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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86화 (86/202)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86

개경의 골목길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급증한 출산율 덕분에 서너 살 남짓 되는 아이들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다양한 놀이를 하며 까르르거리는 아이들의 모습은 너무나 평화로웠다.

뛰어노는 아이들 중에 나이가 많은 몇 명은 나뭇가지를 들고 바닥에 앉아서 긁적이며 뭔가를 그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림이 아니었다.

새로 배운 글자를 쓰는 중이었다.

얼마 전에 반포된 한글이라는 것이었다.

한자와 달리 아이들이 글을 배우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영민한 아이는 하루 이틀 만에 익혔을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개경 곳곳에 온갖 글씨가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바닥이며 벽에 한글로 낙서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내용은 아이들답게 단순했다.

대부분 친구의 이름이나 자신의 이름을 적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부모들이 보기에는 무척 대단한 일이었다. 전에는 꿈도 못 꾸던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이고, 이게 우리 아들 이름이란 말이지?”

“엄마 이름도 적어줄까?”

“그런 것도 쓸 수 있어?”

“물론이지! 잠깐만 기다려 봐.”

글자는 기득권의 전유물이다.

쉽게 배울 수 없는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고정관념은 깨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개경의 아이들 중에 상당수가 한글을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자연스럽게 가능해진 것은 아니다.

알게 모르게 뒤에서 들인 노력이 컸다.

최종 실습 삼아 개경 곳곳에서 퍼져있는 학당의 교사들 덕분이기도 했다.

거의 수백 명에 달하는 이들이 동원되자 개경에는 한글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참으로 보기 좋은 모습입니다.”

모처럼 미복잠행을 나온 내가 흡족한 표정으로 아이들을 지켜보고 있자 신소봉이 옆에서 한 마디 건넸다.

그 역시 훈민정음 반포하기까지 내 곁에서 많은 것을 옆에서 도와주었기에 얼굴에 뿌듯함이 가득했다.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하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있지요.”

“그나저나 세책점(貰冊店)은 어디에 있는 것이냐?”

“저쪽입니다.”

조선 중기에 유행한 세책점이 벌써 나타났다고 하기에 확인차 가는 길이었다.

세책점은 필사한 책을 대여료를 받고 빌려주는 일종의 책방과 비슷했다.

아직 소설의 종류가 다양하진 않으나 그들이 영업하는 대부분의 책은 얼마 전에 시중에 배포한 동화였다.

신소봉이 알려준 방향으로 걷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몰려있는 게 보였다.

삼삼오오 모여 있는 그들의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은 한글로 된 동화책이었다.

아이들을 위해 만든 책이었으나 그걸 읽는 이들의 연령대는 다양했다. 가족끼리 온 것으로 보이는 이들도 많았다.

세책점이 원래 이런 형태는 아니다.

한번 빌리면 하루 동안 집에 가져가서 보고난 뒤에 반납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책이 너무 부족한 상태였다.

세책점에 있는 한글책은 아직 몇 종에 불과했다. 그래서 이렇게 한 시진씩 돌려보는 것이 유행이 되고 것 같았다.

당연히 그만큼 빌려보는 가격도 저렴해질 수밖에 없다.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지.’

하윤린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그가 실패할 거라 생각되진 않았다.

근거 없이 무턱대고 가지고 있는 믿음은 아니었다. 하윤린은 내가 준 초안을 받고 벌써 초기 모델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물론,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당장 쓸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은 아니지만, 아주 못 쓸 정도라 볼 수도 없었다.

잉크와 활자의 완성도 때문에 번지거나 제대로 찍히지 않아 엉성한 부분은 있으나 수작업으로 보완하면 읽을 수는 있었다.

아무리 길게 잡아도 반년 정도면 충분히 성과를 낼 수 있을 거라 예상했다.

그 정도만 되더라도 만족이었다.

몇 년 정도 더 걸리더라도 구텐베르크 활자보다 백 년 가까이 앞당긴 것이다.

이제부터는 얼마나 많은 종류의 책을 다량으로 찍어내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원래의 역사대로 국가의 전유물로 놔둘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이제는 최초보다 최고가 되어야지.”

“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무것도 아니다.”

손사래를 치며 잠시 세책점을 살피던 나는 천천히 밖으로 나와 걷기 시작했다.

다음에 들릴 곳은 경마장이었는데 그곳까지는 마차를 이용할 수 있었다.

거기까지 도로포장을 마친 상태라 가능한 일이었다.

경기가 없는 날이었으나 사람의 수는 제법 많아 보였다. 한적한 경마장을 거늬는 연인들이 상당했다.

몇 개월 사이에 그곳은 환골탈태했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많이 바뀌었다.

정원처럼 꾸며 놓았는데 봄이 오기 전에 심은 꽃이 곳곳에 피어나 눈요기하기 충분했다.

