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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79화 (79/202)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79

동오는 석회라 생각했지만,

정확하게는 시멘트 콘크리트였다.

훗날에 한자로 붙여진 이름은 양회(洋灰)인데 내가 이 시대에 구현한 것은 초창기 포틀랜드 시멘트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거기에는 여러 첨가물이 들어가는 데 그걸 찾기 위해서 상당히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다.

시멘트에 도대체 뭐가 들어갈까.

그걸 내가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건축학과를 나와도 아마 모르지 않을까.

그래도 여러 장인이 노력한 덕분에 건축 용도로는 쓸 수 없으나 도로포장에 쓸 정도의 양회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나는 이걸로 로마가 그랬듯이 고려의 중요 도시를 잇는 길을 만들어서 수레가 다닐 수 있게 만들 생각이었다.

그게 가능한 이유는 풍부한 매장량 덕분이다. 한반도의 광물 중에 석회암은 수천 년을 써도 될 정도로 풍부하다.

내가 아무리 사용해도 티도 안 날 것이다.

더구나 품질도 그리 떨어지진 않았다.

당연히 시멘트를 굽는 과정에서 필요한 화력은 석탄이 활용될 예정이었다.

나는 잠시 그 생각을 하면서 두 사람을 지켜보다가 물었다.

“과인이 이곳에 온 이유를 아시겠소?”

“송구하오나 전혀 가늠이 되지 않사옵니다.”

“소인 역시 마찬가지이옵니다.”

지경탁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눈치가 빠른 동오마저 내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다.

역시 이럴 때는 직접 보여주는 게 편했다.

신소봉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누각 위로 올라가서 손을 들고 흔들었다.

그러자 멀리서 마차 한 대가 다가왔다.

두 필의 말이 끄는 마차였다.

마부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은 안도치였다.

그는 마부석에 앉아서 자연스럽게 사백 보 정도 되는 거리를 달려와서 멈춰 섰다.

그제야 두 사람은 물이 가득 담긴 양동이가 실려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물은 거의 넘치지 않았다.

동오와 지경탁은 그 의미를 알아차렸다.

말끔하게 포장된 길이기에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길은 대부분 좁고 진창이라 수렁이 꽤 깊다.

수레를 끌고 싶어도 바퀴가 빠지는 일이 허다해서 효율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 길은 전혀 그런 게 없었다.

“어떻게 생각하시오?”

“전하께서 이런 도로를 만들어주신다면 확실히 육로로 각지의 물건을 옮기는 일이 많이 수월해질 것이옵니다.”

“하오나 석회를 굽는 시간과 비용을 고려하면 쉽지 않은 일이옵니다.”

우려를 표한 것은 동오였고,

기뻐하며 반긴 것은 지경탁이었다.

나는 두 사람의 말 가운데 틀린 부분이 있기에 그걸 먼저 짚어주었다. 고려의 재정만으로 도로를 만들 생각은 없었다.

“북부에 있는 서경에서 개경, 그리고 나주까지 이것과 같은 도로를 이을 생각이오. 그렇게 되면 누가 가장 많이 이용할 것 같소?”

“당연히 장사치들이옵니다.”

“그러니 고려에서 가장 큰 두 상단이 어느 정도의 부담은 해야 하지 않겠소?”

“지당하신 말씀이시옵니다.”

동오는 계속해서 내 말에 장단을 맞췄다.

미리 입을 맞추고 온 것은 아니었으나 이미 여기서 빠져나갈 구멍은 없다고 여겼는지 금방 수긍을 한 것 같았다.

더구나 내가 막무가내로 뺏어갈 성격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그였다.

수년 동안이나 내 곁에서 지켜봐 온 탓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두 상단주가 고려를 위해서 힘을 써줘야 하겠소.”

“뭐든 하명만 내려주시옵소서.”

“석회암 광산에서 도로를 만들 지역까지 자재를 운송해 주시오.”

일감을 주겠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들이 지닌 인력과 운송 수단을 차출하겠다는 의미였다.

그쯤 되자 지경탁은 내가 앞에 있다는 것도 잊은 것 같았다. 그는 끼어들 틈도 없이 계속 동조하고만 있는 동오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방금 언급한 서경부터 나주까지.

못해도 천삼백 리나 되는 거리였다.

하루아침에 끝날 공사가 아니었고 도대체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니 대부분의 이들은 과연 그게 가능한 일인지 의문을 가질 것이다.

하지만 불가능하진 않았다.

그런 것이었다면 아예 시도도 안 했을 것이다. 현재 고려는 주덕유가 잡아 온 왜구들의 수가 나날이 늘어가고 있었다.

