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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64화 (64/202)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64

쌍성총관부, 화주.

최근 탁도경의 심기는 꽤 불편했다.

요즘 들어 고려에서 들어오는 첩보가 심상치 않았다. 서쪽에 있는 고려의 영원군이 상당히 북적거렸다.

상당수의 고려군이 배치된 탓이었다.

처음에는 수백 명 단위라 신경도 안 썼다.

고려군이라고 해봤자 동네 건달 수준인 것을 다들 알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군대조차 없던 곳이라 위협도 안 됐다.

더구나 다른 곳도 아니고 고려다.

그리고 이곳은 엄연히 원나라 영토다.

정식으로 총관의 자리를 제수받고 이곳을 통치하고 있는데 고려가 공격을 할 거란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 없었다.

그런데 계속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계속해서 증원되는 고려군.

종잡을 수 없다고 알려진 고려의 왕.

왜구를 때려잡고 있는 고려의 군사들.

모든 것이 예전과 같지 않은 분위기였다.

하지만 아무리 말해도 이곳을 책임지는 쌍성총관 조소생은 꿈쩍도 안 했다.

“고려가 감히 쌍성총관부를 도모할 거라 생각하시는 거요? 근래에 개경에서 보내온 소식에 따르면 여진족과 홍건적을 방비하기 위함이라고 하지 않소.”

조소생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최근에 탁도경의 신경이 조금 예민해진 것이라 생각되었다. 고려 내에 심어 놓은 이들도 전혀 그런 기미조차 없다고 했다.

더구나 실제로 최근 들어서 여진족의 침구가 잦아지고 있기도 했다.

“고려의 왕이 미친 것이 아니라면 감히 원나라를 상대로 반기를 든단 말인가?”

미치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다.

지금까지 황실에 밉보여 왕의 자리를 내주고 물러난 이가 한두 명이던가.

심지어 본국으로 끌려가서 악양현까지 유배를 떠나야 했던 왕도 있었다.

백번 양보해서 영원군에 있는 고려가 이곳으로 쳐들어와도 버티면 된다.

그리고 그 대가로 고려의 왕은 왕좌를 내놓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여유만만한 조소생과 달리 탁도경은 초조했다.

“원나라가 예전 같지 않습니다.”

“이 사람이 무슨 소리를 하는 겐가! 감히 그런 말을 입에 담다니.”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백 년 동안 부귀영화를 누렸다.

대대로 총관과 천호 자리를 물려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조상인 조휘와 탁청이 시기적절하게 투항한 덕분이다.

그때 화주 등의 쌍성 지역을 바친 덕분에 쌍성에서는 왕 부럽지 않게 사는 것이다.

피는 물보다 진한 건지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탁도경도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상황이 정말 좋지 않았다.

소문의 내용도 쉽게 볼 수 없었다.

강남에서 들고 일어난 반란 세력을 제대로 토벌도 못 하고 군대가 해산되었다.

이러다 와르르 무너지는 것은 아닐까.

불안한 표정으로 옆에 서 있는 그를 본 조소생은 혀를 찼다.

“그것보다 지금 우리는 당면한 다른 문제부터 해결하는 것이 어떤가.”

“무슨 문제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자춘, 그 무례한 작자를 언제까지 두고 봐야 하는 건가?”

이자춘의 이름을 듣는 순간.

탁도경은 짜증이 치밀어 올랐으나 인내심을 발휘하여 간신히 참았다.

예전부터 두 사람의 사이가 좋지 않기는 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악화됐다.

이 모든 상황은 이자춘이 배다른 동생인 이나해를 죽인 뒤부터 시작됐다.

타지인이 보면 이해가 안 될 것이다.

이나해가 죽은 것이 조소생과 무슨 상관이냐고 하겠지만, 2대 쌍성총관 조양기의 외손자가 이나해였다.

그리고 조씨 가문은 어떻게든 이씨 가문에게서 천호 자리를 가져오고 싶어 했다.

‘그 망할 놈이 임명장과 도장을 들고 튀지만 않았어도 그 지경은 안 됐을 텐데.’

도망쳤던 이나해는 결국에 잡혔다.

그리고 차인사에서 이복형 이자춘이 보낸 이들에 의해 처참하게 죽고 말았다.

그때부터 쌍성총관부는 커다란 균열이 나기 시작했고 시간이 흐를수록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 그를 건드려서 좋을 것이 없습니다.”

“내란이라도 일어날 거란 말인가?”

“그만큼 고려 유민의 신망이 크다는 말입니다. 이자춘이 죽기라도 하면 대규모 이탈이 벌어질 것입니다.”

“망할 고려놈들!”

