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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65화 (65/202)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65

그로부터 한 달 뒤.

개경에 이자춘이 도달했다.

그와 함께 온 이들도 몇 명 있었다.

호위를 위한 가별초 여섯과 그의 둘째 아들인 이성계가 함께했다.

어떻게 보면 개경은 적진이다.

이자춘 혼자 올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다만, 장남인 이원계는 이자춘을 대신해서 화주에 남아 천호의 자리를 지켰다.

화주에서 개경까지 제법 긴 여정을 통해 이자춘과 이성계는 많은 것을 느꼈다.

그들이 알고 있던 고려가 아니었다.

가장 큰 변화는 사람들의 표정이었다.

화주의 백성보다 다들 평온해 보였고 불행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들은 적었다.

이자춘은 그제야 최근 생긴 변화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요즘 쌍성총관부로 넘어오는 유민의 수가 현저하게 줄어든 이유가 있었구나.”

고향을 떠나고 싶은 이들이 있을까.

유민이 생기는 대부분의 이유는 권력자의 횡포 때문이다. 탐관오리가 사라지고 살만해지면 유민이 생길 일이 없어진다.

그 변화가 감지되기는 했으나 정작 이렇게 와보니 피부로 확 느껴졌다.

더구나 외형적인 변화도 상당했다.

다른 이들은 그 차이를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의 왕이 즉위하기 전에 조소생 등과 함께 팔관회에 왔던 이자춘은 느껴졌다.

원나라의 색채가 많이 빠져 있었다.

변발부터 시작해서 옷차림도 옛 고려의 풍습으로 회귀했는데 심지어 전혀 본 적이 없는 새로운 형태의 옷도 종종 보였다.

“언제부터 고려가 이렇게 바뀐 건가.”

“그보다 변발과 상투를 잘라낸 이들이 왜 이렇게 많은 건지 모르겠습니다.”

“확실히 그렇구나.”

개경 인근에 들어선 순간부터.

상투 없는 남자들이 상당히 많아졌다.

거의 열 명 가운데 서너 명은 상투가 없었는데 무척이나 생소한 느낌이었다.

그러다 보니 고려에 들어온 건지 아니면 바다 건너에 있는 미지의 나라에 온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사람이 바글거리는 시전에 들어서자 그들은 화주에서 온 촌뜨기들이 되었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거리를 보는 것은 다들 처음이었다. 그나마 대도에 가봤던 경험이 있는 이자춘 정도만 의연했다.

활기가 거리에 가득했다.

다들 숨 바쁘게 살아가는 느낌이었다.

시간이 곧 돈이라는 관념이 느리지만, 조금씩 자리 잡고 있는 덕분이었다.

한동안 그렇게 시전을 돌아다니던 그들은 많은 사람이 몰려 있는 곳에서 멈춰 섰다.

이성계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그들 중의 한 명을 붙잡고 물었다.

“다들 여기서 뭐 하는 거요?”

“차림새를 보니 외지인 같은데 여기 있는 이들 대부분 이야기꾼을 기다리는 거요.”

“이야기꾼?”

“마침 저기 오는구만.”

그가 가리키는 곳을 보자.

지팡이를 짚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당연히 개경에 그런 인물은 조풍서밖에 없었는데 이자춘의 무리는 호기심이 생겼는지 잠시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내용이 심상치 않았다.

보통의 사랑 이야기였다면 곧장 등을 돌렸을 것이다. 하지만 화척(禾尺) 출신의 고려 병사가 공을 세우는 내용이었다.

내용을 듣다 보니 이자춘의 얼굴이 서서히 붉어졌다.

“이건 마치 우리 이야기 같구나.”

“이야기를 빌어서 다시 고려로 돌아오라고 돌려 말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쌍성총관부뿐만 아니라 심양 등에 몸담고 있는 고려인을 회유하는 내용이다. 그 의도가 맞다면 정말 무섭구나.”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이자춘은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났다.

