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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69화 (69/202)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69

조돈이 고려군에 합류한 이후.

진격 속도는 생각보다 빨라졌다.

그가 가진 영향력으로 말과 수레 등을 현지에서 제법 조달한 덕분이었다.

더구나 지형적인 장애물도 없었다.

그렇다고 화주로 향하는 길에 만나는 성에서 시간을 빼앗기고 있지도 않았다.

조소생이 병사를 다 뒤로 뺀 결과.

고려군은 쉽게 등주(登州) 같은 곳들을 점령할 수 있었다. 정확하게는 백성들이 열어 놓은 성문을 통해 무혈입성했다.

쌍성총관부가 자신들을 버렸다고 생각한 탓에 저항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더구나 고려 사람이 사는 땅이다.

고려군은 일종의 해방군과 같았다.

그만큼 쌍성총관부로부터 꽤 시달렸다는 이야기였다. 한 가지 더하자면 최근에 들리는 고려에 대한 소문 덕분이다.

“저분이 그 유명한 최영 장군님이신가?”

“도대체 이방실 장군과 변안열 장군은 어디 계신 거지. 꼭 한번 뵙고 싶었는데.”

“와아··· 이게 고려군이라고? 쌍성의 병사들이랑 완전히 느낌이 다른데?”

오히려 고려군이 당황할 정도였다.

그들은 창칼을 들고 들어서는 고려군을 열렬하게 반겨주었다. 그 모든 것은 이야기가 가진 힘이라고 봐도 됐다.

고려 전역에 조풍서와 같은 이야기꾼이 돌아다니며 여러 이야기를 퍼트렸다.

그게 이곳 등주까지도 전해진 것이다.

하지만 긴장을 늦추지는 않았다.

혹시 함정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방실 장군은 어느 때보다 더 경계를 철저하게 세우고 있었다.

등주에서 잠시 정비를 마친 고려군은 곧장 최종 목적지인 화주로 향했다.

등주에서 약 200리 떨어진 곳.

동해에 거의 인접해 있는 화주에 도달한 것은 그로부터 나흘이 지난 뒤였다.

긴 행군의 끝에 마지막 결전을 앞둔 고려군은 곧장 숙영지부터 세웠다.

피로가 쌓인 병사를 데리고 곧장 싸우는 것은 그리 현명한 방법은 아니었다.

반면에 화주성에게는 기회였다.

기습의 묘미를 살리면 어쩌면 큰 성과를 낼 수도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럴 엄두를 내지 못했다.

워낙 병력 차이가 컸기 때문이다.

화주성의 병사는 고작 팔천 명.

예상보다 훨씬 적게 모인 상태였다.

이자춘을 시켜서 철령을 제외한 11개의 성에서 병력을 모았지만, 그의 말을 따르지 않는 성이 세 곳이나 나왔다.

고려에게 이미 회유당한 곳이었다.

‘원나라의 원군이 올 때까지 버틴다.’

그게 조소생의 방침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성안에서 버티는 것도 그리 쉽지는 않았다. 고려군은 화포를 백 문이나 가지고 와서 쏘고 있었다.

한 시진마다 쏘는 화포 세례.

그건 정말 공포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아직 제대로 된 화력 시위는 시작도 하지 않았다. 지금 그렇게 쏘는 이유는 영점을 잡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한 차례씩 화포를 쏠 때마다 화주성의 사람들은 벌벌 떨었다.

고려군은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처음 화포 소리를 듣는 이들도 많았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철환이 무서운 속도로 날아오니 미칠 노릇이었다. 심지어 머리에 정통으로 맞아서 완전히 짓이겨진 병사도 나왔다.

쿠우웅! 쿠웅!

“왐마··· 미치긋네!”

“저것들은 화약이 남아도는 건가.”

“야! 이제 고마해라!”

심지어 정확하기까지 했다.

각도를 잡아 놓고 매번 같은 양의 화약을 쓰니 오차는 거의 없었다. 덕분에 성벽 상단을 맞추는 것 정도는 꽤 쉬웠다.

하지만 종종 성벽을 넘어가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쑥대밭이 됐다.

그렇게 이틀 정도가 지난 뒤.

땅거미가 질 무렵 남문 쪽에 흰 깃발을 든 두 남자가 수풀 사이에서 걸어 나왔다.

그들을 본 병사들은 곧장 활시위를 당겼으나 눈이 좋은 몇 명이 두 사람의 정체를 알아채고 다급하게 만류했다.

“잠시만, 저거 조 별장님 아닌가?”

“에이 설마 그럴 리가···”

“아무리 봐도 맞는 것 같은데.”

“그러네! 조인벽 별장님 맞아. 야야! 다들 이리 와봐. 별장 님이 돌아오셨다.”

