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73
수도를 옮기는 일은 쉽지 않다.
단순하게 이사하는 개념이 아니다.
개경을 통째로 들어서 옮길 수 있는 거라면 고민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임금이 움직이는 순간부터 상당히 복잡한 일이 생기게 된다.
일단 궁궐부터 새로 지어야 한다.
덩달아 관리들도 보금자리를 옮겨야 하는데 그 비용이 만만치 않다.
사회적인 혼란까지 고려하면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은 일이었다.
아직 고려는 가야 할 길이 멀었다.
정상적인 국가의 모습을 찾아가기 위해서 뼈를 깎는 심정으로 구조 조정 중이다.
그나마 지금까지는 부패한 관리의 가산을 몰수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앞으로 불교까지 털면 더는 단숨에 많은 재물을 얻어올 만한 곳이 전혀 없었다.
마지막 저금통을 그렇게 쓸 수는 없다.
주덕유의 사략함대가 있기는 했지만,
복불복이 심해서 매번 성공할 거라 기대하는 것은 욕심에 가까웠다.
당연히 그가 하려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차피 내가 보우의 제안을 받더라도 도당에서 막아설 것이다.
‘물론, 좋은 점도 있기는 하지.’
천도의 장점도 분명 있었다.
일단 개경은 지형이 그리 좋지 않다.
개천이 많아 장마가 올 때마다 물난리를 겪는 일이 많고 개활지도 매우 부족하다.
성안에 있는 크고 작은 동산 때문에 뭔가 새롭게 지으려고 해도 꽤 골치 아팠다.
더 큰 문제는 개미굴 같은 집들이다.
너무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옆집의 지붕이 담 너머까지 오거나 아예 겹치듯 쌓여 있는 곳들도 제법 많았다.
가장 두려운 상황은 역시 불이었다.
만약에 개경에 불이 나면 순식간에 전체로 번져서 통째로 소실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었다.
반면에 수도를 옮길 경우.
처음부터 도시 계획을 세울 수 있다.
기술적인 부분이 부족해서 상하수도 같은 것은 바랄 수 없으나 더 합리적으로 관청과 시전 등을 배치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개경은 왜구의 침입에 취약했다.
지금은 잘 막아내고 있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지 모른다.
원래의 역사에서도 크게 당한 뒤에 왜구도 서서히 화포를 도입해 사용했다.
십 년이 지나고 또 백 년이 지나면 상황은 또 달라질 수 있다. 어쨌든 지금의 개경은 고쳐서라도 써야 하는 상황이었다.
더 서둘러야 할 곳은 따로 있었다.
북부의 개발부터 빨리 진행해야 했다.
북부는 언제나 소외되어서 항상 아픈 손가락 같은 느낌이 많이 들었다.
남부는 왜구가 자주 출몰하나 기후 덕분에 경작이 수월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반면에 북부는 여진과 거란 등에게 시달리는데 같은 양의 노동을 해도 성과가 남부에 비해서 그리 좋은 편은 아니다.
괜히 세금을 감면해주고 이동에 제한을 두는 것이 아니다. 그때 내가 기다리던 이가 왔다고 신소봉이 알려주었다.
“공부 상서가 전하를 알현하기 위해서 찾아왔사옵니다.”
공부 상서 황석부.
한때 혁파되어 사라졌던 공부를 맡고 있는 그는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불혹이 될 무렵까지 현장에서 수많은 건축물을 짓던 그가 관직에 올라 정3품의 상서까지 오르는데 우여곡절이 많았다.
공부(工部)는 장인이 소속된 공장과 토목 그리고 건축 등을 관리하는 곳이다.
당연히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했다.
전리사나 판도사와 달리 아무나 앉힐 수 있는 자리는 아니었다. 공부를 부활시키며 가장 걱정했던 부분이었다.
현장을 아는 이가 수장이어야 한다.
하지만 도당에 그런 이가 있을 리 없었다.
공부가 혁파된 지도 오래되었고 실질적인 업무는 아래에 있는 이들이 모두 도맡은 탓에 그쪽을 잘 아는 이가 없었다.
그러던 중에 황석부를 발굴해냈다.
“어서 오시오. 서경까지 다녀오느라 수고가 많으셨소. 그곳의 상황은 어떻소?”
황석부는 서경(평양)에 다녀와야 했다.
대형 공사가 진행될 터라 현장 답사 정도는 기본적으로 하고 시작해야 했다.
북부 개발의 중심지로 서경이 선정된 탓이었다. 일단 사람이 살 수 있을 정도는 만들어 놔야 했다.
처음에는 지리적인 위치를 보고 북방을 지키기 좋은 강계군을 염두에 뒀었다.
문제는 그곳이 아직 고려의 영토가 아니었고 설령 그곳이 가능하더라도 서경보다 개발비가 많이 들 것이다.
“하명하신 대로 서경을 살펴보았으나 손을 봐야 할 곳이 산더미 같았사옵니다.”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오.”
서경은 여러모로 운이 좋지 않았다.
지금은 거의 방치된 상태에 가까웠다.