아무리 4대째 원나라에 충성을 하고 있다지만, 자신도 이자춘이나 유민들처럼 고려의 핏줄인 것은 잊은 것 같았다.

그 문제에 있어서는 탁도경도 비슷했다.

이미 그들 스스로는 원나라의 백성이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이미 참을 만큼 참았네. 요즘 이자춘의 아들마저 불령배 무리 같은 사병을 데리고 활개 치고 다니고 있지 않나.”

“제가 주의를 주겠습니다.”

무턱대고 누를 인물은 아니었다.

탁도경이 보기에는 이성계와 그의 형제만 한 인재가 쌍성총관부에 없었다.

안타까운 일이었으나 여기 있는 두 사람의 아들보다 그가 훨씬 뛰어났다.

이미 이성계는 독보적인 존재가 됐다.

이 지역에서 활 솜씨 하나만큼은 그를 따라잡을 이가 없었다.

‘어쩌면 그래서 저 옹졸한 인간이 더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걸지도 모르지.’

*

탁도경이 그런 생각을 할 무렵.

이성계는 흑석산에 있을 아버지 이자춘을 만나기 위해 서둘러 움직였다. 그의 뒤를 따르는 이들은 모두 가별초였다.

가별초는 지난 백 년 가까이 이씨 가문을 섬기는 사병 집단을 의미했는데 모두 말을 타고 싸우는 것에 능숙했다.

십여 마리의 말이 힘껏 달리자.

영원군에서 화주(和州)에 있는 흑석산의 저택까지 정말 순식간에 도달했다.

그는 말에서 내린 뒤에 집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러자 빗질을 하고 있던 가노가 이성계를 발견하고 허리 숙여 인사했다.

“도대체 어딜 갔다가 오시는 겁니까? 어르신께서 얼마나 찾으셨는데요.”

“아버님은 지금 어디 계시느냐?”

“아침 일찍 나가셔서 아직 안 들어오셨습니다.”

“어디로 가신다는 말은 없으셨느냐?”

“별다른 말은 없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디 계실까.

가실만한 곳은 두 곳밖에 없었다.

총관부에 등청(登廳)하셨거나 가별초의 훈련을 봐주러 가셨을 것이다.

이성계는 둘 중에 후자를 택했다.

최근 들어 총관인 조소생이 아버님을 견제하며 못 잡아먹어 안달인 것은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등청하진 않으셨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이성계는 다시 말을 타고 가별초의 훈련장으로 향했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마을 옆에 있는 공터에서는 십여 명의 가별초가 말을 탄 상태로 격구를 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지금까지 애타게 찾고 있던 이자춘과 이복형인 이원계도 있었다.

두 사람은 편을 나눠서 치열하게 경기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울타리 너머에서는 꼬맹이 하나가 둘을 응원하고 있었다.

“아부지, 하나 더 넣어줘요.”

막내 동생인 셋째 이화였다.

녀석의 응원을 받은 덕인지 이자춘은 보기 좋게 장시(杖匙)를 휘둘러 구문(毬門)에 집어넣으며 경기를 끝마쳤다.

생각보다 꽤 격렬한 경기라 이자춘이 땀을 뻘뻘 흘리며 말에서 내렸다.

이화가 기뻐하며 달려들었는데 그보다 먼저 이성계가 앞으로 나섰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며칠째 귀가도 안 하고 지금까지 어디서 뭘 하고 있었느냐.”

“송구하오나 소자가 직접 서쪽 국경 너머에 있는 영원진을 다녀왔습니다.”

국경 이야기를 꺼내자.

이자춘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지시를 내리기 전까지 그 근처에 접근하지 말라는 자신의 말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영원진 부근은 최근 꽤 살벌했다.

사람을 보내는 족족 실종되고 있었다.

돌아오지 않는 이들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뻔했다. 그런데 이성계가 거길 다녀왔다고 하니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자칫 아들을 잃을뻔했던 상황이었다.

안 그래도 얼굴이 붉어진 이자춘은 벌겋게 달아올라서 터질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가 호통을 치기 전에 이원계가 나서서 두 사람 사이를 중재했다.

“아버님, 무슨 일인지 성계가 하는 말부터 일단 들어보시지요.”

평소에 우애가 좋은 형제다웠다.

이자춘은 맏아들의 말대로 막사 안으로 두 아들을 데리고 들어갔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앉은 이자춘은 가만히 이성계를 바라봤다.

무슨 일인지 말해보라는 의미였다.

그제야 이성계는 입을 열었다.

자신이 영원진에서 본 것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는데 그가 말하는 규모는 이자춘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고 있었다.

