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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68화 (68/202)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68

개경에서 피바람이 불 무렵.

영원진도 상당히 분주하게 움직였다.

오늘은 쌍성총관부를 다시 고려의 품으로 돌려놓기 위한 여정의 시작이었다.

개경에서 부원배를 쓸어버리는 것과 동시에 출발해야 하기에 병사들은 이른 아침부터 이동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쉽지 않은 여정이다.

가는 길이 여간 험한 것이 아니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가면 갈수록 산세가 험해지기 때문이다. 가장 큰 고비가 관북과 관동 지역을 잇는 철령(鐵嶺)이다.

그리 높은 고개는 아니었으나 거길 제때 통과하지 못하면 골치 아파졌다.

“어서 서둘러라! 쌍성의 역적놈들이 눈치채기 전에 철령을 넘어야 한다.”

철령은 천혜의 군사 요충지였다.

워낙 주변 산세가 험한 곳이기에 그곳이 막히면 다른 길로 돌아갈 수 없었다.

화주에 있을 조소생의 병력이 눈치채고 움직일 가능성이 있기에 지휘를 맡은 동북면 병마사 이방실은 마음이 급했다. 만약에 거기서 막히면 장기전으로 바뀔 가능성이 있었다.

가능하면 그런 상황은 피하고 싶었다.

“화통방사군은 아직인가?”

“거의 다 준비를 마쳤습니다.”

“변안열 만호가 거느린 병사가 화통방사군과 같이 이동할 테니 준비를 마치면 곧장 그를 찾아가게나.”

현재 가장 느린 곳이 화통방사군이다.

일반적인 병사들과 달리 그들의 경우에는 챙겨야 할 게 워낙 많으니 당연했다.

화포와 받침 그리고 화약 같은 것도 병사들이 직접 옮길 수밖에 없었다.

철환은 수레로 실어주긴 했지만,

다들 그리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있었다.

얼마 안 되는 수레에는 보급품이 가득 채워져 있었고 길이 험해서 어디까지 움직일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으라차! 어휴 화포를 어깨에 짊어질 때마다 허리랑 어깨가 빠질 것 같아.”

“100근 가까이 나간다잖아.”

“그 정도면 사람 하나를 짊어지고 다니는 거나 마찬가지네.”

“이따가 우리가 바꿔줄 테니 걱정 마.”

훈련 때는 둘이 들었지만,

이번에는 네 명이 달라 붙었다.

잠시 옮기는 것과 달리 먼 길을 가기에 둘이서 들 수 있는 무게가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사람이 부족해서 일반 병사들까지 나서서 화포를 짊어졌다.

그렇게 옮겨지는 화포만 백여 대에 달했다.

생각보다 많은 양이었다.

하지만 이번 한 번만 쓸 게 아니다.

앞으로 그것들은 동북면의 성에 배치되어 방어용으로 사용하게 될 것들이었다.

화포병들이 분주하게 움직일 무렵에 안우 장군과 홍언박이 이끄는 병사가 출발했다.

그들은 이번 출정에서 선봉이었다.

안우 장군의 뒤로 이방실 장군의 본진과 최영의 보충병이 뒤따라서 움직였다.

거의 2만 5천 명이 넘어섰다.

영원진을 떠나는 병사들을 배웅하기 위해 나온 백성들의 표정은 걱정이 가득했다.

상당수가 이곳으로 이주한 병사들의 가족이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어느 꼬마는 아버지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렸다.

“아부지, 가지 마.”

어찌나 서럽게 울던지,

그 주변이 눈물바다가 될 정도였다.

원나라에서 징집되어 전쟁터로 끌려갔다가 겨우 살아 돌아왔던 이들이다.

그런데 다시 전쟁터로 나가게 됐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그리 걱정되지 않는지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의 어깨에는 중사 계급장이 있었다.

홀치 출신이 아닌 징집병이 그 계급을 받았다는 것은 지난 전투에서 꽤 큰 공을 세웠다는 의미였다.

“아들. 고려군이 얼마나 강한지 알지?”

“으응···”

“그러니 걱정하지 마.”

