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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72화 (72/202)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72

개경의 경룡사(敬龍寺).

그곳은 요즘 상당히 북적거렸다.

최근에 개경에서 가장 인기가 좋은 복령사 못지않을 정도의 수준이었다.

복령사보다 더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것은 아니다. 단지 경룡사에 머물고 있는 한 분의 스님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태고 보우.

그가 머무는 곳이기 때문이다.

보우 대사의 명성은 고려뿐만 아니라 원나라 황실에도 알려져 있을 정도였다.

호주(湖州) 천호암(天湖庵)에서 법을 인정받은 덕분이다. 심지어 황제에게 금란 가사를 하사받기도 했다.

원래는 중흥사에 머물던 그가 최근에 개경에 있는 이유는 임금님 덕분이었다.

정확하게는 왕후마마의 영향이 컸다.

원자 아기씨를 본 이후부터 불심이 상당히 깊어졌다는 것은 유명했다.

그래서 현재 보우 대사는 경룡사에 머물며 종종 궁궐에 들어가서 한 차례씩 설법을 펼치고 있었다.

“아이참, 큰스님도 쉬어야 하니 여기 있지 말고 다들 그만 돌아가세요.”

이제 겨우 열 살쯤 됐을까.

귀엽게 생긴 동자승이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보우의 거처 앞에서 소리쳤다.

그의 앞에는 보우의 불경 외우는 소리라도 들어보려고 몰려든 개경의 백성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문제는 이게 매일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다른 스님들이 불경을 공부하는 데 방해를 받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만큼은 두고 보지 않겠다며 동자승이 크게 마음먹고 나섰다.

하지만 그 모습이 꽤 귀여웠기에 사람들은 그를 보며 다들 웃고 있었다.

“꼬마 스님이 되게 당차네.”

“누굴 보고 꼬마라는 거예요?”

“가서 엄마 젖이나 더 먹고 와라.”

그 말을 들은 동자승은 그 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며 노려보았다. 그 이야기를 꺼낸 이도 아차 싶었는지 슬쩍 물러났다.

어린 나이에 사찰에 몸을 담고 있는 동자승이 어떤 처지인지는 뻔했다.

대부분 고아거나 먹고살기 어렵다는 이유로 사찰에 버려지는 일이 허다했다.

이 무렵의 사찰은 하는 일이 많았다.

버려진 아이들을 거둬서 키워주는 일부터 시작해서 나그네의 숙소이기도 했다.

거기에 돌림병이 나돌면 의술을 익힌 의승(醫僧)이 백성을 살폈고 외침이 있을 때는 승병(僧兵)이 되어 무기를 들었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시장을 형성해서 장사를 하고,

물건을 만들어서 판매까지 한다.

심지어 돈을 빌려주고 이자도 받았다.

사찰이 있는 곳의 주변에는 도적도 뜸한 편인데 이 정도면 나라에서 해줘야 할 거의 모든 것을 해주고 있었다.

“다들 미워욧!”

결국에는 동자승이 돌아섰다.

소매로 눈가를 훔치며 뛰어가는 게 우는 것 같았기에 다들 동정을 담아 바라봤다.

하지만 정작 법당 안에서 가부좌를 틀고 염주를 만지작거리던 보우는 뛰어 들어온 동자승을 향해 웃는 얼굴로 꾸짖었다.

“부모님 모두 멀쩡히 살아계시고 스스로 출가한 네가 뭐가 밉다는 것이냐?”

“헤헤··· 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으니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도 궁궐에 들어가시는 겁니까?”

동자승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냐하면 보우 앞에 놓인 가사는 궁궐에 들어가실 때만 입으시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런 일정이 전혀 없었다.

스스로 큰스님의 수발을 들겠다고 나선 동자승이기에 거의 모든 일정을 꿰고 있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이걸 입을 일이 생길 것 같구나.”

보우는 지난밤에 묘한 꿈을 꾸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일이 생길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생각보다 그의 육감은 상당히 정확한 편이었다.

동자승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쉽게 이해가 안 되었다.

“그게 도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때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동자승은 제대로 화가 났는지 문을 벌컥 열고 밖을 내다봤다. 어지간히 좀 하라고 소리치려다 그는 입을 다물어야 했다.

밖에 서 있는 것은 관복을 입고 있는 남자였다.

“전하께서 대사를 보고자 하시니 어서 채비하시고 저와 함께 가시지요.”

보우는 알겠다고 대답을 한 뒤.

곧장 꺼내놨던 가사를 입기 시작했다.

그런 뒤에 놀란 표정으로 서 있는 동자승의 머리를 쓰다듬고 궁궐로 향했다.

