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82
탐라에는 유명한 성씨가 있다.
고 씨와 양 씨 그리고 부 씨가 대표적인 성씨로 탐라의 권력을 지니고 있다.
당연히 현재 성주도 고 씨인 고순원(高順元)이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영향력이 탐라 전체에 있지는 않았다.
탐라의 동부는 왕자인 문 씨의 몫이었다.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최근 동부에서 목호들을 대표하는 토호인 가을치와 투크타치가 고려에서 보낸 관리를 때려죽이는 일이 벌어졌다.
그로 인해 고순원은 골치가 아팠다.
이번 일로 인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망할 놈들! 사고는 항상 저들이 치고 뒷수습은 언제나 내가 하지.”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었다.
사십 년 전에도 군관 대호군(大護軍) 장공윤(張公允)이 보인 탐욕과 포악 때문에 탐라의 백성들이 들고일어났다.
그때도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 상당히 고생하셨다고 어린 시절에 들은 바 있었다. 하지만 지금만큼 불안하진 않았을 것이다.
시기와 상황이 너무 달라졌다.
당시에는 원나라의 입김이 더 셌다.
이곳에 있는 원나라 핏줄의 목호들도 그걸 믿고 손을 썼던 경향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현재 새로 즉위 된 고려의 왕이 보여주는 행보는 파격적이고 과감했다.
어떤 대응을 할지 알 수 없었다.
고려에 불고 있는 피바람.
그 소식은 탐라에도 전해졌다.
워낙 충격적인 소식이라 남쪽에 동떨어진 탐라까지 순식간에 도달했을 정도였다.
이곳도 영향이 없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정동행성은 사라졌고 탐라만호부조차 지난해 소멸되어 관리가 내려왔다.
확실히 새로운 왕은 뭔가 달라 보였다.
“사신은 제때 도착하겠지?”
고순원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곳에는 모사(謀士)인 부사흥이 있었다.
그는 고순원의 꾀주머니로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조언을 구하는 이였다.
부사흥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마 지금쯤 육지에 도달해서 개경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 것입니다.”
“늦지 않게 도달해야 할 텐데.”
“사건이 벌어지고 얼마되지 않아 출발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일이 벌어지고 난 뒤.
고려의 관리가 육지로 도망쳤다.
그들을 놓친 탓에 머지 않아 고려에도 이 일이 알려질 것이다. 그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고순원은 급하게 이번 일을 해명하기 위해서 사신을 보내야 했다.
자신이 벌인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성주의 위치에 앉아 있기에 수습부터 해야 했다. 만약, 사신으로 보낸 이로 부족하다면 직접 탐라에서 키운 말을 이끌고 개경으로 가서 받칠 생각이었다.
지금은 어떻게든 고려의 분노를 잠재워야 했다.
“혹시 우리가 보낸 사신이 도착하기 전에 고려에서 병사부터 보내면 어쩌지?”
“지금까지 이런 일 때문에 고려가 탐라에 원정군을 보낸 경우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렇기는 하지.”
“더구나 병사를 일으키는 데 걸리는 시간도 있으니 혹시 모르니 지금부터라도 조금씩 방비를 하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하나 같이 틀린 말이 없었다.
고순원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의 입을 통해 들으니 확신이 생겼다.
하지만 어떻게 방비를 하더라도 막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탐라에도 고려군에 대한 소문이 돌았다.
원나라와 쌍성총관부.
두 곳에서 보인 고려군의 능력은 상상한 것 이상이었다. 이야기꾼의 입을 통해서 탐라에 전해져서 과장된 것도 있을 거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직접 피부로 느껴지는 것들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해군이었다.
최근 탐라의 앞바다는 주덕유를 비롯한 김휘남 등의 해군이 주름잡고 있었다.
그들이 보이는 능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최근 몇 년 동안 왜구들이 활개 치지 못하고 있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과연 방비한다고 막을 수 있을까?’
*
얼마 뒤에 우려는 현실이 됐다.
하늘이 너무나 청명한 어느 날의 오후에 탐라 앞바다는 배들이 가득 채워졌다.
거의 백오십 척에 달하는 선단이었다.
역시 절대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았다.
혹시나 했던 고려의 원정군이 탐라에 온 것이었다. 그걸 본 고순원은 좌절감이 가득한 얼굴로 부사흥에게 물었다.
“우리가 저들을 이길 수 있겠나?”
“송구하오나··· 힘들 것 같습니다.”
“역시 그렇겠지.”
