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77
뮬나누르에 도달한 6만의 병사.
그들을 이끄는 부카 라야 장군은 술탄인 하리 하라의 형제 중의 한 명이다.
하지만 그의 능력을 의심하는 이들은 한 명도 없었다. 비자야나가르를 건국할 당시에 세운 공로가 적지 않았다.
하리 하라의 형제들은 목숨을 걸고 도왔고 그 덕분에 건국에 성공한 것이다.
그중에서도 용맹한 부카 라야는 대부분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라마의 화신이라 불릴 정도였다.
백성들은 언젠가 그가 모든 전쟁을 끝내고 태평성대를 열어줄 것이라 믿었다.
원래는 북부의 국경선 부근에서 바흐마니와 싸우고 있어야 할 그가 이곳까지 온 이유는 스승님 때문이었다.
비다야란야는 그의 스승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불안하다는 말에 그는 잠시 북부를 다른 장군에게 맡기고 와야 했다.
당연히 그의 형인 하리 하라도 허락을 해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뮬나누르에 주둔하고 있는 마두라이의 병사는 몇 명이나 된다고 하더냐?”
“만 명 정도는 된다고 파악했습니다.”
“생각보다 그리 많은 수는 아니구나.”
“대부분은 후방에 있는 단디굴에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정찰대를 맡고 있는 이가 대답을 하자 부카 라야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아무리 빨라도 구원군이 이곳까지 오려면 며칠 정도는 기본적으로 걸릴 것이다.
어떻게든 그 전에 성을 함락시켜야 했다.
더구나 북쪽이 계속 신경 쓰였다.
“아무래도 바흐마니가 마음에 걸리는구나. 하루라도 빨리 북부로 돌아가야 하니 당장 공격 준비를 하거라.”
병사들의 체력은 양호했다.
여기까지 오면서 어떤 저항도 없었다.
바닥을 드러낸 강은 그냥 넘을 수 있었고 초소는 퇴각을 한 건지 텅 비어 있었다.
기다리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상대방의 수준은 뻔했다.
최근 몇 년 동안 바흐마니와 싸우느라 바빴으나 이곳이 그리 낯설지는 않았다.
그 이전까지 두 나라는 계속해서 크고 작은 전투를 이어갔기 때문이다.
그의 명령이 떨어진 후부터.
비자야나가르의 병사들은 뮬나누르를 둘러싸고 공성에 들어갈 준비를 했다.
몇 대 안 되어도 공성무기까지 들고 왔는데 성벽 위에서 정휘는 그걸 지켜보며 서있었다.
“공성 병기가 너덧 개 정도는 되는 것 같고 화포로 보이는 것도 있구나.”
“화포부터 부숴버리는 것이 어떠합니까?”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느냐.”
부관의 말을 듣고 정휘는 고개를 저었다.
화포는 기본적으로 한 번에 몰아서 쏘라고 훈련도감에서 권장하고 있었다.
그러는 것이 상대편의 병사들에게 심리적인 타격을 더 많이 준다고 했다.
더구나 거리도 조금 애매했다.
정휘가 이곳을 맡은 후에 가장 먼저 한 것이 사정거리를 측정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재 화포 등이 놓인 자리는 아슬아슬하게 그 거리를 벗어나 있었다.
어차피 저들도 화포는 쏠 수 없다.
성벽 위에서 개량된 화약을 써도 겨우 닿을 거리이니 저들이 움직인 후에 쏴도 늦진 않을 것이다. 더구나 공성 무기의 정확도는 크게 기대할 수 없었다.
“그나저나 전투 코끼리를 꽤 많이도 가져왔구나.”
고려에서 마두라이로 온 이후.
정휘와 고려의 병사들은 생전 처음 보는 것들에 꽤 놀랐다. 심지어 과일마저도 고려의 것과 비교하면 완전히 달랐다.
기묘한 생김새와 맛은 호불호가 상당했는데 심지어 동물들도 낯설었다.
그중에서 가장 압권은 역시 코끼리였다.
산 중의 왕이라는 대호마저.
코끼리와 비교하면 강아지처럼 보였다.
무엇보다 생김새가 너무 기괴했는데 코로 보이는 신체를 손처럼 사용하는 것을 본 고려의 병사들은 괴력난신처럼 여겼다.
처음에 전투 코끼리를 봤을 때.
정휘도 상당히 큰 충격을 받았다.
기마병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파괴력이었다. 가죽도 두꺼워서 칼과 창이 제대로 박히지도 않았다.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아찔했다.
저런 덩치로 밀고 들어오면 방진 같은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아마 대부분 밟혀서 죽을 것이다.
“얼추··· 백 마리쯤 되려나?”
“그 정도는 되는 것 같습니다.”
“당장 상대해야 하는 것은 아니니 일단은 당면한 문제부터 해결하지.”
