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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70화 (70/202)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70

이방실이 화주성을 점령하는 동안.

개경에서도 꽤 많은 일이 벌어졌다.

살생부에 적힌 이들의 대부분이 효수되는 중형을 받거나 죄의 경중에 따라 전국 각지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당연히 그중에는 기씨 가문의 두 형제 그리고 인승단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단 한 사람 영안왕대부인만···

아니지 얼마 전에 경왕(敬王)으로 책봉이 되었으니 경왕대부인만 살아남았다.

그녀를 살려둔 이유는 기황후의 억제기 같은 역할을 하기 바랐기 때문이다.

살날이 얼마 안 남은 노부인이다.

아들과 손자가 모두 죽어서 뒷방 늙은이처럼 숨죽여 살 수밖에 없었다.

일종의 인질이라고 봐도 되었다.

이렇게 말하니 악당이 된 기분이 살짝 들었으나 안쓰럽다거나 그렇지는 않았다.

몇 해 전에 황태자가 책봉되었을 당시에 그녀를 위해 쓴 고려의 재물이 얼마던가.

그때의 빚을 지금 갚는 것이다.

그래도 지금의 고려는 꽤 풍족했다.

쌍성총관부로 출정하기 위해서 쓴 재물이 상당했으나 동오가 헌납한 재물과 부원배의 모든 가산을 몰수한 덕분이었다.

이번에 환수한 토지를 모두 다 합치면 개경현에서 경작 중인 농지 중에 1할은 될 거라는 보고가 올라왔을 정도였다.

당연히 뒷말도 많이 나왔다.

현재 가장 큰 목소리를 내는 것은 이제현과 그의 문하생인 이색이었다.

그들이 부원배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너무 과한 처벌이 이뤄지고 있다는 것을 맹렬하게 지적하고 있었다.

온건 개혁을 추구하는 이들다웠다.

어쩌면 문하시중인 자신을 빼고 쌍성총관부를 공격한 것 때문인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그가 보이는 반응을 보면 미리 말을 해줘봤자 어떤 식으로 나왔을지는 뻔하게 보였다. 외교적인 방식으로 풀었어야 한다는 그의 말을 듣고 강성 개혁파도 반박을 시작했다.

“문하시중께서 말하는 현명한 방법이 뭔지 이야기나 들어봅시다.”

“부원배들이 대를 이어가며 나라를 좀먹고 있는 것을 계속해서 모른 척하란 소리입니까?”

“지금이 아니면 안 됩니다. 언제까지 고려가 원나라 밑에서 숙인 채 살아가야 한단 말입니까?”

이인복이 대표하는 강성 개혁파.

그들은 반원 정책에 힘을 실어줬다.

사대주의를 경멸하는 그들은 어떻게든 고려를 되살리기 위해서 애쓰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 비뚤어지고 엉성하게 쌓인 탑을 부숴버리고 새롭게 쌓으려 했다.

“그렇다면 저들이 군대를 보내면 감당하실 수 있습니까? 원나라에서 이 상황을 그냥 두고 보지는 않을 것이오!”

이제현은 결국 선을 넘었다.

아무래도 감이 많이 떨어진 것 같았다.

고희(古稀, 칠순)를 코앞에 두고 있으니 어느 정도 이해는 됐다. 수십 년 동안 직접 겪은 원나라를 기준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이 예전만 못하다는 것은 알고 있으나 쉽게 인정하기 어려워했다.

‘이제 좀 쉴 때가 온 것인가?’

그를 그만 놔줘야 할 것 같았다.

어차피 내년쯤에 치사(致仕)해야 했다.

치사는 나이가 차면 관직을 그만두는 것을 의미하는데 70세가 기준이 된다.

일종의 정년퇴직이었다.

법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었지만,

보통 그쯤에서 물러나는 것이 관례였다.

내가 즉위한 이후부터 이제현은 줄곧 관직을 내려놓고 싶어 했으니 이제 그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다.

이제현은 결국 문하시중 자리를 백문보에게 넘기고 고향으로 떠났다.

솔직히 그게 서로 마음이 편했다.

아름다운 이별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고 그렇게 꾸밀 필요도 없었다.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았다.

원나라의 눈치를 보느라 미뤘던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는데 이제현이 그걸 맡으면 얼마 못 가서 과로사할 것 같았다.

그게 내가 내세운 핑계였다.

“정지상은 이제 풀어주시오.”

백문보와 독대 자리를 마련한 뒤.

올초에 야사부카와 접반사 홍원철를 가두고 그의 동생을 죽인 죄로 1년 가까이 갇혀 있던 정지상을 풀어주라 명령했다.

원래의 공민왕은 곧장 그를 풀어주고 순군제공으로 삼았지만, 나는 괘씸죄를 물어 달포 가까이 그를 방치했다.

쓸데없는 말을 한 죄였다.

백문보도 그쯤 했으면 되었다는 말에 동의하였기에 순순히 알겠다며 답했다.

어차피 몸만 옥에 있을 뿐이지 편의를 많이 봐줘서 살만 찌고 있었다.