고순원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며칠 전에도 부사흥은 비슷한 답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매번 같은 결론이 나왔다. 애써 희망을 찾아보려 하더라도 바다 위에 가득한 해군을 보니 사라졌다.
부질없는 짓을 할 필요는 없었다.
아쉽게도 탐라에겐 전선이 없다.
고작 가지고 있는 배라고 해봤자 몇 명이 타는 작은 어선 정도가 전부였다.
상륙하는 것을 막을 힘조차 없었다.
옛날에 축성된 읍성이 있기는 하나 그거 하나만 믿고 버티는 것도 무리였다.
“저들의 병력이 우리의 열 배쯤은 되는 것 같지 않소?”
“아무리 작게 잡아도 그럴 것입니다. 하오나 죽을 각오를 한다면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게 가능하겠소?”
“아시다시피 탐라에는 수많은 동굴이 있습니다. 그곳에 숨어서 기회를···.”
“그런다고 달라질 것이 있는가? 아무래도 탐라는 여기까지인 것 같소.”
고순원은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이미 대세는 기울었기에 더는 탐라의 성주 자리를 고집할 수 없었다.
이렇게 빨리 병사들을 보낼 정도면 고려의 국왕이 이 사태에 대해 어느 정도로 관심을 두고 있는 지 알 수 있었다.
“오랜 시간 생각을 해보았으나 차라리 고려의 보호 아래 들어가는 것이 모두를 위한 결정일 것이오.”
이제 더는 방법이 없었다.
오늘따라 부사흥도 말이 없었다.
성주인 고순원의 말이 맞았기 때문이다.
현재 그들이 보유한 병력은 천 명 단위도 되지 않는다. 그들 전부를 죽을 것을 알면서 사지로 밀어 넣을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은 고려에서 온 이공수와 고려의 병사들에게 순순히 성문을 열어주고 고개 숙여야 했다.
오히려 고려군이 당황할 정도였다.
한바탕 싸울 거라 각오하고 온 것이다.
그런데 칼을 뽑기도 전에 제주에 있는 유일한 성을 손에 넣은 것이었다.
변안열은 허무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러려고 멀미를 참아가며 바다 건너까지 온 것인지 회의감이 들 정도였다.
“이건 조금 허무하군요.”
이번 토벌은 그에게도 상당히 중요했다.
지금까지 여러 원정길에 나선 그였지만, 직접 작전을 지휘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보다 더 직위가 높은 김휘남도 있었으나 육지에서의 전투는 변안열이 지휘하는 것으로 정해져 있었다.
그런데 실력을 발휘할 틈도 없었다.
“피를 안 보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오.”
김휘남은 오히려 안도했다.
그의 병사들은 뭍에서 싸우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다. 대부분 땅 멀미라는 것을 할 정도로 바다에 익숙해졌다.
이공수도 그와 같은 생각이었다.
그는 진심을 담아 고순원에게 이번 결정을 내려주어 고맙다는 말을 건넸다.
“성주의 과감한 결단 덕분에 불필요한 피를 흘리지 않을 수 있었소.”
“비록 제가 한 일은 아니오나 탐라의 일 때문에 이렇게 먼 걸음을 하게 만들어서 송구할 뿐입니다.”
“그나저나 성주 직위를 반납하겠다고 하신 말씀은 진심이오?”
이공수는 재차 그의 진심을 확인했다.
원정을 떠나오면서 지시를 받기는 했으나 이렇게 금방 해결될 줄은 몰랐다.
원래는 시간을 두고 차차 해결하려 했던 문제였다. 하지만 어떤 압박을 주기도 전에 고순원은 자진해서 먼저 내려놨다.
대신 그는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저에게 아들과 조카가 있사온데 그 아이들을 개경으로 보내어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그걸 굳이 사양할 이유가 없었다.
일종의 인질 역할도 겸하기 때문이다.
이공수는 당연히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저명한 스승 밑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추천서까지 써주겠다고 확답을 주었다.
그때까지는 아직 화기애애했다.
하지만 이걸로 끝날 문제는 아니었다.
사실상 이번 일을 일으킨 이들은 고순원이 아니라 동쪽에 있는 역적들이다.
하루라도 빨리 왕자인 문봉과 목호인 가을치와 투크타치를 토벌해야 했다.
“우리도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고순원은 누구보다 더 열정적으로 토벌을 돕겠다고 나섰다. 이제부터 탐라는 이공수가 통치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긴 시간 지켜본 것은 아니었으나 기존에 고려에서 보낸 관리들과는 뭔가 달랐다.
그라면 믿고 따를 수 있을 것 같았다.