백문보를 내보내고 태평전에서 기다리고 있던 나는 보우 대사가 들어오자 반갑게 맞아주었다. 생각보다 우리 두 사람의 인연은 제법 길었다.

대도에서 인질로 있을 무렵.

당시에 보우 대사도 원나라에 있었다.

그는 황실에서 극진한 환대를 받고 있었는데 공민왕이 그를 처음으로 본 것은 영녕사에서 법회를 할 당시였다.

그 인연이 이어져서 공민왕은 보우를 스승으로 모시고 왕사로 둔 것이다.

하지만 인맥이 전부는 아니었다.

보우 대사는 나옹혜근과 백운화상이라 불리는 경한과 함께 여말삼사에 속했다.

불교의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고려에 대해 연구하면서 불교를 빼놓을 수 없기에 그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 역시 그리 낯설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간 잘 지내셨소?”

“전하께서 어진 정치를 해주시고 마마께서 신경을 써주시는 덕분에 어느 때보다 편하게 지내고 있사옵니다.”

보우가 궁궐에 자주 들어오지만,

내가 그를 만난 것은 손에 꼽았다.

기본적으로 그의 설법에 내가 참석한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주 가끔 가진이 눈치를 줄 때만 어쩔 수 없이 함께 자리했을 뿐이었다.

고려로 오기 전에도 종교 같은 것은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은 없었다.

보우도 그런 내게 불교를 설파하려고 애를 쓰지는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그 이유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했다.

“최근 들어 과인이 불교를 소홀하게 대하는 이유를 알고 계시오?”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사옵니다. 요즘 불교의 작태를 보면 소승 역시 개탄스러운 마음이 가득하옵니다.”

“알고 있다니 다행이오.”

최해(崔瀣)의 척불론.

그의 논리는 나온 지 꽤 되었다.

하지만 점점 더 불교를 배척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요즘이었다.

성리학을 배우는 이들이 괴력난신을 숭배하는 것을 배척하기 위한 것이라 단정 짓기도 어려운 점이 많았다.

불교는 썩어가고 있었다.

온갖 부정한 짓을 행하고 있었다.

탐관오리를 어느 정도 쳐내니 최근 들어 전법사에 사고를 치고 들어오는 승려가 생각 이상으로 많았다.

“승려들의 간통과 음주 비행이 한두 건이 아니오. 백성들이 언제까지 승려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봐줄 거라 보시오?”

“송구하옵니다.”

“이제 과인도 두고 볼 수는 없소. 앞으로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오.”

억불(抑佛)을 하겠다는 의미였다.

이미 보우 대사도 어느 정도 예상은 했는지 참담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싫은 내색은 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도 불교계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찰의 수가 무려 만여 곳이 넘어간다고 들었소. 승려의 수도 최소 십만 명이 넘어간다는데 어찌 불교에 귀의하려는 자들의 수가 고려의 병사들보다 많은 것이오.”

아직 현황 파악을 하기 전이지만,

다들 그 정도는 될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일부 역사서의 추정에 의하면 이십만 명은 넘을 정도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정식으로 승려가 된 이들은 아니었다.

수원승도(隨院僧徒) 때문이다.

평상시에 비승비속의 삶을 살아가며 사찰이 지닌 땅을 경작하는 이들을 수원승도라 하는데 그들의 비율이 8할 정도는 되는 것으로 추정했다.

그 문제는 출산율에도 영향을 주었다.

젊은 나이에 출가해서 가정을 꾸리지 않고 자식을 보지 않는 이들이 많았다.

이 무렵에는 대처승(帶妻僧)이라 하여 아내와 가정을 둔 이들이 꽤 많았으나 그것 나름대로도 문제가 있었다.

“이 나라 고려의 백성들 모두가 불교에 귀의하여 승려가 되는 모습을 두고 볼 수는 없지 않소.”

“소승의 생각도 같사옵니다.”

“가장 급한 것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 파쟁 중인 불교계를 통합해야 하오.”

이 무렵은 파쟁이 너무 심했다.

저마다 새롭게 종파를 만드는 중이다.

심지어 보우조차 임제종을 만든 시조였는데 고려말에는 크게 5교 양종이 불교계를 주름잡고 있다고 보면 되었다.

“쉽지 않은 일이옵니다.”

보우도 통합을 위해 애쓰고 있지만,

저마다 믿는 내용이 다르니 진척되지 않고 있었다. 당연히 그걸 관철시키기 위해서 나도 보우를 도울 생각이다.

그걸 위한 첫걸음은 그를 더 높은 자리에 두는 것이었다.