병사들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남문의 병사들은 얼마 전까지 조인벽과 같이 근무하던 이들이다. 그리고 조인벽 옆에 있는 남자는 지통주사 장천핵이었다.

두 사람은 성문 앞에서 멈춰 섰다.

“다들 잘 있었는가!”

“별장 나으리, 왜 그쪽에서 오시는 겁니까? 술을 자시고 진영을 잘못 찾아가신 겁니까?”

“하하! 이 사람들 농은 여전하구나.”

조인벽은 크게 웃은 뒤.

며칠 전의 일을 병사들에게 고했다.

조소생이 조도치 등을 보내 자신과 조돈을 비롯해 일가족을 모두 죽이려고 했다고 말하자 다들 경악했다.

병사 중의 일부는 조돈에게 개인적인 은혜를 입은 것이 있기에 분노했다.

“그리하여 아버님과 우리 형제는 고려에 몸을 의탁하기로 하였다.”

“그러면 저희는 어쩌면 좋겠습니까?”

“지금 당장 성문을 열고 무기를 내려놓거라 그러면 나머지는 나와 고려군이 알아서 할 것이다.”

항복하라는 말이었다.

조인벽의 말을 들은 이들은 술렁였다.

그쯤 되니 남문을 책임지고 있던 사인경 별장이 뒤늦게 무관과 함께 달려왔다.

그들은 다급하게 병사들을 추스르며 조인벽에게 거친 욕을 내뱉었다.

“네 이놈! 결국에는 원나라와 총관님을 배신하고 고려의 편에 서려는 것이냐.”

“배신은 조소생이 먼저 하였다.”

“닥치거라. 한 마디만 더 떠들면 당장 내려가 네 놈의 목을 벨 것이다.”

“말로만 떠들지 말고 어서 오거라.”

조인벽은 손가락을 까닥였다.

그 단순한 도발에 사인경은 당장 성문을 열고 나갈 기세였다. 안 그래도 그는 조인벽에게 그리 감정이 좋지 않았다.

그의 후임으로 남문을 맡은 이후부터 계속해서 비교당하며 안 좋은 소리를 들었다.

쌍성에서 조씨 가문은 명문이다.

대대로 총관을 배출하는 가문이었다.

심지어 조인벽은 현재 총관인 조소생의 사촌인 데 비해 사인경은 여진 출신이다.

그는 줄곧 조인벽의 핏줄이 부럽기도 했고 한 편으로는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성문을 열 수 없었다.

탁도경 천호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성문을 열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만약에 도발에 못 이겨 뛰어나간 것이 알려지면 목이 남아나질 않을 것이다.

조인벽은 그런 그를 비웃었다.

“어서 안 나오고 뭐 하고 있는 것이냐? 혹시 이번에도 나한테 질 것 같아서 겁나느냐?”

지금까지 두 사람이 대련할 때.

이기는 쪽은 항상 조인벽이었다.

사인경이 이긴 적이 거의 없을 정도다.

그쯤 되니 사인경도 참을성이 동났다.

옆에 서 있던 병사의 손에서 활을 빼앗아 시위를 당기려 하자 성벽 위의 병사들이 깜짝 놀라서 그 모습을 바라봤다.

그러나 그를 말리는 이는 없었다.

자칫 반역죄로 이 자리에서 곧장 목이 잘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인경의 화살은 날아가지 않았다.

시위를 끝까지 당기기도 전에 옆에 있던 병사 하나가 별안간 칼을 휘둘렀다.

단칼에 사인경의 팔목이 잘려 나갔다.

“크으아악!”

생각지도 못한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처음에는 다들 상황 파악을 못 하고 멍하니 바라만 봤다. 칼을 휘두른 병사는 다른 성에서 지원온 병사 중에 하나였다.

그는 칼을 앞으로 치켜들며 외쳤다.

“지금부터 나는 조 별장 님을 따를 것이다. 함께하고자 하는 이들은 어서 성문을 열어라!”

그 순간에 몇 명이 칼을 들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움직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은 과거부터 이자춘의 사병으로 몇 대째 따르고 있는 이들이었다. 천호의 지위를 이용해서 몇 명 심어 놓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만 있지는 않았다.

그 자리에는 감찰사 소속도 있었다.

여러 경로를 통해 잠입해 있었기에 상대방의 정체는 전혀 몰랐지만, 그래도 그들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는 같았다.

그때부터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피아 구분조차 안 되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팔목이 잘린 사인경과 그를 따르던 무관은 모두의 표적이 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일부는 성벽을 내려갔다.

성문을 여는 것이 가장 최우선 목표였다.

“막아라! 절대 성문을 열게 두어서는 안 된다.”

사인경은 팔목을 움켜쥔 채.

