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67
뭐든 독점은 좋지 않다.
동오는 국내 유통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그에게만 특혜를 주진 않았다.
이번 기회에 상단 중에 여력이 되는 이들을 대상으로 일거리를 주기 시작했다.
당연히 가장 큰 타격을 받는 것은 지경탁이 이끄는 상단이었다.
하지만 그건 내가 알 바는 아니었다.
운송료로 주어지는 비용을 아까워할 일도 아니었다. 산지에서 나오는 신선한 식자재가 빠르게 옮겨지는 것은 중요하다.
이 무렵은 거의 자급자족에 가까웠다.
내륙 지역 깊은 곳에서는 해산물을 먹기 힘들고 바닷가 사람들은 산지에서 나오는 것들을 맛보지 못하며 살고 있었다.
태어나고 자란 곳에서 재배되는 것만 먹다가 죽는다는 것은 꽤 억울한 일이다.
그만큼 유통은 매우 중요하다.
아무리 좋은 물건이라도 지역 내에서만 소비된다면 성장세가 더뎌질 수밖에 없다.
더 많은 이들에게 선보이고 판매되어야 생산도 그에 걸맞게 늘어나게 된다.
동오는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듯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각지에서 재배된 신선한 과일을 궁궐로 보내주었다.
특히 경산에서 올라온 복숭아는 그 맛이 일품이었는데 가진이 가장 좋아했다.
모처럼 정자에서 시원한 복숭아를 베어 물며 앉아 있자 더위가 가시는 것 같았다.
여름마다 에어컨이 그리웠지만,
이게 또 살다 보니 조금씩 적응했다.
더구나 옆에서 커다란 부채를 들고 부쳐주고 있으니 이런 호강이 없었다.
하지만 나와 가진을 위한 것은 아니다.
원자인 왕현에게 향하는 벌레를 쫓기 위함이었는데 벌써 8개월이 되었다.
“까꿍, 까까꿍!”
옆에서 신소봉이 놀아주자.
왕현은 방실거리며 까르르 웃었다.
최근에 가장 즐기는 것이 까꿍 놀이였다.
하지만 제일 잘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잠시 한눈이라도 팔면 예상치 못한 순간에 기어서 돌진을 했기에 정자에는 홀치가 네 명이나 지키고 있었다.
“원자는 정말 뒤도 안 돌아보고 돌진하는 것이 꽤 고집이 센 것 같지 않소?”
“정말 누굴 꼭 닮았지요.”
“그게 설마 과인을 의미하는 거요?”
“호호, 본인은 알겠지요.”
가진은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 모습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예쁠까.
이러다가 조만간 둘째를 가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요즘에 일이 너무 많아서 그럴 시간도 없었다.
어느 사이에 출정이 예정된 날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이제 겨우 이틀 정도가 남았다.
병사들과 장수들을 사지로 몰아넣고 나만 행복해도 되는 건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불필요한 희생은 아니었다.
쌍성총관부에 포함되어 있는 함흥평야 같은 토지는 생각 이상으로 비옥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시는 겁니까?”
“아무래도 내가 직접 병사를 이끌고 친정(親征)하는 것이 마음이 편할 것 같소.”
“괜히 그런 말을 꺼냈다가 달포 이상을 달달 볶일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 이상한 일이라 생각하시오? 예로부터 태조께서도 직접 군사를 이끌고···”
“그게 언제 이야기입니까?”
그게··· 4백 년 이상은 되었다.
최근에 병사를 이끌고 전쟁에 나선 왕이 있냐고 가진이 묻자 할 말이 없었다.
거기에 하나 더해서 얼마 전까지 말도 제대로 못 타던 내가 가봤자 방해만 된다며 팩폭을 날렸다.
“거참, 말이 심한 거 아니오?”
“틀린 말은 아니잖습니까.”
“분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구려.”