하지만 상대 못 할 것도 없었다.
코끼리가 비자야나가르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마두라이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미 이곳에서 삼 년 가까이 지낸 덕분에 그들은 이제 코끼리가 무섭지 않았다.
장점도 상당히 많았으나 예민하고 단점도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더구나 지금은 수성 중인 상태다.
성문을 열지만 않으면 코끼리가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무용지물이다.
아무리 맹렬한 기세로 달려와 거대한 몸집으로 부딪혀도 무너질 성벽은 아니었다. 그러는 사이에 홀치들은 성벽을 돌며 뮬나누르의 병사들을 다독였다.
모든 전투는 기세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겁먹지 마라. 지금껏 훈련했던 것이 헛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 성벽이라는 아주 든든한 아군이 있다.”
“길어 봐야 고작 이레만 버티면 된다. 충분히 지켜낼 수 있다.”
이기길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시간을 끌며 버티기만 해도 성공이다.
단디굴에서 병사가 오면 정면으로 붙어도 밀리진 않을 것이란 믿음이 있었다.
그쯤 되자 비자야나가르의 병사들도 싸울 준비를 거의 다 마쳤다고 알려왔다.
부카 라야는 곧장 진군을 명령했다.
“모두 돌격하라!”
6만 명의 병사가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내딛는 발걸음은 곧 파도가 되어 뮬나누르의 성벽을 향해 쇄도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으나 아직 마두라이의 병사들은 요동조차 안 했다.
심지어 성벽 위에 있던 대다수의 병사들이 내려갔는데 남은 이들은 수백 명에 불과했다. 그걸 본 비자야나가르의 병사들이 조롱할 정도였다.
“다들 보이느냐! 겁쟁이 마두라이 놈들이 싸우는 것조차 포기했나 보구나.”
“오래 끌 것도 없다. 곧장 성을 함락시켜라.”
날아오는 화살조차 없었다.
비자야나가르의 병사들을 아무런 방해도 없이 성벽 앞 오백 보까지 도달했다.
그때쯤 되자 뮬나누르 성벽 위에서 움직임이 보였다. 그들은 횃불을 들고 뭔가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청명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쿠우웅! 쿠웅!
수십 대의 화포가 동시 포격을 하자.
뮬나누르의 성벽이 흔들릴 정도였다.
만약 보강을 하지 않았다면 와르르 무너지는 게 아닌가 걱정됐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효과는 상당했다.
수십 개의 철환이 날아가는 순간.
포격하는 소리에 말들은 깜짝 놀라서 기수를 떨어뜨리고 이리저리 날뛰었다.
그나마 바닥에 박히듯이 떨어진 철환은 다행이었지만, 일부는 철환은 물수제비 뜨듯 튕겨 올라서 여러 병사를 덮쳤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포격 끝!”
“2차 포격은 조란탄으로 장전하라.”
“조란탄(鳥卵彈) 장전! 준비를 끝낸 화포부터 포격하라.”
철환의 파괴력은 상당했지만,
대인 전투에서 효과는 미미했다.
한 번의 포격으로 운이 좋아 봐야 몇 명 정도를 전투 불능으로 만들뿐이다.
하지만 산탄처럼 퍼지는 조란탄은 이런 전투에서 가공할 능력을 보여줬다.
포도알 크기의 납탄환.
그게 사방으로 퍼지는 순간에 달려오던 병사 수십 명이 쓰러졌다. 한 번 쏠 때마다 이백여 개의 납탄환이 날아갔다.
고려에서도 이걸 실전에서 쓴 것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기껏해야 주덕유가 해상에서 왜선에 쓴 것이 전부였다.
그것도 한두 문이 아니었다.
거의 수십 문의 화포에서 쏘아지자.
가장 앞장서서 달리던 병사 대다수가 쓰러졌다. 제대로 서 있는 이들을 찾는 것이 어려울 정도였다. 고통에 못 이겨 내는 비명은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였다.
하지만 비자야나가르의 병사들은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화포를 재장전하는 틈을 노려라!”
처음 화포를 겪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 대응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아무리 무서운 화포라고 하더라도 장전하는 시간이 생각보다 길었다.
더구나 화포의 특성상 성벽 위에서 바로 아래쪽으로 포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포신을 아래로 내릴 수는 없다.
장전한 철환이 흘러내리기 때문이었다.
그사이에 어떻게든 성벽을 기어 올라가면 자연스럽게 화포는 무력화된다.
그때부터는 살기 위해서 뛰었다.
하지만 성벽 위에 화포병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슈슈슉!
갑자기 화살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화포의 폭발을 대비해서 뒤로 물려놨던 수노기가 성벽 위로 올라온 것이었다.
연달아 쏟아지는 화살은 쇠뇌보다 위력은 강하지 않았으나 물량으로 승부를 봤다.
