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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85화 (85/202)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85

이색이 쓴 장문의 상소문.

그건 최만리의 것과 비슷했다.

아주 간략하게 그 내용을 정리하자면 한글의 무용론을 완곡하게 주장했다.

거기까지는 어느 정도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내 뚜껑을 열리게 만든 것은 그의 뿌리 깊은 사대주의 때문이었다.

대국을 섬기고 중화를 사모하는 것에 반하는 일이니 이 사실이 원나라에 알려지면 부끄러운 일이 될 것이라 했다.

더구나 그는 세종대왕에게 최만리가 올린 상소문과 똑같이 고유 문자가 있는 나라는 오랑캐라 단정 지었다.

궤변에 불과한 말이었다.

중국이 세상의 중심이라 생각하고 있기에 가능한 발상이었다. 당연히 그가 올린 상소문을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추방하고 싶을 정도였다.

망조(亡兆)의 기운이 가득한 원나라로 보내면 나중에 어떤 후회를 할지 궁금했다.

아마 이불킥을 하게 될 것이다.

북원이 생기는 것이 1368년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빨리 원나라가 망해가는 징조가 여기저기서 보였다.

반란군을 토벌하는 것이 아니라 야금야금 지배하고 있는 땅을 빼앗기고 있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탕화였다.

그는 결국 화주를 점령하고 집경과 태평까지 모조리 수중에 넣은 상태다.

원나라는 그를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폭발적인 세력 확장을 하고 있는 것은 탕화만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대주국의 성왕(誠王) 장사성.

그 역시 아우인 장사덕의 활약 덕분에 평강로(쑤저우)와 상해까지 세력을 확대했다. 마침내 절강 지역까지 손에 넣은 그들 형제의 위상은 고려까지 전해지고 있을 정도였다.

원래의 역사와 달라진 게 많았다.

그는 주원장과 싸우며 세력의 상당수를 잃어버리지만, 다행히 이번에는 그런 일이 벌어지진 않고 있었다.

오히려 암묵적인 동맹을 맺은 것처럼 보일 정도로 두 세력은 부딪히지 않았다.

하지만 진짜 이색을 보낼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그가 내 마음에 들지 않고 정세 파악이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행정에 대한 능력 하나는 인정해줄 수 있는 이였다.

그런 능력을 적국인 원나라에서 쓰도록 놔둘 생각은 없었다.

“문하시중은 이 일을 어떻게 보시오.”

백문보에게 상소문을 보여준 뒤.

노기가 가득한 얼굴로 물어보자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왜 이렇게 화를 내는 건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는 알 것이다.

이번에 내가 들인 공은 꽤 컸다.

안보와 여러 사람들이 애를 쓴 만큼이나 나도 밤잠을 줄여가며 해례본을 썼다.

그런데 그걸 폄하하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백문보는 이색에 대해 나쁜 말을 하지는 않았다.

“음과 글자를 합하는 것이 옛것에 반대된다고 근본이 없다며 폄하하는 것은 조금 과한 것 같사옵니다.”

“단지 그것뿐이오?”

“설마 이 일로 이색에게 죄를 물으실 생각이옵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색에게 징벌을 내릴 생각은 없었다.

최만리는 곧장 하옥되고 불이익을 당했으나 그 정도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다만, 당분간 이색을 도당에서 보고 싶지는 않았기에 백문보에게 경고했다.

미관말직이라도 그를 천거하면 무조건 반려할 거라는 말을 듣자 백문보는 우려를 표했다.

“너무 과한 처사라 생각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옵니다. 원나라에서 한림원 권경력으로 일하던 인재가 아닙니까.”

이색에 대해 기대를 품은 이들의 수가 적지 않았다. 이제현의 제자이자 원나라에 가서 과거 시험에 합격한 그였다.

이 시대의 엘리트 코스를 제대로 밟고 있는 인물이라 조만간 도당에서도 중용 받을 거라 다들 예상하고 있었다.

원래 역사대로 흘러갔을 경우.

그는 올해부터 고려의 문무 관리 전체의 신입 관리를 선출하는 요직인 이부시랑과 병부낭중의 자리에 올랐을 것이다.

당연히 나는 이색에게 그 자리를 줄 생각은 없었다.

“이번 일 때문만은 아니오.”

“그럼 무엇 때문이옵니까?”

“성리학에만 매몰되어 있는 그의 편협함은 과인이 만들려고 하는 고려와 어울리지 않소.”

이색을 기준으로 놓고 본다면,

이제현은 그나마 유연한 편이었다.

그만큼 이색은 뼛속 깊은 곳까지 성리학에 물들어 있어서 곁에 둘 수 없다.