그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최근에도 활쏘기와 말 타는 것은 운동 삼아 게을리하지 않고 있었지만, 몸을 쓰는 것은 확실히 내 적성이 아닌 것 같았다.
차라리 그림을 그리고 책을 보는 게 훨씬 더 재미있었다. 아무래도 광개토태왕과 같은 인물이 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내게는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훌륭한 장수가 넘칠 정도로 많았다.
뒤에서 내가 잘 받쳐주면 고구려 못지않은 광활한 영토를 고려의 품에 충분히 안겨줄 수 있는 이들이었다.
가진은 내게 직접 친정을 나서는 것보다 면포로 한 벌의 옷이라도 더 만들어서 병사들에게 주라며 조언을 해줬다.
북부의 추위를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원나라에서 즉위를 하기 위해서 고려로 돌아오던 때가 한겨울이었는데 그때 느낀 추위는 상상하던 것 이상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 곧 목화를 수확할 시기이구려.”
“조만간 면포 옷을 널리 보급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올해도 작황이 좋은가 보오.”
“매년 목화를 심는 수가 어마어마하니 그래야지요. 문제는 처음 심었던 목화 나무에서 올해부터 다래가 거의 피어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다년생의 목화 나무지만,
벌써 4년 가까이 지나버렸다.
당연히 그 끝이 다가오고 있을 것이다.
목화 나무를 뽑더라도 다시 그 땅에 목화를 심을 수 없었다. 내가 그 말을 하자 가진은 이해가 안 되었는지 의아하게 바라봤다.
“왜 그래야 합니까?”
“목화는 지력을 빨아들이기 때문이오. 아마 거기에 다시 심더라도 원래처럼 목화가 풍성하게 피진 않을 것이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콩을 심거나 휴경을 하는 수밖에 없소.”
목화는 영양분을 엄청 뽑아 먹는다.
인삼과 동급 정도는 아니더라도 다년생인 만큼 지력도 무척 떨어졌을 것이다.
그 땅을 당장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나마 콩은 지력 회복에 도움이 되니 어느 정도는 자랄 것이다.
목화의 유일한 단점이 거기 있었다.
“도대체 그런 것들은 어디서 보고 배우시는 겁니까?”
“과인이 독서당(讀書堂)에서 보내는 시간이 적지 않은 이유가 거기 있소.”
“전하 못지않게 정몽주와 정도전도 유명하더군요.”
독서당의 출입 허가를 받은 뒤.
정몽주는 거의 그곳에서 살고 있었다.
거기에 정도전까지 합세하여 독서당에 있는 모든 책을 다 읽을 기세였다.
하지만 그곳에 쌓아 놓은 책이 적지 않으니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당연히 내가 살던 시대의 도서관과 비교할 수는 없으나 제대로 파고들면 몇 년 이상은 헤어나올 수 없을 것이다.
그런 탓인지 두 사람은 궁인들 사이에서 독서당의 지박령이라 불릴 정도였다.
괜히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게 아니다.
그들의 총명함과 지식에 대한 갈구는 상당했는데 뭔가 잡학 다식한 지식인의 길을 가려고 하는 것 같았다.
성리학만 죽어라 파고들던 두 사람의 변화는 상당히 고무적이었다.
그때 왕현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지금까지 잘 놀던 아이가 우는 것은 배가 고프거나 볼일을 봤다는 뜻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쿰쿰한 냄새가 바람을 타고 날아와 코끝에 맴돌았다. 가진도 그걸 맡았는지 궁녀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오늘도 상당히 늦을 것 같으니 기다리지 말고 먼저 침수(寢睡)하시오.”
“기대도 안 했습니다.”
가진은 웃으며 원자를 안았다.
궁녀가 대신 안겠다고 해도 고집을 꺾을 방법은 없었다. 아이와 교감을 하는데 접촉만 한 게 없다고 말한 것 때문이었다.
어렵게 본 원자라 그런지 가진의 애착은 생각 이상으로 심했다.