“이곳까지 어인 일로 오셨사옵니까?”

모래를 다지고 있는 일꾼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던 이인민은 뒤늦게 나를 발견하고 쏜살같이 달려왔다.

“미복잠행을 나온 김에 요즘 신경을 많이 못 써준 것 같아서 잠시 와봤소.”

“특별한 일은 없으니 심려치 않으셔도 되옵니다.”

“얼마 전에 들어온 말은 어디 있소?”

내 질문에 이인민은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마방이 세워져 있었는데 경마에 뛰는 말이 철저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돈에 눈이 멀어서 상대 말에 해코지를 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기수들도 관리 대상이었다.

그들은 마방에서 상주하며 외부 출타에 제약을 많이 받고 있었다. 승부 조작에 연루될 가능성이 있는 탓이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 불만을 가지는 이는 거의 없었다. 그만큼 큰돈을 받고 있기에 감수할 만한 수준이었다.

그만큼 경마의 열기는 엄청났다.

내가 예상했던 것을 뛰어넘을 정도다.

한 번 경기가 열릴 때마다 발 디딜 틈도 없이 사람이 몰려왔다. 대충 하루에 찾는 관람객이 2~3만 명 단위라 보면 된다.

돈을 거는 이들의 수도 적지 않았다.

그렇게 경기가 열릴 때마다 수십 석 이상의 쌀에 해당하는 저화가 걷혔다.

거기에 추가로 노점상에서 파는 먹거리로 얻는 수익도 생각보다 꽤 짭짤했다.

“저곳에 있는 말들이 얼마 전에 동오 상단에서 싣고 온 대식국의 말과 카리타···”

“카티아와리 아니오?”

“네네. 그 말이옵니다.”

확실히 생소한 외래어라 그런지 이인민조차 말의 이름을 헷갈렸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은 그냥 마두라이 말이라고 부르고 있다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두 종류의 말 모두가 경마에 뛰는 것은 아니었다.

아라비아 말은 적응을 잘했지만,

카티아와리는 그러지 못하는 편이었다.

애초에 전투마로 사용할 목적이었기에 번식을 위한 말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서북면으로 보낼 예정이었다.

아직 수는 그리 많지 않으나 기병을 만드는 데 요긴하게 사용될 것이다.

“요즘 사람이 너무 몰려서 사고가 날뻔했다고 들었소.”

“지난주에 미아가 될뻔한 아이가 서너 명이 생겼으나 무사히 부모를 찾아주었사옵니다.”

“운영에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언제든 순군만호부와 내수사에 요청하시오.”

“하명하신대로 하겠사옵니다.”

경마장은 생각보다 중요해졌다.

수천 명의 병사를 유지할 수 있는 재원을 마련해주는 곳이다. 심지어 지방에서 올라와서 경마를 즐기는 이들마저 있었다.

그런 탓에 요즘에는 서경이나 다른 곳에서도 경마장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하는 이들마저 생길 정도였다.

하지만 그럴 생각은 아직 없었다.

경마장은 워낙 큰돈이 오가는 곳이다.

관리하는 이들이 딴마음을 품기 딱 좋은 곳이었고 똥파리가 꼬일 가능성도 높다.

그나마 이곳은 감찰사가 직접 감사를 하고 있기에 유지가 가능했다.

실제로 불법 경마장마저 생겼다.

당연히 그런 일은 눈감아줄 수 없다.

불법 운영을 하다가 잡히는 이들은 엄중한 법의 처분을 받았다.

하지만 쉽게 목숨을 빼앗지는 않았다.

그들 대부분은 노역형을 받아 각종 공사와 광산에 투입되었다.

히이이잉!

그때 말 한 마리가 보였다.

순백색의 아라비아 말이었다.

정말 흠잡을 곳이 없는 말이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그렇게 예쁜 말은 본 적도 없을 정도였다. 내가 한동안 그쪽에 시선을 두고 있자 이인민은 난처한 표정으로 웃었다.

“아차! 저 녀석은 감췄어야 했는데···.”

“그건 무슨 말이오?”

“정월에 전하께 진상하려고 특별히 마두라이의 재상이 보낸 것이옵니다.”

“지금 타봐도 되겠소?”

“아쉽게도 긴 항해를 한 터라 아직 신경이 날카로워서 조금 더 기다리셔야 할 것 같사옵니다.”

이인민은 아직은 어렵다며 만류했다.

나의 승마 솜씨가 어느 정도인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괜히 지금 탔다가 낙마라도 한다면 목숨이 두 개라도 모자랐다.

나도 주제 파악은 하고 있기에 억지를 부리지는 않았다.

다행히 마두라이는 멀쩡했다.

생각보다 정휘 장군이 잘 버티고 있었다.

화약과 화포의 보급이 대폭 늘어난 덕분이기도 했다. 그러니 마두라이에서 이렇게 말을 싣고 올 수 있는 것이었다.

