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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76화 (76/202)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76

아마라바티 강 부근의 뮬나누르.

그곳은 마두라이 술탄의 최전방이다.

강을 경계로 그 너머에는 힌두교를 믿는 이단자들이 나라를 세워서 살고 있었다.

그런 탓에 병사들은 언제 전쟁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비자야나가르 왕국은 마두라이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고 그걸 모르는 뮬나누르의 병사는 한 명도 없었다.

그나마 요즘은 조금 뜸했으나 수년 동안 뮬나누르는 계속 공격을 받았다.

하지만 다행인 점도 있었다.

지금까지는 본격적인 전쟁이 없었다.

대부분은 강을 넘어와서 한 차례 난동을 부린 뒤에 다시 그들의 땅으로 돌아갔다.

바흐마니와 한참 곡창지대를 놓고 싸우고 있기에 여력이 없는 탓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방심하지 않았다.

최근에 그들에게 내려온 명령 때문이다.

재상의 이름으로 온 것인데 정찰과 경비를 소홀하게 하는 이는 군법으로 엄히 다스리겠다는 내용이었다.

“재상님이 너무 예민하신 거 아닌가.”

“그래도 혹시 모르니 눈을 부릅뜨고 경계를 잘해. 지난달에 경계 중에 졸다가 목이 잘린 녀석들 잊지 않았겠지?”

“그래도 재상님 덕분에 우리 마두라이가 이렇게 발전할 수 있었잖아.”

그건 다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마두라이 출신도 아니고 귀족도 아닌 고려인이 재상이 되었다고 할 때만 하더라도 그를 곱게 보는 이는 없었다.

더구나 종교도 이슬람이 아닌 불교였기에 알게 모르게 무시도 많이 당했다.

하지만 그는 이전의 재상과 달랐다.

능력도 있었고 포부도 컸다.

마두라이를 대륙 최고의 나라로 만들겠다는 말을 공공연하게 하고 다녔기에 다들 허언증이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런 편견은 오래가지 않았다.

새롭게 술탄 자리에 오른 탄야와 함께 마두라이를 이끌자 모든 것이 바뀌었다.

비리와 부패를 혐오하며 개혁을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일을 진행했기 때문이다.

때로는 너무 과감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개혁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그중의 가장 압권은 화포였다.

뮬나누르 성벽 위에 놓인 화포.

고려에서 가져온 그것들은 스무 보마다 하나씩 배치되어 있었다. 모두 합치면 대략 백 문 정도는 될 정도였다.

뮬나누르 병사들은 재상의 고향인 고려에서 가져왔다는 화포를 처음으로 보았을 때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기존에도 화포가 있었지만,

성능에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일단 고려에서 온 화약부터 품질이 달랐다. 처음에는 흙을 파서 끓이라는 말에 다들 의아했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땅을 파니 돈이 나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다들 놀지 말고 어서 덮개를 걷고 화포나 닦아. 녹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그래?”

화포장 하나가 성벽 위로 올라오며 지시를 내리자 다들 도구를 꺼냈다.

그들은 정성껏 솔질을 하기 시작했다.

화포 관리는 무척 중요한 업무였기에 누구도 그에 대해 불평하진 않았다.

“맨날 닦기만 하고 언제 쏴본다냐.”

“차라리 놈들이 떼거리로 몰려오면 이걸 쏴볼 수 있을 텐데 아쉽네.”

“화포 한 번 쏠 때마다 수명도 줄어드는 기분인데 겁이 너무 없는 거 아닙니까?”

“창과 칼에 찔려 죽으나 화포가 터져서 죽으나 마찬가지잖아. 앞으로 떠밀려서 고기 방패를 하는 것보단 이게 좋아.”

“천직이시네. 하하!”

화포병들이 각자 맡은 일을 할 무렵.

한 무리의 군관과 장수 한 명이 성문 위로 올라섰다. 그들은 고려에서 보낸 홀치와 뮬나누르의 방어를 총책임지는 정휘였다.

지금쯤 고려에 있어야 할 그는 여전히 마두라이에 남아 있었다.

“전하께서도 만류하셨다던데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시겠다고 이렇게 먼 곳으로 자진해서 다시 오신 겁니까?”

“삼 년 가까이 집에도 안 가고 있는 너희가 할 소리는 아니다. 나는 그래도 잠시 가족이라도 보고 오지 않았느냐.”

“그래서 다음 배편에 가족도 데리고 올까 고민 중입니다.”

벌써 이곳에 온 지 삼 년이 넘었다.

대부분의 홀치는 한 차례 교대되기는 했지만, 정휘의 직속 부관들은 계속 마두라이에 머물며 일을 보고 있었다.

그들이 하는 일은 생각보다 많았다.