더구나 경계도 상당히 삼엄해서 이성계도 수많은 위기를 넘기고 도달했었다.

“그래서 군사가 몇이나 되더냐?”

“게르와 소형 막사의 숫자를 고려하면 만 명은 넘어갈 것 같습니다.”

“출정에서 돌아온 병사들을 모두 북부로 보냈다더니 생각보다 많구나.”

“그것도 최소로 잡은 것입니다.”

이성계는 만이천 명 내외로 예상했다.

실제 숫자와 비교하면 오차가 상당히 심했으나 멀리서 바라보고 온 탓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상당히 큰 위협이었고 만약 쌍성총관부를 향해 칼날을 겨눈다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쌍성총관부가 언제까지 안전할까.

만약에 지금 고려가 미친 척하고 이곳을 도모하면 원나라가 막아줄 수 있을까.

여러 가지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고려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가장 먼저 노릴 곳이 쌍성총관부인 것은 확실했다.

고토의 회복만큼 좋은 명분은 없었다.

그때 이원계가 끼어들었다.

“탁도경 천호의 병사와 화주에 있는 사병까지 모두 합치면 고려군의 절반도 안 되나 그래도 해볼 만한 숫자입니다.”

“보통 수성하는 쪽이 훨씬 유리하니 그렇기는 하지. 성안에서 지키면서 싸우면 2만 이상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아닙니다. 무조건 우리가 집니다.”

이성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걸 본 이원계는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 아는 동생은 조금 불리한 상황이라도 끝까지 싸우는 성격이다.

그런데 싸워보기도 전에 무조건 질 거란 말을 할 줄은 몰랐다. 그건 이자춘도 마찬가지였는데 이성계는 그 이유를 설명해줬다.

“고려군의 화포가 얼마나 위력적인지 제 눈으로 직접 보고 왔습니다.”

“화포라면 우리도 몇 문 있지 않느냐.”

“그걸 쏴본 적은 있기는 합니까?”

이성계의 질문에 이자춘은 답하지 못했다. 화약이 워낙 귀한 탓에 거의 상전 모시듯이 놔뒀다. 솔직하게 말하면 처음 들여왔을 때 한두 번 쏜 게 전부였다.

그것도 원나라에 부탁해서 겨우 받아낸 화약이었다.

“고려군은 무려 수십 문의 화포를 가지고 있을뿐더러 실전을 방불케 하는 훈련까지 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본 장면을 설명해주자.

이자춘과 이원계는 쉽게 믿지 못했다.

겨우 한두 번 쏜 것이 아니냐는 이자춘의 의심에 이성계는 고개를 저었다.

영원진에 접근할 때부터.

화포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렸다.

더구나 그 장면을 같이 본 가별초가 여럿 있다고 하니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최근에 호적을 정리하며 고려인을 차별하고 홀대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잖습니까. 그들에게 우리들은 언제까지나 이방인일 뿐입니다.”

이성계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리 충성을 다하고 피 흘려도 돌아오는 것은 계속되는 의심과 견제밖에 없었다.

더는 그들에게 충성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

“지금은 원나라에게 기댈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 이씨 가문은 고려에 내투(來投)하여야 합니다.”

“···흐음.”

이자춘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안 그래도 최근에 가별초를 이끄는 부관들 사이에서 그런 말이 돌긴 했다.

그들도 귀가 있으니 원나라가 쇠퇴하고 있다는 소식을 여러 경로로 듣고 있었다.

반면에 고려는 많이 바뀌고 있었다.

그간 물의를 일으킨 왕과 허수아비에 가깝던 어린 왕을 놓고 보면 지금 고려를 이끌고 있는 왕은 뭔가 다르기는 했다.

고려 유민 중의 일부는 화주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다들 대놓고 이야기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저도 성계의 말에 동의합니다.”

한동안 듣고만 있던 이원계가 동생의 말에 동의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곳에 미래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문무 양면으로 뛰어난 모습을 보이던 장남까지 거들자 이자춘은 고민됐다.

솔직하게 말하면 잘난 두 아들 때문에라도 방법을 찾기는 해야 했다.

이화는 아직 몰라도 원계나 성계 모두 이런 곳에서 썩을 아이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조심해야 했다.

만약에 조소생 귀에 들어갈 경우.

자신뿐만 아니라 고려 유민까지 다칠 것이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마음의 결심을 내렸다.

아무래도 내투하기 전에 직접 고려의 왕을 보고 와야 할 것 같았다.

과연 충성을 바쳐도 될 만한 인물인지 직접 보고 결정하는 게 가장 빠르고 정확할 것 같았다.

“내가 직접 개경으로 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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