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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78화 (78/202)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78

역시 이인임다웠다.

그런 카드를 꺼낼 줄 몰랐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었다.

경마와 전투마 품종을 개량하기 위해서 최근 들어 각지에서 말을 구하는 중이다.

당연히 그중에는 대식국의 말도 포함되어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게 얼마 전의 일이라 마두라이에 소식이 닿지도 않았다.

그런데 먼저 이런 제안을 해왔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전투에 사용할 수 있는 말이라는 것을 파악한 것이다.

고려에 있는 말이 어느 수준인지 이인임도 잘 알고 있는 덕분일 것이다.

확실히 능력 하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식국의 말이라···’

솔직하게 말하면 구미가 당겼다.

아라비아 말은 명품이라 할 수 있다.

내 기억으로는 여러 품종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알고 있다. 일단 떠오르는 이미지부터 상당히 품격이 높았다.

그런데 이정근은 인도 서부의 토착종인 카티아와리를 추천했다. 생전 처음 듣는 품종이라 그게 뭐냐고 물어야 했다.

“카티아와리? 그런 종류의 말이 있다는 것은 처음 듣는데 어떤 말인가?”

“적은 양의 먹이를 먹으며 험한 지형에 적응된 천축국의 전투마이옵니다.”

“고산 지대를 의미하는 것이오?”

내 질문에 이정근은 고개를 저었다.

고산 지대가 아닌 사막 전투를 위해서 개량된 것이라 말했다. 하지만 말만 들어서는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자 이정근은 다급해졌다.

아버지의 지시에 따르기는 했지만,

이게 통할 수 있을지 확신은 없었다.

하지만 상황이 그리 좋지 않았기에 이번 알현이 상당히 중요했다. 그런데 내가 아무런 말도 없이 있자 서둘러 말을 이어갔다.

“소인이 타고 온 배에 두 품종의 말을 모두 싣고 왔으니 원하신다면 직접 확인하실 수 있사옵니다.”

나는 일단 말부터 보기로 했다.

대식국의 말은 고려에도 몇 마리 있다.

기존에 팔관회를 통해서 각국의 사신과 상인이 들여온 것들이다. 그중의 한 마리가 내가 평소에 타는 흑마였다.

하지만 번식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워낙 오래전에 들어온 말들이라 이젠 나이가 적지 않았다. 그나마 가장 어린 내 말도 암컷인데 아무리 애써도 계속 실패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이정근은 재빨리 움직였다.

그는 자신 있게 권유했던 카티아와리라는 품종의 말을 궁궐로 가져와서 보여줬다.

함께 데리고 온 아라비아 말과 비교하면 확실히 차이가 있기는 했다.

안쪽으로 둥글게 휘어진 귀 끝.

아주 두툼한 목과 근육질의 몸매.

덩치도 상당히 큰 것이 꽤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강인해 보이는 만큼이나 성질은 그리 온순해 보이지는 않았다.

쉽게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거친 바다를 건너느라 고생한 탓인지 상당히 신경이 날카로워 보였다. 전투마로 쓰려면 기병들이 꽤 고생할 것 같았다.

‘확실한 장단점이 있기는 하구나.’

그래도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현재 고려의 기병이 타고 있는 말에 비하면 덩치 자체가 달랐기 때문이다.

이 정도 말이면 어느 정도 중무장한 기병도 마음껏 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단 이정근이 제안한 말을 보았으니 어느 정도까지 가능한지 물어봐야 했다.

“몇 마리의 말을 구할 수 있겠소?”

“대식국의 품종은 약 2천 마리 그리고 카티아와리 품종은 천 마리를 확보해 놨으니 당장이라도 가능하옵니다.”

“생각보다 많은 숫자는 아니구려.”

“어차피 배에 실을 수 있는 숫자는 한정적이라 수년에 거쳐서 진행할 문제이옵니다. 그 사이에 최대한 더 많은 말을 구해놓겠사옵니다.”

말은 무게도 많이 나가지만,

선박에 실을 경우에 부피도 문제다.

지금 마두라이에서 오가는 상선에 아무리 많이 실어봐야 이십여 마리에 불과하다.

거기에 염초의 수입도 계속되어야 하니 한 번에 옮길 수 있는 숫자는 아니었다.

당연히 이인임은 꽤 길게 보았다.

어차피 화포도 무게가 상당했기 때문에 운반이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는 아들인 이정근을 통해서 5년에 걸친 장기 계약을 제안했다.

‘과연 이인임이 마두라이 술탄의 몰락을 막을 수 있을까?’

솔직하게 말하면 그게 관건이었다.

이번에 시작된 전쟁은 시작에 불과했다.

