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75
성과는 확실히 있었다.
경마장은 순식간에 명물이 됐다.
워낙 많은 이들이 몰려서 너무 혼잡해질 정도였다. 일반 양인들은 돈을 걸 수는 없으나 오락처럼 느끼고 있었다.
한판의 승부가 길어야 몇 분이다.
결승선을 통과하는 장면을 볼 때마다 느껴지는 희열은 상당한 것이었다.
바둑이나 격구처럼 오랜 시간 겨뤄야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거기서 얻는 수익도 적지 않았다.
개장일에는 시범 경기 삼아서 다섯 개의 경기가 진행되었으나, 만오천 저(楮)가 그날 하루에 판돈으로 걸렸다.
계산해보면 경기당 백오십 명에 달하는 이가 저화 백 장씩 걸었다는 뜻이다.
그중의 2할이 운영비와 세금이다.
생각보다 적다고 할지 몰라도 고작 다섯 경기에 불과했던 것을 생각하면 대박이다.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했으니 시간이 지나면 훨씬 더 규모가 커질 것이다.
하지만 좋은 일만 있지는 않았다.
“오늘도 전하께 올라간 상소문이 산더미라던데 사형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정도전은 솔직히 이해가 안 갔다.
도대체 전하께서는 무슨 생각으로 도박판을 직접 구상하시고 만든 걸까.
세금 때문인 거는 알고 있으나 너무 무모했다. 그의 질문을 받은 정몽주는 웃으며 대답을 해줬다.
“우리가 어찌 전하의 심중을 알 수 있겠느냐. 항상 다른 이들보다 먼 곳을 바라보고 계신 분이시다.”
정도전은 피식 웃었다.
그의 말을 비웃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최근에 정몽주가 보여주고 있는 맹목적인 신뢰가 상상 이상이었다.
전하의 말이라면 돌덩이를 집어 들고 금이라 주장해도 믿을 기세였다.
부국강병과 부패 척결.
거기에 완전히 꽂힌 것 같았다.
혹자는 부원배를 몰아내며 공포 정치를 하고 있다고 말했지만, 자주적인 고려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었다.
괜히 고려의 기반을 닦았던 광종과 전하가 비교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나저나 사형은 국자감시를 준비하지 않으실 생각입니까?”
정몽주의 나이가 벌써 약관이다.
올해 스물이 된 그가 아직도 국자감에 입학할 수 있는 시험을 준비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꽤 이례적인 일이었다.
“국자감이 예전만 못하다는 것은 너도 알고 있지 않느냐.”
“그래도 과거 시험을 보려면 거기만 한 곳이 없지 않습니까. 대부분의 장원 급제도 국자감 출신인 이유를 모르십니까?”
지금까지 과거 시험의 결과를 볼 때 국자감은 유독 합격률이 높았다.
애초에 그곳에 들어가는 것조차 쉽지 않았고 최고의 스승 밑에서 배운다.
거기에 대를 이어서 내려오는 기출 문제의 존재도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정몽주는 그걸 포기할 생각인 것 같았다.
“하루가 다르게 세상이 바뀌고 있다. 전하께서도 과거 시험을 바꿀 거라 공공연하게 예고하시고 계시지 않느냐.”
성리학만 죽어라 익히는 동무들.
그들을 보면 정몽주는 조금 안타까웠다.
지금까지 수년 동안 독서당에서 수많은 종류의 서적을 읽고 전하의 가르침을 직접 받은 그는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있었다.
효자가 되고 충신이 되는 것도 중요하나 그 정도의 개인 수양은 기본일 뿐이다.
“그래서 앞으로 관직에 나서지 않으실 생각입니까?”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에휴, 그게 그 말이지 뭡니까.”
두 사람은 티격태격하면서,
궁궐에 있는 독서당을 향하고 있었다.
그들의 뒤로는 십여 명이 뒤따랐다.
가진의 공방에서 정몽주와 함께 새로운 학문을 연구하고 토론하던 이들이었다.