목청껏 소리치며 막아서려 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조인벽의 편에 서는 이들이 많았다. 성문을 놓고 치열하게 전투가 벌어졌으나 정작 조인벽은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성문이 열리기 전까지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성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걸 본 조인벽은 장천핵과 함께 칼을 뽑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뒤로는 어느 사이에 나타난 병사들이 가득했다.

수풀 너머에서 숨은 채로 기다리고 있던 서달과 이천 명의 병사들이었다.

“모두 서둘러 달려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남문을 확보하여야 한다.”

서달은 누구보다 앞장섰다.

말을 타고 달리는 기병이 순식간에 화주성의 남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간 후부터는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이천여 명의 군사는 순식간에 남문을 점령했고 그 뒤쪽에서 안우 장군이 추가로 오천의 병사를 이끌고 달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눈에 보이는 대로 화주성의 병사를 죽이고 있지는 않았다.

“무기를 놓고 투항하라.”

“투항하는 자는 살려줄 것이다.”

“왼쪽 팔에 붉은 천을 묶은 이들은 우리 편이니 죽이지 마라.”

어차피 저울은 기울어졌다.

괜히 피를 볼 이유는 없었다.

병사들도 그걸 알기에 무관들의 눈치를 보다가 결국에는 병장기를 내려놨다.

하지만 그게 남문만의 일은 아니었다.

서달이 성문을 돌파할 무렵.

동문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이자춘은 약조한 대로 내응을 하기 시작했고 성문을 열어서 고려군을 맞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변안열이 오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화주성으로 진입했다.

그것으로 화주성은 끝났다.

성안 곳곳에 고려군이 가득했다.

이자춘이 이끄는 병사는 물론이고 일반 병사도 대부분 고려군에 투항해서 더는 막아설 방법도 없었다.

당연히 조소생도 그걸 잘 알았다.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쌍성총관부의 역사는 오늘로써 끝나게 된 것이다.

지금은 그걸 아쉬워하는 것보다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서 더 노력해야 할 때였다.

곁을 지키고 있던 탁도경과 조도치는 서둘러 도망칠 것을 종용했다.

“어서 가셔야 합니다. 더는 막을 방도가 없습니다.”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지금 퇴각로는 서쪽밖에 없습니다.”

북문의 사정은 더 좋지 않았다.

그곳에는 화포 수십 문이 있었다.

최무선이 이끄는 화포병들이 쉬지 않고 철환을 쏘아대고 있어서 성문이 박살 나기 직전이라는 소식이 조금 전에 전해졌다.

강철로 만든 문도 아닌데 집중포화를 맞고 지금까지 버틴 것이 용했다.

결국에 그들은 서쪽을 향해 달렸다.

그곳은 생각보다 병사의 수가 적었는데 그래서 더 찜찜한 것도 사실이었다.

이건 뭔가 너무 쉬운 느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선택지조차 없었다.

그들이 혼비백산하며 수백 명의 병사를 이끌고 도주하는 모습을 이방실 병마사가 지켜보고 있자 부관이 조바심을 냈다.

“장군, 지금이라도 당장 저들을 추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서쪽에 누가 있는지 잊은 것이냐.”

“아··· 저들은 죽으러 가는 것이군요.”

부관은 호탕하게 웃었다.

괜히 서문이 다른 곳에 비해 포위망이 얇은 것이 아니었다. 지금 조소생은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함성과 함께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잠시 후에 그쪽 방향에서 한 무리의 병사들이 걸어 나왔는데 최영이었다.

자신의 병사들에게도 전투 경험을 한 번쯤 경험하게 해달라는 최영의 요청에 따라 매복에 그들을 배치한 것이었다.

오천 명 중에 삼천이 매복 중이었다.

겨우 수백 명의 쌍성의 병사로 뚫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최영의 표정은 이외로 그리 좋지 않았다. 이쪽으로 올 거라 예상했던 조소생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성과가 없진 않았다.

천호 탁도경의 목은 챙길 수 있었다.

그의 머리는 곧 화주성에 걸렸는데 고려를 배신하고 원나라에 영토를 팔아넘긴 조상의 죄를 그가 대신해서 받았다.

“대장 기를 화주성에 걸 거라.”

얼추 상황이 마무리되자.

이방실은 부관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병사 하나가 곱게 접어놓았던 이방실의 부대기를 꺼내서 펼쳤다.

그곳에는 검은 곰을 형상화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주덕유의 귀면문 다음으로 내가 직접 내려준 두 번째 대장기였다.

우직한 충성심을 가진 이방실.

그에게는 흑곰이 가장 잘 어울렸다.

실제로 수하에 있는 병사와 장수들이 그에게 붙여준 별명이기도 했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대장기가 성벽에 걸리자 다들 감회어린 시선으로 바라봤다.

잃어버렸던 영토가 다시 고려의 품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무려 97년 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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