부끄러워서 더는 있을 수 없었다.

고려를 버리고 원나라의 관직을 받은 선조의 선택이 원망스러운 순간이었다.

그런 주제에 고려인이라고 유민들 사이에서 지도자로 행세하고 있었다.

이성계도 같은 것을 느꼈는지 부쩍 표정이 안 좋았다.

“이보시오. 거기 잠깐 서보시오.”

잠시 멍하니 걷고 있자.

뒤에서 누군가 그들을 불러 세웠다.

동시에 고개를 돌리니 일곱 명의 남자들이 뒤를 쫓아오고 있었다.

범상치 않은 이들이었다.

덩치도 상당히 좋았고 걷는 것만 봐도 몸이 꽤 가벼워 보였다. 이성계와 가별초는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곧장 품속에 손을 넣었다.

다들 단도 하나씩은 품고 있었다.

스스로 호랑이 굴에 들어온 상태였다.

적어도 몸을 보호할 수단 하나쯤은 챙겨야 했는데 설마 개경에 도착한 첫날부터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다.

그걸 본 괴한들은 헛웃음을 지었다.

“허! 역시 예사 놈들이 아니었구나.”

“너희야말로 뭐 하는 놈들이냐?”

“그건 우리가 해야 할 말이다. 어디서 온 놈들이냐?”

서로 대답은 없고 질문만 했다.

소통이 가능할 리가 없는 상황이었다.

숫자는 서로 비슷했는데 골목길 앞에서 대치하고 있자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사람들이 서둘러 뒤로 물러섰다.

누가 봐도 크게 싸울 기세였다.

“감찰 대부 어르신께 보고할까요?”

“숫자도 비슷한데 잡아서 가면 되지 않겠느냐. 설마 우리가 지진 않겠지.”

“저들도 만만치 않아 보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없는 것이냐?”

“어사님, 섭섭하게 왜 이러십니까. 저희 귀신 잡는 홀치입니다. 당장 잡아다가 꿇려 놓겠습니다.”

그들의 정체는 황상과 홀치였다.

감찰 어사인 그가 이자춘 일행을 발견한 것은 우연이었다. 원래는 요즘 시전에 나타난다는 소매치기를 잡으러 나왔다.

보통 그런 일은 순군만호부에서 한다.

하지만 워낙 신출귀몰한 녀석들이라 좀처럼 꼬리가 잡히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감찰사와 홀치까지 나선 것이었다.

그런데 수상한 이들이 보였다.

각자 따로 움직이고 있어도 여덟 명이나 되는 건장한 사내는 눈에 띌 수밖에 없다.

누가 봐도 훈련된 무사들이었다.

황상은 처음 그들을 봤을 때 지방의 권문세족과 사병인 줄 알았다.

하지만 하는 행동이 그마저도 아니었다.

시골 촌뜨기가 아닌 외지인 같았다.

“좋은 말로 할 때 무기를 버리거라. 이게 마지막 경고다.”

황상은 질 거란 생각은 안 했다.

저쪽보다 한 명 적어도 홀치들이다.

나름 몸이 날랜 이들만 뽑아왔기에 덩치는 작아도 얕볼 만한 수준은 아니다.

하지만 싸움에 일가견이 있는 것은 가별초도 마찬가지였다. 계속해서 눈싸움만 할 수는 없기에 황상은 명령을 내렸다.

“한 놈도 놓치지 마라.”

그때부터 난장판이 시작됐다.

열다섯 명의 남자들이 주먹질을 하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칼부림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황상은 백성들이 다칠까 봐 꺼려했고 이자춘도 고려의 왕을 만나러 온 것이다.

괜히 여기서 누군가를 죽이면 먼 길을 온 것이 허사가 되었다.

홀치와 가별초의 싸움은 꽤 격렬했다.

아직 서로의 정체를 알지 못했으나 각자 최고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한 가지 변수가 있었다.

