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66
그날 이자춘은 고려에 내투했다.
더 고민하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이미 시대의 흐름이 바뀌고 있었다.
고려의 군사력을 쌍성총관부가 막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고 원나라는 망조의 기운이 곳곳에 감돌고 있었다.
이자춘이 할 일은 간단했다.
고려군이 화주성 앞에 도달했을 때.
내부에서 고려의 깃발을 들고 성문 하나쯤 제때 열어주기만 해도 된다.
나머지는 고려군이 처리하면 되니 더 바라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가만히 있을 사람은 아니다.
이왕에 내투하였으니 어떻게라도 공을 세워야 조금 더 좋은 자리를 얻을 것이다.
그걸 잘 알기에 이자춘은 자신의 아들인 이성계를 볼모로 고려에 남겼다.
하지만 허송세월하게 할 수는 없었다.
최근에 그는 홀치와 응양군에 새로 모집된 병사들과 함께 구르고 있었다.
그의 능력을 고려하면 곧장 하사 이상의 직위를 줘도 되겠지만, 적어도 고려군이 어떤 곳인지 알아두게 할 필요가 있었다.
병사들이 배우는 전술과 방진.
그런 것도 모른 채 지휘할 수 없었다.
어차피 이번에 쌍성총관부를 공략할 때 이성계가 나설 기회는 없을 것이다.
그곳으로 보내봤자 한솥밥을 먹던 이들과 칼을 겨눌 테니 그럴 시간에 기초부터 다시 배우길 바랐다.
“쌍성등처천호(雙城等處千戶)가 과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내응하기로 했으니 더는 기다릴 필요가 없게 되었소.”
나는 좌중을 둘러보며 말을 꺼냈다.
그 자리에는 영원진에서 잠시 개경으로 들어온 이방실과 같은 무관뿐만 아니라 유택과 백문보 등의 첨의부(僉議府)를 이끄는 문관들도 모여 있었다.
하지만 모든 문무백관이 모인 것은 아니었다.
이 자리는 나의 신뢰를 받는 이들 중에서도 꼭 필요한 이들만 모였다.
출정이 시작되는 그 날까지 기밀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한 차례 군사가 출정을 떠나면 무관들만 고생하는 것은 아니다. 뒤에서 지원하는 이들의 수고도 작다고 할 수는 없었다.
적어도 이곳에 있는 이들이 고려의 치안 유지와 보급을 차질없이 준비해야 했다.
반대로 이 자리에 없는 이들 중.
상당수는 이번에 쳐낼 생각이었다.
관직을 빼앗는다는 뜻이 아니었다.
아예 땅속에 매장하겠다는 의미였다.
다시 피바람이 불 시기가 왔다.
“준비된 것을 꺼내시오.”
이인복을 향해 신호를 주자.
이름이 가득 적힌 인명록을 꺼냈다.
꼭 죽어야 하는 부원배와 불명예를 주고 모든 재산을 압류할 이들의 명단이었다.
가장 약한 징벌이 북부로 보내는 유배일 정도였는데 그 숫자만 수백 명에 달했다.
쉽게 볼 문제는 아니었다.
그리고 다들 내켜 하지도 않았다.
동문수학했거나 혼인 등으로 엮여 있는 이들이 알게 모르게 제법 많았다.
심지어 가까운 친척이 명단에 속해 있는 이가 있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그냥 놔둬서는 안 된다는 것도 다들 알았다.
적어도 한 번은 크게 뒤집어엎어야 했다.
“마지막 기회이니 구제해야 할 이가 있으면 지금 말하시오.”
오늘은 최종 심의를 하는 날이었다.
하지만 이미 정해진 명단에 포함된 이를 변호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만큼 심사숙고해서 정해진 것이었다.
아무런 말도 없이 기다리던 나는 더는 시간 낭비란 생각에 인명록을 접었다.
이제부터 이인복의 소관이었다.
도중에 사병의 저항이 있겠지만, 홀치와 순군만호부의 지원이면 충분했다.
“출정이 코앞까지 다가왔으니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추지 마시오.”
드디어 시작할 때가 되었다.
최영의 보충대까지 이동을 마친 뒤.
이방실이 이끄는 부대는 화주로 진격할 예정이었다. 원래의 역사보다 반년 정도 앞당겨진 것이다. 지금의 목표는 단풍이 모두 지기 전에 끝내는 것이다.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이자춘의 말을 들으니 쌍성총관부의 병사는 생각보다 숫자가 많지 않았다.
고려가 겨울 이전에 화주를 손에 넣으면 원나라도 움직이는 것이 쉽지 않았다.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
겨울에 대군을 움직일 수는 없다.
만약 그게 가능하더라도 최근 상황을 보면 원나라에게 그럴 여력이 없었다.
대주국의 성왕인 장사성과 주원장의 자리를 차지한 탕화의 기세가 대단했다.