백여 명의 홀치는 마두라이의 정병 양성부터 시작해서 술탄의 개인 보호와 국경을 지키는 일도 가리지 않았다.

당연히 백 명으로 가능한 일은 아니다.

이곳에서는 다들 지휘관 계급이나 감투 하나쯤은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그 탓에 고려로 복귀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정휘도 그걸 알기에 고려로 돌아가는 것을 강요하진 않았다.

“그것도 나쁘지는 않지. 하지만 재상님의 가족들을 보면 느껴지는 것이 없나?”

“하긴··· 적응하기가 쉽지는 않죠.”

“이놈의 나라는 겨울도 없고 일 년 내내 덥기만 하답니까. 삼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적응하기 쉽지 않습니다.”

물과 공기 그리고 음식까지.

모든 것이 너무 다른 먼 타향이다.

거기에 말도 안 통하니 이인임과 그의 형제들의 가족은 꽤 힘들어했다.

그래도 요즘 그들의 위세는 대단했다.

고려인으로 재상 자리에 오른 이인임부터 시작해서 두 형제 모두 고위직에 올랐다.

의술에 뛰어난 이인달은 현재 마두라이의 수도에서 명의로 소문났고 이인미는 궁궐의 수비를 총괄하는 자리에 앉았다.

그로 인해 시기하는 이들도 많았으나 술탄이 된 탄야는 그들을 신뢰했다.

고려와 마두라이 술탄국.

두 나라의 관계는 꽤 끈끈했다.

실제로 전하와 술탄 탄야는 형과 아우라 서로 칭하며 서신을 주고받을 정도였다.

최근에는 상인들마저 고려를 형제의 나라라고 부르며 교류가 상당히 잦았다.

덕분에 고려풍이란 말도 나왔다.

고려에서 가져온 물건은 마두라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귀족들은 집안에 고려 도자기 하나쯤 가지고 있어야 자신의 품위가 높아진다고 여기고 있을 정도였다. 거기에 연필과 고려지 같은 것도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

교역하기에는 상당히 먼 길이었으나 주덕유 덕분에 바닷길이 어느 정도 안정됐다.

정휘가 고려를 잠시 다녀왔을 때 듣게 된 주덕유의 명성은 상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그는 요즘 백성들 사이에서 남해의 수호신이라 불릴 정도로 왜구와 그들의 본거지를 박살 내고 다녔다.

그 이야기를 꺼내자 다들 웃었다.

“우리 덕유가 출세했네요.”

“그러게 말이야. 처음에 우리랑 훈련할 때 눈물 콧물 질질 짜더니 말이야.”

“격세지감이 느껴집니다.”

“벼락출세라는 게 이런 것이었군요.”

이 자리에 있는 대부분이 주덕유가 고려에 왔던 즉위 초창기의 홀치였다.

당연히 당시를 선명하게 기억했다.

그 무렵의 주덕유는 기초조차 없는 상태였기에 칼을 제대로 잡는 법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을 알려줘야 했다.

“이 사람들이! 엄연히 전하의 명으로 이제는 장군의 직위에 올랐는데 아직도 옛날처럼 대하면 어찌하나?”

갑자기 정휘가 정색을 하자.

다들 입을 다물었는데 그걸 본 정휘는 크게 웃으며 배를 부여잡았다.

“하하. 농담일세.”

“도대체 어느 시점에 웃어야 합니까?”

“하여간 우리 대장은 다 좋은데 가끔 분위기 싸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으셔.”

“흐음! 이제 슬슬 들어가지.”

나름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성벽에서 내려가려던 그들은 멀리서 말을 타고 달려오는 정찰병을 보고 멈춰 섰다.

필사적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확실히 뭔가 느낌이 심상치 않았다.

더구나 멀리서 두 줄기의 연기까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전방의 초소에서 봉화를 올린 것이었다.

“봉화 줄기가 두 개면 대규모의 적이 아마라바티 강을 건너고 있다는 것이 아닙니까?”

“일단은 정찰병의 이야기부터 들어야겠지. 자네들은 어서 가서 병사들부터 모으게.”

“제기랄! 어쩐지 한동안 잠잠하다 했습니다.”

부관들은 서둘러 성벽을 내려갔다.

그와 동시에 뮬나누르의 곳곳에서 비상 상황을 알리는 종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당연히 그 소리를 듣자 곳곳에서 병사들이 뛰어나와 정해진 곳에 모였다.

우왕좌왕하는 이들은 없었다.

계속되는 훈련과 실전 경험 덕분이었다.

고려의 군관들이 2년 가까이 죽도록 굴리며 쌓인 실력도 상당해서 마두라이 술탄에서 가장 강하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더구나 이곳은 난공불락의 요새다.