그녀가 원자와 함께 떠난 뒤.
나도 슬슬 정자에서 내려왔다.
오후에 만나기로 약속한 이가 있었다.
천천히 걸어서 태평전에 들어서니 이미 주덕유가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략함대를 맡아서 떠난 지 4개월 만에 귀환이었다.
“그간 수고가 많으셨소. 일단 앉으시오.”
나는 주덕유에게 자리부터 권했다.
그런 뒤에 이번에 출항해서 얻은 결과물을 보고 받기 시작했다.
그의 입을 통해서 들은 수확량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많았다. 왜구의 본거지를 먼지까지 탈탈 털어온 덕분이었다.
그간 얼마나 털어먹은 것인지.
왜구들이 거주하는 마을에는 금과 은을 비롯해서 온갖 재물이 숨겨져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보다 노동력 확보에 더 많은 관심을 두었다. 내가 그걸 물어보자 주덕유는 곧장 대답했다.
“왜구의 본거지를 급습하는 데 성공하여 오백 명의 포로를 잡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전하께서 내리신 분부대로 북부에 있는 철광산에 나눠서 보냈사옵니다.”
“왜구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을 것 같은데 피해는 얼마나 생겼소?”
“대부분이 노약자였습니다. 올해 낭도 앞바다에서 조운선을 노리다가 수장된 이들이 상당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생각보다 저항은 심하지 않았사옵니다.”
이번에 주덕유가 잡아 온 포로 중에는 여자와 어린아이가 제법 많았다.
노동력을 제공할 수 없는 노인층을 제외하면 모두 끌고 왔다고 봐도 됐다.
가능하면 아이들은 잡아 오게 하고 싶지는 않았으나 어설프게 동정할 수 없었다.
불과 십 년도 안 돼서 칼을 쥐고 그들의 아버지처럼 왜구 짓을 할 게 뻔했다.
아마 이 시대에도 인권위 같은 게 있다면 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만행에 비하면 약과였다.
왜구에게 끌려간 고려인이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당하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적어도 인간 대접은 해주고 있었다.
“함대의 거점은 어디로 잡았소?”
“기성현(거제) 북부를 함대의 거점으로 삼고 진지를 구축하고 있사옵니다.”
“너무 공을 들일 필요는 없소.”
어차피 다시 옮길 것이다.
그러니 힘을 낭비할 필요는 없었다.
앞으로 몇 년 정도 거주할 정도면 됐다.
홍건적의 침략만 정리되면 왜구에 대한 본격적인 정벌을 시작할 생각이었다.
적어도 대마도는 접수해야 한다.
‘솔직히 고려가 훨씬 더 가깝잖아.’
그런 뒤에 이키섬은 박살 낼 것이다.
아예 사람이 살 수 없을 정도로 만든 뒤에 전진기지처럼 사용할 생각이었다.
내가 죽기 전까지 북쪽으로 얼마나 많은 땅을 확보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적어도 대마도만큼은 후세에 물려주고 싶었다.
한참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던 중.
자연스럽게 부원배를 잡아들이는 일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되었다.
주덕유에게 비밀로 할 일은 아니기에 대략적인 일정을 알려줬다.
그러자 주덕유는 자신도 한 몫 거들겠다고 나섰는데 그건 내가 거절해야 했다.
“장군의 처가 회임을 했는데 그런 일까지 할 필요는 없소.”
“제 처가 회임을 했다는 말이 무슨 말씀이신지요?”
“아··· 아직 소식을 못 들은 것이오?”
주덕유는 금시초문이란 표정이었다.
그가 출항한 후에 이연은 처가에서 지냈는데 주덕유가 개경에 도착한 후에 옷만 갈아입고 곧장 입궐한 탓이었다.
더구나 사략 함대의 거점도 잡기 전이었기에 연락할 방법이 전혀 없었다.
나는 웃으며 어의가 확인해준 이연의 회임 소식을 그에게 알려주었다.
