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74
인간은 완벽하지 않다.
다들 하나쯤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게 어느 쪽으로 표출되느냐의 따라 달라질 뿐이다. 누군가는 명성을 좇기도 하고 원초적인 본능에 몰두하기도 한다.
그런 욕망 중에 도박도 포함되어 있다.
과연 도박의 역사는 언제부터일까.
기원전 1,600년의 고대 이집트에서도 도박이 있었다고 한다. 당연히 고려도 사행성 놀이가 없지는 않았다.
아직 조선 시대의 쌍륙이나 투전 같은 것이 생기지 않았을 뿐이었다.
“저포(윷놀이)나 바둑으로 내기를 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 편이기는 하지.”
“네? 무슨 말씀이신지요?”
“아무것도 아니다. 보던 거나 계속 보거라.”
내가 옆에서 혼잣말을 하자.
신소봉은 자신에게 말한 건 줄 알았다.
그게 아니라고 하자 그는 다시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는 격구에 흠뻑 빠졌다.
상황을 보니 1점 싸움이 될 것 같았다.
한쪽이 점수를 올리면 상대 쪽에서 곧장 뒤따라 붙으며 상당히 치열하게 전개됐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경기는 안중에 두지 않고 있었다. 이미 나는 머리속에 떠오른 것에 완전히 몰두해 있었다.
<술과 담배 그리고 사행산업>
세 가지는 일종의 치트키와 같았다.
거기에 석유까지 더하면 퍼펙트하다.
아쉽게도 그중에서 석유와 담배는 이 시대에 적용할 수 없었다. 그리고 술도 기업형이 아니라 가양주 수준이다.
집집이 돌면서 술을 만드는 이들에게 세금을 매길 수도 없는 일이다.
결국에는 사행산업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왜 나라에서는 복권과 경마 등을 관리하며 도박을 조장할까.
아마 대부분이 이해가 되지 않을 텐데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분명히 있었다.
어차피 도박은 박멸할 수 없다.
금주법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결국에는 밀주가 돌았듯이 도박도 밀어내면 낼수록 음지 속으로 기어들어 갈 것이다.
차라리 공식적으로 양지에 두고 관리하는 것이 여러모로 이득이 많았다.
당연히 그에 따른 부작용도 있겠지만, 어느 정도는 감수할 수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은 하나다.
이건 꼭 해야 하는 일이라 생각됐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어서 빨리 이걸 구체화하고 싶어서 참을 수 없었다.
내가 등을 돌려서 걷기 시작하자 신소봉은 다급하게 내 뒤를 따라왔다.
“어··· 조금 있으면 격구 경기가 끝나는데 지금 가실 건가요?”
“해야 할 일이 생겼다. 너는 그냥 여기 있어도 되니 나중에 보자꾸나.”
“설마 제가 그러겠습니까. 그런데 이쪽 방향은 궁궐 방향이지 않습니까.”
“환궁할 것이다.”
“그럼 공방은 안 가시는 겁니까?”
그 순간 아차 싶었지만,
이미 배고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가진이라면 양해를 해줄 거라 생각된 나는 곧장 궁궐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구상을 시작했다.
과연 어떤 것이 좋을까.
사행산업의 종류는 꽤 다양했다.
일단 복권 같은 것은 제외하기로 했다.
주택 첨약처럼 표를 팔고 추첨해서 새집을 주는 등의 방법도 있으나 위조를 시도하는 사기꾼이 분명 생길 것이다.
그렇다고 경륜을 할 수도 없었다.
자전거를 만드는 것은 엄두가 안 났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역시 경마밖에 없었다. 더구나 경마는 세금을 걷는 것 외에도 장점이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말의 품종 개량이었다.
경마는 말과 기수가 중요하다.
아마 눈치 빠른 마주들은 이게 돈이 될 거라는 사실을 금방 알아챌 것이다.
더 많은 돈을 버는 방법은 간단하다.
빠르고 혈통 좋은 말을 구하면 된다.
아마도 한동안 각국을 대표하는 명마를 사들이려고 상당히 바쁠 것이다.
“수라도 물리셔서 출출하실 텐데 과일이라도 드시면서 하시옵소서.”
그때 신소봉이 간식을 내왔다.
접시에 담긴 것은 꿀에 절인 과일이었다.
마침 당이 떨어져서 머리가 안 돌아가는 것 같았기에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절실한 것은 커피였으나 그런 거는 기대조차 할 수 없는 시대였다.
신소봉은 내가 또 뭔가를 놓고 골머리를 앓고 있는 것을 보고 슬쩍 다가왔다.
“그런데 아까부터 무얼 그렇게 고심하고 계십니까?”
“너도 이리 와서 앉거라.”
“소신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독장난명(獨掌難鳴)이라는 말이 있지 않느냐. 손이라도 보내거라.”