종교적인 문제가 깔려 있기에 한쪽이 멸망할 때까지 계속될 전쟁이었다.

이 무렵의 인도 지역에 대한 역사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원래의 역사대로면 마두라이는 그리 오래 버티지는 못한다.

14세기 후반에 비자야나가르가 인도 남부를 통일하기 때문이다.

그걸 알고 있기에 망설여졌다.

지금의 마두라이가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까. 과연 시대의 흐름을 바꿀 수 있을 역량이 있는지부터 고려해야 했다.

만약에 내가 화포를 보낸 뒤에 마두라이 술탄이 망하면 난감해진다.

가장 좋은 결말은 무엇일까?

당연히 고려에 호감을 가지고 있는 탄야가 대륙을 통째로 삼키는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이미 고려군 전력에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화포를 운영하는 것이 조금 더 수월해질 것이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이인임보다 마두라이에 있는 정휘와 홀치를 믿기로 했다.

즉위 초기부터 나와 함께한 이들이다.

그들이라면 지나 수년의 시간 동안 마두라이의 병사를 잘 단련시켰을 것이다.

누구보다 제식의 중요성을 잘 알기에 쉽게 비자야나가르에게 질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마두라이 술탄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하지만 내게도 조건이 있소.”

그 말을 꺼내자 이정근은 감당하지 못할 내용이 아닐까 걱정부터 했다.

하지만 내가 바라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일단은 고려에 보낼 말의 연령을 번식이 가능한 어린 말로 보내라는 것이었다.

너무 어리거나 늙은 말은 필요 없었다.

지금의 고려는 당장 그 말들을 전장에 보내기보다 번식에 집중해야 했다.

말도 사람과 비슷했다.

번식 가능한 적당한 나이가 있다.

품종에 따라서 24개월에서 48개월까지 키운 뒤에 번식을 시도하게 된다.

이제 막 태어난 말은 몇 년은 키워야 하는 데 소모되는 먹이값이 만만치 않다.

그리고 암말의 비중이 높아야 했다.

여기 와서 알게 된 사실인데 보통 교배하는데 마흔 마리 정도의 암말 무리에 수말은 고작 한 마리를 넣는다고 한다.

수말이 꽤 부담되긴 하겠지만, 그쪽이 수태율이 높다고 했다. 이정근은 당연히 나의 조건을 받아들였다.

“하오면 대식국의 말을 위주로 보내면 되옵니까?”

그 부분에서 살짝 고민이 됐다.

내가 내린 선택은 결국 반반이었다.

고민 될때는 그게 가장 쉬운 선택이었다.

품종의 비율은 나중에 바꿀 수도 있고 지금은 조금이라도 다양한 품종을 가지고 개량을 시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걸로 이야기가 끝나진 않았다.

이왕에 탄야를 밀어주는 김에 사람도 조금 보내주기로 했다.

“과인이 술탄을 위해 화통방사군의 군관 몇 명을 추가로 보내줄 테니 귀하게 여겨달라고 전해주시오.”

이번에 추가된 전투 교리가 있었다.

쌍성총관부 등을 공략하며 얻은 경험이 적용된 덕분이었다. 마두라이 술탄국의 화포사용량이 상당히 많지만, 공성의 경험은 아직 전무하다고 들었다.

당하고만 있지 말라는 의미였다.

그쯤에서 나는 이정근과의 만남을 끝냈다. 그길로 곧장 태평전에 들어서자 백문보가 다가와서 살짝 우려를 표했다.

그는 이번 거래가 그리 달갑지 않은 것 같았다.

“종마를 얻는 것도 중요하오나 여분의 화포를 모두 내주는 것은 조금 과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옵니다.”

“설마 내가 그걸 손해를 보면서 내줬다고 생각하시오?”

“그게 아니옵니까?”

나는 크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번 거래는 고려 입장에서 손해라 볼 수 없었다. 오히려 최근에 고민 중이던 문제가 단번에 해결되었다.

새롭게 만들어진 신형 화포 때문이다.

얼마 전에 최무선의 연구를 이어받아서 화포를 개량하던 공학 박사들이 야장(冶匠)들과 함께 <총통 4호>를 개발하는 데 성공하였다. 구경은 기존에 주력으로 사용하던 총통 2호와 똑같으나 내구성과 명중률을 상당히 개선한 것이다.

문제는 그걸 만들기가 애매했다.

이미 총통 2호의 생산량이 너무 많은 탓에 추가로 만드는 것은 쉽지 않았다.

더 많은 성에 화포를 설치하면 좋겠으나 아직 그 정도의 여력은 없었다. 그런데 마침 재고 처리의 기회가 온 것이었다.

기존의 화포는 마두라이로 보낸 뒤.

우리는 신형 화포를 만들 생각이다.