더구나 그가 원나라의 황후마마와 혈연이 있다는 점도 한 몫을 차지했다.
고순원은 부사흥과 함께 역적들이 위치한 곳을 설명해줬다. 지형부터 병사의 수까지 상세하게 알려주니 토벌 준비는 금방 끝났다.
“문봉과 목호들을 모두 합치더라도 이천여 명에 불과합니다. 다만, 그들은 말을 다루는 것에 대단히 능숙합니다.”
고순원은 그게 가장 걱정이었다.
현재 성 밖에 있는 벵뒤에 야영 준비를 하고 있는 만여 명의 고려 병사들은 말을 거의 끌고 오지 않았다.
벵듸란 오름과 오름 사이에 있는 들판이었는데 기껏해야 수십 마리 정도가 전부였다. 자신이 말을 내놓아도 수적인 차이가 있기에 꽤 손해를 볼 것 같았다.
하지만 변안열은 그리 걱정되지 않았다.
“기마병이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오.”
“방안이 있으신 것입니까?”
“물론이오. 그건 걱정하지 마시오.”
저들의 기마병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아무리 말을 타고 잘 싸워도 제대로 된 갑주를 입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 정도 숫자면 궁수만 나서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었다. 거기에 화포도 있으니 개활지에서는 접근조차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당장 움직일 수 없었다.
그 이유는 극심한 멀미 때문이었다.
김휘남의 해군과 달리 변안열은 물론이고 병사들 대부분이 배를 처음 타는 것이다.
배에서 내리기 전까지 거의 반쯤 죽어가던 상태였기에 적어도 이틀 정도 읍성 부근에서 야영하며 요양해야 했다.
그리고 정확하게 나흘째 되던 날.
변안열은 전선과 읍성을 지키는 이천 명을 제외한 팔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김휘남과 함께 동쪽으로 진격했다.
이공수는 읍성에 남았는데 이번 전투에서 해군은 보조를 하는 수준에 불과했다.
변안열이 이끄는 4천 명의 병사.
그들이 이번 탐라 토벌의 주력이었다.
탐라는 그리 넓지 않았기에 그들은 하루 만에 문봉과 역도들이 있는 곳에 도달했다. 그곳에는 아무리 많이 쳐줘도 이천 명이 안 되는 이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 내부에서도 문제가 많았다.
모든 병사가 문봉의 병사도 아니었고 그중의 일부는 목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고려의 전선이 나타난 이후에 탐라 전역에서 일제히 모여든 목호들이었다.
당연히 문봉은 그들이 탐탁지 않았다.
“그대들이 벌인 짓 때문에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왕자 문봉은 노기를 감추지 못했다.
시뻘겋게 달궈진 얼굴로 그는 이번 일의 빌미를 제공한 목호들을 바라봤다.
그들 중에는 당연히 가을치와 투크타치도 포함되어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저들의 목을 가지고 고려군에 투항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이들을 받아들인 순간부터.
이미 그런 선택지는 사라진 것이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고려의 관리를 죽인 건지 아직도 그는 이해가 안 됐다.
하지만 여전히 목호들은 자신들은 꼭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라며 떳떳했다.
“저들이 감히 어쩌지는 못할 것입니다.”
“맞습니다. 허장성세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키우는 말이 없다면 원나라에 보낼 말을 어떻게 구하겠습니까?”
가을치가 먼저 입을 떼자,
다른 목호들도 옆에서 거들었다.
목호들은 원나라의 위세가 과거만 못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테우리들이 있지 않은가.”
그 이야기를 들은 가을치는 크게 웃었다.
탐라인으로 구성된 테우리도 목호처럼 목축하는 이들이나 기술적인 차이가 컸다.
비교 받는 것부터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하지만 문봉에게 몸을 의탁한 상태라 대놓고 불쾌함을 표시할 수는 없었다.
“그들이 뭘 할 수 있겠습니까.”
애초에 테우리는 골칫거리였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이들이다.
몽골말의 혈통을 어지럽힐 가능성이 있어서 그들은 목장 주변에도 오지 못하게 막을 정도였다. 한 번도 그들은 테우리가 자신들을 대신할 거라 생각지 않았다.
실제로 그들은 자신들의 과하마를 조금이라도 개량하기 위해서 온갖 일을 꾸며서 목호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들 때문에 일부러 수말을 거세한 일도 있을 정도였다. 다른 목호들의 반응도 가을치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걸로 입씨름하고 있을 틈은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변안열의 고려군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걸 본 문봉은 목호와 자신의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뭣들 하고 있는 것이오. 어서 나가서 저들을 막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