가별초는 원래 기병이다.

원래 말 위에서 싸우는 이들이 박투와 난전에 능한 홀치를 당해낼 수는 없었다.

당연히 시간이 지나자 가별초는 하나둘 제압되기 시작했다. 그쯤 되자 남은 것은 이성계와 이자춘 밖에 없었다.

“이런··· 시작부터 일이 꼬였구나.”

“아버님, 이곳은 소자가 어떻게든 막을 테니 어서 몸을 피하십시오.”

“이미 늦었다.”

이자춘은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주먹다짐을 하느라 몰랐는데 어느 사이에 고려의 병사들이 주변에 가득했다.

한눈에 봐도 정예병들이었다.

언제든 칼을 뽑아들 기세였기에 그들을 뚫고 도망갈 수는 없었다. 그때 병사들 사이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오해가 있었나 본데 다들 그만하시오.”

그 남자의 위세는 대단했다.

누군지 몰라도 다들 그의 말에 신속하게 움직여서 뒤로 물러났다. 남자는 그런 뒤에 이자춘에게 다가와서 앞에 섰다.

“먼 길을 오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도대체 뭘 알고 저런 말을 하는 걸까.

이자춘은 잠시 헷갈렸으나 확실히 처음 보는 사람이 맞았다. 혹시나 싶어서 아들을 바라봤으나 고개를 저었다.

이성계 역시 본 적이 없는 이였다.

“누구길래 아는 척을 하는 건가? ”

“다루가치였던 이안사의 후손 아니십니까. 기다리시는 분이 계시니 저를 따라오십시오.”

이자춘은 귀신에 홀린 것 같았다.

어떻게 증조부의 이름까지 알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쯤 되니 이미 자신의 정체는 들켰다고 봐야 했다.

“도대체 누가 나를 기다린단 말인가?”

“가보시면 압니다. 절대 해를 끼치지 않을 테니 순순히 따라오시겠습니까?”

“알겠으니 앞장서시게.”

이자춘은 체념하듯 따라나섰다.

그러자 탈출로를 애타게 찾고 있던 이성계도 이제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그런 기회가 나오더라도 아버지를 두고 혼자 도망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앞장서서 걷는 이가 향하는 곳은 고려의 궁궐이었다.

“혹시 나를 기다리고 계신 분이···”

“함부로 입에 담을 분이 아니십니다.”

“그랬던 것이구나, 하하!”

그제야 무슨 일인지 알 것 같았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게 누군지 알아챈 것이다. 이성계도 이미 눈치를 챘기에 평소답지 않게 긴장한 표정이었다.

잠시 후에 그들이 태평전에 도달하자 이성계는 밖에서 기다리게 하고 이자춘만 안으로 들어왔다.

“전하, 쌍성등처천호(雙城等處千戶)이자춘을 데리고 왔습니다.”

“수고가 많으셨소. 감찰 대부는 그만 가서 일을 보시오.”

이인복은 허리 숙여 인사를 한 뒤.

뒷걸음을 하며 태평전 밖으로 나갔다.

그제야 이자춘은 자신을 데리고 온 이가 이인복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최근 그의 이름 석 자는 화주 부근까지 알려졌다.

비록 좋은 쪽으로 알려진 것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꽤 인상 깊었다.

그가 그런 생각을 할 무렵.

나는 유심히 이자춘의 모습을 살폈다.

환조(桓祖)라 불리던 그를 직접 보는 것은 꽤 설레는 일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밖에 있는 이성계도 부르고 싶었다.

하지만 오두방정을 떨 정도는 아니었다.

‘언제 오나 했더니 지금이었구나.’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다.

이자춘이 고려에 와서 공민왕을 만난 시기는 정확하게 알려지진 않았다.

고려사에서도 미상으로 분류했다.