그들은 요즘 개경에서 꽤 유명했다.
독서 모임 <진방회(眞訪會)>
진리를 탐구한다는 뜻이었다.
전하의 총애를 받고 있기도 했지만,
거기에 속해있는 이들이 심상치 않았다.
염제신의 장남인 염국보와 훗날 덕린체로 유명해지는 신덕린 그리고 홍언박의 아들인 홍사우도 그 모임에 속해 있었다.
십 대 중반부터 이십 대 중반까지.
고려에서 신동 소리를 들었던 이들도 상당수가 진방회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들이 하는 일은 생각보다 많았다.
오전에는 성리학 공부를 하고 오후에는 독서당 등에서 지식을 섭렵하며 최근 문제가 되는 일에 대한 토론도 했다.
무리 지어 궁궐로 향하는 그들을 보자 사람들은 뒷모습을 바라보며 수군거렸다.
“저들이 그 유명한 진방회 사람들인가?”
“앞으로 고려를 이끌 이들이라 하던데 다들 엄청나게 똑똑하다더군.”
“변방을 지키시는 변안열 장군님도 그렇고 요즘 고려에 인재가 풍년입니다.”
“하늘이 고려를 도우시나 보오.”
당연히 그 소리는 그들에게도 들렸다.
하지만 우쭐대거나 콧대가 높아진 이들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어깨가 무겁다고 느끼는 이가 훨씬 더 많았다.
관심과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궁궐 앞에 도달한 그들은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궁문을 지키는 무관이 세운 탓이었다.
“오늘은 궁궐 출입을 하실 수 없소.”
정몽주는 꽤 당황했다.
이런 일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진방회가 독서당에 드나드는 것이 하루 이틀도 아니기에 궁문을 지키는 이들치고 그들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전하께서 특별히 내린 명령도 있기에 몸수색 외에 어떤 절차도 필요 없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정도전이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확실히 평소와 다른 분위기이긴 했다.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으나 얼굴에 긴장한 느낌이 가득했다. 하지만 납득이 될 만한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선 정도전은 정몽주를 바라보며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요?”
“글쎄다. 뭔가 이유가 있겠지. 커다란 변고가 있거나 그런 것 같지는 않구나.”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성균관 앞으로 가야지.”
그곳에도 도서관이 있었다.
하지만 아직 책이 많지는 않았다.
독서당에서 필사된 책을 보관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손으로 옮겨 적는 일은 생각보다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곳은 볼만한 책이 없습니다.”
“일단 가서 상황을 보고 안 될 것 같으면 그간 미룬 토론을 하면 되지 않느냐.”
홍사우가 나서서 말을 하자.
어쩔 수 없이 정도전은 돌아섰다.
그는 진방회에서 최연장자이며 정도전과 열 살 가까이 차이가 났다. 말만 사형이지 거의 친구처럼 지내는 정몽주와는 달랐다.
그래서인지 정도전은 홍사우에게는 쉽게 말대꾸를 하지 못했다.
그때 등 뒤가 소란스러웠다.
동시에 고개를 돌리니 백여 명이 넘는 긴 행렬이 궁궐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정몽주와 진방회 이들은 그들의 정체를 곧장 알아차렸다. 깃발과 병사들의 옷차림만 봐도 원나라의 사신이 분명했다.
그제야 정몽주는 이해가 됐다.
“저들 때문에 입궐을 막았던 것이구나.”
하지만 진짜 놀랄 일은 시작도 안 했다.
사신이 궁궐 앞에 도달하자 궁문이 열렸는데 그 안에는 홀치로 보이는 수백 명의 병사가 오와 열을 맞춰서 서 있었다.
두꺼운 솜옷을 입은 탓에 덩치도 평소보다 훨씬 커 보이는 효과가 있었다.
원나라의 사신 사데이칸.
그는 궁문 안을 보고 사색이 되었다.
압록강에 머물며 조서만 보냈다는 사실이 대도에 알려진 덕분에 호되게 질책을 받고 직접 개경까지 온 그였다.