“그리하겠사옵니다.”

“그를 동북면 안렴사로 제수하니 석방하는 대로 곧장 부임하라 하시오. 민심을 안정시키라고 보내는 것인데 이번에도 또 사고를 치면 그때는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는 말도 꼭 전하시오.”

“그리 전하겠사옵니다. 나머지 성의 주사는 어찌하옵니까?”

“문하시중이 도당과 함께 논의해서 적절한 이를 천거하면 검토하겠소.”

거기까지 신경 쓸 틈은 없었다.

당장 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았다.

세세한 것들은 백문보와 다른 관리들이 정리를 해서 올려줘야 했다.

그러는 사이에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원나라 연호를 버리는 것이었다.

존재 자체를 지운 곳도 많았다.

정동행중서성 이문소와 응방(鷹坊).

고려의 백성과 관리들을 고달프게 했던 두 곳은 이번 기회에 모두 폐지했다.

정동행성은 원래 왜국 정벌을 위해 세워진 곳인데 평소에 횡포가 상당했다.

일단 그 존재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

이문소의 관리들은 항상 고려의 내정을 통제하려 애썼고 반원 세력을 탄압하며 부원 세력을 만들어낸 기관이다.

심지어 원나라와 관련된 범죄 행위는 이문소 소관이라 어떤 죄를 지어도 원나라의 관리에게 죄를 물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응방에서 키우고 있던 매와 재물은 어찌하옵니까?”

“매는 경매장을 통해 최대한 팔고 사전(賜田)과 재물 그리고 노비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환수하시오.”

매사냥 같은 값 비싸고 고상한 취미를 권장할 시기는 아니었다. 내가 원래 그쪽에 관심이 없는 것도 큰 이유였다.

앞으로 원나라에 헌응(獻鷹)하지 않을 생각이기에 더는 필요 없는 곳이었다.

그 외에도 변화는 꽤 많았다.

서북면의 조세와 염세를 당분간 낮춰주고 죄인을 석방하는 등의 백성들을 위한 정책도 다수가 통과되었다.

수많은 이들이 효수된 탓에 민심을 다스리기 위해서 그 정도는 해줘야 했다.

그리고 부원배들이 쓸려나간 자리가 꽤 많이 비었기에 교서를 하나 내렸다.

[재능과 도덕을 품고서도 은둔하여 벼슬하지 않은 자가 있으면 소재지의 관원은 그 덕행을 기록하고 후하게 대우하여 조정에 나아오도록 하라.]

당연히 과거시험도 예정되어 있었다.

한동안 내가 하는 말을 듣고 있던 백문보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뭔가 고민이 있는 것 같았다.

“왜 그러시오?”

“최근에 워낙 많은 이들의 가산을 적몰(籍沒)한 탓에 양곡과 재물을 보관할 곳이 터무니없이 부족할 지경입니다.”

“양곡은 저렴하게 백성들에게 팔고 일부는 동오의 상단을 동원해서 북부로 보내 성을 보수하는 데 쓰도록 하시오.”

재물이란 게 참으로 요물 같다.

모으는 것은 어렵지만, 쓰는 것은 쉽다.

하지만 헛되게 쓸 생각은 없었다.

올해는 흉년이 들지도 않았기에 그냥 나눠줄 이유도 없었다. 이왕에 쓸 거면 축성과 보수를 하는 데 쓸 생각이었다.

이제부터는 디펜스 게임이다.

얼마나 효과적으로 잘 막냐에 따라서 그 이후에 북벌의 가능성이 정해질 것이다.

시간도 그리 많은 편은 아니었다.

4년 후에 쳐들어오는 4만의 홍건적이 첫 시험대가 될 것이다. 이번 전투에서 생각보다 피해가 적어 다행이었다.

[사망자 238명, 부상자 382명]

그게 우리측 손해의 전부였다.

철령을 반나절 만에 돌파할 당시에 화포의 활약이 무척 컸기 때문이다.

당시에 백여 문의 화포로 두어 차례 일제 사격을 하자 곧장 항복 의사를 알리는 흰 깃발이 올라왔을 정도였다.

화주성도 다를 것이 없었다.

두 개의 성문이 거의 동시에 열렸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고려군을 보고 끝까지 목숨을 걸고 싸운 이들은 거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

그건 바로 조소생을 놓친 것이었다.

이방실이 추격대를 꾸려서 보냈으나 아직 잡혔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역사에서 그랬던 것처럼 여진 쪽으로 간 것 같았다.

“병력의 재배치는 기존에 말씀하신 대로 진행하실 생각이시옵니까?”

나는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공을 세운 조돈과 조인벽 그리고 이자춘은 모두 개경으로 불러들였다.

공을 세운 그들에게는 적절한 관직을 내려주고 개경에서 머물 수 있는 저택도 하나씩 주었다.

이자춘과 이성계.

두 사람에게 동북면을 맡길 수 없었다.

지금 두 사람을 보내면 그들만의 왕국을 만들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두 사람 없이 여진을 상대하는 것도 힘들었다.

