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84
한글 반포를 결심했지만,
생각보다 준비할 것이 별로 없었다.
이미 한글은 완성된 문자였기에 지금 내가 이곳에서 손을 볼 필요가 없었다.
세종대왕님이 만드신 이후에 수백 년 동안이나 세월의 흐름 속에서 개선되었다.
그건 인위적으로 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의 준비는 해야 했다.
적어도 이 글자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려주는 해례본은 물론이고 나중에는 언해본도 차례대로 준비해야 했다.
우선 가장 먼저 할 일은 해례본을 만들 이론을 다시 세우는 것이었다.
그걸 나 혼자 할 수는 없었다.
당연히 도와줄 이들이 필요했다.
나는 환궁을 하자마자 곧장 적임자를 뽑기 위해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만약 백문보가 문하시중이 아니었다면 그를 시켰을 것이다. 실제로 한글을 활용하고 있는 이인복도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저마다 맡고 있는 일이 있기에 한참 고민하다가 내가 선택한 인물은 안보(安輔)였다.
그라면 충분히 믿고 맡길 수 있었다.
지금까지 안보가 쌓은 경력은 생각보다 화려했다. 각지의 안렴사를 거쳐 밀직제학과 지공거 그리고 종2품의 정당문학의 자리까지 역임했었다.
적어도 그 정도의 무게감이 있는 이가 중심을 잡아줄 필요가 있었다.
‘문제는 그의 수명인데···.’
안보는 머지않아서 죽는다.
길어봐야 일 년쯤 남은 것 같았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죽는 건지 알려진 바가 없었다. 다행히 내가 알기로는 아직은 건강에 문제가 없었다.
그러니 올해 이내에 일을 끝내야 했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조건이 있었다.
안보와 함께 일을 도와줄 이들이 상당히 많이 필요했다. 그때 떠오른 것은 정몽주가 소속된 진방회(眞訪會)였다.
그들이라면 충분히 도움이 될 것이다.
나이는 그리 많지 않으나 다들 살던 고향에서는 천재라 불리던 이들이었다.
더구나 이번 일이 큰 경험이 될 것이기에 나는 곧장 그들을 불러 모았다.
안보와 정몽주 그리고 정도전부터.
상당히 많은 이들을 모였는데 대충 스무 명 남짓은 되었다. 그 정도면 충분하기에 뜸 들이지 않고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괜히 말을 돌려가며 시간을 끄는 것은 내 취향도 아니었다.
“일단 앉아서 이것부터 보시오.”
나는 그들에게 한글을 보여줬다.
당연히 그게 뭔지 아는 이들은 없었다.
생전 처음 보는 문자였기에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자 곧 감찰사에서 지원을 나온 이인복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찰사는 한글을 암호로 썼다.
당연히 현재 고려에서 이인복이나 그의 수하만큼 한글에 익숙한 이들은 없었다.
그는 나를 대신하여 한글에 대해서 설명하기 위해 참석했기에 안보와 진방회 사람들에게 차분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그게 오래 걸리진 않았다.
진방회 사람들은 다들 머지않아 장원 급제를 하는 이들이라 그런지 너무 빨리 익혀서 놀랄 정도였다. 심지어 나이가 많은 안보조차 반나절 만에 익혔다.
그들은 생전 처음으로 보는 언문에 금방 매료되었다.
“말하는 대로 쓰는 글이라··· 생각지도 못한 일이옵니다.”
“그대들이 직접 경험한 것처럼 빠르게 반나절 만에 익힐 수 있고 아무리 어리석은 자라도 열흘이면 충분하오.”
“정말 대단한 일이옵니다. 허나 새로운 문자에 대해 반대를 하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옵니다.”
역시 안보는 중요한 점을 짚어냈다.
기득권은 어떻게든 자신의 권력을 지켜낼 생각만 가득하다. 그들은 백성들이 계속 우매하길 바라고 있을 것이다.
다들 쉽게 배울 수 있는 글이 생기면 당연히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거라 여길 텐데 애초에 학당도 반기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
아직은 지난해의 여파가 남아 있었다.
부원배들을 처단하며 도당에는 그 어느 때보다 개혁을 지지하는 이들이 많았다.
만약에 여기서 몇 년만 더 지나도 어떻게 분위기가 바뀔지 모른다. 내가 그 부분을 이야기하자 안보도 어느 정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쯤에서 나는 이번에 만들어야 할 해례본의 구성을 설명했다.