평소에 고려의 왕이 효수를 즐겨한다는 소문을 들었기에 설마 자신의 목을 자르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이···이것들은 무엇이냐?”
왠지 들어가면 죽을 것 같았다.
병사들의 눈에 실린 살기가 상당했다.
맹수 떼에게 포위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덕분에 사데이칸은 궁문 앞에서 쉽게 움직이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이건 일종의 무력시위에 가까웠다.
그때 병사들이 옆으로 갈라졌다.
그곳에서 나온 것은 흑마에 올라타고 있는 나였는데 이번에 보여준 연출은 내가 생각해낸 것은 아니었다.
원래의 공민왕도 사데이칸을 맞을 때 병사를 가득 동원해서 기세를 잡았다.
그제야 사데이칸은 말에서 내린 뒤에 나에게 천천히 걸어서 다가왔다.
“황제 폐···”
“따라오시오. 자세한 이야기는 들어가서 합시다.”
사데이칸이 궁문 앞에서 황제의 조서를 꺼내려고 하자 서둘러 말을 돌렸다.
이런 자리에서 그딴 거를 받을 생각은 없었다. 사데이칸이 왜 그러는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다들 보는 앞에서 복종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았다.
‘그런 꼼수에 당할 수는 없지.’
워낙 창졸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입을 제대로 떼기도 전에 내가 등을 돌리니 사데이칸도 어쩔 수 없었다.
애초에 이런 일이 생길지도 모르기에 말을 타고 나온 것이기도 했다.
사데이칸은 정전으로 향하는 나를 재빨리 쫓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걸어오는 그가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했다.
허겁지겁 사신이 뒤따르는 것을 본 정도전은 크게 웃으며 통쾌해했다.
“그것참 꼴 좋구나!”
잠시 후, 정전에 들어서자.
그제야 사데이칸은 꾹 누르며 참아왔던 분노를 터트렸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 사신 자격으로 각국을 다녔던 그였다.
하지만 이런 대접을 받는 것은 처음이었다. 원나라의 위세가 많이 죽었다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병사를 저리 동원한 것은 황제 폐하의 사신인 소신을 핍박하기 위함입니까?”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과인은 먼 길을 온 그대에게 예를 다한 것이오.”
“그리고 폐하의 조서를 가지고 온다고 미리 연통을 드렸는데 어찌 문무백관이 모여서 기다리지 않는 것입니까?”
정전에는 고작 몇 명 밖에 없었다.
당연히 문하시중인 백문보와 이인복 그리고 유숙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그런 사데이칸의 말을 무시하고 곧장 조서부터 읽어보라고 재촉했다.
뭐라고 적혀있을지 꽤 궁금했다.
그제야 사데이칸은 상자에서 황제가 보낸 조서를 조심스레 꺼내서 읽기 시작했다.
나름 근엄한 목소리를 내고 있으나 그 내용은 조금 우스웠다. 내용을 아주 간략하게 정리하면 이런 것이었다.
[특별히 관용을 베풀어 용서한다. 지금부터 근신하는 마음으로 동쪽 변방을 잘 지키도록 하라.]
물론, 그 이전에 꾸짖는 내용도 많았다.
하지만 그런 헛소리는 마음에 새겨놓을 필요가 없었다. 그보다 쌍성총관부에 대한 언급조차 없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동쪽 변방을 잘 지키라는 말도 의미심장했는데 그곳은 가져가고 더는 엉뚱한 짓을 하지 말라는 뜻인 것 같았다.
예상은 했기에 놀랍지는 않았다.
역사를 통해 이미 증명된 일이었고 황제도 상황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쯤에서 끝내자는 심정이 조서 곳곳에서 배어 나오고 있었다.
이걸로 쌍성총관부의 일은 마무리된 것으로 봐도 무방했다. 여기까지는 역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전개였다.
나는 그걸로 당분간 평화로운 시기가 올 것이라 믿었지만, 정작 생각지도 못한 다른 곳에서 일이 터졌다.
