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87화 (87/202)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87

그로부터 며칠 뒤.

심부가 궁궐에 들어왔다.

고려에 도착했다는 것은 감찰사를 통해 이미 전해 듣기는 했지만, 먼 길을 왔기에 여독을 풀 시간은 주어야 했다.

더구나 급한 용건이 있지도 않았다.

이번에 그가 온 이유는 뻔했다.

독점 거래의 갱신을 위한 것이었다.

다음 달이면 벌써 그와 약속했던 기간이 끝나게 된다. 그런데 그가 나관중을 데려올 줄은 생각조차 못 했다.

내가 시킨 일도 아니었기에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전하께서 이야기를 쓰는 이를 찾고 계신다는 소문이 들려서 소인이 천거하기 위하여 직접 데리고 왔사옵니다.”

도대체 이 사람은 뭘까.

전생에 은혜를 갚겠다며 박씨를 물어다 준 제비는 아니었을까. 이건 뭐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온 기분이었다.

삼국지는 어릴 때 가장 많이 본 소설이자 사학과에 들어간 원인 중에 하나다.

수백 년이란 긴 시간 동안 자신의 글이 영향력을 떨치는 것을 알기나 할까.

“먼 길을 오느라 수고가 많으셨소.”

“산서성 출신의 나관중이라 하옵니다. 미천한 재주나마 전하를 위해 사용될 수 있다면 최선을 다하겠사옵니다.”

“혹시 지금까지 써오던 것을 볼 수 있겠소?”

그래도 혹시 모르니 검증이 필요했다.

이 세상에는 동명이인이 너무 많았고 그의 얼굴을 알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관중은 품에서 얇은 서책 하나를 꺼내서 내게 받쳤다.

<삼국지통속연의>

그가 내민 것은 삼국지를 쓰기 전에 민간의 구전을 책으로 정리한 것이다.

연의란 일종의 역사 소설인데 역사서라 보기는 어렵다. 소설적 재미를 위한 윤색이 상당히 많이 들어가는 탓이다.

당연히 그가 훗날 쓰는 삼국지도 역사와 다른 부분이 상당히 많았다.

살짝 그걸 펼쳐 본 나는 그가 진짜 나관중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진도가 많이 나가지는 않은 상태였다.

‘지금쯤이면 과거 시험에 줄곧 낙방하던 시기인가?’

나관중도 역경이 참 많았다.

처음부터 글을 쓴 것은 아니다.

원래는 과거를 봐서 관리가 되길 희망했던 이였으나 그쪽으로는 머리가 그리 좋지 않았는지 계속 낙방했다.

그 뒤로 장사성 아래에서 잠시 몸을 의탁했다가 이야기꾼의 재능을 꽃피운 것이라 알려져 있었다. 아마 장사성이 절강 지역을 차지하면서 심부가 그를 우연히 찾은 것 같았다.

“상당히 흥미로운 이야기이지만, 과인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겠소?”

현재 그가 바라는 것은 뻔했다.

애초에 글을 쓰는 이라고 소개했다.

집필 활동에 대한 후원을 바라는 것이다.

최근에 나는 내수사의 자산으로 소설 집필을 위한 후원을 아끼지 않고 있었다.

아마 그걸 바라고 왔을 것이다.

하지만 남의 나라에 대한 연의를 집필할 생각이라면 절대 후원할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나관중이라도 어림없다.

내가 지긋이 바라보고 있자 나관중은 천천히 입을 떼어 설명을 시작했다.

“소인은 고려 이전에 삼국시대를 연의로 써보고 싶사옵니다.”

예상 밖의 대답이었다.

이거 이러다가 삼국지 연의가 위촉오 세 나라가 아니라 고구려, 백제 그리고 신라의 이야기가 될 것 같았다.

당연히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 시기를 언제로 잡을지 궁금했다.

“어느 시기를 염두에 두고 있소?”

“아직 자료를 자세히 살펴보진 않았으나 삼국의 멸망과 고려의 개국에 대한 내용을 쓰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사옵니다.”

“쉽지는 않을 것이오.”

결국, 고려의 태조에 대한 이야기였다.

조금만 실수를 하더라도 왕실에 대한 모욕죄가 성립될 수 있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나관중은 주제를 바꿀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이야기꾼답게 재미난 이야기가 눈에 그려지기라도 한 걸까.

나는 일단 그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관중의 시도가 어떤 결과로 나올지 알 수 없으나 삼국지 연의를 이 세상에서 지우는 것도 상당한 의미가 있었다.

수많은 미래의 독자들에게는 미안한 일이나 그 대신 한반도의 삼국지를 선물하면 되는 일이 아닐까.