“해례본은 이름이 말해주는 그대로 다섯 가지의 해설과 예시가 들어갈 것이오.”
글자 창제를 설명하는 제자해부터 글자를 활용하는 예시인 용자례까지 정리해야 하는 것이 그들이 해야 할 일이다.
당연히 서문에 들어가야 할 내용과 본문은 내가 어떻게든 기억해내야 했다.
얼추 내용을 기억하고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때 정몽주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내게 질문을 했다.
“전하께서 이 글자들을 직접 만드신 것이옵니까?”
정몽주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어느 정도 확신을 갖고 있었으나 확인이 필요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고려에 생긴 수많은 변화가 내 머릿속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정몽주의 기대감을 채워줄 수는 없었다.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의미를 가진 훈민정음(訓民正音)은 이도(李祹)라는 이가 긴 시간 고민하여 만든 것이오.”
훗날 세종대왕이 되는 이도.
그분은 아직 실존하지 않은 인물이나 내가 만들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른 것이면 몰라도 훈민정음에서 그분의 이름을 제외할 수 없었다. 내가 이도를 언급하자 다들 그를 만나 보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쉽게도 만날 수 없는 상황이오.”
“원나라나 지방에 가 있는 것이옵니까?”
“이 세상 사람이 아니오.”
“저런··· 이런 대단한 글자를 만든 이를 볼 수 없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옵니다.”
그 이야기를 듣자 다들 아까워했다.
나도 세종대왕님을 보지 못해서 안타까운 한 사람이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분이기에 만날 방법이 없었다.
그분을 만나려면 40년쯤 기다려야 한다.
그쯤이면 내 나이가 미수(美壽, 66세) 정도는 될 것이다.
한두 해 기다려서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었다.
‘오래 살아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네.’
그것도 희망 사항일 뿐이다.
이성계의 다섯째인 이방원도 태어나지 않은 상태다.
과연 세종대왕께서 이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한동안 훈민정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신소봉이 들어왔다.
“전하, 저녁 수라는 어찌하옵니까?”
밖을 내다보니 달이 떠올랐다.
정오에 모였는데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갈 줄은 몰랐다. 낮 수라도 건너뛰었기에 그제야 허기짐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건 다들 비슷했는지 정도전은 꼬르륵 소리가 나는 배를 움켜쥐고 있었다.
지금까지 붙잡고 있었는데 저들을 그냥 보내는 것은 조금 그랬다.
“사선서(司膳署)에 연락해서 스무 명 정도 식사를 할 수 있는지 확인하거라.”
“이미 그럴 줄 알고 가볍게 식사할 수 있도록 준비시켰습니다.”
“잘되었구나. 지금 가면 되느냐?”
“언제든 상관없사옵니다.”
나는 일단 식사부터 하자며 안보 등을 데리고 식사를 준비한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식사 준비를 마친 궁인들이 우리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년 전부터 사선서는 수라상 외에도 항상 여분의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야근을 하는 관리가 워낙 많았다.
그 정도로 부려 먹으면 적어도 식사 정도는 챙겨줘야 했다. 요즘에는 평균 수십 명 정도가 궁내에서 식사했다.
식단이 자주 바뀌는 것은 아니었는데 보통은 곰탕과 최근에 시중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돌솥비빔밥이 나왔다.
“많이들 드시오.”
내가 수저를 들어 식사를 하자.
진방회에 소속된 이들은 상당히 상기된 표정으로 분주하게 수저를 들었다.
다들 정식으로 관직에 오르지 않았기에 궁궐에서 이렇게 식사를 하는 자리를 꿈에 그리던 이들이었다.
하지만 밀직사나 감찰사에 소속된 이들은 후배들을 안쓰럽게 바라봤다. 야근이란 늪에 빠진 그들의 미래가 뻔히 그려졌다.
오죽하면 집에 있는 아이가 아버지의 얼굴을 낯설어할 정도였다.
그렇게 시작된 식사는 금방 끝났다.
다시 태평전으로 돌아오자 안보는 곧장 이번에 진행되는 일의 기한을 물었다.
내 곁에서 일한 시간이 적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는 이번에 해야 할 일에 많은 여유를 주지 않을 거라 어느 정도는 예측하고 있었다.
“해례본은 언제까지 완성하면 되옵니까?”
염두에 두고 있는 날이 있었다.
세종대왕님이 반포했던 날에 맞춰서 음력 9월 상한(上澣)에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더구나 학당의 교사들이 연수를 끝내기 전에 그들에게 한글을 알려줘서 학당을 통해 훈민정음을 반포해야만 했다.