현재 철광석 광산에서 일하는 이들 중에 일부 석회암 광산으로 보내고 도로를 만드는 데 활용하면 되었다.

‘솔직히 지금 아니면 불가능하지.’

현재 고려의 재정은 넉넉했다.

역대 최고치의 무역 성과를 내고 있었고 부원배를 처단하고 남은 재물도 상당히 많았다. 조만간 불교 개혁도 예정되어 있기에 추가될 예산도 적지 않았다.

지금이 아니면 영영 시도조차 못 할 것이다.

“물론, 그에 대한 보답도 충분히 할 것이오.”

무턱대고 하라는 말은 아니었다.

내가 제시하는 보상은 아마 통할 것이다.

그게 통하지 않으면 다른 상단이나 해군 등을 투입하면 그만이었다. 조금 더 일이 귀찮아질 뿐이지 못할 것도 없었다.

그중의 핵심은 무역 권한이었다.

“이번 일에 참가하는 상단에게는 그 기간 동안 타국과 교역할 수 있는 독점 무역 권한을 허락해줄 것이오.”

확실히 효과가 있기는 했다.

그 이야기를 꺼내자 지경탁은 눈을 반짝이며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원나라에 있는 심부와 독점 거래를 하는 것은 어용 상인인 동오의 권한이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그 계약 기간이 3년이라 조만간 끝난다고 했다.

반면에 동오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언젠가 이런 일이 생길 거라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국내 유통에 손을 뻗은 것도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거기에 조건을 걸었다.

“독점 거래 기간은 3년으로 정하고 그 기간 동안은 건설 자재를 차질 없이 운송하시오. 만약, 납득하지 못할 이유로 지체되거나 소홀해지면 그날부로 당장 독점 거래는 종료될 것이오.”

“하오면 어느 곳의 독점을 주실 것이옵니까?”

지경탁은 기대감이 가득한 눈빛으로 내게 물었다. 그의 질문을 받은 나는 네 곳의 선택지를 꺼내서 두 사람에게 내밀었다.

“왜국과 여진 그리고 교지국(베트남)과 섬라곡국(태국)이오.”

“원나라는 어찌하여 빠진 것이옵니까?”

“심부와 맺은 계약이 아직 남아있소.”

이제 겨우 몇 개월 남았다.

당연히 계약은 갱신할 생각이었다.

심부와 동오가 키워 놓은 황금알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를 생각은 없었다.

더구나 그걸 지경탁에게 준다는 것은 고양이에게 생선 가게를 맡기는 일이다.

그제야 굳어 있던 동오의 얼굴이 풀렸다.

“그러면 저는 왜국을 맡고 싶사옵니다.”

지경탁은 서둘러 왜국을 택했다.

그것마저 동오에게 빼앗길 수는 없었다.

여진은 말을 제외하면 돈이 될 만한 것이 많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교지국이나 섬라곡국을 택하자니 내수 시장에 특화된 그로서는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멀었다.

차라리 고려에서 매입해 주는 유황이나 금과 은 같은 게 훨씬 이득이 많았다.

그 정도는 나도 예상하긴 했다.

나 같아도 왜국을 선택할 것 같았다.

혹시 동오도 지경탁과 같은 선택일 수 있기에 대답을 기다렸는데 그의 선택은 조금 의외였다. 동오는 선택지에서 벗어난 다른 곳을 원하고 있었다.

“전하께서 허락을 해주신다면 소인은 마두라이 술탄국과 교역을 하고 싶사옵니다.”

지경탁은 그 이야기를 듣자 혹시 놓친 게 있는 것은 아닌지 열심히 눈알을 굴렸다.

하지만 그건 나도 조금 의아했다.

워낙 먼 항해라 도중에 폭풍 등으로 인해 손실이 날 가능성이 무척이나 컸다.

현재도 일반 상선이 아니라 마두라이와 고려에서 고용한 이들이 오가고 있었다.

한번 좌초라도 되면 엄청난 손해가 나기에 나라에서 진행하는 것이 아니면 쉽게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소인에게는 장거리 항해가 가능한 배가 여러 척이 있사오니 양국에게 필요한 전략 물자의 운송을 맡겨주시옵소서.”

그제야 뭔지 알 것 같았다.

아마 이인임의 아들인 이정근을 통해 뭔가 들은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나서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마두라이의 고려풍 덕분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직 그 사실이 널리 알려진 것은 아니었으나 요즘 마두라이에서는 고려 물건이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

동오의 의도가 어찌 되었든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제안이기에 막을 이유는 없었다.

‘영역을 더 넓힐 필요가 있기는 하지.’

지금 당장 바라지는 않지만,

옛 고려 같은 해상 왕국이 되고 싶었다.