거의 수천 대의 화살이 쏟아졌다.
“쉬지 말고 쏘아라!”
“1번부터 10번 화포는 철환을 장전하고 적의 공성 무기와 화포를 노려라!”
“지원조는 수노기에 화살을 장전하거라.”
그때부터는 거의 학살에 가까웠다.
조란탄과 수노기의 조합은 대량 살상에 특화되어 있었다. 순식간에 뮬나누르의 성벽 아래는 시체가 가득 쌓였다.
전투를 시작한 지 한 식경도 되지 않아 잃은 병사가 만여 명에 달할 정도였다.
녹는다는 표현이 가장 정확했다.
아니쉬는 멍하니 그걸 지켜봤다.
도무지 지금 뭘 보고 있는 건지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수없이 훈련을 참관했으나 이 정도인 줄 몰랐다.
이인임이 기를 쓰고 염초를 긁어모아서 고려로 보내고 화포와 화약을 가져와야 한다고 주장했는지 알 것 같았다.
“부성주님, 저길 보십시오!”
병사 하나가 다급하게 외쳤다.
아니쉬가 고개 돌려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자 뜻밖의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비자야나가르의 본진에서 전투 코끼리가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코끼리는 소음에 민감하다.
그런데 화포가 계속 쏘아지고 있자 날뛰기 시작했는데 백 마리가 넘는 코끼리를 전혀 제어하지 못하고 있었다.
덕분에 적진의 지휘소마저 위태로울 정도였다.
어쩔 수 없이 부카 라야는 코끼리의 뒷목에 스파이크를 박아서 제거하라는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 상태로 더 두고 보다가는 오히려 성안에 있는 뮬나누르가 역습할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전개에 부카 라야는 부들부들 떨었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당한 경험은 한 번도 없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이냐!”
“장군! 지금이라도 병사를 물려야 합니다. 이대로 계속 돌진해봤자 개죽음입니다.”
“어쩔 수 없구나. 모두 퇴각하라.”
선택의 여지조차 없었다.
이대로 계속 밀어 넣었다가는 더 많은 희생만 할뿐이었다. 죽다가 살아났다는 표정으로 돌아오는 병사들을 보면서 부카 라야는 스승님의 말을 꼽씹었다.
확실히 그분의 말이 들어맞았다.
북부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는 사이.
마두라이 술탄의 역량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강해져 있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에 그 증거가 명백하게 있었다.
그렇다고 좌절하진 않았다.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했다.
“술탄께 이 사실을 알리고 인근의 병사들을 모두 이곳으로 불러들이거라.”
*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난 뒤.
뒤늦게 그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이인임이 자신의 아들인 이정근을 고려로 보내온 덕분이었다. 그는 현재 상황을 내게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비자야나가르 술탄국이 국경을 넘어 마두라이를 공격하기 시작하였사옵니다.”
“피해는 어느 정도더냐?”
“다행히 정휘 장군이 최전방에서 잘 버텨주고 계셔서 영토를 크게 잃지는 않았사옵니다.”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다.
마두라이 술탄은 상당히 중요했다.
그곳을 잃게 되면 염초의 수입이 아예 끊어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들어온 양이 있어서 당분간은 버틸 것이다.
하지만 그게 언제까지 갈까.
매년 훈련하는데 쓰는 양을 생각하면 생각보다 그리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든 마두라이를 지켜내는 것을 도와야 했다. 아마 이인임도 그걸 알기에 고려로 아들을 보냈을 거다.
“그래서 무엇이 필요한가?”
굳이 오래 끌 필요가 없었다.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자 이정근은 품에서 이인임이 쓴 서신을 꺼냈다.
신소봉이 받아서 내게 건네주었는데 거기에 쓰인 내용은 구구절절했다.
그걸 아주 간단하게 정리하면 화약과 화포가 대량으로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수성을 하며 워낙 많이 화포를 쏴서 내구도가 바닥났다. 부풀어 올라서 폐기해야 하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아직은 화포의 수가 어느 정도 남아서 당분간은 버티겠지만, 계속 공세가 이어진다면 결국에는 무너질 거라 했다.
그런데 그 숫자가 생각보다 많았다.
“흐음··· 이건 조금 과하지 않은가.”
일단 청동이 넉넉하지 않았다.
지금도 다른 나라에서 사들일 정도였다.
이인임이 원하는 수준으로 맞춰주려면 현재 북방에 보급된 화포 중의 일부를 마두라이로 돌려야 할 정도였다.
그게 말이 쉽지 고려의 입장에서 보면 상당히 많은 것을 양보해줘야 했다.
내가 잠시 난감한 기색을 보이자 이정근은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전하께서 허락해주신다면 앞으로 마두라이 술탄국은 대식국의 말을 바치겠사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