훗날 미국이 동맹국에 무기를 팔아치우던 수법을 떠올린 덕분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백문보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애써 감췄다.

“이 상황을 그렇게 이용하시다니··· 소신은 상상도 못 했사옵니다.”

“뭐든 궁하면 통하기 마련이오.”

마두라이에게도 손해는 아니었다.

새로운 화포를 대량으로 생산하길 기다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기존보다 생산 과정이 더 복잡하여 꽤 오래 걸릴 것이다.

차라리 만들어 놓은 화포를 조금이라도 더 많이 가져가는 걸 선호하지 않을까.

한동안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있자 신소봉이 다가와 시간이 됐음을 알려줬다.

“과인은 이만 가봐야겠소.”

“마두라이에 보낼 물품에 대한 것은 소신이 잘 마무리 하겠사옵니다.”

“그렇게 해주시오.”

어차피 큰 틀은 정리되었다.

나머지 소소한 부분은 문하시중인 그에게 맡겨도 충분했다. 태평전에서 나온 나는 곧장 후원 북동쪽의 귀령각으로 향했다.

귀령각은 동지 부근에 있는 누각이다.

평소에 병사를 사열하거나 활을 쏘는 등의 시간을 보내는 곳인데 오늘은 그 때문에 가는 것은 아니었다.

귀령각에는 먼저 온 두 명이 있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보자고 미리 불러둔 이들이었다. 하지만 분위기가 어찌나 냉랭하던지 한파가 불어오는 것 같았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두 사람은 어용 상인 동오와 고려 최고의 상단을 이끌고 있다고 알려진 지경탁이었다.

지경탁은 나를 보자마자 곧장 누각에서 뛰어 내려와 엎드려서 인사를 올렸다.

누가 봐도 너무 과했는데 최근에 지은 죄가 있기에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잠시 두 사람을 살펴본 뒤에 누각에 앉아서 그들에게도 자리를 권했다.

“과인이 부른 이유를 알고 있으시오?”

내가 질문을 하자 두 사람은 고개를 푹 숙이며 그렇다고 대답을 했다. 서경에서 얼마 전에 불미스러운 일이 터졌다.

두 상단이 고려 최고의 상단 자리를 놓고 경쟁을 하던 중에 소속된 이들끼리 다툼이 생겨 큰 규모로 패싸움이 벌어졌다.

“두 상단주 모두 부끄러운 줄 아시오! 지금 그 일로 하옥된 이가 몇 명이나 되는지 알고나 있소?”

사람이 죽지 않아 다행일 정도였다.

처음에는 그냥 넘어가려 했으나 언제 또 이런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이다.

하루가 다르게 점점 더 과열되는 양상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주의를 주기 위해서 두 상단주를 부른 것이었다.

“앞으로 이런 일이 다시 생기면 상단 자체를 없애버릴 테니 그리 아시오.”

“명심하겠사옵니다.”

“과인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오.”

당연히 내 시선은 지경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저 인간이 소유한 상단을 통째로 삼켜버리고 싶었다.

이번에 벌어진 일도 따지고 보면 지경탁의 상단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뒤에서 몰래 장난을 치다가 동오의 상단 사람에게 딱 걸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당장은 그럴 수 없었다.

여기서 지경탁을 쳐내면 애써서 활성화 시켜 놓은 상업이 다시 주춤할 것이다.

아무리 인성이 엿 같아도 그의 영향력이 적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지경탁이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위치는 아니었다.

정당한 이유만 있다면 언제든 하루아침에 나락에 떨어뜨릴 수 있다.

“가볼 곳이 있으니 과인을 따라오시오.”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끝낸 후.

나는 귀령각에서 내려와 바로 옆의 동지루 방향으로 걸어갔다. 지경탁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쫓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기대도 되었다.

즉위한 후에 전하를 직접 볼 기회는 지금까지 한 차례도 없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오기만을 기다린 그였다.

별 볼 일 없던 동오의 상단이 단숨에 자신을 위협할 정도의 자리까지 올라온 데는 왕실의 영향이 컸다.

어용 상인이 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지경탁은 혹시나 자신에게도 그런 기회가 오지 않을까 기대했다.

아직 그는 희망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잠시 후에 나는 동지루에서 멈췄다.

그곳에 도달한 두 사람은 바닥이 달라졌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다른 곳과 달리 그곳은 지난밤에 내린 빗물로 웅덩이가 생기거나 그렇지 않았다.

진흙으로 가득해서 미끌거리는 이쪽과 달리 그 위에 회색빛의 뭔가가 덮여 있는 덕분이었다. 동오는 생각보다 빨리 그게 뭔지 알아차렸다.

“이것은··· 석회(石灰)이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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