항상 열세였던 고려군이다.

우월한 전력을 갖고 싸운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가 따르는 장군들은 지금껏 한 번도 진 적이 없었다. 더구나 이번에는 예전과 비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병력에서 우위에 선 것도 처음이고 전에 없던 화포와 쇠뇌도 가지고 있었다.

질 거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금방 올 테니까 어무이 말 잘 듣고 있어.”

*

그로부터 며칠 뒤.

쌍성총관부에 비상이 걸렸다.

고려군이 화주로 향하고 있다는 내용이 그때가 되어서야 전해졌기 때문이다.

급하게 달려온 전령의 말에 의하면 이미 고려군은 철령을 넘어섰다.

우려가 현실이 된 것이었다.

정보의 싸움에서 완전히 졌다.

쌍성총관부에서는 영원군의 상황에 대해서 전혀 알고 있는 바가 없었다.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여러 번 정찰을 보냈으나 대부분 소식이 끊겼다. 그렇게 잃은 병사만 수십 명에 달할 정도였다.

그래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이게 말이 되는 것이오!”

조소생은 화를 주체하지 못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것이 조만간 터질 것 같아 보였다. 그가 이토록 화를 내는 이유가 있기는 했다.

철령이 너무 맥없이 무너졌다.

적어도 며칠 정도는 버틸 줄 알았다.

하지만 고려군은 반나절도 안 되어서 철령을 접수하고 이곳 화주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누굴 탓하겠는가.

이 모든 상황은 조소생 탓이었다.

여기 있는 이들 중에 탁도경이 계속 주의를 줬던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조소생은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호언장담했다.

그 결과가 이렇게 나타난 것이었다.

탁도경은 속으로 혀를 차며 초장부터 완전히 당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고려군이 철령을 넘어서는 순간부터 등주까지는 그냥 내줄 수밖에 없었다.

지금 당장 달려가도 늦었다.

“천호들은 꿀 먹은 벙어리라도 된 것이오? 무려 2만이 넘는 고려군이 철령을 넘어설 때까지 뭘 하고 계셨소?”

누구를 질책하는 건지 뻔했다.

조소생의 시선은 이자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이러다가 고려군이 도달하기 전에 내분이 나서 끝장날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탁도경이 나섰다.

“고정하시지요. 우선은 저들을 막을 방안부터 마련해야 합니다.”

“탁 천호는 방법이 있으시오?”

“일단은 본토에 구원병 요청부터 하시지요. 엄연히 쌍성총관부는 원나라의 영토이니 어떻게든 방안을 찾을 겁니다.”

그제야 조소생은 진정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이자춘은 웃음이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고 있었다.

과연 그들이 병사를 보내줄까.

이자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친하게 지내는 여진족의 이야기에 따르면 심양의 상황도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있다.

원나라의 황실에서는 병력과 황족의 품위 유지를 위해 나머지 지역을 쥐어짜고 있는 중이었다. 일시적인 것이라면 백성도 어느 정도 참겠지만, 벌써 몇 해 동안이나 계속되고 있었다.

그들이 만약에 병사를 보내더라도,

이곳에 도달하기 전에 화주성은 무너질 것이 분명했다. 지난 홍건적 토벌 당시에 쌓은 고려군의 명성은 상당히 대단했다.

거기에 성안에서 내응하기로 약조했기에 화주성은 하루도 못 가서 무너질 것이다.

모두 부질없는 짓이었다.

“탁 천호는 당장 심양과 대도에 전령을 보내어 원군을 요청하시오. 그리고 이 천호는 다른 성의 병사들을 모두 이곳 화주성으로 불러 모으시오.”

“화주성만 지키고 나머지 성은 버리시는 겁니까?”

쌍성총관부에는 12개의 성이 있다.

모든 병사를 이곳으로 불러 모으면 나머지는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조소생은 이자춘의 말을 듣고 오히려 화를 내며 꾸짖었다.

“화주성이 무너지면 모든 게 끝나는 것이오. 원나라의 원군이 올 때까지 이곳은 무조건 지켜내야 하오.”