그곳에서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과 조위총의 난 그리고 홍복원 등의 반란이 연달아 터졌으니 그럴 만 했다.
거기에 몽골의 침입도 있었다.
최탄이 서경과 인근의 성을 원나라에 바친 뒤에 한동안 동녕부(東寧府)가 되어 원나라의 지배를 받기도 했다.
그곳을 되돌려 받은 것이 65년 전이다.
“이것은 동행한 화원(畵員)이 그린 서경의 도면이옵니다. 성벽도 거의 허물어지기 직전이라 보수해야 합니다.”
“어느 정도면 가능하겠소?”
“보수를 하는데 얼마나 많은 인력이 동원되느냐에 따라 편차가 심하옵니다.”
나는 잠시 고민되었다.
현재 동원 가능한 이들이 몇 명이더라.
주덕유가 잡아 온 왜구는 대부분 광산에 투입되어 있기에 빼낼 수 없었다.
그곳에는 최근에 부원배를 처단하며 노비가 되어버린 이들도 꽤 많았다.
철광산은 쉬지 않고 돌려야 했다.
화살촉과 같은 것들은 썩는 것도 아니기에 미리 만들어 놔도 되는 것이다.
불교 개혁을 마치면 수천 명의 노비와 환속하는 승려들이 생기겠지만, 그걸 바라고 서두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쩔 수 없이 유민을 동원해야 했다.
10년 계약을 맺었던 이들은 영원진 구축에 동원됐었다. 이제 그곳도 얼추 마무리되어가고 있기는 했다.
아무래도 그들은 앞으로 전문적인 축성 기술자로 써야 할 것 같았다.
“영원진에서 축성을 하던 천여 명 정도의 유민은 서경으로 보내줄 수 있을 것 같소.”
“그들이라면 어느 정도 경험이 쌓였을 테니 안심이옵니다.”
“그 정도면 서경을 재건하는 데 어느 정도 걸릴 것 같소?”
황석부는 잠시 고민을 했다.
그러다가 2년이라는 대답을 했다.
다만, 거기에는 조건이 하나 있었다.
관청을 수리하는 것까지 포함된 것이고 민간 영역은 제외한 것이라고 했다.
어차피 사적인 재산까지 내가 신경을 쓸 필요는 없었기에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시전의 위치가 이곳이오?”
“그러하옵니다. 기존에 있던 민가 몇 채를 허물고 거리의 폭을 늘릴 예정이옵니다.”
“이주에 관련된 보상은 판도 총랑과 의논하여 적절하게 해주시오.”
북부 경제의 구심점.
그게 내가 바라는 서경이었다.
남부가 농경 위주의 개발을 한다면 북부는 광산 개발과 함께 수공업을 위주로 성장하는 것이 현재 가진 목표였다.
지금은 질 좋은 물건을 많이 만들 필요가 있었다.
“서경은 그렇다고 치고 조만간 진행될 예정이던 벽란도의 확장 계획은 어떻게 되었소?”
벽란도는 조금 더 넓어져야 했다.
최근 고려를 찾는 상인이 너무 많았다.
즉위한 후부터 계속 진행된 팔관회의 성과가 이제야 조금씩 나타나고 있었다.
올해는 개경에서 피바람이 불어서 조금 어수선한 상태였는데도 팔관회는 열렸다.
어떤 상황이 되더라도 계속 이어진다는 것을 알려줘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덕분에 이번 팔관회는 기존에 단골처럼 오는 왜국이나 마두라이 술탄국 외에도 다양한 곳에서 고려를 찾아주었다.
교지국(베트남)과 섬라곡국(태국).
그리고 대식국(이슬람)에서 상인이 왔다.
몇 년 사이에 그들 사이에서 고려의 물건을 팔아서 꽤 큰 이문을 얻었다는 상인의 소문이 퍼져나갔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그 당사자는 심부였다.
하지만 단순히 그 탓만은 아니다.
가장 큰 시장이었던 원나라가 분열되며 상인들은 요즘 꽤 난감한 상황이었다.
기존의 거래처가 거의 남아나지 않았다.
홍건적과 같은 반란군은 군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상단 같은 곳을 그냥 놔두지 않았다.
반면에 고려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벽란도는 완벽한 무역항에 가까웠다.
그곳에는 여러 나라 말에 익숙한 관리가 항시 대기 중이었고 자체적으로 엄격하게 관리를 하는 탓에 부정부패도 없었다.
정확하게 정해진 세금만 내면 얼마든 물건을 사고팔 수 있는 구조였다.
문제는 벽란도가 그 많은 물량을 감당하기 어려워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장거리 항해에 필수라 할 수 있는 바람 때문에 다들 비슷한 시기에 오고 있었다.
팔관회가 열릴 무렵에는 정말 미어터질 뻔했다는 말이 어울렸다.
“설계는 이미 끝냈고 날이 풀리면 곧장 공사에 들어갈 예정이옵니다.”
“폭풍우를 피해 정박할 곳은 어디로 정해졌소?”
“강화와 석모로도 사이에 백여 척이 정박할 수 있도록 마련하고 있사옵니다.”