*
인도의 비자야나가르 제국.
아니 아직은 왕국에 불과한 그곳에는 하리 하라 1세라는 걸출한 인물이 있었다.
앞으로 300년 가까이 인도 남부를 지배하는 비자야나가르를 세운 인물이다.
그의 바람은 단 하나였다.
‘이 땅에서 힌두 문화를 지켜낸다.’
천축국의 이슬람화는 폭풍 같았다.
순식간에 대륙 전체에 퍼지고 있었다.
종교를 믿는 것을 탓할 생각은 없었다.
힌두교는 다양한 신이 있고 누굴 믿을 건지는 전적으로 본인의 선택이다.
문제는 거기부터 시작됐다.
이슬람은 그런 힌두교를 인정하지 못했고 수많은 힌두교도들이 투글라크 왕조에 의해 지속적인 탄압과 배척을 받았다.
심지어 강요에 의해 하리 하라도 잠시 이슬람으로 개종한 적이 있었다.
그런 그에게 토벌군이 맡겨졌다.
포로로 잡혀가 있는 동안에 델리 술탄의 신임을 얻은 덕분이었다. 하지만 하리 하라는 마두라이를 공격하진 않았다.
오히려 그 군대를 이끌고 비자야나가라에 일곱 겹의 성을 쌓아서 독립을 선언했다.
힌두교의 최후의 보루였다.
“스승님, 저를 찾으셨습니까?
하리 하라의 스승 비다야란야.
그는 세상을 보는 혜안을 가졌다.
지금은 비록 많이 노쇠했으나 그의 지혜는 여전히 총명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의 도움이 없었다면 비자야나가르를 세우는 것은 불가능했을 거라 여겼다.
왕이 된 후에도 하리 하라는 스승의 부름을 거절한 적이 없을 정도였다.
“술탄이시여, 마두라이를 눈여겨봐야 합니다.”
조금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현재 비자야나가르는 북부의 마라트와다 지역 등을 놓고 바흐마니 술탄의 군대와 치열하게 싸우는 중이다.
그곳은 비옥한 토지가 있어서 전략적 요충지로 평가를 받고 있는 곳이다.
그런데 갑자기 마두라이를 주목하라니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마두라이의 변화가 심상치 않아서 하는 말입니다. 이대로 십 년만 아무런 견제 없이 발전한다면 비자야나가르를 위협할 정도가 될 것입니다.”
하리 하라는 인내심을 갖고 들었다.
그제야 비다야란야의 말이 무슨 뜻을 가지고 있는 건지 알 것 같았다.
바흐마니 술탄을 신경 쓰느라 뒷전으로 밀려있던 마두라이 술탄국이었다.
그걸 경계하라는 의미였다.
“그러면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병사들을 보내 현재 그들의 방비가 어느 정도인지 먼저 살펴보시지요.”
“지금은 바흐마니를 막기 위해서 배치한 병사를 뒤로 물릴 수 없습니다.”
“그 정도까지는 필요 없습니다. 상대방의 수준을 확인하고 돌아올 정도면 됩니다.”
하리 하라는 그 이야기를 듣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안 그래도 마두라이의 이야기는 그의 귀에도 들려왔다.
고려라는 나라와 교역한 후부터 그들의 성장세는 멀리서 봐도 상당했다.
새롭게 화폐를 발행하고 위치상의 이점을 가지고 원나라 등의 동쪽 지역과 교역도 점차 왕성하게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 모든 일은 새로운 술탄이 이뤄낸 것이라 보기는 어려웠다. 아직 어린 그의 곁에는 고려에서 왔다는 재상이 있었다.
마두라이에 심어 놓은 이들이 보내는 보고에는 그 고려인 재상이 모든 일을 주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십여 년 뒤에 마두라이 술탄이 어디까지 발전할지 모른다는 우려에 그도 동감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에 하리 하라는 스승의 조언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잡초는 뿌리가 깊이 박히기 전에 미리 뽑는 것이 편했다.
“마두라이 술탄국을 공격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