이왕이면 그들을 활용해야 했다.
그러려면 남은 기간이 많지 않았다.
벌써 초여름이니 겨우 석 달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이 정도 인원이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여겨졌다.
“가을이 오기 전에 완성해야 하오.”
*
시간이 흘러서 가을이 될 무렵.
드디어 훈민정음 해례본이 완성됐다.
안보와 진방회를 비롯하여 밀직사 등의 여러 관리들이 힘을 써준 덕분이었다.
그동안 그들의 노력은 상당했다.
며칠씩 집에 들어가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만큼의 보람이 있기는 했다.
다들 내 곁에 머무는 이들이라 그런지 반원정책에 찬성하고 있다. 그런데 더는 중원의 글자를 쓰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동기부여가 됐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예상보다 오히려 조금 더 빨리 끝냈다.
“하아··· 드디어 끝났습니다!”
정몽주는 해례본을 덮으며 소리쳤다.
마지막으로 오탈자를 확인하였으나 특별히 이상한 부분은 없었다.
거의 석 달 가까이 고생해서 만든 서책이었다. 당연히 다들 환호성과 함께 일어나서 자축하기 시작했다.
“고생하셨습니다.”
“죽는지 알았습니다. 어서 다들 들어가서 눈이라도 좀 붙이고 쉬시지요.”
“그 전에 어서 전하께 이 사실을 알려야 하지 않겠는가.”
안보는 다른 해례본을 집어 들었다.
모두 합쳐서 세 권의 서책이 만들어졌다.
혹시라도 잘못된 곳이 있을지 몰라서 몇 차례나 확인했다. 이제 이걸 필사해야 하는데 그 전에 전하의 승인이 필요했다.
안보는 곧장 나를 찾아왔는데 안 그래도 목 빠지게 기다리던 소식이라 어느 때보다 더 반갑게 그를 맞았다.
“그동안 수고 많으셨소.”
“전하께서 신경을 많이 써주신 덕분에 늦지 않게 완성할 수 있었사옵니다.”
“이리 가져와 보시오.”
마지막으로 나도 확인해야 했다.
이게 원본이 되어 필사를 하게 될 테니 조심해야 했다. 표지를 열어서 첫 장을 펴자 이번 일에 참여한 이들의 이름이 한 장에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거기에는 당연히 이도의 이름도 적혀 있었다. 하지만 나보다 더 위에 놓을 수는 없기에 가장 윗줄에는 내가 적혀 있었다.
당연히 내 이름은 그대로 적을 수는 없기에 왕이라고만 표시해야 했다.
“배포는 어찌할 것이오?”
“각지의 학당과 서고에 한 부씩 보내고 팔만대장경이 있는 해인사 같은 곳에도 보관용으로 보낼 예정이옵니다.”
“그걸로 끝내지 말고 백 부 정도는 더 필사하시오.”
가능한 많이 만들어서 배포해야 했다.
훗날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보관하던 곳이 실수로 불에 탈 수도 있고 전쟁도 있을 수 있다.
더구나 나중에 해례본을 인질처럼 삼는 짓거리가 다시 나오지 않았으면 했다.
그 뉴스를 볼 때마다 분통이 터졌던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건 꼭 후대에 물려줘야 한다.
“이제 슬슬 반포할 준비를 하시오.”
“전에 말씀하신 그날이면 되옵니까?”
“그렇소. 그전에 필사부터 어서 끝내고 곧 각지의 학당으로 가는 교사들부터 확실히 교육을 마치게 하시오.”
학당의 교사를 최대한 활용해야 했다.
그들이 각지에 퍼져서 아이들에게 언문을 알려주어야 빠르게 퍼져나갈 것이다.
당연히 필사도 그들의 손을 빌려야 했는데 해례본의 필사가 끝내면 곧장 각자가 맡은 지역으로 이동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훈민정음을 반포를 하자 반응이 예상보다 훨씬 더 좋지 않았다.
역시 기득권의 반발이 상당히 심했다.
안보가 괜히 걱정했던 것이 아니다.
그건 얼마 전에 친모가 연로하다는 이유로 원나라에서 돌아온 이색이 올린 상소문부터 시작되었다. 그가 적은 내용은 본 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터졌다.
역시 이색은 나와 정말 안 맞는 것 같았다.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가며 썩소가 지어지게 만드는 내용이었다. 그는 정말 모처럼 뚜껑을 열리게 만들었다.
이번에는 나도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이게 드디어 미쳤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