‘내가 준비하던 일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일이기도 하지.’

안 그래도 건국에 대한 이야기를 책으로 엮으려고 하는 중이다. 그걸 그에게 맡기면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궁금했다.

나는 그에게 관직부터 내려주기로 했다.

“과인은 앞으로 <문화부(文化部)>라는 곳을 만들 생각이오. 정5품 정랑(正郎)에 제수할 테니 일을 하면서 집필하시오.”

문화부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앞으로 문화와 예술 분야를 집중해서 관리할 부서를 신설할 생각이었다.

그곳에는 궁중무용인 정재(呈才)와 악공과 배우가 소속된 전악서와 관현방 그리고 교방을 모두 포함될 예정이다.

당연히 그 수장은 미정이었다.

소악부(小樂府)를 만든 이제현도 적임자이긴 했지만, 그를 다시 도당에 불러들이고 싶진 않았다.

내심 적임자로 시와 풍류를 좋아하는 유숙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아직 어느 정도의 관직인지 말하지도 않았는데 나관중의 반응은 뜨거웠다.

과거에 낙방했던 경험 탓인 것 같았다.

나는 나중에 다시 연락을 주겠다며 말한 뒤에 그를 내보냈다. 지금은 그보다 심부와 할 이야기가 더 많았다.

“소인이 고려에 올 때마다 놀랄 일이 하나씩 생기는 것 같사옵니다.”

“뭘 봤길래 그러시오?”

“벽란도부터 개경까지 이어진 도로를 말하는 것이옵니다.”

“쉬운 일은 아니었소.”

앓는 소리를 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그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없던 길을 새로 만드는 것은 이제껏 아무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대부분의 길은 사람이 자주 오가며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이라 여겼다.

그런 탓에 반대도 제법 많았다.

더구나 도로포장이란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다. 잠시 한눈을 팔면 발자국을 내놓고 도망가는 이가 많았다.

문제는 진흙처럼 여기다가 굳어서 난리가 나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래도 효과는 확실했지.’

벽란도와 개경을 이은 후부터.

물류의 이동이 비약적으로 빨라졌다.

심부가 직접 경험한 마차나 수레가 오가며 기존에 며칠씩 걸리던 물량도 이제는 하루 이내에 끝낼 정도다.

덕분에 운송업이란 분야도 생겼다.

그들은 벽란도와 개경을 오가며 물건과 사람을 나르고 품삯을 받고 있었다.

발 빠른 곳은 십여 대 이상을 운영하며 내수사나 동오 상단 같은 곳과 장기적인 계약을 맺은 곳도 있을 정도였다.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은 어떻소? 과거에 맺었던 독점 계약의 연장 때문에 온 것이 찾아온 것이 맞소?”

“그렇사옵니다.”

“그대도 이번 연장을 바라는 것이오?”

“물론이옵니다. 고려와의 거래는 소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옵니다.”

심부는 솔직하게 대답을 했다.

그가 절강 지역을 넘어 전국에서 이름을 알리는 거부가 되는 과정에서 고려의 물건이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히 컸다.

덕분에 전 지역을 통틀어도 열 손가락 안쪽에 들어갈 정도로 급성장했다.

당연히 고려필(高麗筆)과 고려를 대표하는 특산물을 놓고 싶진 않았다.

연필이 수출된 지 몇 년이 흐른 상태다.

지금까지 홍보에 들인 노력이 성과로 나오기 시작하는 시기였다.

하지만 그때와 상황이 많이 달랐다.

지금의 고려는 수많은 상인이 드나드는 무역의 중심지가 되어가고 있었다.

심지어 제주는 중국과 왜국의 중계 무역을 하기 위한 방안도 준비 중이었다.

아무리 개인적으로는 친우처럼 생각하는 심부지만, 공과 사의 구별은 확실하게 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계약을 연장하려면 손봐야 할 곳이 꽤 있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기존과 같은 조건으로 연장할 상황이 아니오.”

“최근에 원나라 상인들이 탐내고 있다는 것은 소인도 알고 있사옵니다.”

“상당히 좋은 조건이 많더이다.”

심부가 고려의 물건을 팔기 시작한 후부터 원나라 상인의 접촉이 잦아졌다.

지경탁이 동오의 자리를 탐내던 것과 흡사했는데 기황후와 같은 원나라 황실을 등에 업고 접근하는 경우도 있었다.

당연히 그런 이들과 거래를 틀 생각은 없었다.

반면에 심부와 꼭 계약할 의무도 없다.

처음에 그와 계약할 당시는 고려 유민의 송환을 가장 중요시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가 보내줄 수 있는 유민이 거의 없었다.

원나라의 중부 지방 이남에는 자진해서 넘어간 이들만 존재했다.