그러자 주덕유는 뛸 듯이 기뻐했는데 당장 집으로 달려갈 기세였다.
당연히 나도 잡을 생각은 없었다.
“축하하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모든 것이 전하 덕분이라고 생각되옵니다.”
“어감이 조금 이상하지 않소? 장군의 처가 회임한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하하. 그게 아니라···”
주덕유는 복령사 이야기를 했다.
내가 후사를 보는데 그곳의 영향이 컸다고 생각했는지 그 역시 복령사에서 정성을 올렸다는 말에 웃음이 나왔다.
“장군도 복령사의 주지에게 어느 정도 성의 표시는 해야겠구려.”
복령사 이야기는 나도 들었다.
최근에 시주받는 규모가 상당했다.
급한 일이 끝나면 불교계도 한 번 정리할 생각이기는 했다. 이 시기의 불교는 권문세족 못지않은 기득권층이었다.
탐욕에 물들어 불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찰도 상당히 많았다.
‘종교세를 도입할 수도 없는 일이고···’
괜히 불교가 탄압을 받았겠는가.
모든 일에는 다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신을 믿는 이들이 본분을 잊고 재물에 탐욕을 내기 시작하면 종교 자체가 변질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개경에 들어온 부하들과 함께 소신도 부원배를 때려잡는 데 손을 보태겠사옵니다.”
그때 주덕유가 다시 한번 청을 했다.
공을 세워서 공신첩에 이름을 올리려고 하는 소리는 아니었다. 부원배를 때려잡는 일이라면 절대 빠질 수 없다며 처음 고려에 올 때 내가 했던 약속을 언급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왕에 개경에 있으니 그의 손을 빌리기로 했다.
“그럼 그렇게 하시오.”
*
그로부터 이틀 뒤.
해가 정수리 위로 떠 오를 무렵.
만월대는 무장한 병사들이 가득했다.
그들의 소속은 홀치였는데 왼팔에는 피아 식별용으로 붉은 천이 묶여 있었다.
홀치만 투입되는 것은 아니었다.
개경을 중심으로 네 방향에 응양군과 용호군 그리고 순군만호부도 배치되었다.
이번에 부원배 추포 작전에 동원된 이들의 수만 2천 명이 넘어간다.
개경의 거의 모든 병력이었다.
워낙 많은 이들이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기에 그 정도는 되어야 했다.
최대한 줄이고 줄였는데도 원나라에 나라를 팔아먹은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 죽일 수도 없었다.
이번 명단에 들어간 이들은 도저히 봐줄 수 없는 수준의 일을 한 이들이었다.
공녀를 차출하기 위하여 온갖 패악질을 한 자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때 이인복이 다가와서 기다리고 있던 보고를 했다.
“포위망을 뚫고 도망치는 이들을 잡을 수 있도록 벽란도와 주요 길목에 감찰 어사와 병사의 배치가 끝났습니다.”
이제 준비는 모두 마쳤다.
더는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
그늘 아래 놓인 의자에서 일어난 나는 곧장 이원림과 주덕유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날카로운 병장기에 부딪히며 반사된 햇살이 눈가를 스쳤다.
임진정변은 달빛 아래에서 진행되었다.
당시에는 몰래 뒤에 숨어서 일을 처리해야 했지만, 이번에는 떳떳하게 나서는 것이기에 감회가 새로웠다.
이제 내가 명령을 내리면 몰락해가는 원나라를 상대로 반기를 드는 것이다.
다시는 돌이킬 수 없었다.
하지만 망설여지진 않았다.
이 순간을 위하여 4년을 기다렸다.
겨우 잡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이제는 이 세계로 들어와서 가장 먼저 작성했던 살생부를 완성할 때가 왔다.
그렇게 병사들을 잠시 보고 있던 나는 영원진은 어떻게 되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들도 지금쯤 출정하고 있을 것이다.
‘다들 잘하고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