긴 시간 동북면에서 살아온 그들만큼 여진족을 상대하는데 특화된 이가 없었다.

원나라와 여진 그리고 왜구.

저마다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 차이를 아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주덕유가 왜구를 맡은 것처럼 앞으로 이성계도 여진을 맡아서 막아줘야 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그보다 더 위에 충성심이 변치 않을 이를 세우는 것이다.

서북면의 이방실, 동북면의 최영.

두 사람에게 쌍두마차의 역할을 맡겼다.

그리고 조인벽과 이성계는 개경에서 개인 훈련과 군사학을 수료한 후에 다시 최영의 밑으로 보낼 예정이었다.

고지식한 면이 많고 꽉 막힌 성격이지만, 그라면 이성계를 믿고 맡길 수 있었다.

‘그나저나 원나라에서도 반응이 올 때가 되기는 했는데···’

*

고려에서 그런 일이 있을 무렵.

원나라의 대도에도 마침내 쌍성총관부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고려가 원나라의 땅을 공격해서 손아귀에 넣었다는 것은 상당히 큰 충격이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원 혜종의 분노도 작지 않았다.

믿었던 도끼에 발등이 찍힌 것이다.

다른 곳도 아니고 부마국인 고려마저 이렇게 등을 돌릴 줄 몰랐다.

소식을 들은 그는 당장 80만 대군을 일으켜 고려를 지워버릴 것이라 공언했다.

기황후도 다를 것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어머니를 제외한 모든 가족이 죽었는데 이번에도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이미 그녀는 오라버니가 죽었을 당시에도 한 차례 관용을 보여주었다.

“이 지경이 되도록 도대체 승상께서는 뭘 하고 있었던 것이오!”

기황후가 윽박지르며 노려보자.

원나라의 승상 초스간은 미간을 찡그리며 아무런 말 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지금은 뭘 말하더라도 들리지 않을 것이다.

초스간 역시 고려를 믿고 있었다.

몇 해 전에 공물의 양을 대폭 늘렸는데도 아무런 불평 없이 계속 보내주던 곳이다.

그런데 갑자기 이럴 줄은 몰랐다.

쌍성총관부를 공격하는 것은 그렇다고 쳐도 황후의 가족을 싹 다 죽일 거란 예상을 누가 할 수 있단 말인가.

그쯤 되자 수년 전에 있었던 조일신이란 자에 의해 황후의 가족이 죽었던 것도 고려의 왕이 사주한 게 아닌가 의심됐다.

“80만의 병사를 보내서 왕기 그놈을 왕좌에서 끌어내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처참하게 죽일 거라고 황상께서 공언하셨소. 그러니 승상께서는 어서 준비하시오.”

“마마, 그게 가능할 거라 생각되옵니까?”

“황상께서 이미 윤허해주었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란 말이오?”

“냉정하게 생각하셔야 하옵니다.”

초스간은 현실을 알려주기로 했다.

지금 원나라에 그 정도의 여유는 없었다.

토크토아 승상을 실각시키며 그가 진행하던 토벌은 사실상 실패하였다.

그때 이후로 계속해서 반란군에게 밀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병사의 숫자와 보급품까지.

어느 것 하나 부족하지 않은 게 없었다.

오죽하면 골머리를 앓다가 최근 초스간의 머리카락은 뭉텅이로 빠지고 있었다.

당장 병력 동원이 불가능한 이유를 설명해주자 기황후도 한발 물러나서 병사의 수를 대폭 줄였다.

“8만이면 충분하오. 그 정도면 고려를 다 쓸어버리고 돌아올 수 있을 것이오.”

그런데도 초스간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그 절반도 빼내기 어려웠다.

기황후는 고려에 대한 복수를 반드시 하고 싶었기에 잠시 자존심을 내려놨는데 그마저도 안 된다고 하니 폭발했다.

“그럼 어쩌란 말이오!”

“원한은 잠시 묻어두시고 급한 일부터 해결한 후에···”

“도대체 그게 언제란 말이오?”

기황후의 질문에 초스간은 잠시 말을 머뭇거리다가 이내 대답을 했다.

그가 내린 전망은 꽤 암울했다.

마음 한편으로는 이 상황을 과연 극복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 드는 요즘이었다.

하지만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스스로 무능력하다고 알리는 꼴이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올해가 아닌 것은 확실하옵니다.”

군자보구 십년불만(君子報仇 十年不晩).

초스간은 복수를 함에 있어 십 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런 이후에 그는 할 일이 많다며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떠났다.

기황후도 듣는 귀가 없지는 않았다.

복수를 하려다가 황실 자체가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것도 어느 정도 알았다.

어떻게 올라온 자리인데 여기서 나락으로 떨어질 수 없었다. 더구나 황태자에게 반 토막이 된 나라를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결국에는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이 수모와 굴욕을 잊지 않을 생각이었다. 두 눈이 붉어진 그녀는 표독스러운 목소리로 고려를 향해 저주에 가까운 말을 퍼부었다.

“이 일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 네 놈을 반드시 내 앞에 꿇려서 사지를 찢어서 죽이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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