주원장 못지않은 활약 중이었다.
그는 곽자흥 밑에서 총병관이 되어 저주성을 지키며 세력을 넓히고 있었다.
중원과 강남을 무주공산으로 만들고 고려로 병사를 돌린다는 것은 턱 밑에 칼날을 괴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거기에 김첨수의 활약도 대단했다.
그가 이끄는 비밀 조직은 암암리에 원나라에 퍼져서 공작을 하고 있었다.
아마 대부분의 이들이 자신이 고려를 위해 일하고 있다는 것조차 모를 것이다.
이간질과 정보 조작.
그리고 때에 따라서 암살까지.
김첨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고려에 작은 이득이라도 된다면 망설이지 않고 행동할 사람이었다. 그게 오히려 반란 세력에 은근히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 활약을 아는 이는 없다.
오직 나와 이인복밖에 모르는 일이다.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한 보상은 훗날 몰아서 해줄 생각이었다.
“이번 기회에 북동쪽에 있는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도모하는 것은 어떠시옵니까?”
그때 최영이 제안을 해왔다.
그가 말하는 것은 압록강 상류의 무창 등의 지역과 두만강 하류의 경흥 등의 지역으로 훗날 4군 6진을 의미했다. 그곳만 고려의 영토로 만들면 내가 알던 한반도의 지도가 완성되는 것이다.
하지만 너무 커다란 꿈이었다.
최영의 제안은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압록강 너머의 8참 지역이 이번 출정에 포함되지 않은 이유와 같았다.
당장은 점령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계속 지킬 수 있을 곳은 아니다.
영토의 확장은 급하지 않았다.
지금은 홍건적을 대비하는 게 훨씬 더 급했다. 가능하면 우리 영토 안으로 들어오는 것부터 막아야 했다.
굶주린 다수의 홍건적은 메뚜기떼와 같은 재앙이었고 그들이 고려 땅을 밟는 순간부터 고려의 백성이 고통받을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여진족까지 더하는 것은 너무 무모한 짓이었다.
“원나라도 모자라서 여진을 동시에 상대하겠다는 것이오?”
내 질문에 최영은 대답을 못 했다.
여진의 저력도 원나라 못지않았다.
그나마 4군 6진은 쌍성총관부의 입김이 제법 많이 닿아서 우호적인 분위기였다.
지금 들쑤셔서 좋을 게 없었다.
그렇다고 완전한 포기는 아니었다.
홍건적이 대규모로 쳐들어오는 2차 침략만 막으면 그때부터는 고려해볼 만 했다. 그와 관련된 내용에 대해 더는 아무런 말이 없었기에 그쯤에서 나는 이번 출정일은 정확하게 공지해주었다.
“달포 뒤에 개경과 영원군에서 동시에 시작할 테니 준비하시오.”
*
마지막 회의를 마친 뒤.
최영은 변안열과 보충대를 데리고 영원진에 합류하기 위해서 떠났다.
아직 훈련이 부족하다는 판단이 있기에 그들이 직접 전투를 치르진 않게 했다.
준비 안 된 이들을 밀어 넣을 수 없었다.
지금은 병사를 아껴야 했다.
조금 더 단련시켜서 한 사람 몫을 해줄 정도는 되어야 그간 들인 노력이 헛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개경에서도 부원배를 뿌리 뽑기 위한 준비를 차근차근하고 있었다.
사병의 규모와 평소 다니는 길.
모든 것을 추적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중에 가장 철저하게 따라붙고 있는 것은 당연히 기씨 가문의 생존자였다.
당시에는 운이 좋게 고려에 없어서 살아남을 수 있었으나 그런 행운이 다시 있을 거라 바라는 것은 무리였다.
만약에 이번에도 놓친다면,
원나라에 자객을 보내서라도 반드시 해치울 생각이었다. 조금이라도 정신을 차렸다면 이 정도까진 안 했을 것이다.
기세걸과 기새인첩목아는 지난 일을 벌써 잊어버렸다. 그들은 원나라의 황태자를 등에 업고 그의 아버지인 기철과 똑같이 행동하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더한 것 같아.’
정말 안하무인 그 자체였다.
이미 도당은 그들을 중심으로 파벌을 이뤄서 내가 하는 일마다 딴지를 걸었다.
그들의 곁에는 인승단 같은 이들도 함께하고 있었는데 당연히 그도 이번에 명단에서도 상위권에 들어있었다.
“사람이 줄을 잘 서야지.”
인승단의 운도 여기서 끝이다.
지금까지는 정말 잘 빠져나갔는데 더는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한동안 그와 관련된 보고를 보던 중에 밖에서 대기하던 안도치가 들어왔다.
“전하, 내수사 승(丞) 동오가 알현을 하고자 찾아왔사옵니다.”