왜 그쪽으로 잡은 지 알 것 같았다.
석모로도가 일종의 방파제 역할을 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다고 영향이 아예 없지는 않으나 태풍과 파도에 그대로 노출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렇게 한참이나 황석부와 이야기한 후에 그를 내보내자 신소봉이 다가왔다.
“낮 수라를 잡수실 시간입니다.”
“벌써 그렇게 되었느냐? 왕후와 함께 할 수 있게 준비하거라.”
“외람되오나 왕후마마께서는 오후에는 공방에 나갈 거라 하셨으니 궁궐 내에 안 계실 겁니다.”
“그러면 과인도 그쪽으로 가서 함께 식사하겠다고 전하거라.”
그런 뒤에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참을 떠들었더니 상당히 배가 출출했다. 그 길로 곧장 가진의 공방으로 항하고 있자 멀리서 함성이 들렸다.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살펴보니 격구장 쪽에서 나는 소리 같았다.
“오늘 시합이 있는 날이더냐?”
뒤를 따라 오던 홀치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는 고개를 숙이며 답을 했다.
“오늘은 이성계와 조인벽이 홀치들과 함께 격구 시합을 할 거라 들었사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꽤 흥미가 생겼다.
평소에 격구를 즐겨서 하거나 보는 편은 아니지만, 최근에 이성계와 조인벽의 격구 실력은 어느 정도 들은 바가 있었다.
워낙 백성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았기 때문에 모를 수 없었다.
이 시대는 격구의 위상이 드높았다.
고려 최고의 운동 경기라고 봐도 되었다.
개경에만 격구장이 두 곳이나 있었는데 사나흘에 한 번씩은 경기가 치러졌다.
그러나 말을 타고 하는 경기라 일반인이 접하는 것은 조금 무리였다.
일종의 귀족 스포츠에 가까웠다.
하지만 놀이라 치부하긴 어려웠다.
격구는 전투력 향상에 꽤 도움을 줬다.
경기를 뛰려면 기본적으로 말을 잘 다뤄야 하며 장시(杖匙)라 불리는 막대는 언월도를 휘두르는 것과 흡사했다.
그래서 군사들에게도 오락 겸 훈련 삼아서 오히려 권장하고 있었다.
‘기병도 언젠가는 양성 해야 하니···’
현재 고려군은 대부분 보병과 궁수 위주로 편성되어 있었다. 그나마 궁수는 활에 익숙하지 않아도 쇠뇌가 있었다.
하지만 기병만큼은 양성이 쉽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병종이 아니다.
이번에 쌍성총관부로 출정한 2만 5천 명의 병사 중에 기병은 고작 5백 명에 불과했다.
일단 비용적인 단점이 있었다.
기병 하나를 양성하고 유지하는 비용이면 적어도 보병 수십 명을 키울 수 있었다.
더구나 고려는 현재 말이 거의 없다.
있더라도 체구가 작은 과하마가 전부다.
원나라에서 지난 백 년 동안 가져간 말이 수십만 마리이기에 생긴 일이다.
“이놈의 일거리는 끊이지 않는구나. 하늘에서 재물이 산더미처럼 쏟아져 내리면 얼마나 좋을까.”
아무리 일을 해도 끝이 안 보였다.
하지만 당장 어떻게 할 방법은 없었다.
조만간 북부의 여진과 교역로를 뚫고 그들과 거래해서 호마를 들여와야 했다.
제대로 된 기병은 그 이후부터 다시 고민을 해보기로 하고 격구장으로 향했다.
격구장의 열기는 생각 이상으로 뜨거웠다.
“우와아! 동북면 애송이 너만 믿는다.”
“기마술이 저렇게 뛰어난 이는 처음 보는 것 같네. 저게 어떻게 가능한 거야?”
“태어난 후부터 말만 타고 다녔나 보지.”
잠시 경기를 지켜본 결과.
그들이 환호하는 이유를 알아냈다.
보통의 격구 경기와는 완전히 달랐다.
조인벽과 그의 형제들은 이성계와 가별초를 상대로 치열하게 경기를 하고 있었다. 양쪽 모두 말 타는 기술은 신묘했다.
특히, 이성계가 대박이었다.
그는 신이라 불리는 축구 선수를 보는 것 같았는데 저절로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활 솜씨만큼 격구에 능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정말 두 눈으로 봐도 믿기지 않을 정도의 활약을 하고 있었다.
“자자! 아직 돈을 안 거셨다면 늦지 않았으니 어서 오십시오.”
“나는 붉은 두건을 하고 있는 쪽에 저화 열 장을 걸겠네.”
“좋은 선택이십니다. 그럼 좋은 결과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그때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한 남자가 보였다. 격구 경기를 구경하는 이들이 저화를 걸고 내기를 하고 있었다.
암암리에 퍼져있는 도박이었다.
하지만 그리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
가볍게 저화 몇 장을 거는 정도에 불과했기에 순군만호부에서도 그냥 유흥거리 정도로 여겨서 묵인해줬다.
그 순간 좋은 생각이 났다.
“그래! 그게 있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