경마를 떠올린 것까지는 쉬웠다.
그런데 생각보다 큰 문제가 있었다.
그건 바로 내가 경마를 제대로 본 적이 지금까지 한 번도 없다는 것이었다.
애초에 그쪽에 관심이 없었던 탓이다.
단승과 복승 같은 단어는 들어봤는데 그 이상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결국에는 아예 새롭게 규칙 등을 만들어야 했다.
복잡한 것들은 그냥 다 지웠다.
오로지 1등만 모든 것을 가지는 승자 독식 형태로 규칙을 만들어야 했다.
거기에 조금 특별한 경기도 만들었다.
그건 바로 중장거리 경마 경기였는데 지구력이 좋은 말을 선별하기 위해서였다.
죽어라 달리는 스프린트.
그것은 돌진할 때 유용한 능력이다.
하지만 병사들이 타는 말은 그보다 조금 느리더라도 지구력이 좋아야 했다.
그래도 장거리 경주는 그 나름대로 온갖 전략이 나올 테니 노잼이란 소리는 나오지 않을 것이라 예상되었다.
“이게 성공하더라도 몰래 주최하는 이들이 나올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 이들은 저화의 위조를 한 이들과 동일하게 극형에 처할 것이다.”
“하루에 몇 경기를 하실 생각입니까?”
“여덟 마리씩 뛰는 거로 해서 열 경기 정도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신소봉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려면 여든 마리의 말이 필요했다.
처음부터 그 정도의 말을 구하긴 어려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더 늘리더라도 당분간은 조금 줄이자고 했다.
틀린 말은 아니기에 경기를 줄이고 기간도 열흘에 한 번으로 정했다.
“그런데 정말 저화를 거는 이들의 신분을 제한하실 겁니까?”
나는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걷을 수 있는 세금은 많이 줄겠지만, 경마장에서 돈을 거는 것은 귀족이나 관리 등으로 한정해 놓을 생각이다. 거기에 양인 계층은 상인 정도만 고려 중이었다.
돈 많은 이들이 몰래 쌓아 놓은 재물을 거둬들이는 것이 또 다른 목표였다.
계속해서 신소봉은 문제점을 짚어줬다.
생각보다 예리한 부분도 많았기에 상당히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 결정된 세금은 운영비까지 포함해서 2할로 정해졌다.
우승한 마주는 1할을 챙기게 될 것이다.
아직 확정된 내용은 아니다.
일단 시행해보고 불합리한 부분은 나중에 수정할 생각이었다. 신소봉이 도와준 덕분에 불과 하루 만에 내용이 정리됐다.
그렇게 나온 것이 훗날 국내 최초의 사행산업이자 세수 확보의 혁신이라 불리는 <경마장(競馬場)>이었다.
*
개경 동부의 개국사 부근.
장패문 너머에 있는 제법 넓은 토지에 경마장이 세워지기로 결정되었다.
솔직히 별다른 시설은 필요가 없었다.
넓은 공터에 두툼하게 모래를 까는 것으로 준비는 끝났다고 봐도 되었다.
거기에 말이 관객을 덮치지 않게 울타리를 세우고 시야 확보를 위한 관중석이 세워진 것이 전부였다.
홍보도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개경 곳곳에 방을 붙이고 이야기꾼인 조풍서 등이 매일 경마장을 홍보했다.
새롭게 만들어진다는 경마장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이들은 제법 많았다.
평소에도 내기라면 죽고 못 사는 이들이 꽤 많은 탓이었다.
그리고 달포가 지난 뒤.
정월을 맞은 기념으로 경마장이 개장됐다. 당연히 나도 가진과 함께 장패문 너머의 경마장을 찾았다.
생각보다 가진의 관심이 컸다.
평소 승마를 즐기는 이라 말을 타고 달리는 것만 봐도 즐거운 것 같아 보였다.
“그렇게 좋으시오?”
“원자를 가진 후부터 말을 제대로 탄 적이 없으니 그렇지요. 마지막으로 궁궐 밖으로 말을 타고 나간 것이 벌써 2년 전의 일입니다.”
“조만간 날이 풀리면 근처에 나들이라도 나갔다가 옵시다.”
내 제안을 들은 가진은 꽤 반겼다.
왕이 한 차례 행차할 때마다 꽤 번잡해서 최대한 자제하고 있었지만, 가까운 곳에 한 번 나갔다가 오는 것도 필요하긴 했다.
강제로 도로 정비를 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그때 경마장을 맡기로 한 이인민이 다가왔다.
계획부터 경마장의 준비까지.
빠르게 진행되었으나 정작 이곳의 운영을 맡길 이는 쉽게 찾아내지 못했다.
관직에 올라간 이들은 노름판을 관리한다는 것부터 대부분 꺼려했다.
나도 그건 그리 달갑지 않았다.