곧 죽어도 살려고 발버둥 친다는 말은 안 했는데 이자춘은 알겠다며 뒤로 물러났다.

모두 모아서 한 번에 끝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괜히 여러 성에 나눠서 들어앉으면 더 오래 걸릴 것이다.

“다들 나가서 수성 준비를 하시오.”

조소생이 나가보라고 말하자.

관리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밖으로 뛰어나갔다. 괜히 지금 눈에 띄어봤자 좋은 소리를 듣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부터는 시간 싸움이었다.

고려군을 보고한 전령의 말에 의하면 다행히 진격 속도는 생각보다 느렸다.

대부분이 보병인 데다가 산세가 험한 탓이라 체력 소모도 꽤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그리 넉넉하진 않았다.

탁도경도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조소생이 그를 다시 불러서 앉혔다.

마뜩잖은 표정을 애써 숨기며 탁도경이 앉자 조소생은 은밀하게 지시를 내렸다.

“탁 천호는 지금 당장 용진에 계신 조돈 숙부를 조용히 모셔와서 감금하시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숙부께서는 고려에서 벼슬을 하며 여러 왕의 총애를 받은 분이요. 그분이 내응할 가능성이 없다고 할 수 있겠소?”

탁도경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총관의 말을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여기서 또 무시하는 말을 했다가 이자춘이 당하는 것처럼 자신도 똑같이 당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쩔 수 없이 그는 참모 중의 하나인 백호(百戶) 조도치를 보내기로 했다.

*

그로부터 얼마 정도 시간이 지난 뒤.

조도치는 서른 명의 병사와 함께 조돈의 거처가 있는 용진에 도착했다.

하지만 조돈은 어디에도 안 보였다.

심지어 그의 아들과 아내는 물론이고 가노조차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저택에서 살아있는 것이라고는 개 한 마리가 전부였다.

“제길! 한발 늦은 것인가?”

아무래도 눈치를 챈 것 같았다.

조카인 조소생을 가장 잘 아는 것이 조돈이니 이런 상황을 예측한 것 같았다.

하지만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조도치는 병사를 이끌고 삼기강(三岐江) 방면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만약에 조돈이 고려군에 투항하려고 마음을 먹었다면 등주로 가는 길목이 그쪽 방향이었다.

다가닥, 다가닥!

말을 몰고 얼마나 달렸을까.

조도치의 눈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달리는 것이 보였다.

대충 이십여 명에 달했는데 그들을 보는 순간 조돈의 일가족임을 직감했다.

슬며시 미소 짓는 조도치와 달리 말발굽 소리를 들은 조돈은 사색이 됐다.

“다들 흩어져라!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고려군이 있는 등주로 모여야 한다.”

조돈은 흩어지길 종용했다.

모두가 죽는 것보다 몇 명이라도 살릴 방법을 찾아야 했다. 급하게 나오느라 말을 몇 마리 못 구한 것이 안타까웠다.

달려오는 기병을 피할 방법은 없었다.

잠깐이라도 시간을 벌기 위해서.

조돈과 네 명의 아들은 칼을 뽑았다.

그중에서 가장 믿을만한 아들은 역시 별장(別將) 자리에 있는 조인벽이었다.

모두가 죽기를 각오하고 기다리던 중에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겼다.

슈우웅! 슈웅!

머리 뒤에서 화살이 날아왔다.

그리 많은 수는 아니었으나 순식간에 조도치의 부하 몇 명이 낙마를 했다.

화살을 맞고 몸부림치는 말에서 버티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다급하게 뒤돌아본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주저앉았다. 빠른 속도로 달리는 그들의 정체는 고려 기병이었다.

“모두 쳐라!”

양쪽에서 기병이 돌진했다.

서로를 향해 달려가는 속도는 대단했다.

순식간에 코앞까지 도달한 조도치는 칼을 들고 힘껏 휘두르려고 했다. 하지만 고려의 기병은 그럴 마음이 없어 보였다.

그들은 양옆으로 갈라지며 허리춤에 꽂혀 있던 단창을 들어서 힘껏 던졌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움직임이었다.