세 겹의 성벽을 가지고 있기에 쉽게 무너질 거라 생각되지 않았다.

순식간에 병사들이 자리에 배치되는 와중에 정찰병이 성문 앞에 도달했다.

그가 타고 있는 말은 지쳐 보였다.

얼마나 빨리 달려왔는지 거친 숨을 뿜으며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말에서 뛰어내린 정찰병은 곧장 뮬나누르를 책임지고 있는 정휘에게 다가섰다.

국경 부근에 배치한 정찰조의 대장인 고려인이라 통역은 필요 없었다.

“비자야나가르의 병사들이 아마라바티 강을 건너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휘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이미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최근 국경 너머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고 이인임도 얼마 전에 경고를 했다.

현재 그는 형인 이인복과 마찬가지로 정보 조직을 꾸려서 활용하는 중이었다.

“어느 정도 규모더냐?”

많아야 수천 명 정도라 생각됐다.

지금까지 비자야나가르는 천 명이 넘어가는 병사를 보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래도 꽤 넉넉하게 잡은 것이었다.

하지만 정휘의 예상과 너무 달랐다.

“적어도 5만 명이 넘어가는 것 같습니다. 행렬의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라 그 이상이 될 가능성도 큽니다.”

“제대로 본 것이 맞느냐?”

옆에 있던 아니쉬가 재차 물었다.

그는 뮬나누르의 이인자였는데 현지 병사들의 관리를 주로 맡고 있었다.

고려인 틈에서 보낸 세월이 길어서 고려말도 꽤 능숙한 탓에 5만 명이란 단어는 통역 없이도 알아들었다.

“몇 번이나 확인했습니다. 확실합니다.”

전령은 확신에 찬 얼굴로 답했다.

생각했던 것 이상이기에 다들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 무렵은 건기라 아마라바티 강이 바짝 말라 있다는 것이다.

거길 넘어서는 것은 너무 쉬운 일이다.

더구나 뮬나누르가 보유한 병사는 모두 합쳐도 1만 명을 넘기지 못했다.

이곳은 전초기지와 같은 곳이었다.

실제로 가장 많은 병사가 운집해 있는 곳은 140리(55km) 떨어진 단디굴이다.

그곳에는 홍귀와 교관으로 임명된 홀치에게 훈련 받고 있는 5만 명에 달하는 병사들이 있다. 아니쉬는 그들을 당장 불러와야 한다고 조언을 했다.

“단디굴에 어서 지원 요청을 하시지요.”

당연히 지원 요청은 보내겠지만,

그들이 제때 올 거라 생각되진 않았다.

전령이 가는 시간과 출전 준비를 하고 여기까지 오려면 나흘 이상은 걸린다.

실제로 훈련할 때도 그 정도 걸렸다.

일단은 이곳에 있는 병사로 어떻게든 버티며 시간을 벌어야 했다.

“지금 당장 전령을 보내도 아무리 빨라야 사나흘은 지나야 올 것이오.”

“그럼 어찌합니까?”

“그때까지 버티는 수밖에 더 있겠소?”

정휘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답했다.

다른 곳은 모르겠는데 이곳은 고려에서 들여온 화포의 3할 이상이 배치되어 있다.

거기에 화약도 충분하다 못해서 넘칠 정도로 있었다. 다만, 조금 아쉬운 것이 있다면 병력이 살짝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당장 가서 화약고에 경비를 두 배로 늘리거라. 그리고 성벽에 배치된 화포병에게 화약을 나눠주거라.”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혹시 모를 공작을 대비해서 화약고를 지키는 것이었다.

만약 거기가 터진다면 방어고 뭐고 할 것 없이 뮬나누르가 통째로 박살 날 것이다.

부관들도 그걸 알기에 곧장 움직였다.

하지만 누구도 불안해하거나 그렇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즐거워했다. 아니쉬는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싸우지 못해서 안달이 난 사람들 같으니.”

그가 정확하게 보기는 했다.

홀치는 전공에 무척 목말라 했다.

같이 훈련을 받았던 이들은 쌍성총관부와 왜구를 토벌하며 많은 공을 세웠다.

심지어 대부분의 동기가 수십 명의 부하를 이끄는 자리에 올라갔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자.

멀리서 흙먼지가 일어났다.

잠시 후에 흙먼지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비자야나가르의 병사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수없이 많았다.

전령이 제대로 보긴 했다.

후속대가 없다고 하더라도 지금 보이는 수만 5만 명은 충분히 넘어설 정도였다.

정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오히려 크게 웃었다.

지금은 병사들을 위해서라도 대범해 보일 필요가 있었다.

“하하! 드디어 우리도 활약할 기회가 왔다. 모두 전투를 준비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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