아마도 쉴 틈 없이 그의 잣대를 기준으로 삼아서 나를 옭아매려 할 것이 뻔했다.

지금까지 올린 상소문을 보면 눈에 선하게 그려질 정도였다.

적어도 이색은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주요 관직에 오를 수 없을 것이다.

그것 하나는 장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억울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그와 함께 상소문에 이름을 올린 이들도 이색과 똑같이 대우할 것이다.

“이번에 올라온 상소문과 비슷한 내용을 올리는 이들은 정리해서 가져오시오.”

이번에 같이 행동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지금까지 성리학을 배척해오던 터라 참아왔던 분노를 터트린 것으로 보였다.

과거시험에 경전을 넣어야 한다는 것을 내가 한사코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심지어 만월대 밖에서 자리까지 깔아놓고 통촉하여 달라며 소리치고 있어서 소음 공해까지 유발하고 있었다.

당연히 그중에는 옛 국자감에 소속된 유생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하겠사옵니다.”

어디에 쓰려고 하는 건지 뻔했다.

백문보가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을 하기에 나는 곧장 주제를 다른 것으로 바꿨다.

괜히 이런 것 때문에 시간 낭비를 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하고 급한 것들이 수두룩했다.

“그건 그렇고 한글 서책의 준비는 차질없이 잘되고 있는 것이오?”

훈민정음 반포가 끝이 아니다.

오히려 이제부터 시작이라 봐야 했다.

최대한 빠르고 널리 전파될 수 있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그걸 위해서 동화책이라는 수단을 사용하기로 했다.

지금은 성리학이나 불경보다 어린아이 수준의 짧고 재미난 이야기가 적당했다.

짤막한 이솝우화부터 시작해서,

신데렐라와 백설 공주 같은 이야기까지.

모든 것들은 14세기 고려의 기준으로 바뀌었고 당연히 기억나지 않는 부분도 있었는데 내용을 추가하거나 제외했다.

뜻밖의 창작 활동이었지만,

내게는 꽤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해례본을 쓰는 틈틈이 원자인 왕현에게 옛날이야기를 해주는 시간으로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걸 받아서 쓰는 것은 사관이 해야 할 일이었다.

“전하께서 아이들을 위해 편찬하신 책은 거의 마무리되었으나 각지의 설화를 모으는 일은 시간이 더 필요하옵니다.”

“왜 이렇게 늦어지는 것이오?”

“전국에 보낸 이야기꾼들이 돌아오지 못하기도 했고 저마다 알고 있는 내용이 다르기에 정리할 시간이 부족하옵니다.”

구전설화가 많은 탓이었다.

당연히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다.

지금은 그저 자료를 수집하는 단계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건국 설화 같은 것들이다. 어린 시절부터 고려에 대한 충성심을 길러줄 필요가 있었다.

다음 세대부터 사대주의는 찾아볼 수 없게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거기에는 추가적인 목표도 있었다.

고려의 문학 및 예술의 발전도 염두에 두고 있는 중이었다. 내가 통치하는 시대가 문화의 전성기이길 바랐다.

훗날 아이들이 배우는 교과서에서 유럽의 르네상스 그런 것보다 고려의 문화가 더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시작이 문학일 뿐이었다.

홍길동전과 같은 한글 소설이 많이 나올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많은 이들이 한글을 배울 것이다.

그 시작을 위한 물꼬를 틔워주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필사로는 답이 안 나왔다.

한글로 만든 서책을 전국적으로 뿌리려면 당연히 활자 인쇄가 선행되어야 한다.

먼저 금속 활자를 만들어 놓고 사장시킬 생각은 전혀 없었다. 적어도 이번에는 구텐베르크에게 밀릴 생각은 없었다.

백문보를 내보낸 나는 신소봉을 불렀다.

“하명하시옵소서.”

“당장 공부에서 활자를 만드는 책임자를 불러오너라.”

“공부 상서는 안 불러도 되옵니까?”

“그는 지금 서경에 있을 것이다.”

신소봉은 알겠다며 대답을 한 뒤.

곧장 나가서 내가 불러오라고 한 책임자를 데리고 태평전으로 돌아왔다.

현재 금속 활자를 담당하고 있는 이는 공부 시랑 황순염이었는데 그쪽 바닥에서 잔뼈가 굳은 일종의 고인물이었다.

다만, 평판은 그리 좋지 않았다.

밑의 관리를 괴롭히거나 뒷돈을 받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야장들과 망치질을 같이 할 정도로 이쪽 일에 빠져 있었다.

