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83
결과는 문봉의 패배였다.
그것도 아주 큰 대패로 기록됐다.
한 차례 맞붙은 것만으로도 와해될 정도로 고려군의 위세는 대단했다.
기본적으로 문봉의 병사들은 고려군의 사 분의 일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더구나 질적인 차이도 컸다.
훈련을 거듭하여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고려군과 달리 목호들은 모래알 같았다.
어떠한 전략과 전술도 없이 움직였다.
문봉의 병사들이라고 해봤자 어부와 같은 이들을 긁어모은 것에 불과했다.
거기에 경험의 차이도 있었다.
변안열의 병사들은 원나라 원정을 다녀온 하사와 중사 계급을 지닌 이들이 다수 포진되어 있었다. 거기에 무기와 갑주의 품질 차이도 무시할 수 없었다. 모든 면에서 고려군이 유리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목호들도 포기하진 않았다.
“뒤로 돌아가서 적의 후방을 노려라.”
“어서 빨리 달려라!”
“몽골말의 우수함을 어리석은 고려놈들에게 알려줄 기회다. 이럇!”
기마병으로 이뤄진 목호의 반격이었다.
천 보 정도 떨어진 오름 뒤편에서 나타난 그들의 숫자는 이백여 명이나 됐다.
그들만으로 팔천 명의 고려군을 어떻게 할 방법은 없다. 하지만 고려군의 후방은 충분히 유린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그들은 고려군을 너무 몰랐다.
후방으로 치닫고 있는 목호들을 본 김휘남은 곧장 움직이기 시작했다.
혹시나 이런 일이 생길지 모르기에 임무를 나눠놨기에 변안열은 뒤쪽에 생긴 일에는 관심도 안 두고 계속 전진했다.
김휘남을 믿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겨우 이백의 기마병에 불과하다. 화포병과 쇠뇌병은 준비되는 대로 발사하라!”
아무리 뭍에서 싸움이 익숙지 않다고 하더라도 거칠기로 유명한 해군이다.
고작 이백의 기병에 움츠러들 이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김휘남의 지시대로 자리를 정렬해서 곧장 준비를 마쳤다.
곧 이백여 명의 기마대는 뜨거운 맛을 봐야 했다.
거의 직사로 쏘아지는 화포와 쇠뇌.
그 엄청난 화력을 뚫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심지어 해군의 병사 상당수가 흔들리는 파도 위에서도 왜구의 머리를 뚫는 이들이다. 목호들이 말을 타고 달리고 있더라도 쉽게 맞출 수 있었다.
더구나 이번에도 화포가 효과를 보였다.
마두라이의 코끼리처럼 목호들의 말도 화포 소리에 통제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생전 처음으로 듣는 굉음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대충 헤아려보면 삼할 이상은 등을 돌려서 도망가거나 기수를 떨어뜨렸다.
거의 학살 수준에 가까웠다.
변안열과 김휘남에게 자비는 없었다.
감히 고려의 관리를 죽인 반역자인 것도 있으나 그들 대부분이 원나라 출신인 점도 한몫하고 있었다.
문봉은 한 시진도 버티지 못했다.
살아남은 목호의 토호들은 무기를 내려놓고 변안열에게 항복해야 했다.
아무리 싸워도 고려군은 꿈쩍도 안 했다.
거대한 파도와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 느낌이 들 정도였기에 더 버텨봐야 개죽음일 뿐이었다.
“당장 저놈들을 추포하거라!”
변안열의 지시가 떨어지자.
병사들은 그들을 억류하기 시작했다.
이천 명의 병사 중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고작 오백 명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단숨에 탐라 인구의 1할 가까이 사라진 것이었다. 고려의 입장에서는 뼈아픈 일이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전하께서 내리신 어명이 있었지만,
살상을 줄이라는 말은 탐라인에 해당됐고 목호까지 포함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고려의 백성이라 볼 수 없다.
훗날 애써 키운 말을 자신들의 고국인 원나라가 아니라 명나라에게 보내라는 말을 듣고 반발하는 일마저 생길 정도다.
그러는 사이에 후방을 정리한 김휘남이 변안열에게 다가왔다.
“이제 저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전하께서 내리신 지시대로 토호 지위에 있는 목호들은 본토의 석회 광산으로 보낼 것입니다.”
“그 외에 나머지는?”
“오실 때 들으셨겠지만, 탐라에 목장을 확장하실 생각이셔서 일손이 부족하니 그곳에 노비로 보낼 예정입니다.”
“사람은 고쳐서 써먹는 게 아닐세.”
김휘남은 수없이 많은 왜구를 봐왔다.
지금까지 경험을 보면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아무리 회유를 해도 결국에는 다시 배신하는 게 왜구였다.
목호들 역시 다를 게 없어 보였다.
“어차피 이와 관련된 문제는 도순문사께서 정하실 것입니다.”
변안열은 거기에 관여할 생각이 없었다.
토벌을 마치는 순간부터 모든 권한은 이공수에게 넘어갔다. 전하께서도 무관의 내정 간섭은 무척 싫어하셨다.
