지. 그 친구도 고려에서 장군 직위에 올랐네.”

“허! 그게 정말인가?”

“폐하께서 중용해주신 덕분이지.”

동쪽 바다를 호령하는 주덕유의 이름은 탕화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가 주중팔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쯤 되자 탕화도 고려의 왕에 대해 호기심이 생겼다.

도대체 그는 왜 자신의 동무를 고려로 데려가서 장군의 자리를 준 것일까.

그리고 멀리 떨어진 고려에서 어떻게 군량미가 떨어진 것을 알아챈 건지도 궁금했다. 여러 질문에 대해 민감한 기밀에 대한 것은 제외하고 대답을 해주던 서달은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난 가끔 그분이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나타난 미륵불이 아닌가 생각되네.”

서달은 백련교 신자는 아니다.

하지만 미륵불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세상을 뒤집어엎을 이는 폐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몇 해 동안 옆에서 지켜본 폐하는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으셨다.

탕화는 서달의 이야기를 듣더니 크게 웃었다.

“뭐가 그리 특별한 것인가?”

“말로는 설명할 수 없어. 자네도 직접 뵙고 잠시 대화만 나눠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있을 걸세.”

“나는 솔직히 믿을 수 없네. 황제나 왕이나 가진 것들은 모두 없는 이들의 고혈을 쥐어짜는 것에만 혈안이지.”

“믿고 말고는 자네의 맘이지.”

어차피 그럴 의도로 말한 게 아니었기에 서달은 그리 크게 신경쓰진 않았다.

혹시라도 홍언박이 설득에 실패하면 옆에서 도와주려고 함께 온 것이다.

이곳에 와서 목적한 바는 이뤘다.

이제는 귀국하는 과정에서 일행의 안전을 책임지는 것에 신경 쓰기도 바빴다.

그때 탕화가 슬쩍 제안을 했다.

“그러지 말고 나와 함께 새로운 세상을 만들 생각은 없나. 주중팔과 자네가 나를 도와주면 무서울 것이 없을 걸세.”

옛 동무인 두 사람을 얻으면 천군만마를 얻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주중팔은 자신이 가장 필요로 하는 함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만약에 그가 자신의 밑으로 들어오면 진짜 무서울 게 없었다. 하지만 서달은 어림도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누구보다 주덕유를 잘 아는 그였다.

아무리 회유를 하더라도 자신의 부하들을 데리고 탕화의 밑으로 오진 않을 것이다.

이미 개경에 모든 친인척을 데리고와서 자리잡은 상태였다. 가족을 버릴 리도 없고 그의 부하들이 반역할리도 없었다.

고려군의 충성심은 상상 이상으로 강했고 그건 자신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난 친우로서 충고 하나만 하지. 가능하면 고려와 척을 질 생각은 하지 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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