이인복이 몇 년 전에 화주에 심어 놓은 정보원이 보낸 소식이 조금 뒤늦게 도착해서 일이 조금 묘하게 꼬일뻔했다.

그런데 마침 황상이 잡은 것이었다.

소 뒷걸음질 치다가 쥐 잡은 격이지만, 그래도 수상한 자를 솎아냈다는 것은 칭찬해줘야 할 부분이었다.

시전에서 난리를 친 덕분에 이인복이 두 사람을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

“화주에 있어야 할 쌍성의 천호께서 개경까지 어인 일로 오셨소?”

“꼭 한 번 만나 뵙고 싶었던 분이 계셔서 이곳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게 설마 과인인 것이오?”

갑자기 너무 훅 들어간 탓일까.

이자춘은 상당히 놀란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숙이며 그렇다고 실토를 했다. 여기서 아니라고 해봤자 안 그래도 꼬인 상황이 더 안 좋아질 것이다.

“과인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솔직하게 말해도 되옵니까?”

“그리하시오.”

“전하께서 꿈꾸시는 고려가 어떤 것인지 궁금해서 찾아뵙고 싶었사옵니다.”

내가 꿈꾸는 고려라···

철학적인 대답을 원하는 걸까.

아니면 현실적인 대답을 바랄까.

일단은 생각나는 대로 말해주었다.

“과인은 고려가 천 년의 제국이 되기 위한 반석을 세우는 것을 염원하고 있소.”

고려는 오백 년의 역사를 못 채운다.

그 뒤에 이어지는 조선도 간신히 오백 년을 넘겼을 뿐이다. 신라처럼 고려도 천 년의 역사를 가질 수 있기를 바랐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더 많은 땅을 후손에게 물려주고 싶었다.

‘분명 누군가 말아먹는 놈이 나오겠지만, 부자는 망해도 삼대는 간다고 하니···’

솔직하게 말하면 큰 기대는 없었다.

원나라만 하더라도 그렇게 순식간에 무너질 거라 상상한 이가 있었을까.

불과 백 년 전만 해도 정말 무서울 게 없었던 몽골의 후손이었다.

그래도 훗날 나와 같이 역사를 공부하는 이가 이 무렵을 살았던 이들을 기억하고 자랑스러워할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이 아닐까.

당연히 원나라 이야기 같은 것까지 이자춘에게 해주진 않았다.

“그렇다면 영원진의 군사는 역시 쌍성총관부를 향하는 것이옵니까?”

“아니라고 말하면 믿어주겠소? 그대가 고려의 핏줄이지만, 엄연히 쌍성총관부의 천호이지 않소.”

그런 것까지 말해줄 의무는 없었다.

내가 그 부분을 강조하자 이자춘은 뭔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줬다.

여기까지 왔다는 것은 어느 정도 마음의 정리가 되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입으로 그걸 꺼내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내가 강요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자춘이 자신의 모든 것을 고려에 걸어야 나 역시 흔쾌히 받아줄 것이다.

한참 고민하던 그는 내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화주에는 고려의 유민이 생각 이상으로 많습니다. 이미 터를 잡고 오랜 기간 살아서 또 다른 고향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오?”

“그들의 과거를 묻어주시고 화주의 백성으로 인정해주시옵소서.

도망친 노비와 범죄자.

그런 이들을 소환하지 말아 달라는 부탁이었다. 그 정도는 충분히 들어줄 용의가 있었다.

“하늘 아래 있는 모든 고려인은 과인의 백성이오. 과거에 대한 잘못을 반성하였다면 굳이 따질 이유는 없소.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오.”

거기에 당신도 포함되어 있어.

망설이지 말고 어서 말을 하란 말이야.

그런 감정을 담아서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자 이자춘은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그는 지금까지와 달리 결연한 표정으로 머리를 조아리며 내게 충성 맹세를 했다.

“소인을 받아주신다면 죽을 때까지 고려와 전하께 충성을 다하겠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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