“과인에게 방법이 하나 있소.”

“그것이 무엇이옵니까?”

“그대를 왕사(王師)로 책봉하고 광명사(廣明寺)에 원융부(圓融府)를 건립할 테니 불교계의 통합을 이끌어 주시오.”

그를 왕사로 앞세운 뒤.

불교를 선교 양종으로 만들 생각이다.

너무 많은 파벌은 관리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교종과 선종을 합쳐서 300개의 사찰만 남겨 놓을 생각이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 남겨는 놔야지.’

완전히 없앨 생각은 없었다.

그러니 적절한 선에서 타협한 것이다.

거기까지 이야기를 들은 보우는 예상한 것보다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리 깨달음을 얻은 그라도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라 안색이 창백해졌다.

보우는 조심스럽게 내게 물었다.

“그 외의 사찰은 어찌 되옵니까?”

“일부는 용도를 바꾸거나 폐사하고 그곳에 속해 있던 땅과 노비 그리고 재물도 거둬들일 것이오.”

“가장 큰 사찰만 남겨도 모든 승려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숫자를 줄여야 할 것 아니오. 나머지는 모두 환속(還俗)시키시오.”

사찰 하나당 최대 삼백 명.

그게 내가 세운 사찰의 정원이다.

삼백 명이란 제한에는 수원승도까지 포함된 것으로 계수(計數)할 예정이다.

만약 그걸 넘길 경우에 추가로 폐사하는 것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국내의 승려는 만 명 미만이 될 것이다.

처음에는 더 과감하게 줄이려 했다.

그로 인해서 얻는 이득이 크기 때문이다.

이번에 정리되는 사찰의 재산과 토지 그리고 노비를 국고로 귀속할 생각이었다.

훗날 태종 때 몰수한 토지가 1만 7,200결이고 노비가 무려 8,600명이나 될 정도라고 했으니 안 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오래된 사찰 같은 것은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훗날 국보로 지정되는 문화재의 상당수가 사찰과 불교에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도첩제로 선교 양종에 매년 백 명씩 승인해줄 생각이었다.

50년만 지나도 다시 만 명의 승려가 늘어나겠지만, 수명을 다하는 이들을 고려하면 그 정도가 적당했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과도하긴 했어도 보우도 어느 정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소승이 부족함이 많으나 전하의 어명을 받들어 불교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사옵니다.”

그쯤 되자 보우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왕사의 자리를 받아들였다.

무슨 마음인지는 대충 알 것 같았다.

내 곁에 있으며 불교에 대한 압박을 조금이라도 줄여볼 생각이지 않을까.

“뼈를 깎는다는 심정으로 타락해 버린 불교를 바른길로 이끌어야 하오. 앞으로 과인과 문하시중이 최대한 돕겠소.”

“하오나 환속된 이들에게도 당분간은 먹고 살 방법은 주어야 하옵니다.”

“물론이오. 과인에게도 생각이 있소.”

사찰에 소속되어 있던 노비.

그리고 환속을 하게 될 승려까지.

모두 저수지와 광산 개발과 같은 토목 공사에 쏟아부을 생각이었다. 보우는 그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그건··· 부역이지 않사옵니까?”

“일한 만큼의 대가를 치를 생각이니 부역이라 할 수는 없지 않소. 당연히 사찰이 보유하고 있던 토지를 경작할 이들은 남겨 놓을 생각이오.”

농경지를 방치할 생각은 없었다.

거기서 나오는 양곡은 내년에 추가로 모집할 병사들의 녹봉으로 쓰일 것이다.

내가 목표로 잡은 5만 명의 정병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그게 당장 진행될 일은 아니다.

백문보가 불교계의 현황을 파악한 뒤.

정확한 자료를 놓고 진행할 일이었다.

그것마저 없이 교서 한 장 내려놓고 알아서 하라고 할 생각은 없었다.

이왕에 할 거면 철저하게 해야 했다.

그나마 보우는 시간적인 여유를 어느 정도 얻었다는 생각에 안도했다.

“소승이 긴히 드리고 싶은 말이 있사옵니다.”

그때 보우가 지기쇠왕설을 꺼냈다.

그것은 시기가 변함에 따라 땅의 기운이 약해지거나 강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당연히 나는 그가 무슨 이야기를 꺼낼지 단번에 눈치챘다.

한양 천도를 꺼내려는 것 같았다.

그 이야기가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이미 인종 당시에 묘청이 지기쇠왕설을 바탕으로 서경천도론을 펼친 바가 있었다.

당연히 그쪽으로 옮길 생각은 없었다.

“천도를 말하는 것이라면 그럴 생각은 없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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