주덕유의 사략 함대를 보내 남해를 평정하게 만든 이유도 거기 있었다.

어느 정도 바다가 안정되면 어디든 못 갈 이유가 없었다.

내가 죽기 전에 남미는 아니더라도 북아메리카쯤은 찍어보고 싶기도 했다.

감자와 옥수수 같은 것만 더 일찍 들여올 수 있다면 경신대기근 같은 불행한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하시오.”

당연히 나는 그걸 허락해줬다.

하루라도 빨리 종마를 데려오고 염초를 더 많이 가져와야 할 필요가 있기는 했다.

더구나 고려의 물건을 더 많이 팔 수 있다면 오히려 내가 부탁을 해야 할 입장이었다.

“자세한 세부 사항은 이번 공사를 책임지고 있는 공부 상서 황석부와 논의해서 진행하시오.”

*

도로 건설을 공부 상서에 넘긴 뒤.

다시 궁궐로 돌아가던 중에 나는 사람들이 몰려있는 것을 보고 멈췄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이 전법사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중에는 승려들도 제법 많이 섞여 있었다.

“무슨 일인지 알아볼까요?”

내가 한동안 그쪽을 지켜보고 있자.

안도치가 먼저 나서서 내 의중을 물었다.

지난해 가을에 한번 부원배를 쓸어버린 이후에 전법사는 한동안 잠잠했다.

마지막으로 올라온 전법 판서 이달충의 보고도 이레가 지났을 정도였다.

내가 그러라고 허락을 해주자.

안도치는 잠시 그쪽으로 다가가서 여러 사람과 대화를 하더니 얼마 후에 돌아왔는데 표정이 상당히 좋지 않았다.

아무리 숨기려 해도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 인물이었다. 확실히 뭔가 일이 있는 것 같았기에 안도치에게 그게 뭔지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러느냐?”

내 질문에 안도치가 답을 해줬다.

현재 전법사 안에는 환관인 김부카(金不花)의 아내와 간통을 한 승려 영욱(英旭)이라는 자가 잡혀 있다고 했다.

여기서 헷갈리지 말아야 할 것이 원나라에서 기황후의 측근인 박부카(박불화)와는 다른 이라는 것이다.

그쯤 되니 안도치가 왜 그러는지 알 것 같았다. 김부카라면 신소봉이 관리하는 왕실 직속 기관에 소속되어 있다.

안도치에게는 직장 동료였다.

내 시중을 드는 이가 연관되어 있다 못 해서 피해자라고 하니 관심이 갔다.

사람들을 헤치고 안으로 들어서자 이달충은 나를 알아보고 곧장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내가 손을 올려서 그를 만류했다.

잠시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듣고 싶었다.

더구나 사복을 입고 나온 상태였다.

이달충도 그걸 곧장 눈치채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앉았다.

내가 이렇게 돌아다니는 것에 이미 어느 정도 익숙해진 덕분이었다. 이달충은 다시 영욱에 대한 심문을 이어갔다.

“아직도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사랑하는 것이 어찌 죄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왜 저한테만 이러시는 것인지 이해가 안 됩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이더냐?”

너무 당당하게 말해서인지,

오히려 이달충은 어이가 없었다.

더구나 전하께서 보고 계신 중이다.

하지만 그가 어떤 말을 꺼내기도 전에 영욱은 담 넘어에 있는 이들에게 들으라는 듯이 큰 목소리로 일장 연설을 하듯이 외쳤다.

“얼마 전에도 내원당에 소속되어 있는 선근이라는 승려 역시 간통을 저질렀지 않습니까.”

“그게 지금 일과 무슨 상관인가?”

“다들 똑같다는 것입니다. 만약 나를 벌하시려면 먼저 종문(宗門)부터 없애야 할 것입니다. 지금 자은종에 몸담고 있는 승려 중에서 누가 나를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자은종은 나도 들어본 종파다.

그 시작은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여러 종의 교학을 고려에 전하며 탄생했다.

역사로 보더라도 근래에 생긴 곳은 아니었는데 훗날 종파가 통폐합되며 교종에 흡수된다.

그가 말한 대로 자은종의 승려가 다들 그렇다면 조금 더 일찍 역사에서 사라져도 부담될 것은 없었다. 하지만 거기만 건드리고 끝낼 생각은 없었다.

안 그래도 벼르고 있는 중이었다.

백문보와 왕사인 보우가 거의 준비를 마쳤다는 소식이 얼마 전에 있었다.

언제 시작할 건지 기회만 노리고 있는 중이었는데 승려 영욱은 역사에 불교 개혁의 단초였다고 기록될 것이다.

“원한다면 그렇게 해줘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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