심지어 뒤에 있던 기병은 활까지 쐈다.

저렇게 빨리 달리며 활을 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된 건지 화살을 쏘는 족족 맞고 있었다.

히이잉!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는 했다.

화살은 모두 말을 노리고 있었다.

마갑을 씌우지 않았던 탓에 조도치의 병사들이 탄 말은 너무 쉽게 쓰러졌다.

그게 그들의 가장 큰 실수였다.

조도치는 설마 이 부근까지 고려군이 들어와 있을 줄 생각지도 못했다.

조돈을 최대한 빨리 잡아들이라는 명령 때문에 쉬지 않고 달리려면 어쩔 수 없었다.

“끄아악!”

“이 비겁한 녀석들, 제대로 겨뤄보자.”

“어딜 도망가는 것이냐?”

고려의 기병은 거리를 내주지 않았다.

어찌나 귀신같이 말을 모는지 아무리 쫓아도 허탕이었다. 더구나 어지럽게 움직이면서도 다른 이의 뒤를 봐줬다.

기를 쓰며 뒤를 쫓다가 등을 노리고 날아오는 단창에 맞고 쓰러지는 이들이 속출했다.

이미 손쓸 수 없을 정도였다.

서른 명 중에 절반 이상이 낙마했다.

그마저도 조돈과 그의 네 아들에 의해 하나씩 죽고 있었다. 반면에 고려군은 다친 병사를 찾아볼 수도 없었다.

이대로는 더 버티는 게 무의미했다.

“모두 후퇴하라!”

조도치와 그의 병사들이 물러서자.

고려군의 기병을 이끄는 무관 하나가 말에서 내려 조돈을 향해 다가섰다.

그는 변안열 아래에서 쉰 명 단위의 기병을 이끄는 중사 계급의 무관이었다.

“다들 괜찮으십니까?”

“늦지 않게 와주어서 고맙네. 감찰사에서 보낸 이가 위치를 잘못 전해준 것은 아닌가 걱정했네.”

“송구합니다만, 일단 가시죠. 또 다른 추격대가 언제 올지 모릅니다.”

기병들은 타고 온 말에 조돈의 가족을 한 명씩 뒤에 태우고 곧장 이동을 시작했다.

그들은 등주 부근까지 진격한 고려군의 군영으로 향했다.

조돈은 어떻게 알고 피했을까.

그 이유는 용진과 화주에 배치된 감찰사 정보원 덕분이었다. 고려군이 철령을 넘어선 순간부터 그들은 빠르게 움직였다.

성안에서 내응하기로 한 이자춘을 제외한 대부분의 친 고려파 관리와 미리 포섭한 이들을 재빨리 빼돌렸다.

그중에서 1순위가 바로 조돈이었다.

고려에서 관직 생활을 하다가 돌아온 그는 총관의 숙부였고 생각 이상으로 이 지역에서 영향력이 꽤 컸다.

그걸 알기에 이방실은 직접 나가서 조돈과 그 식구들을 맞이했다.

“무사히 오셔서 다행입니다.”

“장군께서 병사들을 제때 보내주신 덕분입니다. 덕분에 무사히 빠져나왔습니다. 제가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시지요.”

조돈은 화주의 상황을 설명했다.

이방실도 어느 정도 아는 내용이었지만, 쉽게 성을 함락시킬 방법이 있다고 한 가지 계책을 내놓았다. 그게 뭐냐고 묻자 조돈은 자신의 아들을 보내 병사들을 회유해보겠다고 말을 했다.

“제 장남이 별장에 불과하지만, 병사들의 신망을 많이 얻고 있습니다. 더구나 이자춘 천호의 사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요?”

“그 아이를 보내서 천호를 회유해보는 것도 시도해볼 만 합니다.”

이방실은 표정 관리를 해야 했다.

아직 이자춘이 내응하기로 한 것은 만호 이상의 장군들만 알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세 치의 혀로 성을 무너뜨릴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없었다.

기왕이면 한 명이라도 피해가 덜 생기게 하는 것이 이방실의 목표였다.

“그러면 한 번 해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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