당분간은 쉽게 무너지진 않을 것이다.

아니 꼭 그래야만 했다.

‘아직 뽑아먹을 게 산더미 같으니 잘 버텨야 하는데···.’

*

잠시 백마에 정신이 팔려있을 때.

동오 상단에 소속된 쾌선 한 척이 벽란도에 정박을 하고 있었다. 잠시 후에 그곳에서 내린 이는 심부였다.

하지만 그 혼자 온 것은 아니었다.

심부의 곁에는 비슷한 또래의 동행이 있었는데 익살맞은 눈매를 가진 남자였다.

“이곳이 요즘 명성이 자자한 고려의 벽란도라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생각보다 그리 크지는 않지요?”

“그래도 효율적인 것 같습니다.”

그는 신기한 눈빛으로 두리번거렸다.

원나라 절강에서 출발한 그는 타국에 발을 내딛는 것이 생전 처음이었다.

아무리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해도 그의 고개는 쉴 틈 없이 좌우로 움직였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수레 상점이었다.

벽란도의 명물에서 이제는 개경의 명물이 된 수레 상점들은 온갖 먹거리를 팔았다.

동오 상단이 국내 물류에 뛰어든 이후에 각지의 특산물이 빠르게 들어왔다.

확실히 경쟁은 상당히 중요했다.

거의 독점에 가깝게 탁도경이 운영하던 상단도 이제는 더 저렴하게 많은 물건을 주요 도시로 나를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그 영향은 전국적으로 조금씩 나타나고 있었다.

“일단 이동하실까요?”

계속 여기 서 있을 수는 없었다.

심부가 앞장서서 걷기 시작하자.

그가 데리고 온 남자가 뒤따라 걸었다.

하지만 얼마 못 가서 그들은 발걸음을 멈춰야 했다. 호객을 하는 이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둘러싼 탓이었다.

“어디까지 가십니까? 저희 마차로 저렴하고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혹시 시전까지 옮기실 물건이 있으면 저희 수레를 이용해주십쇼.”

“저택의 문 앞까지 모시겠습니다.”

매년 한두 차례씩 벽란도에 오는 심부조차 상당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몇 개월 전에 왔을 때만 하더라도 이런 일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원나라와 왜국의 언어로 호객하는 이도 있었다.

덕분에 그들이 뭘 원하는지는 알아차렸다.

“마차를 타고 이곳에서 개경까지 이동이 가능하다는 말이오?”

“물론입니다. 편하게 모시겠습니다.”

“내가 초행길도 아닌데 산비탈을 어찌 올라가려고 그러는 것이오?”

개경까지 가는 길의 상태가 어떤지 아는 심부였다. 중간에 산기슭을 타고 올라가야 하고 길의 상태도 좋지 않았다.

마침 어제 비가 온 것 같았다.

바닥에 물이 고여 진흙이 가득했다.

괜히 마차를 타고 나섰다가 중간에 내려서 개경까지 걸어가야 할지도 모른다.

차라리 동오의 상단에 들려서 말을 빌리는 게 편했다. 하지만 호객을 하는 이들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모처럼 벽란도에 오신 거 맞으시죠? 예전과는 사뭇 달라졌습니다.”

“그렇소.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오?”

“이건 직접 봐야 확 느껴지실 겁니다.”

호객꾼은 여전히 자신만만했다.

그쯤 되니 심부도 호기심이 생겼다.

결국에는 그를 따라 움직이자 십여 대의 마차가 세워진 공터가 보였다.

일행과 함께 마부가 안내하는 마차에 올라타자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에 심부는 왜 그렇게 호객꾼이 자신만만했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벽란도를 나오자 진회색의 도로가 깔끔하게 깔려 있었다. 그 위로 마차가 달리기 시작하자 흔들림조차 거의 없었다.

정말 순식간에 개경의 성문 앞까지 도달할 수 있었는데 그걸 보고 놀란 것은 심부뿐만이 아니었다. 그와 함께 동행한 남자는 믿기진 않는 표정으로 물었다.

“고려는 모든 길이 이런 것입니까?”

“그건 아닙니다. 제가 올 초에 고려에 잠시 들렸을 때는 못 보던 것입니다.”

“불과 몇 개월 사이에 이렇게 바뀔 수 있단 말입니까?”

심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자신이 겪고 본 고려라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됐다.

아마 이것도 전하께서 고안한 것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그분에게는 불가능이란 것이 없어 보였다.

“고려라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평소에 칭송을 아끼지 않는 그분을 직접 만나다니 참으로 기대됩니다.”

“저기가 바로 만월대라 불리는 궁궐로 들어가는 성문입니다.”

심부와 동행한 남자는 궁궐을 바라보며 동경 어린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그의 이름은 나본(羅本), 훗날 삼국지 연의를 집필하는 나관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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