“안으로 들라 하여라.”
언제 고려로 돌아온 것일까.
최근 동오는 원나라에 머무는 기간이 조금씩 길어지고 있었다. 배에서 오가며 잃는 시간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고려 내의 일처리는 대부분 부상단주인 나철경이라는 이가 맡고 있었다.
잠시 후에 모처럼 관복을 입은 동오는 안으로 들어와서 인사를 올렸다.
“그간 강녕하셨사옵니까?”
“언제 돌아온 것이오?”
“오전에 벽란도에 도착하였사옵니다.”
“뱃길이 쉽지 않았을 터인데 왜 쉬지 않고 곧장 입궐부터 한 것이오? 원나라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것이오?”
동오는 그렇지 않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왜 이렇게 급하게 온 건지 묻자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이 접은 종이를 신소봉에게 내밀며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그걸 받아서 펼쳐보니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상단에서 지금까지 모은 재물을 고려에 바치겠다니 이건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과분하게도 전하에게 받은 것이 너무 많사옵니다. 그걸 갚고 싶은 마음에···”
“혹시 관직이라도 청탁하려는 건가?”
“아니옵니다! 소신은 정7품 승(丞)이면 충분히 만족하고 오히려 과분하다고 여기며 살고 있사옵니다.”
꽤 억울한 얼굴을 하고 있는 동오를 보자 확실히 그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이건 너무 과하지 않소.”
“재물이 너무 많이 쌓이니 오히려 부담될 정도입니다. 뭐든 과하면 모자람만 못하다고 모시던 분에게 배웠사옵니다.”
“남궁신이라고 했던가?”
동오는 그러하다며 고개 숙였다.
내가 즉위하기 전에 죽은 이라 직접 본 적은 없으나 대단한 사람 같았다.
왜냐하면 지금 동오가 내민 쪽지에 그가 바치겠다고 적은 재물의 양이 엄청났다.
금과 은뿐만 아니라 양곡도 10만 석에 고액의 저화까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지난 4년 가까이 되는 시간 동안 모은 것치고는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다.
마침 군사를 일으킬 무렵이라 재정적인 부담이 꽤 컸는데 잘 되었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이렇게 많이 모은 것이오?”
“전하와 용왕님이 도와주신 덕분에 운항 중에 가라앉은 배가 한 척뿐이고 왜구에게 당한 적은 없기에 그렇게 됐습니다.”
그에게 주는 운송료는 위험수당도 포함되어 있었다. 중간에 물건을 잃으면 그가 대부분 책임지는 구조였다.
하지만 배를 잃은 게 고작 한 척이다.
더구나 그의 상단이 고려와 원나라의 무역량을 거의 다 책임지고 있으니 재물이 급격하게 쌓일 수밖에 없긴 했다.
‘계속 어용 상인을 하고 싶어서 하는 아부인 것이냐?’
차라리 그런 거면 다행이다.
아무리 보아도 뭔가 바라는 게 있었다.
계속 캐묻기보다는 그냥 소원권 하나를 주는 게 더 빠를 것 같았다.
“뭐든 원하는 것이 있다면 말하시오.”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을 경우.
그냥 모른 척하고 입을 닦을 생각이었다.
똑같은 말을 여러 번 물어보지 않는 내 성격을 알기에 동오도 그제야 입을 뗐다.
“전하께서 허락해주신다면 고려의 조세와 특산물을 운반하고 싶사옵니다.”
“각지에서 올라오는 양이 적지 않은데 그게 가능하단 말이오?”
“전부 다 맡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번에 원나라에서 선박 스무 척을 저렴하게 사들였는데 나중에 보니 먼바다를 나갈 정도는 아니었사옵니다.”
그제야 대충 이해가 되었다.
아무래도 원나라 상인 놈들한테 눈탱이 맞은 것 같았다. 배가 생겼는데 쓸데가 없으니 대략 난감했을 것이다.
동오가 주력으로 하는 것이 원나라를 오가는 장거리 무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애초에 이걸 목표로 저렇게 많은 재물을 내놓은 것 같지는 않았다.
배보다 배꼽이 훨씬 컸기 때문이었다.
나는 동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조운선을 완벽하게 대신할 수는 없지만, 지역의 물류를 옮길 이가 필요하긴 했다.
현재 고려에서 민간 부분의 물류 유통은 지경탁의 상단에서 거의 독점하고 있는 중이었다. 당연히 그로 인한 문제점이 꽤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그의 목적이 뭔지 뒤늦게 알아차렸다. 지경탁과 동오의 얽힌 과거의 원한은 어느 정도 알고는 있었다.
내수 시장의 주도권을 가져오겠다는 의미였다. 아마도 고려 최고의 거상(巨商) 자리를 놓고 치열한 다툼이 시작될 것 같았다.
‘쩐의 전쟁이 시작되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