수년 동안 노비로 전락한 이들을 싹 쓸어온 탓에 심양과 요동 부근에 밀집되어 있는 유민 정도만 있을 뿐이었다..

지금까지 돌려보낸 유민의 수가 수만 명에 달할 정도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고려인이 아닌 이들까지 합치면 훨씬 더 많았다.

“원하시는 조건이 있으시옵니까?”

“일단 그대가 매입하는 원가부터 손을 봐야 할 것 같소. 알아본 바에 의하면 일부 품목은 생산자인 우리보다 더 수익이 높다고 하더이다.”

“최대한 맞추겠사옵니다.”

심부도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아니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부분이다.

계속 조율하며 매입가를 정하기는 했으나 일부 품목은 서너 배 이상을 남겨 먹었다.

나도 그걸 모르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시장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서 지금까지 상당히 봐주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호의가 권리가 될 수 없었다.

내가 알기로는 심부도 꽤 절실했다.

하루가 다르게 상황이 바뀌고 있었다.

야심 차게 준비한 동정호부터 상해현(上海縣)까지 이어지는 장강의 유통 거점을 탕화와 장사성이 나눠 가지고 있다.

만약에 두 세력이 마음먹는다면 심부가 엄청난 재물을 들여 준비하던 것이 완전히 무너져버릴 가능성이 있었다.

조금의 실수도 허용할 수 없는 시기다.

그의 입장에서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을 품에 안고 있는 기분일 것이다.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하고 있던 그는 내게 한 가지의 제안을 해왔다.

“송구하오나 소인에게 고려를 위한 묘책이 있사옵니다.”

“그게 무엇인가?”

“이번 기회에 오국공(吳國公) 자리에 오른 탕화를 대주국의 성왕인 장사성처럼 동맹으로 품으시는 것은 어떠십니까?”

“과인에게 홍건적과 손을 잡으라는 말인가? 그리고 탕화는 여전히 한림아 아래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소.”

손을 못 잡을 이유는 없었지만,

한번 심부를 떠보기 위해서 물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수집한 중원의 정보를 해석까지 해가며 내게 상세하게 알려주기 시작했다. 그의 분석은 김첨수가 보내온 것과 거의 흡사했다.

하지만 차이가 확실히 있기는 했다.

상단에 소속된 수많은 이들이 보고 겪은 것을 수집한 것이기에 김첨수의 조직보다 훨씬 광범위한 정보 수집력이 있었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게 너무 탐났다.

만약에 김첨수의 정보 조직과 심부의 상단을 합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이제 슬슬 그의 정체성이 어디에 있는 건지 확립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다.

출신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고려는 이미 서달과 주덕유를 비롯해서 마두라이 출신의 관리도 있을 정도였다.

나는 심부를 고려로 귀화시키거나 그의 상단을 우리 쪽 정보 조직으로 활용하는 것 중에 하나쯤은 챙기기로 했다.

“원나라는 이제 망조의 기운이 가득하고 그대가 활동하던 절강 부근은 장사성이 차지하게 되었소. 앞으로 그대는 누구에게 충성을 바칠 것인가?”

당연히 심부는 쉽게 답하지 못했다.

그 역시 상당히 고민하고 있는 중이다.

과연 누가 중원을 차지할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을 정도였다. 절강만 하더라도 수년 사이에 몇 차례나 바뀌었다.

가능한 중립을 지키는 것이 옳지만, 그게 생각보다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다.

“얼마 전에 동오 상단이 재계약을 맺었다는 것은 들었을 것이오.”

“소식을 들었사옵니다.”

“두 상단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시겠소?”

심부는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어용 상단과 타국의 국적을 가진 상단을 동일하게 놓고 볼 수는 없었다.

그 말은 고려로 귀화해서 어용 상단이 되라는 말을 돌려서 한 것이었다.

당연히 심부도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고 있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고민할 것도 없었다.

심부는 고려의 발전 속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처음에 개경에 왔을 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천지 차이였다.

더구나 상단 자체가 바뀌는 일은 아니다.

그저 자신의 가족과 쌓아 놓은 부를 고려로 옮기는 것이 전부였다.

“차라리 가족을 데리고 개경으로 오는 것이 더 안전할 것이오. 과인이 그대들의 안전을 책임지겠소.”

당장은 성왕의 지배를 받고 있으나 홍건적과 백련교 무리가 곳곳에 있기에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

돈을 노리고 해코지를 하는 일이 없을 거라 보장할 수도 없었다. 그 말을 꺼내자 심부는 흔들렸는지 곧장 머리를 조아렸다.

“전하께서 소인을 백성으로 받아주신다면 고려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겠사옵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