문관들은 여전히 무신정권이 어떤 결론을 낳았는지 경계하고 있었다.
김휘남도 그걸 알기에 그쯤에서 더는 그에 관련된 말을 꺼내진 않았다.
무관들이 도당에 들어설 기회를 잃은 대신에 문관들이 군권을 잡는 일도 사라지고 있어서 불만은 크게 없었다.
이번 탐라 토벌만 하더라도 이공수는 군사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어떤 간섭도 하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행정적인 면에서 도움을 주기 위해서 상당히 애를 써주고 있었다.
“탐라에 주둔하는 병사들은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전하께서 어떤 말씀은 없으셨습니까?”
이제 곧 초여름이 다가온다.
폭풍우가 몰려오는 시기가 온 것이다.
혹시라도 전선이 손실될까 걱정된 마음에 변안열이 물어보았다. 아직 이 부분에 대해서는 변안열도 아는 바가 없었다.
그의 질문에 김휘남은 턱 끝을 긁적이며 대답을 해줬다.
“여기는 정박할 곳도 없으니 태풍이 오기 전에 변 장군과 함께 떠나야지.”
“그러면 탐라에 공백이 생길 텐데요.”
“해군과 주덕유의 함대에서 천 명씩 이곳에 주둔시킬 걸세.”
자신의 병사들을 분리해서 주둔군으로 보내지 않아도 되는 것은 다행이었다.
하지만 공백이 너무 클 것 같았다.
해군 중에 이천 명을 탐라에 남기면 생각보다 큰 전력의 누수가 생긴다.
더구나 해군을 주둔군으로 쓰기에는 너무 아까운 이들이었다.
“허허. 우리라고 언제나 파도 위에서 잠을 청할 수 없지 않나.”
탐라는 일종의 휴식처와 같았다.
해군에게 내려진 전하의 명령은 근무하는 병사 가운데 일부는 휴가를 보내고 나머지는 탐라에서 훈련하라는 것이었다.
대충 그 비율은 전체 해군의 3할 정도로 잡고 있었다. 그제야 변안열은 이해가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구와 전쟁을 시작한 지 수년째다.
그러는 중에 목숨을 잃은 이들도 적지 않았고 가족을 못 보고 지내는 이들이 허다했다. 가뜩이나 고려군에서 가장 힘들다고 알려진 해군이다.
변안열이 충분히 자격이 있다고 언급하자 김휘남은 기분 좋게 웃었다.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맙군. 어서 빨리 이곳을 정리하고 돌아가세.”
그로부터 이틀이 지난 뒤.
병사들은 다시 읍성으로 돌아왔다.
훗날 제주성이라 불리는 그곳에 들어서자 변안열은 곧장 고려의 깃발을 걸었다.
탐라가 완벽하게 고려의 땅으로 편입되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당연히 그 옆에는 변안열과 김휘남의 부대기도 나란히 게양되었다.
이번 출정에서 전하에게 받은 것이라 병사들은 물론이고 두 장군 역시 상당히 뿌듯한 표정으로 그 장면을 바라봤다.
두 장군은 푸른 파도 문양과 호랑이 문양을 사용하게 되었는데 고려군을 통틀어 네 번째로 받게 된 부대기였다.
변안열이 한동안 자신의 부대기를 바라보고 있자 김휘남이 그의 곁에 서서 말을 걸었다.
“마음에 드나 보지?”
“물론이지요. 전하께서 직접 내려주신 것이니 이것만 한 영광이 있겠습니까.”
“이번에 최영 장군도 부대기를 받았다고 들었는데 어떤 문양인지 아는가?”
“해동청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분이랑 잘 어울리는 문양이군.”
최영의 전투 방식과 잘 어울렸다.
그는 한번 기회를 포착하면 절대 놓치지 않기로 유명했다. 생각보다 집요하고 또 날카로운 공세가 해동청과 닮았다.
한동안 그렇게 자신의 부대기를 보던 변안열은 슬쩍 김휘남에게 속삭였다.
이내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변안열은 크게 웃으며 돌아서서 병사들을 향해 크게 외쳤다.
“대고려 만세! 폐하 만세!”
처음에는 다들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당연히 고려에서는 만세가 아니 천세를 사용해야 옳았다. 더구나 전하도 아니고 폐하라는 호칭도 바람직하지 않았다.
하지만 김휘남 역시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한번 변안열과 똑같이 제창했다.
그쯤 되니 실수는 아닌 것 같았다.
이공수도 고개를 저으며 그가 한 제창에 따라 두 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입가에 웃음기가 있는 것을 보면 싫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제야 병사들도 입을 모아 만세를 외쳤기 시작했다.
무척 열광적인 반응이었다.
“대고려 만세! 폐하 만세! 만만세!”
*
그로부터 보름이 지난 뒤.
토벌을 끝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제대로 된 병사도 없는 목호에게 당할 거란 생각조차 안 했지만, 풍랑을 만나는 것은 아닌가 싶어서 조마조마했다.