체면이나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이 일이 험한 꼴도 많이 볼 것이 분명하기에 강단이 있는 자가 필요했다.
그때 유일하게 자원하는 이가 이인복의 막내 동생인 이인민이었다.
‘그게 참 이상하단 말이지···’
나는 그가 관직에 오를지 알았다.
지금까지 수년 동안 연필을 생산하는 것을 맡아서 흠잡을 곳 없이 진행했다.
당연히 그 공이 적지 않기에 조만간 그가 원하는 자리를 주려고 했는데 덥석 경마장을 맡겠다고 먼저 나섰다.
지금까지 심부와 동오 등과 함께 일을 하더니 영향을 받은 것 같았다.
어쨌든 이인민이 지금까지 보여준 것이 있기에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그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런데 그의 뒤에 대여섯 살 정도 되는 꼬맹이 하나가 졸졸 따라다니고 있었다.
아들일 리는 없었고 저 정도 나이면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는 이인민에게 누구의 아이인지 물었다.
“저 아이는 설마?”
“생각하고 계시는 아이가 맞사옵니다.”
“벌써 이렇게 많이 크다니 놀랍소.”
“누구의 아이길래 그러십니까?”
가진은 궁금했는지 끼어들었다.
혹시 숨겨놓은 아들이 아니냐며 물었는데 농담과 진담이 반쯤 섞여 있었다.
등골이 살짝 시려울 정도였다.
괜한 오해는 받기 싫었기에 어쩔 수 없이 가진이 있는 쪽으로 몸을 살짝 기울였다.
그런 뒤에 소리를 낮춰서 아이의 정체를 말해주었다.
“조일신의 유일한 혈육이오.”
그제야 가진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가 어디 있는지는 말한 적은 없지만, 조일신의 아이를 거둬주었다는 것은 가진도 예전에 들어서 알고는 있었다.
어차피 이제는 기씨 일가가 몰살당했고 원나라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기에 숨어서 지낼 필요가 없어졌다. 하지만 조일신의 명예를 되찾아줄 생각은 없었다.
내가 그를 이용한 탓에 아들을 거둬준 것이지 조일신이 충신인 것은 아니었다.
그 무렵에 사람들이 가득 찼다.
나와 가진이 앉은 가장 높은 곳을 제외하면 빽빽하게 들어찰 정도였다.
관중석 아래에 돌로 괴어 놓지 않았다면 무너지는 게 아닐까 걱정했을 것이다.
그 반대편에 있는 평지에는 가족 단위로 나온 이들도 제법 많아 보였다.
그게 내가 바라던 바였다.
노름을 하는 이들은 따로 분리한 뒤.
나머지 공간은 가족끼리 나와서 공원처럼 사용되길 바랐다.
‘한반도 최초의 놀이 공원쯤 되려나.’
입구에는 벽란도의 명물이 된 수레 상점이 즐비하게 세워져 있었고 곳곳에서 연회자들이 각자 공연을 하는 중이었다.
그들은 본격적인 경기를 하기 전에 분위기를 고조시켜주는 역할도 했다.
얼추 정해진 시간이 되자 이인민은 경기를 시작하기 위해서 바쁘게 움직였다.
드디어 여덟 마리의 말이 출발선 위에 서자 얼마 지나지 않아 출발 신호가 울렸다.
부우웅!
그와 동시에 말들이 뛰어나갔다.
출발은 거의 비슷했는데 울타리가 세워진 곡선 구간을 돌자 네 마리가 선두에 섰다.
트랙의 거리는 한 바퀴에 천육백 보 정도였는데 당연히 시간이 흐를수록 체력이 부족해 밀려나는 말이 많았다.
“8번마. 뭐 하는 거야 힘껏 달려!”
“가즈아, 4번마 너는 할 수 있다.”
“아무래도 3번마는 꼴찌 확정인 것 같네.”
당연히 희비가 갈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목숨 걸고 발악하는 이는 없었다.
한 판에 걸 수 있는 저화는 백 장이니 쌀로 계산하면 겨우 한 말에 불과했다.
나름 살림살이가 괜찮은 이에게는 체면까지 구길 정도의 양은 아니었다.
그때 1번마가 뛰어나오기 시작했다.
계속 중위권에 있던 그 말은 순식간에 한 마리씩 뒤로 밀어내더니 결승선쯤에는 1위와 엎치락뒤치락하고 있었다.
그쯤 되자 사람들은 열광하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1번마가 첫 승리를 장식했다.
확실히 경마가 매력적이긴 했다.
첫 경기부터 대역전극이 나올 줄은 몰랐다. 결승선을 앞둔 마지막 순간이 되자 손에 땀이 가득할 정도였다.
열광적으로 응원하는 그들의 목소리와 눈빛을 보는 순간 나는 알아차렸다.
생각했던 것 이상의 반응이었다.
‘이건 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