정말 보기 드문 별종이란 뜻이다.

“금속 활자는 어디까지 진행되었는가?”

내 관심은 거기에 있었다.

올봄부터 금속으로 된 활자를 만들어서 불경을 찍어내기 위해 노력 중이다.

당연히 그건 핑계에 불과했다.

훈민정음 반포를 대비하여 미리 선행해 놓은 작업이라고 보아야 했다.

“전하께서 하명하신 대로 납으로 활자를 만들기는 했으나 생각보다 글씨가 뚜렷하게 찍히지는 않습니다.”

“문제점이 무엇이라고 보는가?”

“활자에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고려지와 먹물이 어울리지 않는 것 같사옵니다.”

나도 황순염의 생각에 동의했다.

단순하게 활자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현재 국내에서 쓰는 고려지는 흡습성이 크고 먹물도 개량할 필요성이 있었다.

거기에 구텐베르크가 썼던 것처럼 프레스로 압착하는 기술도 개발해야 했다.

하지만 그걸 황순염에게 맡길 수는 없는 일이기에 나는 하윤린을 따로 불렀다.

세종대왕에게 장영실이 있다면 내게는 하윤린이 있었다. 그라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해결책을 찾을 것이라 믿었다.

그는 부름을 받고 들어오자마자 신소봉을 통해 내게 종이 뭉치를 전달해줬다.

일단 그걸 펼쳐보자 공성 무기의 도안이 세밀하게 그려져 있었다. 아마 내가 이것 때문에 부른 거라 오해한 것 같았다.

나는 설계도를 내려놓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것 때문에 부른 것이 아니오. 과인이 따로 맡길 일이 있소.”

“이제 공성 병기의 개발이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사옵니다.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시면···.”

“공성 병기는 이 정도면 충분하오.”

성과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얼마 전에 그가 만든 투석기를 직접 보니 어느 정도의 성능을 보이고 있었다.

원나라로 출정을 떠났던 이들의 말에 의하면 그들의 것과 비교해도 이제는 그리 큰 차이가 없다고 했다.

오히려 더 뛰어난 부분도 많았다.

일단 설계부터 완성도가 높아서 이동과 조립이 훨씬 빨랐다. 여기서 더 개선할 수도 있겠으나 그건 비효율적이었다.

어차피 화포도 개량된 것이 있기에 이쯤에서 접는 것이 바람직했다.

아예 손을 놓으라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같이 연구했던 이들도 있기에 그들 중의 일부만 남겨 놓으면 된다.

훈련도감에도 화살 등의 개량을 위해서 일하는 이들이 있으니 그쪽으로 합류시킬 생각이었다. 그 이야기를 꺼내자 그제야 하윤린은 안도했다.

“그럼 소인은 이제부터 무엇을 하면 되옵니까?”

그때부터 설명을 시작했다.

가장 급한 것은 압착기의 개발이었다.

잉크와 종이의 개량은 다른 이들에게 맡겨도 충분하지만, 압착기는 아무에게 맡길 그런 난이도의 물건은 아니었다.

구조는 단순해도 정밀함이 필요했다

당연히 맨땅에 헤딩을 시킬 생각은 없었기에 기초적인 구조를 그림으로 그려가며 그에게 알려주어야 했다.

이러다가 훗날에 레오나르도 다빈치 수준으로 포장되는 거는 아닐까.

뭐 그것대로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이렇게 레버··· 아니 막대기를 당기면 회전하면서 아래로 내려와 눌러주는 구조인데 이해할 수 있겠소?”

“아하! 무게를 이용하여 먹물을 종이 위에 찍어내는 것이군요.”

“금방 원리를 알아보니 다행이오.”

역시 하윤린다운 모습이었다.

그는 기계류에는 천재적이었다.

손으로 눌러서 인쇄하는 것보다 빠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쉽게 알아차렸다.

당연히 하윤린은 크게 관심을 가졌다.

전혀 상상해보지 못한 물건이었다.

이미 공성 무기 같은 것은 싹 잊어버린 것 같았는데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어린아이처럼 눈빛이 반짝였다.

“언제까지 완성해야 하옵니까?”

“빠르면 빠를수록 좋을 것이오. 제작하는 것은 공부와 계정골의 장인들이 도와줄 테니 걱정 마시오.”

하윤린도 그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공성 병기를 만들 때도 그곳에 소속된 장인의 도움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가 뭔가 만들 때마다 대부분 참여했기에 주문 제작 방식에 상당히 익숙해진 장인들이다. 그걸 알기에 하윤린도 상당히 크게 반겼다.

“계정골의 장인들이라면 충분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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