수장시키기에는 아까운 병력이었다.
“그래서 변안열 장군의 병사들은 무사히 육지에 도착한 것이오?”
“그러하옵니다. 예정대로 남해안 일대를 순찰하며 왜구를 방어할 예정이옵니다.”
“이번에 공을 세운 탐라 성주 고순원을 탐라부원군으로 봉할 테니 그리 알고 준비하시오.”
백문보는 알겠다며 고개를 숙였다.
최근 들어 봉작(封爵)을 내리는 일은 거의 없었으나 고순원은 충분히 자격이 있었다.
이 시대는 개나 소나 다 부원군 자리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정도였다.
그가 결심을 내려준 덕분에 피를 보지 않고 탐라에 무사히 상륙한 것이다.
당연히 그에 대한 보답을 줘야 했다.
그런 봉작이라면 아깝지 않았다.
“탐라부원군이 보낸 고명걸과 고신걸이란 이들은 어떻게 하기로 하였소?”
“그 친구들은 판도 총랑의 문하에 들이기로 했사옵니다.”
“잘하셨소.”
이공수는 약속을 지켰다.
그는 추천서를 써서 올렸고 백문보는 김득배에게 그들을 보낼 생각이었다.
나도 그라면 믿고 맡길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탐라에서 온 두 명은 정몽주와 동문이 되는 것이었다.
“탐라의 일은 얼추 마무리된 것 같은데 각지로 보낼 학당의 교사들은 잘 준비하고 있는 것이오?”
불교의 개혁은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아직 교육에 대한 개혁은 제대로 시작도 못 하고 있었다. 아이들을 가르칠 선생에 대한 교육이 마무리되지 못했다.
인구 5만 이상이 되는 주요 도시에 학당을 추가로 만들 계획이라 양성해야 하는 교사의 수가 생각보다 많았다.
“원래 예정대로 가을까지 문제없이 양성할 수 있도록 준비 중이옵니다.”
“학당은 어떻게 되었소?”
“이번에 문을 닫은 사찰 중에 일부를 개조하여 공부할 수 있는 곳으로 마련 중이옵니다.”
학당을 개보수하기는 했지만,
새롭게 지어야 하는 곳도 많았다.
하지만 폐사된 사찰 일부를 사용하는 것으로 부담은 최소화하기로 했다.
모처럼 보고를 받는 거라 말없이 듣고 있었더니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가 나왔다.
“마침 오늘 공개 수업을 진행하며 평가를 받는 자리가 있사옵니다.”
“그런 것은 또 언제 준비한 것이오?”
“실전 경험을 쌓을 기회가 필요하다는 대사성의 제안 덕분이옵니다.”
“일단 한 번 가봅시다.”
과연 어디까지 준비됐는지 확인해보고 싶었기에 곧장 백문보와 함께 성균관 부근에 마련된 교육 장소로 향했다.
그곳에선 십여 명의 아이들이 기초 산수에 대해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집중이 깨지지 않게 뒤쪽으로 슬쩍 다가서자 열정 가득한 목소리로 아이들에게 설명을 하는 교사가 보였다.
학당에 투입될 교사들은 아직 미숙한 부분이 보이기는 했지만, 다들 얼굴에 열정 하나만큼은 상당히 뚜렷했다.
이 일의 중요성을 알기 때문이다.
더 많은 아이들이 누릴 보편적인 교육에 대한 필요성은 다들 느끼고 있었다.
보수를 그리 많이 받는 것도 아닌데 이 일에 자원한 이유도 거기 있을 것이다.
확실히 지금까지 다들 교수법(敎授法)을 상당히 열심히 익힌 티가 났다.
하지만 신경 쓰이는 것이 있었다.
“교재의 생산은 어찌 되고 있소?”
“현재 최대한 필사를 하고 있으나 턱없이 부족한 상태이옵니다.”
“불경을 만들기 위해서 생산하는 금속 활자로는 안 되는 것이오?”
“주로 사용되는 글자가 상이한 탓에 효율이 그리 높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해결책이 필요했다.
서책의 대중화까지 갈 길이 멀었다.
더구나 한자를 익히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것도 신경 쓰였다. 한글과 달리 한자는 외워야 할 게 상당히 많았다.
고등교육까지 받으려면 천자문을 넘어서 이천 자에서 삼천 자까지 익혀야 했다.
문턱이 높아도 너무 높았다.
먹고 살기 바쁜 양인들이다.
과연 그 정도의 여유가 있기는 할까.
이 시대는 아이들도 집안의 일을 도우며 노동력을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결국에는 사교육을 받을 수 있는 권문세족이나 부유한 이들만 공부를 한다.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이 있었다.
시대가 바뀌어 과거로 돌아와도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아니 오히려 신분 제도 때문에 콘크리트 천장이었다.
능력 있는 관료를 선발하기 위하여 더 넓은 범위의 교육을 하는 것인데 그 의미가 퇴색되는 느낌이었다.
‘이제 슬슬 한글 반포를 준비해야 할 때가 온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